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이후 시카고대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법경제학은 오늘날 미국 법조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흐름으로 받아들여진다. 법경제학의 연구 성과가 판례에서 인용되는 경우도 잦다. 대부분의 법리는 경제적 효율성의 측면에서 해석할 때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890년 독점금지법인 셔먼법(Sherman Act)이 제정되면서부터 법경제학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초기 법경제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기업의 각종 관행에 대한 법적 규제가 바람직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후 이들의 관심은 단지 경제를 규제하는 법률을 넘어서 민법, 형법, 소송법 등 전통적인 법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됐다.
1960년대 이후 법경제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미국 시카고대학의 경제학자들이었다. 재산권의 해럴드 뎀세츠(Harold Demsetz), 불법행위법의 로널드 코즈(Ronald Coase), 그리고 형법 분야의 게리 베커(Gary Becker) 등이 그들이다. 또한 법경제학자로 현직 미국 연방법원 판사인 리처드 포스너(Richard Posner)도 시카고대 교수를 지냈다.
법경제학은 법에 대한 법조인의 생각을 바꾸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세부적인 법률 분야에는 다양한 법리들이 있다. 법경제학은 이처럼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던 법리들이 많은 부분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포스너에 따르면 모든 법리의 근저에는 부(富)의 극대화라는 논리가 자리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법리는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할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의 실현과 富의 극대화
법을 경제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법의 이념을 편협하게 해석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법이 갖는 도덕적 측면이 무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법이 추구하는 정의의 개념과 부의 극대화는 모순되지 않는다. 자원이 희소한 사회에서 자원의 낭비는 정의에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정의의 실현에도 경제적 자원이 필요하다. 자원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도 증가할 것이다.
또한 사회가 경제적 가치를 중히 여기지 않더라도 이를 따져보는 것은 합리적일 수 있다. 사회가 중시하는 가치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무엇인지를 따져봐야 합리적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든 이를 달성하는 데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제 법경제학은 미국의 법조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법경제학의 연구 성과가 판례에서 인용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우리의 법 체계는 영미법과 달리 대륙법 체계이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 성과를 우리 사회에 바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법이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는 나라에 따라 다를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법치주의가 강조되고 있는 요즈음 법에 대한 경제적 분석은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법경제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사례들이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생각해볼 것이다. 이를 통해 법경제학이 법이나 규칙 등을 이해하는 방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교차로에 신호등이 없다면 교통사고가 늘어날까?]
그렇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신호등 때문에 교통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설치된 신호등이나 차량 통행이 뜸한 새벽에 작동하는 신호등은 교통사고를 유발하기 쉽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차량 운전자라고 하자. 그리고 차량의 통행이 뜸한 새벽에 신호등이 작동하는 교차로에 접근한다고 하자. 신호등은 녹색 신호로 진행이 가능하다. 이 경우 여러분은 교차로를 바로 지나가겠는가.
이는 다른 사람들이 새벽에 신호등을 잘 지키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불편하더라도 여전히 교통신호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교통량이 많은 낮에 비해서는 신호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신호를 지키지 않더라도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낮보다는 적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호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늘 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신호등만 믿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녹색 신호등이 켜져도 많은 이들은 주변을 주의깊게 살피며 교차로를 지나갈 것이다.
보행자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보행자는 새벽에 신호등을 지키지 않고 지나치는 차량이 많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횡단보도에 녹색 신호가 켜지더라도 무작정 길을 건너지는 않을 것이다.
다수의 운전자와 보행자가 그렇게 행동하면 교차로의 신호등은 없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신호등을 믿고서 교차로를 지나갈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항상 사고를 당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사고를 당할 가능성은 낮에 비해 증가한다.
새벽에 신호등을 믿고 진행하다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대개 질서의식의 부족을 탓하게 된다. 그래서 경찰이 새벽에도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하기 쉽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보면 대단히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순찰 경찰을 늘리는 데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통행차량이나 보행자는 불필요한 시간낭비를 해야 한다. 통행량이 많을 때 신호등이 있으면 통행자들의 교차로 통과 시간이 전체적으로 줄어든다. 그러나 통행량이 적을 때는 신호등이 통과 시간을 불필요하게 증가시킨다.
그러니 차량 통행이 적은 새벽에는 신호등을 아예 꺼버리는 것이 경제적이다(또는 그저 반짝거리게만 해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게 좋다.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사고도 줄고 교차로 통과 시간도 줄어든다.
이 사례는 사회적 규칙이 항상 효율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정부가 간섭하기보다 개인들의 자발적 노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규칙을 정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입학·입사시험에서 동점이 되면 왜 나이가 적은 사람이 합격하고, 선거에서 득표수가 같으면 왜 나이가 많은 사람이 당선될까?]
경제적 효율성 때문에 그렇다. 그러한 규칙이 효율성과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입사시험부터 먼저 살펴보자.
여러분이 회사의 인사 담당자라면 어떤 사원을 채용하겠는가. 아마 우수한 응시자를 먼저 뽑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회사는 신입사원을 선발해 여러 가지 교육을 실시한다. 이러한 교육도 투자라고 할 수 있으므로 투자의 효율성이 높은 응시자를 뽑으려 할 것이다. 우수한 응시자는 교육효과가 뛰어나다. 그래서 우수한 응시자일수록 동일한 교육효과를 얻는 데 적은 투자비용이 들 것이다.
하지만 교육의 효과가 비슷하다면(시험성적이 똑같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는 투자의 회수 기간이 문제가 된다. 투자 수익은 수익이 얻어지는 기간에 비례한다. 평균 수명이 같다고 보면 나이가 적을수록 회사에 근무하는 기간이 길 것이고, 따라서 교육효과가 동일하다면 나이가 적은 응시자를 뽑을 때 투자의 이익이 증가할 것이다(하지만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회사를 그만두는 신입사원이 많아지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입학시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교육도 투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육기관의 목적에 따라 우수 학생의 기준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어떤 기준이 적용되더라도 그런 목적을 달성하는 데 비용은 적게 들고 투자 이익은 큰 방법이 채택될 것이다. 그래서 교육에 드는 비용이 비슷하다면 잔여수명이 긴, 나이 어린 학생을 선발할 것이다(요즘에는 수험생들의 나이 차이가 적어서 큰 의미가 없지만, 과거에는 수험생 간의 나이차가 많았고 그래서 이 기준은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이제 선거의 경우를 살펴보자. 선거에 의한 선출직은 대부분 임기가 정해져 있다. 선출직은 임무 수행을 통해 배우는 곳이 아니라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곳이다. 따라서 그 직책을 수행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시된다. 선거는 그러한 능력를 평가하는 것이다.
두 후보자의 득표수가 같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선출할 것인가.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경험은 가장 중요한 변수 가운데 하나다. 풍부한 경험은 임기가 정해진 선출직의 업무 수행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다. 객관적 신뢰도가 높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나이가 많은 사람을 선출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듯 관습처럼 여겨지는 규칙이 많다. 그러한 규칙을 자세히 살펴보면 경제적 효율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누가 강제하지 않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는 규칙들은 특히 그렇다. 그래서 과거부터 내려오는 규칙들을 합리적 근거 없이 무시하면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기도 한다.
강아지가 뼈다귀를 땅에 묻는 것은 본능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그러한 본능이 유전자에 각인된 것은 동물의 세계에 재산권이 없기 때문이다.
동물의 번식은 주변 환경에 먹이가 얼마나 풍부한가에 달려 있다. 언제나 마음껏 먹을 수 있다면 먹이를 저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먹이가 풍부하면 주변에 경쟁자가 많아진다. 또한 계절에 따라 먹이가 부족할 수도 있다. 따라서 사냥을 하거나 먹이가 풍부할 때 이를 저장해 부족할 때를 대비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물의 세계에는 재산권이 없다. 애써 저장한 먹이도 자신보다 힘이 센 동물에 빼앗기면 무용지물이 된다. 따라서 동물에 따라 저장하는 방법이 다양하다. 가장 많이 쓰이는 저장 방법은 먹이가 풍부할 때 몽땅 먹어치워 자신의 피하 지방에 저장하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우리도 배고픈 시절에는 배가 나온 것을 부유함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 방법을 쓰면 운동 능력이 떨어져 적에게 잡아먹힐 가능성이 많아진다. 그래서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먹이를 숨기게 된다. 흔히 표범은 사냥한 먹이를 다른 동물이 먹지 못하도록 높은 나무 위에 숨겨놓는다. 다람쥐는 자신의 서식지에 숨기고 강아지는 땅 속에 먹이를 숨겨둔다.
이러한 방법을 찾아낸 동물은 다른 동물에 비해 생존 확률이 높고, 그런 동물의 유전자는 세대를 통해 전달된다(집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방에서 장판을 파헤치는 것도 자신들의 생존을 가능케 했던 조상들의 지혜를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도 다를 바 없다. 혹독한 자연환경에 대비해 식량의 저장이 긴요할 때가 많다. 하지만 재산권이 보호되지 않으면 저장하는 것을 망설인다.
뿐만 아니라 씨앗을 뿌려 수확하는 일도 쉽지 않다. 씨를 뿌려 열매가 맺을 때까지 기다리면 더 많은 식량을 얻을 수 있음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재산권이 보호되지 않으면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누군가 빼앗아갈지 모르는 많은 식량보다는 자신의 손 안에 있는 한줌의 식량이 더 중요하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이 재산권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재산권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하고 투자를 한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재산권 침해가 자주 발생한다.
과거에는 외부의 침략으로 재산권을 침해받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국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외침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국익’ ‘공익’ ‘생존권 보장’ 등을 이유로 국가에 의한 재산권 침해 사례가 늘고 있다. 비록 재산권 침해가 불가피하더라도 이를 최소화하지 않으면 미래를 위한 투자가 희생될 것이다.
[회식에서 삼겹살을 먹으면 왜 배탈 나는 사람이 많을까?]
불판 위의 삼겹살이 공유 재산이다 보니 고기가 익기도 전에 먹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결과가 나올까.
회식 자리에서 삼겹살을 시켰다고 하자. 삼겹살은 대개 식탁 위에서 직접 굽는다.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익어갈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까. 아마도 삼겹살이 완전히 익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완전히 익힌 삼겹살이 먹기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삼겹살이 완전히 익었을 때 그것을 여러분이 먹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회식에 모인 사람들 간에 위계질서가 있다면 윗사람이 먼저 먹고 여러분은 다른 삼겹살이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또는 익어가는 삼겹살이 회식에 참여한 사람에 비해 많다면 누구나 익은 삼겹살을 먹게 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식은 동료끼리 이뤄진다. 그리고 익어가는 삼겹살에 비해 참여하는 사람이 많은 게 현실이다. 익은 삼겹살을 다른 사람이 먼저 먹으면 여러분은 아마 다른 삼겹살이 익을 때까지 다시 기다릴 것이다. 그렇더라도 여러분이 그것을 먹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여러분은 생각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삼겹살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삼겹살이 완전히 익기 직전에 먹는 게 낫겠다’고.
그렇지만 이것도 성공하긴 어렵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아마 모두가 삼겹살이 약간 노릇노릇해져서 먹는 데 불편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먹어버릴 것이다. 그처럼 덜 익은 삼겹살을 먹게 되면 배탈 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적으로 보면 모두가 삼겹살이 잘 익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먹는 게 바람직하다. 하지만 불판 위의 삼겹살에 소유권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그렇게 하진 않는다. 주인이 없는 자원은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다. 그래서 비효율적인 결과가 초래된다. 이러한 현상을 ‘공유의 비극’이라고 한다.
주인이 없기 때문에 비효율적인 자원 배분이 야기되는 것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 개인의 탐욕을 비난하곤 한다. 하지만 개인의 탐욕을 줄이려는 노력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성공하기도 어렵다. 또한 개인의 탐욕과, 환경에 적응하려는 개인의 노력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개인의 탐욕을 줄이려는 노력보다는 그러한 개인의 노력이 바람직한 결과를 낳도록 ‘주인’을 정해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교수가 실수로 답을 잘못 알려준 문제가 취업시험에 나왔다. 그 문제에 잘못 답한 학생이 시험에서 떨어졌다. 그 학생은 교수에게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을까?]
잘못 가르친 교수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다면 잘못 가르칠 가능성은 줄어든다. 하지만 유익한 교수행위 또한 동시에 줄게 된다.
경제적으로 보면 손해배상은 사회적 낭비를 가져다준 행위를 줄이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해배상을 하게 되면 교수가 잘못 가르칠 가능성도 낮아지지만, 동시에 유익한 교수 행위도 줄게 된다.
교수가 잘못 가르쳤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을 하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교수는 강의를 보다 신중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강의를 할 때 잘못 가르치는 경우가 줄어들 것이다. 이것은 손해배상을 하도록 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부작용도 나타날 것이다. 교수는 100% 확실한 내용만 가르치려 할 것이고, 그래서 ‘100% 진실’을 장담할 수 없는 강의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의 경제정책을 가르치는 과목은 대학 강단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지 모른다. 경제정책을 잘못 가르치면 막대한 피해가 발생할 것이고 교수는 손해배상이 두려워 경제정책을 아예 가르치지 않으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은 진실만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손해배상 책임을 묻지 않으면 잘못된 지식이 대학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할 수도 있다. 일리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그러한 교수의 과목을 수강하지 않게 된다. 대학도 그러한 교수의 승진을 허용하지 않거나 급여를 줄일 것이다. 그래서 손해배상 책임을 묻지 않더라도 교수는 스스로 잘못을 줄여나가고자 노력할 것이다.
이처럼 유익한 경제활동의 부산물로 개인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그럴 때 흔히 피해를 본 개인에게 당연히 손해배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손해배상은 개인의 피해만 줄이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유익한 경제활동도 줄이게 된다.
따라서 손해배상 여부를 정할 때는 경제 전체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더욱이 개인의 노력에 의해 피해를 적은 비용으로 줄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때 피해를 당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을 허용하면 개인의 도덕적 해이가 커지고 그 결과 피해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어린이가 물에 빠졌다. 그런데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변에 수영선수가 있었다. 이 수영선수를 처벌해야 할까?]
법률적으로는 수영선수의 이러한 행위를 ‘부작위’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법은 사회적으로 해를 주는 특정한 행위에 대해 처벌을 한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특정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처벌하기도 한다. 특정행위를 하지 않아 사회적 피해가 발생할 때 그렇게 한다. 가령 추운 겨울에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이 만취해 쓰러졌다고 하자. 포장마차 주인이 이를 보고서도 방치한 채 집으로 갔다면 포장마차 주인은 부작위범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앞의 수영선수도 물에 빠진 아이를 구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작위로 처벌해야 한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리’에 따르면 수영선수는 처벌받지 않는다.
부작위의 처벌 목적은 위험에 빠진 사람에 대한 구조활동을 증가시키려는 것이다. 처벌을 해도 구조활동이 증가하지 않는다면 처벌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수영선수에 대한 처벌 여부는 처벌을 통해 구조활동이 증가할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위험에 빠진 어린이를 구조하지 않은 수영선수를 처벌하면 수영선수에 의한 구조활동이 증가할까? 증가한다면 처벌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지 않다(앞의 경우처럼 포장마차 주인에 대한 처벌은 만취한 손님에 대한 구조활동을 확실히 증가시킨다).
여러분이 수영선수라고 하자. 여러분은 누군가 물에 빠졌을 때 이를 구조하지 않으면 처벌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까. 아마 대다수 수영선수는 여전히 물가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아예 물 근처를 피하는 수영선수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가 물에 빠졌을 때 수영선수가 그 근처에 있을 확률은 낮아진다.
더욱이 법적 강제로 타인을 구조하도록 하면 수영선수가 아닌 다른 사람의 구조활동은 줄어든다. 그들은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수영선수가 아이를 구하기를 기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벌을 하더라도 구조활동이 늘어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주변 사람의 무관심으로 피해자가 구조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누구나 시민의식의 부족을 탓한다. 옳은 지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의식 부족이 강제적인 법이나 정부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데서 비롯된 점은 없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을 법적 강제에 의지하게 되면 이타적인 행동은 줄어들게 된다. 우리 스스로의 자율성과 책임을 키워나가는 것이 시민의식의 성장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거절하는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구매한다는 뜻으로 알겠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답장을 보내지 않았더니 물건을 보내왔다. 나는 물건값을 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계약은 청약에 대한 승낙이 있어야 성립한다. 그런데 침묵은 승낙의 표시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계약이 성립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물건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특수한 경우엔 침묵이 승낙의 표시로 여겨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거절하는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무료로 제주도 여행권을 보내주겠다’는 이메일을 받았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는 답장을 보내지 않더라도 승낙의 표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계약에 따른 거래비용 때문이다.
먼저 침묵이 승낙의 표시로 여겨지지 않는 일반적인 경우를 살펴보자.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계약에는 두 통의 편지가 필요하다. 청약의 편지와 승낙의 편지다. 청약의 편지를 받고 승낙의 편지를 발송하면 계약이 성립한다. 청약을 거절하고 싶으면 답장을 하지 않으면 된다. 즉 계약의 거절에는 청약의 편지 한 통만이 필요하다.
이에 비해 침묵이 승낙으로 여겨지는 계약의 성립에는 한 통의 편지만 필요하다. 청약에 대해 답장을 하지 않으면 계약이 성립한다. 그리고 청약의 거절에는 두 통의 편지가 필요하다. 청약의 편지와 거절의 편지다.
승낙의 비율이 높을 때 침묵을 승낙의 표시로 여긴다면 우편 비용이 줄어든다. 예컨대 제주도 무료 여행권처럼 거의 100%의 사람들이 청약에 대해 승낙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자. 이때 침묵을 승낙으로 여기지 않게 되면 모든 사람이 승낙의 편지를 보내야 할 것이다. 그것보다 승낙을 하지 않을 사람만 편지를 보내도록 하면 계약에 따른 비용이 훨씬 줄어든다.
반면에 물건을 구매하라는 청약의 경우를 보자. 그때에는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거절을 할 것이다. 그래서 침묵을 승낙의 의사표시로 여기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이 거절의 편지를 보내야 한다. 그래서 계약에 따른 비용이 커지게 된다.
결국 승낙의 비율에 대한 예상에 따라 규칙을 달리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즉 승낙의 비율이 낮을 것으로 예상되면 침묵을 승낙으로 여기지 않고, 승낙의 비율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면 침묵을 승낙으로 허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경우에 이를 적용하기는 힘들다. 사전에 승낙의 비율이 얼마나 될 것인지를 예상하는 데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또한 침묵이 승낙으로 허용될 것인가의 여부가 불확실하면 비용이 증가할 수 있다. 가령 거절의 편지를 보내지 않으면 승낙의 표시로 여긴다는 편지를 받았다고 하자. 이러한 계약을 법원이 허용할 것으로 확실시되면 청약을 거절하는 사람만 편지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약을 법원이 허용할 것인지가 불확실하면 청약을 수락하려는 사람도 편지를 보내게 된다. 법원이 이를 허용하지 않으면 승낙의 기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승낙이 있어야 계약이 성립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이 승낙할 것으로 틀림없이 예상되는 예외적인 경우에 한하여 침묵을 승낙으로 허용함으로써 계약에 따른 비용을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폭력을 통해 사회를 바꿀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책으로 발간됐다. 이 책의 저자를 선동혐의로 처벌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저자는 폭력을 행사하여 사회를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단지 그런 생각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저자의 주장은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이로 인해 폭력이라는 불법행위가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불법을 유인한 혐의로 저자를 처벌해야 폭력의 유발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저자를 처벌하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부정적 효과가 발생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경우에 흔히 적용될 수 있는 법리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이라는 기준이다. 즉 표현의 자유에 속하더라도 그로 인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초래될 것으로 예상되면 처벌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이 야기할 위험은 폭력이 유발될 확률과 그로 인한 사회적 피해의 크기를 곱한 것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란 폭력이 유발될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데 따르는 위험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따르는 비용보다 클 것으로 예상된다. 즉 저자의 주장이 초래할 위험이 상당하여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따른 비용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처벌에 따른 이익과 비용을 비교한다는 것은 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원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때 흔히 사회적 여건을 중시한다. 사회가 안정돼 있으면 누군가 폭력을 주장하더라도 이에 동조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다. 그럴 경우 저자의 주장이 초래할 위험도 작다. 반면 사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회가 안정돼 갈수록 표현의 자유에 대한 허용의 범위가 확대돼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비록 폭력을 옹호하는 표현이라 해도 그러한 주장이 학술적 모임에서 발표되면 처벌의 가능성이 낮다. 학술적 모임의 경우 충분한 토론의 기회가 제공되어 그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이 제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비록 폭력을 주장하더라도 실제로 폭력이 초래될 가능성은 줄어든다. 이에 비해 반론의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 대중 집회에서 폭력으로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면 선동혐의로 처벌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표현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를 억압받았다고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가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자유는 헌법적 질서하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폭력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록 사상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에 속하더라도 그것이 초래할 위험의 가능성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법경제학에 관심을
법은 명시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경제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법에 대한 분석은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특히 법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신중히 고려하지 않고 국민들의 정서에서 비롯된 법률이 제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법률은 법이 원래 보호하고자 의도했던 집단의 이익을 해칠 수 있으며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우리 사회에도 법치주의가 자리를 잡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 점에서 우리 사회도 법경제학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물론 한국법경제학회 등에서 법조인과 경제학자, 그리고 사회과학 연구자들의 학제간 연구가 이뤄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 법률을 대상으로 한 연구 성과는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 형편이다. 법률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법경제학에 대한 투자와 비례하여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법경제학을 현실 법률에 적용하는 데 있어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법관이 법을 경제적으로 해석해서 판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정보 비용 때문이다. 시장의 실패가 정부의 개입을 항상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 비용이 크면 정부의 개입은 시장의 실패보다 비효율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법관이 경제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나 빈약한 정보를 가지고 법률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다 보면 원래의 의도와 다르게 더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독점금지법에 대한 미국의 판례들이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모든 사람이 흡족해하는 개혁적인 법률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불완전하지만 예측 가능한 법률이 더 나을 수 있다. 예측이 가능하면 개인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불완전한 부분을 피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이 개인의 자율과 책임에 기초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