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호

벤처기업 옥석가리기

  • 이강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7-01-02 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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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 열기가 후끈하다. 이름에 ‘컴’ ‘텔’ ‘통’이 들어가 있으면 투자자가 줄을 서는 형국이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처럼 조건이 완벽한 곳에서도 벤처기업의 성공률은 10% 정도. 이 혼탁한 시장의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
    올해로 8년째 예비 벤처 창업자를 상대로 컨설팅 활동을 하고 있는 A컨설팅 L사장(42)은 작년 한해동안 57개의 회사가 문을 여는 데 참여했다. IMF의 직격탄으로 온나라가 수렁에 빠진 상태에서 출범한 새정부가 벤처 창업을 독려하던 재작년과 비교하면 근 30%가 늘어난 수치다.

    일감이 늘어난만큼 그의 사무실은 생기가 돈다. 밀리지 않고 직원 월급도 줄 수 있게 됐고, 삼겹살로 때우던 회식자리에서는 소갈비나 회도 먹는다. 하지만 요즘 그의 솔직한 심정은 즐겁다기보다는 허탈하다. 그의 도움을 받아 창업한 회사들이 ‘떼돈’을 번 것을 보노라면 자신이 초라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그의 본업은 투자가 아닌 창업 컨설팅이고, 또 그를 거쳐간 회사가 잘된 것은 자기 덕이라고 자위할 수 있으니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다. 상대적 박탈감보다 더욱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기실 다른 데 있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그조차 시장이 돌아가는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그것이다.

    작년 하반기 그가 경험한 ‘사건’ 하나. 무선통신을 응용한 서비스를 하겠다는 한 업체로부터 투자자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사업 계획서를 세밀히 살펴본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사업 불가. 그리고 회사 사장에게 업종을 바꾸라고 권했다.

    계획대로 사업이 되기 위해 필요한 장비업체와의 합의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무엇보다 비슷한 아이템의 기존업체들도 놀고 있는 데가 많았던 것. 그러나 그에게서 ‘빠꾸’를 맞은 이 업체는 얼마 뒤 인터넷 공모를 통해 투자자를 모집, 보란 듯이 9억9000만원의 자금을 모았다(현행법상 자금 공모 금액이 10억원 미만일 경우 기업은 유가증권 신고서를 금감위에 내지 않아도 된다).



    “내 판단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재무제표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일반 투자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투자환금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그저 정보통신업이라면 돈을 싸들고 달려든다. 회사 이름에 ‘컴’ ‘텔’ ‘통’자만 들어가면 단기간에 10배 20배로 투자금이 뻥튀기되는 것으로 아는 게 요즘 분위기다. 물론 일단 자금이 확보됐으니 다른 사업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투자계획서의 사업을 보고 돈을 댄 사람들은 심하게 말해 사기당한 것이다.”

    벤처투자시장의 돈 돈 돈

    작년 한해동안 이 나라에는 월평균 250개의 벤처기업이 탄생했다. 그 결과 중기청에 등록된 벤처기업의 숫자는 12월말로 5000개에 육박한다. 우리가 벤처 선진국이라 부르던 대만(1200개)이나 이스라엘(1000개)을 능가하는 수치다. 인터넷기업의 약진을 중심으로 벤처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전세계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우리 같은 성장은 유례가 없다.

    무엇보다 창업이 활발해진 데는 벤처기업으로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정부의 정책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98년 중반, 코스닥지수는 70선을 오르락내리락 했고, 하루 거래량이라 해봐야 1400만여주, 그나마 300여 종목 가운데 70여개만이 거래될 뿐이었다. 상장사 주식시장조차 바닥을 기고 있는 상황에 코스닥은 관심거리조차 못됐던 것. 이 무렵까지만 해도 벤처를 살리겠다고 내놓은 각종 정책은 ‘벤처대란’에 대한 우려감만 안겨줄 뿐 효과가 없었다. 당시 벤처캐피털 관계자들의 주문은 한 가지였다. “코스닥을 살려내라.”

    그런데 작년 3월, 이들의 말대로 정책 방향이 코스닥 활성화로 바뀌면서 시장상황은 급변했다. 벤처기업에 돈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코스닥 시장이 활발해지면서 이전의 투자 자금을 회수한 벤처캐피털이 경쟁적으로 또다른 투자에 나섰기 때문이다.

    지금 벤처시장 주변에는 돈이 넘쳐나고 있다. 이 시장에 흘러 다니는 돈의 규모가 얼마나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표적인 벤처캐피털인 창투사는 작년 말 현재 90개를 넘은데 이어 올 1월 말 100여개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은 투자조합 결성과 정부의 벤처자금 지원 등에 힘입어 회사별로 대개 100억원 이상의 투자여력도 확보해놓고 있다.

    또 대기업이 조성했거나 할 예정인 1000억원 이상 규모의 대형펀드만도 20여개나 된다. 이들과 함께 은행 투신사 등은 물론이고 종금사, 파이낸스, 신용금고도 저마다 수백억원의 자금을 벤처투자 용도로 책정해놓은 상태다. 벤처투자가 황금알을 낳는 재테크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비상장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가 유행처럼 번졌고, 덩달아 요즘 명동 사채시장의 큰손들마저 가장 좋아하는 투자처로 벤처기업을 꼽고 있을 정도.

    덕분에 창업 환경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졌다. 전국 40개 대학 벤처동아리의 모임인 한국대학생벤처창업연구회 정연수 회장(전남대 대학원)은 “요즘 대학생들의 희망 1순위는 벤처기업가가 되는 것”이라며 “아직 학생들의 창업은 무리가 많지만, 자금 조달이 쉬워졌고 대기업들이 아이디어경진대회나 벤처과거(科擧) 등을 열어 창업을 독려하고 있어 올해 안에 상당한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투기 광풍 시절과 유사

    원래 벤처기업의 고향인 실리콘밸리에서는 일반적으로 각 단계에 따라 투자자가 정해져 있다. 엔젤은 창업단계의 종자돈을 제공하고, 벤처캐피털은 주식공개를 향해 7부능선을 넘어선 기업에, 투자은행은 기업상장 후에 투자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할 분담이 불분명한 우리나라에서 요즘 시장에 뛰어든 주체들은 투자단계를 가리지 않는다. ‘먼저 돈 대는 쪽이 임자’인 것이다.

    시중에 투자자금이 풍부해지면서 투자시장의 주도권은 돈 쥐고 있는 쪽이 아닌 판매자, 즉 기업으로 옮겨졌다. 벤처캐피털과 ‘흥정’이 성사 직전까지 갔다가 더 쳐주겠다는 쪽으로 발을 돌린 벤처기업의 얘기를 듣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갓 창업한 회사가 몇차례 언론을 탄 뒤 10배 이상의 프리미엄을 붙여 자본 참여를 요구했다는 얘기도 마찬가지.

    시장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상황은 가장 ‘섹시한’ 업종으로 불리는 인터넷 기업 주변에서 발견된다. 작년 중반까지 회원 1인당 1만원의 가치를 인정받던 것이 하반기로 들어오면서 10만원으로 올랐다. 이 사업에 자본금은 의미가 없다. 인터넷사업은 성격상 당장의 매출액이나 자본금 같은 전통적 잣대로 회사를 평가하지 않는다. 기업 쪽에서도 자신들의 시장성을 확인시키기 위해 내놓는 자료는 가입 회원수나 페이지 뷰 정도. 작년 여러 인터넷기업이 억대의 경품을 걸고 회원모집에 혈안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시장의 요즘을 보여주는 또 한가지 지표는 한 기업에 대한 투자자금의 규모가 날로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평균 5억원 정도에 머물던 것이 요즘에는 스타트업 단계의 회사에도 10억원 단위까지 올라가고 있다. 여러개의 벤처캐피털이 컨소시엄을 형성해 공동투자를 하기도 하지만, 아예 ‘몰빵을 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와 함께 순자산이나 본질가치를 통해 기업의 내재가치를 평가하던 방식도 요즘은 유사기업의 주가가 가장 큰 고려사항이 됐다.

    이런 현상을 두고 앞의 L사장은 “서울 강남에 부동산투기 열풍이 불던 70년대 후반이 연상된다”고 말한다. 마치 영동 땅값이 뛰니까 양재동 땅값이 덩달아 뛴 것처럼, 비슷한 업종이면 미래가치를 거론하며 같은 값을 받으려 한다는 것.

    이 곳으로 돈이 몰린 이유는 자명하다. 아직 ‘먹을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벤처캐피털들은 벤처기업에 대한 사회의 높은 관심이 궁극적으로는 쉽게 투자자금을 회수하는 것으로 이어질 거라고 본다. ‘돈 없어 사업 못하겠다’는 얘기가 쏙 들어간 상태에서, 창업이 성공으로 이어지고 이 성공이 또 다른 창업을 독려하는 선순환을 이룸으로써 투자자와 기업이 모두 이익을 거두는 윈윈 게임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무늬만 벤처’에 ‘묻지마 투자’

    그러나 비교적 업력이 쌓인, 특히 코스닥이 문을 열 무렵 이 시장에 있었던 관계자들의 태도는 확실히 조심스럽다. 뜨거운 맛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코스닥이 처음 개장한 96년 7월을 전후해 약 1년 간도 지금과 유사한 상황이 연출됐다. 하이테크 붐이 일었던 당시, 해당 회사의 주식 가격이 폭등하면서 투자시장은 갑작스레 폭발했다.

    코스닥 등록 기업의 주가가 규모나 성적과 무관하게 오르는 것을 보고 기업들은 너나 없이 ‘가자 코스닥으로!’를 외쳤다. 여기에는 등록 이전 액면가의 10배 이상을 프리미엄으로 지불하고 지분을 산 창투사들의 거품 넣기가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하지만 이 잔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소수의 시장 참가자끼리 북치고 장구치는 사이, 일반 투자자들은 혼탁한 이 시장을 떠나버렸고, 곧 IMF의 된서리를 맞았던 것이다.

    이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그래서 지금처럼 좋은 시절이 도래한 것을 보며 즐거워하기보다 ‘이후’를 더 걱정한다.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더없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지금 시장에서 벌어지는 변화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보수적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C창투사 N씨는 현재의 벤처기업 주가는 기업의 내실과 역량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상태라고 평가했다. ‘고위험 고수익’이 벤처기업 투자의 속성이라지만, 수익에 대한 기대보다는 위험 요소가 더 큰 기업이 대부분이란 얘기다.

    작년 12월 중소기업특별위원회가 개최한 벤처기업지원 시책 평가 및 발전방안에 대한 공청회에서 “벤처정책이 벤처붐 조성에 기여하긴 했지만 ‘무늬만 벤처’를 양산하고 ‘묻지마 투자’로 이어지는 등 벤처거품 현상을 조장한 측면이 있다”고 한 벤처시책평가위원회 이언오 위원(삼성경제연구소 이사)의 진단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우려다.

    특히 N씨가 걱정하는 것은 게임 참가자들의 태도다. “이 세계에 ‘먹튀’라는 용어가 난무하고 있다. 시장의 승세를 틈타 치고 빠진다는 뜻이다.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복권 당첨되듯 사업을 벌이는 것이 가능한 이 시장은 분명 미쳐 돌아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회사 내용보다 분위기에 휩쓸린 투자가 이어지고 사이비 벤처가 발호하는 현실에서, 과연 벤처기업이 일반 기업과 무엇이 다른지부터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현행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르면 벤처기업이란 ▲연구개발 투자비 비중이 총매출액의 5% 이상 ▲특허권과 실용신안권 등을 이용해 생산한 제품의 매출이 총매출액의 50% 이상 ▲벤처캐피털의 투자총액이 기업 자본금의 20% 이상이거나 ▲벤처캐피털이 인수한 주식 총액이 자본금의 10% 이상인 기업을 말한다.

    그러나 법적 요건과 별개로 일반적으로 정의되는 벤처기업은 ‘개인 또는 소수의 창업인이 위험성은 높으나 성공할 경우 높은 기대수익이 예상되는 신기술의 개발 아이디어를 독자적인 기반 위에서 사업화하는 기술집약적 중소기업’이다(벤처기업협회). 따라서 벤처기업이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차별화된 기술과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

    벤처기업 업종이 정보통신과 멀티미디어 등 첨단장비, 생명공학산업, 환경산업에 집중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중기청이 작년 10월 4008개 벤처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에서도 우리나라의 평균적인 벤처기업 경영자는 대졸 이상(77%)의 학력에 공학(49%)을 전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지금 당장 높은 주식가격을 형성하고 있는 벤처기업들이 과연 시장을 창출하고 독점할 기술을 확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회의적이다. 업계 사정에 밝은 이들은 “최근 투자를 이끈 벤처기업들 가운데는 활황을 기회삼아 기술개발은 뒷전으로 미루고 ‘재테크 실력’만 키우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전한다.

    특히 기술보다 아이디어에 승부를 거는 쪽인 인터넷 비즈니스는 외국에서 인기를 끈 컨텐츠를 국산으로 포장한 경우가 많아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힘들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국IBM의 e비즈니스 엔지니어 김국현씨는 최근 한 기고문에서 “미국 내에서는 독특한 아이디어로 시장을 형성하고 전지구 규모의 브랜드와 시장을 선점했으며, 참신한 리더십을 지니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조차 냉혹한 거품론을 퍼붓고 있다”고 소개했다. 하물며 고만고만한 실력과 미국산 아이디어의 재탕에 불과한 기획으로 국내시장만을 상대로 하는 우리의 경우는 어떻겠느냐는 얘기다.

    지금은 이름을 바꾼 인터넷 소프트웨어업체인 W사는 한창 잘나가던 시절 업계 주변에서 “파워포인트를 개발도구로 쓰는 회사”란 소리를 들었다. 파워포인트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프리젠테이션 프로그램. 주가 관리에 매달려 제품개발보다는 홍보에만 열을 올린다는 비아냥이었다. 핵심 기술보다 포장에 매달리는 현상은 투자시장이 미인대회 비슷한 양상을 보이면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물론 기술이 벤처기업의 전부는 아니다. 좋은 기술만 보유하고 있으면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을 뜻하는 ‘쥐틀의 오류(mousetrap fallacy)’란 최신 경영학 용어도 있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중세에는 좋은 쥐틀(기술)이 성공을 보장해주었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의미다. 실제 기술과 아이디어만 믿고 자신만만하게 창업의 길에 들어섰다가 곳곳에서 장애물과 만나 지뢰를 밟고 장렬히 산화한 경우도 부지기수다. 실리콘밸리처럼 환경이 완벽한 곳에서도 벤처기업은 10곳 중 한 곳만이 성공한다는 것이 ‘정설’이기도 하다.

    벤처기업의 핵심은 기업가 정신

    그렇다면 이 난세에 ‘될 성 부른 떡잎’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이진주 원장은 제대로 된(될) 벤처기업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기준으로 창업자의 ‘기업가 정신’을 살핀다. 벤처 비즈니스에서 말하는 기업가 정신이란 현실적인 자원의 제약을 무릅쓰고 포착한 기회를 사업화하려는 행위와 과정을 말한다. 다시 말해 업종에 대한 전문성과 기술력, 창의력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조직의 내부자원을 총가동하는 힘의 바탕이 기업가 정신인 것이다.

    기업가 정신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경영자 자신에 대한 냉철한 판단도 빠질 수 없다. 이를테면 사업 규모가 커져 자신의 능력에 부친다면 과감히 새로운 사람을 불러오는 자세가 돼 있어야 한다. “자신보다 더 유능한 사람을 불러들일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정말로 유능한 사람”이라는 PSIA 박상일 사장의 말도 이를 지적한 것이다.

    76년 25세의 나이에 워즈니액과 함께 애플컴퓨터사를 창업한 스티브 잡스는 경영보다 컴퓨터 자체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에게 ‘경영을 모르는 컴퓨터 천재’라는 비웃음섞인 별명이 붙은 것도 이런 연유였다. 97년 7월 길버트 아메리오 회장이 경영 부실로 물러난 이후 이사회의 요청으로 다시 복귀하긴 했지만, 그는 85년 에는 ‘경영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채용한 존 스컬리에 의해 회사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창업자=오너=CEO’란 등식이 굳어버린 우리 나라에서 이런 장면을 구경하기는 쉽지 않다. 94년 국내 처음으로 인터넷 접속서비스를 제공한 아이네트의 허진호 사장이 작년 말 “이 회사는 더 이상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고 새 인터넷 기업을 설립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그에게 박수를 보낸 것은 ‘벤처정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벤처기업에 유독 기업가 정신이 더 강조되는 이유에 대해 이원장은 “기업가 정신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조직’에 의해 움직이는 대기업과 달리 벤처기업은 ‘사람’, 특히 창업자에 의해 기업의 성패가 좌우된다는 것. 기보엔젤클럽의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그는 “창업자에게 필요한 것은 선천적인 에너지나 지능이 아니다”라며 “기업가의 성실성(integrity)을 투자의 필요조건이라고 한다면, 상품의 시장성과 경쟁력은 충분조건, 기업가정신에 충만한 경영능력은 필요충분 조건”이라고 정리했다.

    벤처캐피털에서 투자심사를 담당하는 이들 역시 예외 없이 가장 중요한 투자 결정 요소로 ‘사람’, 즉 경영자의 자질을 꼽는다. 이들은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볼 때 벤처기업에서는 경영자 한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어도’ 절반 이상이라고 본다. 더욱이 변화무쌍한 벤처기업의 경영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에 대한 적응이 필수이며, 이는 전적으로 CEO의 역량에 달려 있다는 것.

    업종이 정보통신이나 생명공학 등 첨단이라고 벤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벤처기업이란 말그대로 강한 성취욕과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모험심을 가진 기업이다. 이 모험심을 잃고 다른데 눈을 돌린다거나 전시를 위한 치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더 이상 벤처 기업이란 훈장을 달 자격이 없다. ‘크기의 신화’에 매달려 몸집 불리기에 치중하고, 경영 성과를 나누는데 인식하며, ‘소유와 경영의 분리’는 안중에도 없다면 재벌과 다를 게 없다. 성공한 벤처기업과 실패한 벤처기업이 극명히 대비되는 부분도 이 점이다.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요즘 인터넷과 리눅스 관련기업인 ‘드림위즈’를 설립해 재기에 성공한 이찬진 전 한글과 컴퓨터사 사장. 그가 98년 6월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원을 받는 대신 아래아한글 개발을 포기하기로 했을 때, 업계는 “이미 예견됐던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야전침대에서 잠을 자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창업 초기의 어려움을 너무 쉽게 잊어버려 화를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첫손에 꼽히는 모범 기업인 미래산업이 오늘의 명성을 얻게 된 데에는 한 해 순이익이 100억원이 넘고 부채가 자본금의 60%에 불과하다는 등의 경영지표 때문만은 아니다. 시장이 이 회사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이와 같은 숫자 때문이 아니라 회사를 움직이는 경영진의 치열한 기업가 정신이다.

    이 회사 창업자인 정문술 사장은 원광대학교 종교철학과를 졸업한 기술 문외한이다. 46세의 늦깎이로 사업에 뛰어든 그의 창업 전 이력(중앙정보부 부이사관 퇴직)도 벤처기업과는 무관하다. 또 개발과 영업 등 내부 업무를 총괄하는 백정규부사장(48)은 공고 출신이다. 이들은 자신의 핵심 역량이 무엇인지, 또 이를 어떻게 발휘하는지를 알았다. 사장은 기술을 가진 직원들에게 일을 맡기고, 자신은 그들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투명한 경영에 대한 정사장의 집착은 유명하다. 그는 친인척은 물론이고 물론이고 아들도 회사 일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렇게 하면 직원들이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영자세는 94년 부천에서 지금의 천안으로 회사를 옮길 때 직원 136명 중 단 1명을 제외한 전직원이 생활터전을 옮긴 진기록을 세우게 했다.

    미국의 인터넷 컨설턴트인 게리 맥거번은 그의 책 ‘경제 다스리기’에서 인터넷 비즈니스원칙 10가지를 소개하며 직원을 포함해 사업과 연관을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권한의 분배를 첫째로 꼽았다. 이는 “앞으로는 시장, 고객과 더불어 사원에 대해서도 편집광적인 관심을 유지하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인텔사의 앤디 그로브 회장의 예견과도 일맥상통한다.

    ‘회사는 내 개인소유가 아닌, 함께 일한 모든 사람과 사회의 공동소유물’이라는 정사장의 말은 “머슴들이 무얼 안다고…” 운운하던 어느 패망한 재벌총수의 태도와 극명하게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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