수입 없어 아내 유품 내놓는 팍팍한 상황
남자 발레리노라는 마뜩잖은 아들의 꿈
아들 춤에 담은 진심 보고 생각 바뀐 아버지
세계적 발레리노로 성장한 아들 보며 젖어드는 눈가
소자본, 무명 주인공으로 만든 영화였으나
등장인물 심정 세밀히 다룬 연출로 성공

영화 말미에 빌리 엘리어트가 매슈 본이 각색한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 역을 맡아 공연하는 장면. IMDB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그려낸다. 영화는 영국 북부 탄광촌을 배경으로 발레리노를 꿈꾸는 소년과 그의 가족이 겪는 갈등과 화해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영화는 단순한 성장 서사나 역경 극복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발레리노를 꿈꾸는 소년 빌리의 몸짓과 그런 아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아버지의 삶은 발레와 거리가 멀다. 탄광 노동자인 아버지의 손은 매일 흙과 탄가루에 뒤덮여 있다. 아버지는 발레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결국 아들의 꿈을 응원한다. 그 결단은 ‘빌리 엘리어트’를 단순한 영화가 아닌, 삶을 담은 작품으로 완성시킨다.
아들 위해 신념 꺾는 아버지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포스터. IMDB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 중반 영국의 근로자들의 삶은 팍팍했다. 경기침체와 함께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의 신자유주의 정책 덕에 노동조합의 권한은 약해졌다. 이를 틈타 다양한 산업 현장에서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광업회사가 광부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였든 그러지 않았든, 석탄산업의 경쟁력 약화로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부의 결정은 나라의 경제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지역사회에 충분한 지원이 뒤따르지 않았던 점은 분명한 문제로 남았다. ‘빌리 엘리어트’는 이런 시대 변화 속에서도 가족과 예술이 한 소년의 성장, 그리고 공동체의 희망과 연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불완전하지만 불행하지 않은 가족’에 대해 다룬다. 가정에 크고 작은 고난이 밀려와도 ‘어른’의 사랑이 중심을 잡고 있다면 가정은 무너지지 않는다. 고통이 덜한 것이 아니라, 버틸 수 있는 저력이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빌리는 발레 무용수를 꿈꾼다. 하지만 빌리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아들의 꿈을 이해하지 못한다. 남자아이가 발레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기며 빌리를 꾸짖는다. 발레를 폄훼하고, 레슨을 금지한다. 그러나 그는 곧 아들의 몸짓 안에서 숨겨진 진심을 본다. 그러고는 자신의 신념을 꺾는다. 그 순간 아버지는 진정한 ‘부모’가 된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현재를 내려놓는 그 결단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조용하면서도 강렬한 클라이맥스다.
영화 말미 아버지는 세계적 발레리노로 성장한 막내아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큰아들 토니와 함께 낯선 런던으로 올라온다. 복잡한 거리와 소란스러운 인파를 조심스레 헤치며 극장에 도착한 그는 객석 뒤편에 조용히 앉는다. 무대 위 조명이 서서히 켜지고, 빌리가 백조처럼 우아하게 날아오르는 순간,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아버지는 무대 위 아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짧은 숨, 천천히 젖어드는 눈가에 담긴 감정은 자부심과 미안함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눈빛은 그간 쌓여온 내적 갈등과 단념, 그리고 뒤늦은 이해를 하나로 압축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윌킨슨 선생님이 빌리 엘리어트에게 발레를 가르치는 장면. IMDB
뮤지컬로도 재탄생한 빌리 엘리어트
영화는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된다. 발레와 노동, 계급과 욕망, 교육과 예술이라는 수많은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한 아이를 위한 한 아버지의 선택’이라는 가장 인간적 이야기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시대는 바뀌어도, 부모의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절망을 견디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언제나 묵묵히 곁을 지켜준 이들의 믿음 덕분이다.빌리 곁에는 그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먼저 읽어낸 어른도 있다. 지역 문화센터에서 발레를 가르치던 윌킨슨 선생님(줄리 월터스)이 그 주인공. 윌킨슨 선생님은 고된 삶 속에서도 예술의 가치를 믿었다. 윌킨슨 선생님은 빌리에게 발레에 대한 지식보다 ‘마음의 움직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빌리가 수업에 빠져도 혼내지 않았다. 가난한 빌리의 가정환경을 탓하지도 않았다. 윌킨슨 선생님은 낡은 체육관에서 공들여 빌리에게 발레를 가르친다. 빌리에게 윌킨슨 선생님은 발레 강사 그 이상의 의미다. 빌리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끈 첫 번째 자극이었다.
윌킨슨 선생님은 빌리의 가능성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주저하지 않는다. 빌리의 가족들을 설득하며 예술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다. 윌킨슨 선생님이야말로 빌리가 처음 만난 ‘자신을 믿어준 어른’일지도 모른다. 빌리가 발레리노라는 꿈을 이룰 수 있던 것도 가족의 사랑과 더불어 자신을 지지해준 어른이 있었기 때문이다.
빌리 엘리어트는 스티븐 돌드리(65) 감독의 데뷔작이다. 연극계에서 명성을 쌓은 돌드리 감독은 영국 북부 작가 리 홀의 시나리오로 2000년 이 영화를 만들었다. 리 홀(당시 35세)은 자신이 자란 영국 더럼 지역의 기억과 1984년 광부 파업 당시의 공동체적 경험을 토대로 각본을 썼다. 리 홀은 감독과 함께 인물 중심의 섬세한 연출로 관객이 등장인물에 공감할 수 있도록 애썼다.
제작비 500만 파운드(약 92억 원)에 불과한 영화였기에, 이 작품이 세계적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전 세계에서 연이어 흥행에 성공했다. 누적 수익은 1억9000만 달러(2632억 원)를 훌쩍 넘겼다. 약 20배가 넘는 놀라운 수익률을 기록했고, 언어를 초월한 관객의 눈물과 박수는 어디서나 똑같이 터져 나왔다.
2005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영화를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로 무대화했다. 무대 위 빌리의 몸짓은 한층 더 길고 절실하게 뻗어나갔고, 아버지의 침묵은 객석에 더 깊은 여운으로 울려 퍼졌다. 영화가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공동체의 상실을 다뤘다면, 뮤지컬은 그 이야기를 예술의 힘으로 더욱 깊게 확장시켰다. 전 세계 수많은 도시에서 아역배우를 발탁해 각기 다른 무대에 올리며, ‘빌리 엘리어트’는 하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세계인의 정서에 닿을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빌리 역의 제이미 벨(39)은 실제 영국 북부에서 성장한 배우다. 2000여 명 공개 오디션으로 선발된 무명이었으나, 어린 시절부터 익힌 발레와 탭댄스는 물론 치밀한 감정연기로 영화를 빛냈다. 이 영화로 만 14세에 영국 아카데미상(BAFTA) 남우주연상을 최연소로 수상했다.
백조는 여성이라는 고정관념 깬 매슈 본
영화 말미에 빌리가 공연하는 작품은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다. 여자 무용수 오데트와 지그프리드 왕자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고전발레다. 수십 년간 여리지만 우아한 여성 백조의 이미지가 무대를 지배해 왔다. 그런데 영국 안무가 매슈 본(65)은 이 익숙한 설정을 과감히 깨뜨렸다. 그는 전통적으로 여성 무용수가 맡던 백조 역할을 남성 무용수에게 맡기며 발레의 성별 고정관념을 깨는 데 도전했다.이 도전은 단순한 성별 전복이 아니라, 발레가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을 한층 넓히는 전환점이 됐다. 매슈 본의 ‘백조의 호수’는 기존 발레가 머물던 ‘아름다움’이라는 영역을 넘어 외로움과 욕망, 억압된 정체성을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그 결과 무대는 단순히 사랑을 표현하는 공간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과 마주하는 장으로 거듭났다.
영화는 성장한 빌리가 매슈 본의 ‘백조의 호수’ 주역으로 무대에 올라 날아오르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으로 마무리된다. 매슈 본은 전통에 가려져 있던 슬픔과 정체성, 억눌린 소망을 새로운 동작과 시선으로 끌어올렸다. 남성 무용수를 백조로 세운 그 선택은 단순한 성별의 전복이 아니라, 존재를 있는 그대로 무대에 올린 용기였다. 매슈 본의 ‘백조의 호수’는 남성의 몸짓으로 슬픔과 해방, 존재의 의미를 이야기했고, 빌리 엘리어트는 한 아이의 날갯짓을 통해 세대와 계층, 편견을 넘어선 사랑의 언어를 펼쳐 보였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인물이 바로 애덤 쿠퍼(54)다. 그는 매슈 본의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 역할로 활약했던 대표적 무용수이며, 영화 속에서는 성인이 된 빌리 역으로 출연했다. 왕립발레학교 출신인 그는 정교한 테크닉 위에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표현력까지 더해,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의 무대는 말보다 강했고, 손끝 하나의 떨림에도 감정의 결이 묻어난다.
영국은 전통에 머무르지 않고, 예술을 ‘현재의 언어’로 끊임없이 다시 써 내려가는 나라다. 그 창조 정신은 매슈 본과 애덤 쿠퍼의 행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영국이 세계 예술 무대에서 오랜 시간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이유는 단순한 기술력이나 일시적 유행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며, ‘무엇을 혁신할 것인가’ ‘어떻게 새로운 감동을 창조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왔다.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예술, 그리고 그 언어가 누구에게 닿을지를 고민하는 태도야말로 오늘의 영국 예술을 지탱하는 힘이다.
한국의 K-컬처 역시 기술력과 대중성을 바탕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더 큰 도약을 위해서는 우리도 같은 질문을 마주해야 한다. 무엇을, 왜, 어떻게 노래하고 춤추며 그릴 것인가. 그 질문 앞에 흔들림 없이 설 때, 한국 문화도 시대를 넘어선 예술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품은 언제나 철학을 품은 예술, 경계를 넘어서는 포용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무대는 특별하다. 그것은 한 소년의 비상이자, 고정관념을 벗고 스스로에게 다가가는 몸짓이었다. 날아오르는 성인 빌리의 움직임엔 자유를 향한 갈망이 녹아 있다. 그 뿌리엔 언제나 곁을 지켜준 가족의 사랑이 깊게 박혀 있다.
우리의 비상은 결코 혼자 이룬 일이 아니다.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눈물로 조용히 우리를 지켜준 그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시작이자 가장 오래 남는 힘이다.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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