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이 갈수록 더워지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 국제사회가 마련한 기후변화협약. 그러나 이에 대비한 한국 정부의 움직임은 더디기만 하다. 관련 부처들이 자신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내세우며 힘겨루기를 벌이기 때문이다. 그 답답한 속사정을 들여다보았다.
지난해 3월 전세계 온실가스의 4분의 1을 배출하는 미국 정부가 선진 산업국들의 온실가스 감축의무를 법적으로 규정한 교토의정서 서명을 철회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미국의 일방주의에 맞선 다른 국가들의 노력 끝에 가까스로 교토의정서는 살아남았고 마침내 지난해 11월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제7차 당사국총회(COP7)’에서 그 이행을 위한 세부 규칙과 절차가 합의됐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의 환경전문가들은 2002년 9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최되는 ‘지속가능발전 세계정상회의(WSSD)’ 이전에 교토의정서가 발효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빗발치는 비판을 무시한 미국이 교토의정서를 탈퇴한 데 이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이 교토의정서의 자국 의회비준을 미루고, 심지어 온실가스 배출량 세계 2위인 러시아도 비준을 연기하면서 지속가능발전 세계정상회의 이전에 교토의정서가 발효되기는 어렵게 되었다.
심화되는 부처간 이견과 갈등
한국 정부는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국제사회의 더딘 발걸음을 은근히 반기는 눈치다. 기후변화협약에 대한 우리 정부의 속내는 한마디로 ‘일단 우리의 국익을 생각해 가급적 교토의정서 비준을 늦추되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지 않도록 눈치를 잘 살피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정부는 당초 지속가능발전 세계정상회의 이전에 교토의정서를 국회에서 비준할 계획이었지만 계속되는 정쟁으로 국회가 공전하고 국제사회마저 더딘 대응을 보이자 7월12일에야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한국이 기후변화협약과 관련된 국제사회의 논란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해도 좋을 형편은 아니다. 한국은 석유 수입량 세계 4위, 석유 소비량 세계 5위, 온실가스 배출량 세계 9위에 이르는 에너지소비대국. 외견상 우리 정부가 온실가스 저감 노력을 차일피일 미룰 수 있는 근거는 교토의정서에서 온실가스 감축의무를 규정한 선진국 그룹에서 빠졌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정부 부처들 사이에 이견이 난립해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대책 마련에 가장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곳은 산업자원부. 산자부는 한국이 서둘러 대응에 나설 경우 국가경제와 기업경쟁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조하며 온실가스 감축의무 이행 시기를 최대한 늦추자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거나 그런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예를 들어 자동차 회사)에게 경제적·제도적 불이익을 주거나, 반대로 이산화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기업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식의 장치가 마련될 경우 해당 업계에 타격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논지의 핵심이다.
이러한 산자부 견해와 반대입장에 서있는 곳은 환경부다. 온실가스 저감이 당장에는 경제적 부담이 될 수 있지만 미래의 환경적 편익을 생각하면 서둘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국제사회의 압력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국토를 생각해서라도 적극적인 대책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다.
두 부처의 대립구도에 끼어 있는 또 다른 정부부처는 외교통상부. 외교부는 아무래도 국제사회의 압력에 여느 부체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훨씬 더 강해질 다른 나라들의 온실가스 저감 압력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감축의무 이행시기를 좀더 유연하게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물론 특정사안에 대해 정부 부처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앞에서 예로 든 3개 부처 외에 과기부나 기상청이 기후변화 예측과 관련된 기초연구 지원을 강조하는 것이나, 농림부나 산림청이 경작지나 산림의 이산화탄소 흡수능력 함양을 위해 예산 확충을 요구하는 것 역시 기후변화를 둘러싼 자연스런 이견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입장 차이가 단순한 의견대립이 아니라, 각 부처의 영향력 강화와 방어를 위한 ‘파워게임’의 성격으로 번지면서 갈등이나 반목이 심화된다는 데 있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갈등이 범정부 차원의 기후변화협약 대책 추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사실. 이미 정부는 부처간 이견을 조율하기 위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기후변화협약 범정부대책기구’를 구성하고 국무조정실이 부처간 이견을 통합·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 12월 말, 각 부처의 기후변화협약 관련 공무원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여의도에서 벌어졌다. 국회의원들이 느닷없이 기후변화 대책 관련법의 입법을 발의하고 나섰기 때문. 12월21일 이정일 의원 등 20명의 여야 의원들이 ‘지구온난화방지대책에대한법률안’을 제출한 데 이어, 같은달 27일에는 이호웅 의원 등 23명의 여야 의원들이 거의 유사한 내용의 ‘지구온난화가스저감대책법안’을 국회 환경노동위에 제안했다.
사전에 이러한 내용을 전혀 알고 있지 못했던 행정부처 공무원들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일 수밖에 없었다. 기후변화 종합대책을 총괄 수립하는 국무조정실 산업심의관실, 온실가스 배출의 93%가 넘는 에너지·산업공정 분야를 담당하는 산자부 자원정책과, 기후변화협약과 관련된 외교협상을 실무적으로 총괄하는 외교부 환경심의관실 담당자들은 갑자기 벌어진 ‘입법사태’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분주해졌다.
반면 환경부 지구환경과의 분위기는 이와 정반대였다. 의원들의 입법 발의가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던 것. 사실 제출된 두 개의 법률안은 1999년부터 환경부가 일본의 ‘지구온난화대책추진법’을 본따 정부입법을 추진하던 ‘지구온난화방지대책법’과 유사한 골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환경부는 산자부 등 관련부처의 반발에 부딪혀 눈물을 머금고 ‘지구온난화방지대책법’의 추진을 보류했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상황파악에 나선 국무조정실과 산자부는 거의 동시에 제안된 지구온난화방지대책관련 법안들이 사실상 ‘의원 발의의 형식을 빌린 환경부 입법안’이라고 보았다. 향후 기후변화 대책 추진과정에서 환경부의 권한을 크게 강화하는 자체 입법안의 제정이 관련 부처 반발로 힘들어지자, 환경부가 자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민주당 의원 중심의 국회환경포럼, 한나라당 의원이 다수인 환경경제연구회 등의 연구회를 통해 우회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여긴 것이다. 두 개 법률안의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곤 골격과 내용이 거의 일치할 뿐 아니라 예전의 환경부 안과 상당부분 유사하다는 점 등이 이런 추측을 낳았다.
환경부 지구환경과에서도 의원들이 제출한 법률안이 환경부 안을 기초로 했음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환경경제연구회 측 역시 기후변화협약 대책이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온실가스 감축 의지가 강한 환경부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해 환경부의 손을 들어주는 입법안을 냈다고 말한다.
놀란 가슴을 진정한 관련부처에서는 순식간에 제출된 법안에 대해 다양한 부정적 견해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지구온난화방지대책에 관한 국가, 지방자치단체, 사업자 및 국민의 책무를 명확히 하고, 지구온난화종합대책추진 및 국제협력 증진에 관한 사항 등을 정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대책법안의 제안 취지와 주요골자는 일견 무난해 보인다.
그러나 관련부처들의 심기를 거스른 것은 바로 이 대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주체가 환경부로 명시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국무총리를 위원장, 환경부 장관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대통령 소속 지구온난화방지대책위원회의 설치, 환경부 장관 소속 실무기획단 설치, 환경부 장관이 관리하는 지구온난화대책추진기금 신설 등은 물론 온실가스 배출억제 조치의 상당부분도 환경부가 담당하는 것으로 법률안은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이호웅 의원 안은 종합대책의 수립 주체도 환경부 장관으로 명시했다. 이러한 체제는 지금까지의 기후변화협약 대응체제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새로운 대응체제가 도입되면 현재 기후변화협약 대책의 총괄·조정을 맡고 있는 국무조정실과 국내 저감대책을 주도하는 산자부, 국제협상을 담당하는 외교부를 축으로 하는 기후변화협약대책위원회는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다. 당연히 산자부와 외교부는 ‘온실가스배출억제조치 도입은 부적절하다, 기존 대책위원회와 업무가 중복되고 혼선의 우려가 있다, 부처간 업무 조정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대책법안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물론 환경부가 대책 추진을 총괄하는 것은 환경부의 기능상 적절하지 않으며 효율적이지 않다는 의견도 덧붙여졌다. 건교부나 과기부 등도 대책법 제정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환경부 중심으로 대책을 수립, 추진하는 것에 대해선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결국 이 법률안은 의원 입법발의 이후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캐비닛 속에서 그대로 잠자고 있는 상태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 환경노동위에서 심의하는 것조차 불투명한 상황. 법률안에 대한 부처 의견수렴 과정에서 문제제기가 쏟아진 탓도 있었던 데다 환경노동위 의원들이 상대적으로 이 법률안을 비중있게 여기지 않았던 점도 한몫을 했다. 6·13 지방선거와 연말 대선을 앞둔 긴박한 정치 스케줄 속에서 ‘지구가 더워지니 대책을 마련하자’ 같은 문제제기는 귓전에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대책법안을 놓고 팽팽하게 대립했던 환경부와 산자부는 지난 2월 ‘기후변화협약대응 제2차 종합대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일합을 겨룬다. 환경부는 종합대책 수립을 위해 제출한 의견서에서 “기후변화 대책은 자원절약형 사회 및 자원순환형 사회 지향을 통한 근본적인 기후변화 대책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종합대책이 산업부문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단순히 에너지대책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
이는 사실상 산자부 측이 주도하고 국무조정실에서 종합한 제2차 종합대책에 대해 불만이 있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국무조정실 산업심의관실과 산자부 자원정책과, 기후변화대책반 등이 주도하여 종합대책을 수립하다 보니 내용이 온실가스 저감에 보수적인 산업계와 경제부처의 논리에 치우쳤다는 식이다. 제2차 종합대책 마련을 위한 시민단체 간담회 자리에서 환경부 측은 국무조정실에 대해 “환경부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았다”며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주로 국내 대책만을 제시하고 있는 제2차 종합대책에 대해서 외교부는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 국무조정실은 결국 환경부와 산자부의 입장 차이, 특히 환경부의 불만을 충분히 종합·조율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난 3월5일 서둘러 ‘기후변화협약 대응 제2차 종합대책안’을 공개해 버렸다. ‘부처 의견을 추가로 수렴하고 대책안을 수정·보완하여 조만간에 확정된 종합대책을 발표한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관련 부처 홈페이지에는 아직까지 3월5일자 종합대책안만 올라 있다.
대외 협상전략을 담당하는 외교부는 국내 대책을 둘러싼 산자부와 환경부의 의견대립이나 이해다툼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 관련부처와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오해를 피한다는 자세다. 그러나 온실가스 감축의무 이행 시기를 둘러싼 쟁점은 외교부 역시 피해갈 수 없어, 산자부 측과 의견 충돌을 빚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지난해 3월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산하 국제·지역협력분과위원회(이하 국제협력위)’는 한시적으로 ‘기후변화협약 대응방안 소위원회’를 조직, 운영했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국제회의 석상에서 “2018년부터 의무부담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해왔기 때문에 지금 당장 온실가스 감축 의무 부담은 없는 상태. 그러나 현재의 국제적인 여건을 고려할 때 어떤 형태로든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노력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국제협력위의 판단이다.
관련부처 공무원, 전문가, 시민단체 대표 등이 참여한 이 1차 회의에서 외교부는 우리나라가 선택할 수 있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성의 표시’ 방안의 하나로, 2018년 이전의 소위 ‘중간단계’ 감축노력 방안을 제안했다. 쉽게 말해 국제사회에 온실가스 감축 의무 부담을 공식 약속하기 이전에 기업, 시민, 지자체 등에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행동을 미리 촉진해 나가자는 제안인 셈이다.
이는 우선 기후변화협약에 대한 국내 대응체제를 강화하자는 의도지만, 나아가서는 국제적으로 ‘한국이 인류 공익 증진에 앞장선다’는 긍정적인 국가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외교부의 설명이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중간단계의 감축목표를 정해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애쓴다는 이미지를 과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이러한 방안이 아직 전혀 준비가 안돼 있다시피 한 국내 상황이나 늘어가는 국제적 압력에 비추어 적절한 대응책이 될 것이라는 데 대체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중간단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느 부문이, 언제까지, 어느 만큼의 온실가스를 줄여나갈 것이냐’ 하는 구체적 이행 방안에 대해 논의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산자부 측은 “중간목표 설정도 쉽지 않지만 국내 업계의 준비정도, 온실가스 저감 노력의 속도조절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할 때 중간단계 도입의 구체적인 방안을 지금 논의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며 이 제안을 소위원회에서 더 이상 다루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고 나섰다. 회의에 참석한 한 에너지전문가는 “외교부의 중간단계 감축목표 설정 제안이 국제협상에서 화려한 실적을 올리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국가경제와 기업에게는 매우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섣부른 외교적 발상”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결국 논의는 “오는 2002년 ‘기후변화협약 제8차 당사국총회(COP8)’에서 우리나라가 ‘중간단계’를 도입해 우리 실정을 감안한 온실가스 감축방안을 펼치기로 했음을 대내외적으로 표명한 뒤, 이를 바탕으로 기후변화협약의 구체적인 이행방안을 단계별로 마련하자”는 다수 의견과 “먼저 이 문제에 대해 연구기반을 만들고 우리나라의 입장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더 이루어진 후로 논의를 유보하자”는 소수 의견으로 정리됐다.
이후 지속가능발전위원회는 ‘기후변화협약 특별위원회’를 신설해 ‘중간단계’에 대한 후속논의를 진행할 계획을 세웠지만 특위를 맡을 적임자를 찾지 못해 무산되고 말았다.
관계부처 사이에 손발이 안 맞는 모습은 국내뿐 아니라 나라 밖 국제회의장까지 이어진다.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 참여해본 기업인이나 환경운동가들은 대표단 내부의 분위기가 냉랭하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정부대표단은 국제회의장에서도 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처별 역할 분담에 따라 맡은 업무를 수행한다. 산자부와 에너지 전문가들은 주로 실무적인 기술협상을 맡고, 외교부는 협상 전략을 총괄하며, 환경부는 수석대표인 환경부 장관을 수행하면서 장관급 회담, 대표 연설 등을 준비하고 기자단을 챙기는 것이다. 물론 서로 역할을 나누어 맡다 보니 동선과 일정이 다른 탓도 있지만 한국 정부 대표단이라는 일체감이나 팀워크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협상장에서 우리 대표끼리 싸웠다”는 일부 언론보도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각 부처 담당자들끼리 서로 소 닭 보듯 무심하거나 때때로 작은 불협화음을 내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다. 회의 기간 중 만난 정부측 인사들이 다른 부처의 활동이나 역할을 낮게 평가하는 얘기를 듣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외교부 담당자들은 다른 부처 담당자들이 국제협약에 대한 이해와 협상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산자부와 에너지전문가들은 다른 참가자들이 복잡한 협상과정에서 명분과 국가이익을 분별할 줄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환경부 측은 다른 부처가 온실가스 저감에 대해 경직된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물론 다른 나라 대표단들이라고 해서 손발이 착착 맞는 것은 아니다. 경제부처와 환경부처 사이에 접근 자세가 달라 서로 마찰을 빚는 경우는 외국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역사적인 교토의정서 산파역을 맡으면서 ‘1990년 대비 6%’라는 파격적인 감축안을 밀어붙인 자국의 환경성에 대해, 일본 정부의 경제부처 담당자가 “국익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경솔한 행동이었다”며 비판적 입장을 표현하는 모습 -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경로를 통하기는 했지만 - 이 눈에 띄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 봐도 한국정부 대표단의 분위기는 ‘한 팀’이라는 소속감이나 협동전략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결과 없는 1차 대책, 부실한 2차 대책
기후변화협약 대책을 둘러싼 환경부와 산자부 사이의 의견 차이는 때때로 환경부와 재계간의 마찰로 드러나기도 한다. 지난해 11월21일 저녁 김명자 장관 등 환경부 고위 관리들은 기후변화협약 대처 방안을 의논하기 위해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 재계 대표들을 식당에서 만났다. 참석자들에 따르면 김명자 장관이 “유럽연합, 일본 등이 온실가스를 줄이면 다음 목표는 한국이 될 것”이라고 말문을 열자, 재계 측 인사들은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니 정부는 간여하지 말라”고 합창하듯 대답했다는 전언이다. 환경부 관리들이 구체적인 목표와 수단을 제시하지 못한 채 ‘온실가스 저감 대책이 필요하다’는 원칙론만을 반복하는 동안 재계는 ‘정부의 규제나 시민단체의 반발 때문에 기업하기 어렵다’고 동문서답했다는 것.
사실 한국의 기후변화협약 대책은 앞으로도 크게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국무조정실이 일부 부처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발표한 ‘기후변화협약 대응 제2차 종합대책안’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시행될 예정. 그러나 이번 대책 역시 제1차 종합대책에서 별로 달라진 점을 찾기 어렵다. 1차 종합대책은 “관련부처가 이미 시행하고 있던 기후변화 관련 대책을 마치 새로운 대책인 양 포장해 국내외에 발표해놓고 사실상 시행과 평가는 방치하고 있다”는 호된 비판을 받은 바 있었다.
정부가 지난 3년간 시행한 1차 대책의 결과는 그리 좋은 성적표를 받기가 힘들다. 근본적으로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구조 자체를 개혁하는 방안이 빠져 있었고, 더욱이 구체적으로 온실가스를 얼마나 어떻게 줄일 것인지 역시 명시되지 않았다.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에너지 소비와 온실가스 배출량은 급증했다. 애초부터 기초 통계가 부실했던 데다 각 부처가 반발하고 나서자 각 부문별로 온실가스를 얼마나 줄일 것인지 규정하는 세부대책별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아예 설정이 불가능했고, 국무조정실 중심의 범정부 대책기구는 통합·조정 기능에 한계가 많았다. 심지어 1차 대책은 문서에 불과했지 현실에선 작동하지 않았다는 혹평도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국무조정실은 1차 종합대책의 결과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를 아예 내리지 않았다.
이에 비해 2차 종합대책은 온실가스 배출 전망치에서부터 문제가 있다. 그동안 환경단체에서는 정부의 온실가스 배출 전망이 온실가스 감축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수치라고 비판해왔다. 이 때문이었을까. 2차 종합대책에서는 아예 배출총량의 전망치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다만 초안에 제시된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2000년에 13억6900만 탄소톤이던 온실가스 배출량이 2010년엔 20억5100만 탄소톤으로 50% 가량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2001년을 기준으로 온실가스 배출량 세계 9위였던 한국은 2010년도 되기 전에 미국, 일본, 독일 등 산업국이나 중국, 인도, 러시아 등 영토가 넓은 나라들에 이어 세계 7위의 온실가스 배출국가가 된다고 정부는 전망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이 더 이상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앞세워 온실가스 감축의무를 미루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문제는 현재와 같은 부처간 갈등이 계속될 경우 이러한 전망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예상치를 갖고 있는 정부 스스로 이번 종합대책에서 획기적인 온실가스 감축노력을 반영하지 않았다.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은 등한히 하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세부대책에 들어가기 이전에 우선 온실가스를 대량 배출하는 현행 에너지 다소비 구조에 대한 근본적 개혁 청사진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구조 자체를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각 분야의 감축목표만을 제시해봐야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을 매는 식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 이를 위한 근본대책은 화석연료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현재의 체제를 재생가능에너지 위주의 저소비 체제로 전환하는 방법을 들 수 있다. 사실상 기후협상을 이끌고 있는 유럽연합이 에너지원 고갈과 기후변화 같은 에너지위기 대응을 위해 2010년까지 전력의 22%를 재생가능 에너지원으로 충당하겠다는 계획은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2차 종합대책은 교토의정서 탈퇴로 비난을 사고 있는 부시행정부와 마찬가지로 경제성장을 앞세워 사실상 온실가스 감축을 회피하려는 논리에 기초해 대응책을 수립하고 있다. 2차 종합대책에서 언급된 재생에너지 시범사업 관련내용은 일종의 장식용에 가깝다. 화력과 원자력 주축인 에너지 부문은 그대로 두고 산림, 농업, 폐기물, 하수처리, 프레온가스 등 비에너지분야의 온실가스 감축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에너지 저소비형 경제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에너지 소비는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구만 방대했지 사실상 헛돌았던 기후변화협약 대응체계도 달라지지 않았다. 1차 대책기간의 범정부대책기구와 마찬가지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고 관련부처 장관이 위원으로 참여하는 기후변화협약대책위원회, 그 밑에 국무조정실이 실무위원회와 실무조정회의를 통해 협상대책반, 에너지·산업대책반, 환경대책반, 농림대책반, 연구개발반 등 관련부처가 중심이 된 실무단위를 총괄하는 식의 기후변화협약 대응체계가 2차 대책기간에도 계속 운영된다.
이에 따라 산자부, 환경부, 외교부 등 의 입장차이와 갈등은 여전히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로 지적된 국무조정실의 통합·조정 기능 부족을 개선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지 않아 1차 대책기간의 문제가 재현될 공산이 큰 것이다. 국회 기후변화협약특별위원회, 대통령 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등 ‘훈수’를 두는 곳은 늘었지만, 정작 기후변화협약대책 관련 조직과 정책은 그대로인 셈이다.
이제는 보수적인 에너지 전문가들 역시 “온실가스 저감을 위한 조기 행동에 돌입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압력에 떠밀려 허둥지둥 온실가스 감축에 동분서주하는 것보다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만큼 기후변화 대책마련은 시급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기후변화협약 관련법안의 입법이 늦춰지고, 중간단계 등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 난항을 거듭하는 상황 역시 개선될 기미는 없다.
그나마 “지구온난화는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검증되지 않았다”며 “미국민의 복지가 우선이지 지구온난화 문제는 그 다음”이라고 한 목소리로 말하는 미국의 국무성과 에너지성, 환경청 등 관련 행정기관의 ‘일관된 일사분란함’보다는 낫다고 평가해야 할까. 아직은 멀리 남은 듯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넉넉한 시간이 아닌 2018년 이후, 미처 준비되지 못한 급격한 온실가스 감축이 한국경제에 가져올 충격에 비명을 질러댈 국민들의 원성이 누구를 향하게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