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정된 삶을 보장해주는 ‘멀쩡한’ 직장을 뛰쳐나와 벤처기업으로 향하는 사람들. 그들을 끌어낸 것은 ‘억!억!’ 하는 스톡옵션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이 진정 목말라했던 건 ‘꿈’이었다. 》
그렇다고 어중이떠중이들이 머릿수만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석·박사 학위 소지자와 이직을 희망하는 대기업 엘리트 샐러리맨들의 화려한 이력서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대기업 샐러리맨들의 벤처기업행은 가히 ‘엑소더스’라 칭할 만하다. ‘꿈’과 ‘돈’,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인터넷과 정보통신 관련 벤처기업으로 대기업 엘리트들이 대거 흘러들면서 21세기의 새로운 직업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
1월2일 오후. 서울 강남구 도곡동 자유와 도전(http://www.freechel.com) 사무실. 신정인 전날 ‘프리첼 커뮤티니 서비스’를 인터넷에 정식 오픈하고 자정에 돼지머리로 고사를 지내고 나서 막걸리 파티를 연 전제완(36) 사장과 직원들이 회의실에 둘러앉았다. 노트북 컴퓨터의 마우스를 클릭할 때마다 회의실 한쪽 벽면을 다 차지한 대형 슬라이드 화면에는 프리첼 홈 페이지의 고급스러운 디자인이 옷을 바꿔 입었다.
연말연시를 죄다 회사에 반납하고 인터넷 서비스의 이상 여부를 점검하는 직원들의 얼굴은 다들 부스스했지만, 눈빛만은 생기와 자부심으로 초롱초롱했다.
인터넷 특공대 모여!
“사장님. 불만 있는데요. 사장님이랑 비슷하게 생겼다고 규동이 형만 편애하는 것 같아요.”
“내 마음이야. 신체 결함이 있는 사람끼리 서로 아껴줘야 되는 것 아니겠어?”
탈모증으로 골머리를 앓는 전제완 사장을 대놓고 놀려대는 직원들. 눈도 깜짝하지 않고 능청을 떠는 사장. 자유와 도전 사무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상사와 하급자가 함께 일하는 직장이라기보다 허물없는 선후배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대학교 동아리 방 같은 분위기다.
전사장이 회사를 차리고 명함에 ‘대표이사’ 넉 자를 새겨넣은 것은 지난해 4월. 그 전까지 전사장은 삼성그룹 비서실 인사팀에서 근무했다. 89년 삼성물산 인사팀에 입사, 91년부터 삼성그룹 인사정보시스템(PDSS) 개발을 주관했다. 그는 PDSS 프로젝트를 통해 삼성그룹의 조직 관리를 과학화한 공로를 인정받아 95년 ‘제1회 자랑스런 삼성인상’을 받았다.
인터넷 커뮤니티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유와 도전은 설립 당시 아이디어 하나로 국회의원 기업인 교수 등 20여명의 엔젤 투자자로부터 32억의 자본금을 유치해 화제를 모았다. 지난 8개월이 서비스 개발에 주력한 기간이었다면 오는 3월부터는 외자 유치에 주력하는 한편, 미국에 법인을 설립해 ‘글로벌 커뮤니티’를 목표로 공격적인 경영을 펼칠 예정이다. 올해 매출액 목표는 100억원. 전사장은 “그간의 성과는 전적으로 ‘인터넷 특공대’라 불리는 탄탄한 맨파워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자유와 도전의 임직원은 55명. 이 가운데 15명이 전사장처럼 삼성물산 삼성SDS 삼성전자 등을 거친 ‘삼성맨’ 출신이다. 서울대 출신 직원이 절반에 가까운 25명이나 되는 것도 이채롭다.
전사장과 서울대 경영학과 동문인 김용진(37) 부사장도 몇 달 전까지 삼성물산 정보전략기획팀에 몸담고 있었다. 김부사장은 삼성물산에 있을 때 전사장과 함께 컴퓨터 입문서 ‘PC는 내친구’를 펴내 매스컴을 타기도 했다. 삼성물산의 해외 네트워크 구축 및 인터넷 상거래 프로젝트가 그의 작품이다.
홍보팀 이정아(28) 과장은 ‘선배 따라 강남 온’ 케이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이태신 전략기획팀장을 만나 꾐에 넘어갔다. 이과장과 이팀장 역시 삼성물산 출신으로 평소 사내 동아리 ‘미래영상연구회’에서 선후배로 알고 지내던 사이다.
이 밖에 자유와 도전 직원 중에는 포항제철, P·G 등의 ‘잘 나가는’ 기업에서 근무했던 이도 있고 공인회계사도 있다.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의 ‘디지털밸리’에는 200개에 가까운 인터넷·정보통신 관련 벤처기업들이 흩어져 있다. 야후 코리아, 라이코스, 다음커뮤니케이션 등과 함께 ‘오프라인(Off-Line)’에서는 벤처기업이지만 ‘온라인(On-Line)’에서는 대기업 못지않은 브랜드 파워를 과시하는 네띠앙도 이곳의 대화벤처플라자 8층에 사무실을 냈다. 네띠앙의 네티즌 회원수는 175만명을 돌파했고, 지난해 9월부터는 텔레비전 광고도 내보낸다.
네띠앙 사무실의 로비와 엘리베이터, 건물 복도를 분주히 오가는 얼굴들은 대부분 20∼30대의 홍안(紅顔). 사무실로 들어서니 출입구부터 외부인들로 웅성거리고 여기저기서 담배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사각형 칸막이가 벌집처럼 빽빽하게 들어 찬 사무실에선 직원들이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바쁜 손놀림으로 마우스를 조작하고 있다. 억대 연봉을 받는 46명의 인터넷 전사들이 총 한방 쏘지 않고 소리 없는 사이버 전쟁을 치르는 순간이다.
‘벤처사관학교’ 삼성SDS
네띠앙도 삼성맨들이 조직의 골간을 이룬다. 홍윤선(38) 사장은 삼성SDS 유니텔사업부 출신. 인하대 컴퓨터공학과를 나와 동서증권 전산실 기획담당과 테크니컬 애널리스트를 거쳐 95년 삼성SDS로 옮겼다. 유니텔의 사업기획과 정책수립, 마케팅 책임자로 일하다 지난해 6월 네띠앙의 전문경영인으로 영입됐다.
마케팅을 책임지고 있는 성진일(32) 실장은 홍사장의 삼성SDS 직속 후배로 ‘바늘’ 가는 데 ‘실’이 따라온 경우. 성실장은 이미 98년부터 인터넷 사업이 ‘뜬다’는 느낌이 확실했지만, 대기업 명함을 버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망설임 끝에 가족들에게 네띠앙으로 옮긴다고 통보하자 부친은 삼 형제 중 장남인 그에게 “너, 미쳤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송세호 디자인실장, 이윤석 기술실장, 이종혁 홍보팀장도 삼성SDS에 사표를 던지기까지 성실장과 마찬가지로 가족들로부터 ‘실성한 놈’ ‘분유 값도 못 벌어 올 놈’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네띠앙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자 ‘역시 난 놈’으로 복귀했다.
유수의 외국계 기업에서 벤처 승부사로 말을 갈아탄 경우도 있다. 정보보안 전문 솔루션업체 코코넛(http://www.coco nut.co.kr)이 그 예.
코코넛은 ‘인터넷 업체의 정보 보디가드’를 표방하며 기술 자본 아이디어를 가진 고급 두뇌들이 전략적으로 제휴한 벤처기업. 데이콤 안철수바이러스연구소 펜타시큐리티 등 3개사가 참여한 합자회사다.
아직 인력 구성이 채 끝나지 않아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지만 기술력만큼은 어느 벤처기업 못지않게 탄탄하다. 데이콤은 자본을 조달하고 네트워크를 제공하며, 안철수바이러스연구소는 기존 앤티바이러스 솔루션과 PC 보안 솔루션을, 펜타시큐리티는 네트워크 보안과 서버 보안을 맡고 있다. 각사의 기술력과 경영노하우, 사업환경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향후 정부기관, 금융기관, 각종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를 주요고객으로 안정적인 정보 보안 서비스를 펼 계획이다.
코코넛의 전문경영인으로 영입된 조석일(43) 사장은 지난해 12월까지 한국오라클 영업이사로 일했다. 그 전에는 외환은행과 한국IBM에서 요직을 거쳤다. 영업과 마케팅을 맡고 있는 조원영(36) 이사는 최근 한국선마이크로시스템에서 코코넛으로 옮겨 왔다.
코코넛이 입주한 한국인터넷데이타센터에서 코코넛 직원들은 같은 건물에 세 든 다른 벤처기업 직원들로부터 깍듯이 최고참 대우를 받는다. 여느 벤처기업 직원들의 평균연령이 20대 중후반인 데 비해 코코넛은 30대 중반이 주력군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
코코넛은 이글팀과 타이거팀으로 나뉘어 2월1일부터 서비스를 시작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보안 기술은 보안회사의 적인 해커들에 의해 발전하기 마련. 따라서 코코넛은 전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해커들과 본의 아니게 ‘전략적 제휴’를 맺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밖에 삼성물산에서 인터넷 사업을 총괄해온 이금용 이사는 인터넷 경매회사 옥션으로 자리을 옮겼고, 한국오라클 이영수 과장은 ‘유니온 헬스’를 창업했다. ‘서치캐스트’를 창업한 전원하 사장도 대우정보시스템 출신이다.
“창원띠∼오늘은 집에 오려나. 결혼을 해도 독수공방, 안해도 독수공방이라고 하길래 농담인 줄 알고 웃고 넘겼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어. 흑흑흑… 침대가 넘 넙당. 피곤할 텐데 빨리 집에 와서 쉬면 안될깡?”
인터넷 프리첼 방명록에 오른 한 새색시의 사이버 신세 한탄이다. 벤처기업의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남편은 지난해 10월 신혼살림을 차린 이후 집에 들어온 날이 손에 꼽을 정도다. 1월1일로 예정된 인터넷 서비스 개시 일정에 맞추기 위해 밤샘작업을 밥 먹듯했기 때문이다.
벤처기업 직원들의 사정은 대개 그렇다. 평균 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이들은 한 사람이 열 사람 몫을 처리해야 할 만큼 노동강도가 세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퇴근 자유제가 된 것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다 그대로 쓰러져 사무실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자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많은 벤처기업들이 지난해에 창업했기 때문에 지금 한창 인터넷 서비스를 개발 중이거나, 서비스를 개시했다고 해도 아직은 씨를 뿌리는 과정이라 하루를 한 달처럼 보내야 한다.
이들이 멀쩡한 대기업을 박차고 나가 사서 고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탁!’하고 사표 던지고 나갔다가 어느 새 ‘억!’을 주물러대고 있는 ‘마이더스’들을 보면서 인생관이 송두리째 바뀌었기 때문이다. ‘골드 러시’로 비유되는 대기업 샐러리맨들의 벤처 행렬은 스톡옵션이라는 오아시스를 향하고 있다. 그들은 제2의 야후, 제2의 새롬을 꿈꾸며 오늘의 힘겨운 노고를 기꺼이 감수한다.
H건설 K대리(33)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요즘 벤처기업가들은 스스로를 베팅해 수백억원을 거머쥔 도박꾼들이다”며 “허구한 날 언론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그들의 ‘성공신화’를 접하다 보니 회사 다니기가 싫어졌다”고 한다.
“과장, 부장들을 보면 5년, 10년 뒤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심란해요. 앞날이 뻔하지 않습니까. 이만한 규모의 대기업에서 개인의 꿈을 펼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건설현장에서 콘크리트만 주물러본 내가 벤처기업을 차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제서야 진로를 잘못 설정했다는 생각에 후회가 막심하죠. 그나마 주식 투자를 낙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도 제대로 하려면 작정을 하고 매달려야 해요. 비전 안 보이는 회사일랑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사이버 주식투자나 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S전자 P주임(34)은 “우리 회사는 IMF체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순이익을 냈다. 하루 100억원 넘게 이익을 내고 있는데도 직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다. 오히려 과장급의 경우 연봉제 실시 이전보다 연수입이 400만원이나 줄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는 “요즘 회사 전체로 봤을 때 하루 평균 2명 이상 사표를 낸다고 들었다. 회사에서 말로는 ‘벤처기업으로의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 인센티브 제도를 활성화하겠다’고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일 뿐 실질적인 혜택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코스닥에 투자한 돈이 좀 불어나 당장 호구지책만 마련되면 미련없이 회사를 뜨겠다고 한다.
“우리나라 기업이 신입사원 들어오면 적성 보고 배치합니까? 가라는 부서에 가서 그 부서 돌아가는 대로 나를 억지로 맞춘 것이지, 내 꿈에 날 맞춘 것이 아니잖아요. 벤처기업으로 옮긴 사람들 보면 돈도 돈이지만,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솔직히 가장 부러워요.”
노는 것처럼 일한다
요즘 대기업 샐러리맨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단어가 ‘3S’라고 한다. ‘스톡(주식)’, ‘새롬’, 그리고 ‘스타크래프트’가 그것이다. ‘새롬’은 성공한 벤처기업의 대명사. 샐러리맨들은 사무실이나 PC방에서 주가 조회를 하거나 스타크래프트 대결을 펼치면서 “우리도 창업해서 새롬처럼 뜨자”고 호기롭게 외친다.
헤드 헌팅 업체 드림서치의 유현주씨는 “한 달에 평균 15명 정도의 대기업 사원이 구직 의뢰를 하는데, 이 가운데 10명은 다른 대기업이 아닌 벤처기업을 희망한다”고 귀띔한다. 그는 “승승장구하던 간부들이 하루 아침에 ‘팽’당하는 것을 지켜본 유능한 대기업 엘리트들이 더 이상 회사에 충성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벤처기업의 경우 자신의 아이디어를 회사 경영에 반영해 커리어에 대한 전문성을 높이면서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므로 벤처기업을 향한 이들의 대이동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대기업에서 벤처기업으로 옮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필요한 게 돈뿐이었다면 이런 모험을 하지 않았다. 대기업은 봉급도 많고 복리후생도 잘 되어 있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준다. 다만 더 나이 들기 전에 그간 잊고 지냈던 꿈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실패하고 깨지는 것은 나중 일이고 일단 덤벼들고 보기로 했다”고 한다.
재벌그룹 계열 정보통신 기업에서 인터넷 벤처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S씨(32)는 “이곳으로 직장을 옮긴 뒤부터 ‘회사 가기 싫다’는 고질적인 증세가 사라졌다”며 “무엇보다 나 자신이 회사의 종업원이 아니라 경영자의 파트너라는 의식을 갖게 된 게 가장 큰 변화였다”고 한다.
“대기업에 있을 때 가장 불만스러웠던 점은 일보다 ‘정치’나 ‘처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늘 회사 돌아가는 분위기를 살피면서 윗사람 눈치나 보고…. 같은 조직 안에서 벌어지는 알력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더군요. 이런 상황에 창의성을 발휘하지도, 성취감을 얻지도 못하고 하루 하루를 때우게 될 내 미래가 한심스러웠습니다. 이에 비해 벤처기업의 조직문화는 달라요. 노는 기분으로 즐겁게 일할 수 있고, ‘기본’만 지키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자유롭지요.”
의사결정 과정에도 대기업에서라면 열흘은 족히 걸려야 끝날 결재가 단 하루에 처리되기 때문에 업무효율이 높다고 한다. 특히 인터넷 업계는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변해 있기 일쑤여서 결재라인을 한 다리 한 다리 올라가다 보면 뒷북 치기 십상이다.
따라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때는 임원보다 실무자의 의견이 먼저 반영돼야 하고, 이런 분위기 때문에 대기업에 팽배한 권위주의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경영의 탄력성과 개인의 자율성이 자연스럽게 보장되는 것. 대기업의 장점은 흡수하되 벤처기업의 자율성을 제대로 발휘해야 ‘사이버 공간의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 거대 조직의 한계 때문에 효율적인 인터넷 비즈니스를 전개하지 못하는 대기업들은 ‘가출’한 자사 출신 벤처기업가에게 수시로 자문을 구한다.
제 흥에 미쳐 날뛰는 게 벤처정신
대부분의 벤처기업엔 사장실이 따로 없다. 직원들의 옷차림도 제멋대로다. 청바지에 헐렁한 남방, 운동화 차림이 주조를 이룬다. 걸핏하면 팀별로 밥값 내기 스타크래프트 게임이 벌어진다. 자유와 도전에서는 일하다가 슬그머니 사라진 사람들은 십중팔구 근처의 DDR(Dance Dance Revolution)실에서 신나게 발을 구르고 있다. 사무실에서든 춤판에서든 ‘제 흥에 겨워 미쳐 날뛰는’ 게 벤처정신이라는 것.
요즘 강남 유흥업소들의 최대 고객이 벤처기업 직원들이라고 한다. 벤처 주가가 수직상승하면서 ‘원님 덕에 나발 분’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긴데, 실제로 벤처기업들이 투자자와 고객을 대상으로 사업설명회 등을 자주 열면서 인근 호텔들의 매출도 크게 늘고 있다는 후문이다.
강남대로변에는 룸살롱과 단란주점, 호텔말고도 호황을 누리는 곳이 또 있다. 지하철 2호선 삼성역과 강남역 부근을 걷다 보면 미국에 본사를 둔 사무편의대행 전문점 킨코스코리아의 간판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의 단골고객 역시 벤처기업이다. 이 회사 영업팀 윤용찬씨(30)는 각 벤처기업의 동향을 누구보다 빨리 파악하고 있다. “벤처기업마다 각종 사업제안서나 바인더를 적게는 몇백 권에서 많게는 몇천 권씩 제작해 가는데, 복사된 사업설명서 한 장에도 기업의 이미지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편집이나 복사의 질에 꽤 신경을 쓰는 눈치”라고 한다.
벤처기업 직원들의 이직률은 거의 0%에 가깝다. 대기업에서 옮겨온 샐러리맨들이 주력군을 이루고 있지만, 성차별이 없는 능력 위주의 채용조건 때문에 여성들이 차지하는 비율도 높고, 대학 졸업 후 병역의무를 대신하기 위해 특례요원으로 입사하는 경우도 있다. 대학 졸업 후 벤처기업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3년, 또는 대학원 졸업 후 5년간 병역특례요원으로 근무하면 병역을 마친 것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병역 문제를 해결하려는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것도 벤처기업 입사 경쟁률을 높이는 요인이다.
경력사원을 뽑을 때는 헤드 헌트사 등을 통해 인재를 영입하거나 학연 등의 인맥을 통한 특채 형식이 대부분. 신입사원을 모집할 때는 자사 인터넷 홈페이지에 광고를 내거나 각종 인터넷 취업 사이트에 올라 있는 사이버 이력서를 근거로 인원이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채용한다.
채용기준도 파격적이다. 자유와 도전 전제완 사장은 “10분짜리 면접으로 어떻게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하고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단란주점에서 최소한 6시간 이상 ‘소폭’(소주와 위스키를 섞은 폭탄주)을 돌려보고 ‘괜찮다’는 판단이 서면 그 자리에서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통보한다.
벤처기업을 ‘자전거 갈아타기’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페달을 쉬지 않고 밟으며 달려가야 하는 것은 물론, 성장 단계마다 낡은 자전거를 버리고 새로운 자전거로 갈아타야 정보통신혁명시대에 생존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오늘 벤처기업의 핵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은 출발단계에서 이미 대기업이라는 크고 편안한 자전거를 과감하게 내던지고 ‘세발자전거’로 갈아탔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이들이 대기업의 경영노하우와 벤처기업의 자율성을 효율적으로 조화시킨다면 사이버 공간의 글로벌 경영자로 군림할 날이 그리 먼 미래의 일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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