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경제중심’ 간판 내린 동북아위원회

집권 초 구상으로 유턴 과적운행이냐 쾌속질주냐

  • 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4-08-25 18: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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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중심’은 선거용, ‘마담뚜論’ 내세워
    • 한국판 ‘슈망 플랜’ 구상 구체화할 듯
    • 중국 · 일본 제치고 ‘러시아 카드’ 급부상
    • 노 대통령 방문 맞춰 러시아에서 ‘열린음악회’
    • 포스트 치앙마이 구상 등 구체화 가능성도
    • 동북아 철도 협력 방안 ‘개봉박두’
    ‘경제중심’ 간판 내린 동북아위원회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8월13일 동북아시대위원회(이하 동북아위) 민간위원 13명에게 위촉장을 수여했다. 노 대통령이 내세웠던 12대 국정과제 중 최우선 과제였던 동북아경제중심 국가 건설이라는 ‘간판’이 내려지고 ‘동북아시대’라는 이름으로 ‘2기 위원회’가 출범한 것이다.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강조하고 애착을 보여온 ‘동북아경제중심’이라는 ‘브랜드’를 거둬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동북아위는 이에 대해 ‘단계적 접근법’에서 ‘동시병행 접근법’으로 바뀐 것이라고 설명한다. 애초 참여정부 출범 당시에는 경제번영을 먼저 이룩한 뒤 동북아 평화 구축으로 이행하는 단계적 접근이라는 로드맵을 그렸지만, 북핵문제의 해결이 지연되면서 ‘선번영-후평화’ 전략에 차질이 생겨 평화와 번영을 동시에 진행하는 ‘병행 전략’으로 방향을 수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 이유만으로 ‘동북아경제중심’이라는 구호의 폐기를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우선 동북아위의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대통령이 ‘동북아경제중심’ 구상을 들고 나온 2002년 말~2003년 초는 북핵 문제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이었다. 핵동결 해체를 선언한 북한이 폐연료봉 저장 시설의 봉인을 제거하고 연료봉을 재장전하는 등 북핵 문제를 둘러싼 긴장은 날로 고조됐고, 2003년 들어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한반도는 최악의 긴장국면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최악의 순간에 꺼내든 어젠더가 ‘동북아경제중심 국가 건설’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비하면 북핵 6자회담이 세 차례나 열리고 북한의 수용을 전제로 한 5단계 해법까지 제시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핵문제 해결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핵문제 해결 지연 때문에 (더 기다릴 수 없어) 경제허브 전략과 평화공동체 전략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동북아위측의 ‘명분’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이하 동북아경제위)는 지난 4월 이후 사실상 활동 중단 상태에 있었다. 배순훈 위원장 경질이 결정된 것은 이보다 훨씬 전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동북아위 핵심 관계자 역시 “위원장을 교체해야겠다는 노 대통령의 구상에 대해 3개월이나 반대했다”고 말해 이런 관측을 뒷받침했다.



    이 관계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노 대통령은 동북아경제위가 출범한 지 10개월여 만에 이미 위원회 개편 결심을 굳혔다는 얘기다.

    ‘목표’는 없애고 ‘방법론’만

    우선 주목할 것은 동북아시대위원회를 나타내는 영문 명칭부터 1기때와 다르다는 점이다.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당시 위원회의 영문 명칭은 ‘Presidential Commitee on Northeast Asian Business Hub’ 였다. 그러나 동북아시대위원회로 바뀌면서 위원회의 영문 명칭도 ‘Presidential Commitee on Northeast Asian Cooperation Initiative’ 로 바뀌었다. 영문 명칭이 의미하듯 우리 스스로 무엇이 되겠다는 지향을 없앤 채 역내 협력(cooperation)에 대한 구상만을 언급한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국정과제 위원회처럼 ‘국가균형발전’ ‘지방분권·정부혁신’ ‘빈부격차·차별 시정’과 같은 구체적 목표는 빠지고 방법론만 담긴 셈이다.

    정작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를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좀더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참여정부 초기에 내세웠던 ‘경제중심국가’ 또는 ‘경제중심’이라는 구호가 중국 일본 등 주변국의 불만을 사온 데다 패권주의적 냄새를 풍긴다는 지적은 이미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그러나 유독 역내 협력을 강조한 것은 중국과 일본의 패권적 틈바구니 안에서 우리가 교량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중국과 일본 사이의 잠재적인 적대감과 경쟁의식을 감안할 때 두 나라 중 어느 한쪽이 주도하는 역내 협력에 대해서는 상대국이 거부감을 가질 수 있으므로 그 중간자 역할을 우리가 떠맡자는 것(안충영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의 설명)이다. 팽창주의나 패권의식으로 무장하지 않은 한국이 나선다면 두 나라 모두 별다른 거부감을 갖지 않을 논리다. 굳이 비유하자면 것이란 ‘약소국중재론’ 또는 ‘마담뚜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동북아위는 이런 구상을 처음부터 드러내지 않고 굳이 먼 길을 돌아왔을까. 1기 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애초 노 대통령의 구상은 동북아공동체라는 정치 외교적 틀을 만드는데 우리가 대외적 이니셔티브를 쥐자는 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선 직전 아무래도 경제이슈가 중요하다 보니 동북아와 경제를 접목해 ‘동북아경제중심’이라는 어젠더를 만들어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TV토론 등에서 ‘7% 경제성장론’을 주장하면서 ‘7%’를 달성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로 동북아 특수(特需)를 거론했다.

    그러나 동북아위 관계자는 “동북아시대위원회로 명칭을 바꾼다고 해서 금융허브, 물류중심지 건설, 외국인투자 유치라는 위원회의 과제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해 본질적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의 동북아 구상이 ‘경제’쪽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외교안보’쪽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사실은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동북아위원회측도 노 대통령의 동북아 협력 구상이 2차 세계대전 직후 서유럽의 ‘슈망 플랜(Schuman Plan)’을 원용한 것이라고 밝혀 이런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동북아경제중심 추진의 비전과 과제’, 국정홍보처 펴냄). ‘슈망 플랜’은 1950년 프랑스 외무장관 슈망이 구상했던 독일과 프랑스의 석탄·철강 공동관리계획이다. 당시 중요한 전쟁물자였던 철강과 석탄을 과거 적대국이었던 독일과 프랑스가 공동관리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구상은 주변국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결국 슈망의 구상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조약으로 이어졌고 이는 오늘날 유럽연합(EU)을 탄생시킨 모태가 되었다.

    이쯤 되면 노 대통령이 동북아위를 통해 이루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내친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 훌륭한 지도자상으로 아데나워 전 독일 수상을 꼽은 적이 있다. 패전국 독일 수상으로서 수백 년 동안 적대관계에 있던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유럽통합의 토대를 마련한 아데나워 수상이야말로 노 대통령이 동북아 구상을 통해 구현해보고자 하는 정치인상이라는 말이다. 동방정책을 통해 동독의 문을 연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수상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역할 모델이었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아데나워 전 수상을 역할 모델로 삼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동북아경제위 출범 당시 노 대통령의 이러한 구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위원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일부 위원은 “위원회 내에서 뚜렷한 역할을 찾기 힘들었다”고 실토하했다. 한 인사는 “정부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지 학습하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지난 1년여 동안 1기 위원회 활동을 놓고 내부에서도 불만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도 ‘동북아경제중심’이라는 정확한 개념에 대해 위원들 사이에서도 공감대가 이뤄져 있지 않다보니 공허한 토론이 거듭될 수밖에 없었던 데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 등과의 업무 중복 문제로 적지 않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특히 동북아경제위가 동북아경제중심론의 핵심으로 설정했던 산업 클러스터(cluster) 구축 과제가 업무 중복 논란 끝에 균형발전위로 넘기는 것으로 결정됨으로써 ‘1년 동안 헛고생한 것 아니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민간위원 중에도 위원회의 목표와 관련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1기 동북아위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노 대통령의 후보 시절 구상을 기조실에서 그대로 밀고가는 데 민간위원들이 손님처럼 참여하는 격”이었다고 전했다. 이 인사는 “한 달에 두 번 열리는 조찬회의에서 1시간여 토론하는 게 전부인 위원회에서 민간 전문가의 의견이 반영될 여지는 거의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 지방대 교수 출신의 한 민간위원은 “서울에서 조찬모임 형식으로 열리는 위원회에 지방대 교수가 어떻게 참여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위원 구성 단계에서부터 심도 있는 논의를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배순훈 “유감이다”

    위원회의 성격과 관련해 논란이 이어지면서 정작 모양이 우습게 된 사람은 배순훈 전 위원장이다. 배 전 위원장은 대우전자 사장과 정보통신부 장관을 거친 기업인 출신으로 동북아경제위 위원장에 내정돼 ‘의외의 인사’였다는 평가를 들은 바 있다. 노 대통령은 ‘동북아위원장만큼은 교수 출신보다는 기업인 출신이 맡는 것이 좋겠다’는 구상을 밝혔고 위원회는 이에 따라 20여명의 기업인을 검토한 끝에 결국 배 위원장을 낙점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배 위원장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들어온 모양이 돼버렸다. 이에 대한 배 전 위원장의 생각을 듣기 위해 ‘신동아’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머물고 있는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다음은 배 전 위원장이 보내온 답변 내용 중 일부이다.

    - 동북아경제위의 활동 성과는.

    “동북아경제위는 한국이 동북아의 경제중심이 되기 위해 규제완화(Deregulation), 민영화(Privatization), 자유화(Liberalization)라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3가지 원칙에 충실한 경제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데 주력해 왔다. 중국 및 일본과 협력하기 위해서는 세계 질서에 충실한 경제 체제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 동북아경제위에서 물류, 금융, 산업 클러스터, 남북경협 등 너무 많은 현안을 다루다 보니 위원들 사이에서도 ‘동북아경제중심론’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지적이 있는데.

    “동북아경제위의 5개 전문위원회는 위원회 출범 이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던 노 대통령의 구상이다.”

    - 위원회의 위상에 대해서도 자문기구냐 의결기구냐, 또는 집행까지 떠맡는 집행기구냐 등으로 서로 견해를 달리했다. 위원회의 위상과 관련한 혼란은 없었나?

    “위원장을 비롯한 민간위원들은 비상근이기 때문에 대통령 자문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동북아경제위는 방향 설정을 추진하는 것이지 경제중심을 건설하는 집행기구는 아니었다.”

    ‘경제중심’ 간판 내린 동북아위원회

    동북아시대위원장으로 새로 위촉된 연세대 문정인 교수는 취임하자마자 동북아 평화 및 군축 구상을 쏟아놓고 있다.

    - 기조실이 독주했다는 지적도 있고 민간위원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위원회 운영이 미숙했던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기조실은 대통령 비서실의 일부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기조실이 마련한 안건을 놓고 비상근 민간위원들이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으로밖에 운영할 수 없었다.”

    - 지난 1년여간 위원장으로서 느낀 점은?

    “아일랜드가 18년 걸려 이룬 경제중심을 현재 상황에서 한국이 주변국과의 경쟁을 통해 추진하고자 한다면 그보다 휠씬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북아경제중심위를 1년 만에 개편한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물론 배 전 위원장의 경질과 관련해서는 다른 시각도 있다. “배 위원장이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온 데다 귀족적 스타일이라서 노 대통령과는 맞지 않았다”(청와대 관계자)거나 “지나치게 소극적 리더십으로 일관해 대통령의 눈밖에 난 것 같다”(동북아위 민간위원)는 지적이 그것이다. 배 전 위원장이 노 대통령의 동북아 구상 전반을 이해하지 못한 채 CDMA사업과 같은 ‘한 건’만을 의식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러나 전임 배순훈 위원장에 비해 새로 취임한 문정인 위원장은 임명장을 받은 직후부터 활발한 대외 행보를 보이며 동북아 구상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문 위원장이 취임 이후 밝힌 구상만 해도 동북아 평화포럼, 동북아 평화군축센터 건설, ‘제주 평화의 섬’ 구상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문 위원장은 한걸음 더 나아가 유엔군축위원회를 제주도에 유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계획도 밝힌 바 있다.

    또 1기 동북아위에서 논의해온 물류중심지·금융허브 구축 방안, 외국인 투자 유치 방안 이외에도 최근 동북아위에서는 굵직굵직한 ‘프로젝트형’ 사업을 입에 올리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동북아위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동북아에는 쓸 곳을 못 찾고 떠도는 돈이 많다. 중국의 동북3성, 러시아 연해주, 북한 개발 등을 연계시키면 이 자본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동북3성에 있는 낙후된 중화학공업 설비나 발전소를 사들여 우리가 관리하면서 수익성을 높여 되파는 방법도 있고 우리의 구조조정 경험을 살려 부실채권 규모가 엄청난 중국 구조조정 시장 진출을 가속화할 수도 있다. 할일은 얼마든지 있다.”

    또다른 동북아위 관계자는 “동북아 주변 국가들을 공동의 이해 관계로 엮을 수 있는 사업을 발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동북아위 주변에서는 최근 러시아에 초점을 맞추는 듯한 발언을 자주 들을 수 있다.

    물론 한중일 3국의 경제협력을 통한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이라는 동북아위의 당초 구상을 감안하면 러시아는 1순위 협력 파트너가 아니다. 그러나 국제 유가가 치솟으면서 대체 에너지원으로서 러시아의 주가가 덩달아 치솟고 있는 데다 한국과 에너지 협력을 원하는 러시아 쪽의 러브콜도 꽤나 집요한 편이어서 러시아에 대한 관심은 이래저래 높아지고 있다.

    러시아 협력 구상

    게다가 한중간 협력사업의 경우 당분간 고구려사 왜곡 문제의 덫에 걸려 진전을 보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일본과도 사정은 비슷하다. 현재 정부 차원에서 협상이 진행중인 자유무역협정(FTA) 이외에는 동북아 구상의 내용을 채울 만한 대형 프로젝트가 마땅치 않다. 일본측에서는 부산 또는 거제도에서 출발해 대마도를 거쳐 규슈(九州)에 이르는 200여km의 해저터널 프로젝트를 다시 꺼내들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이미 교통개발연구원(KOTI) 등 국책연구기관에서 ‘경제성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놓은 터라 우리가 나서 재론하기는 쉽지 않은 실정이다.

    특히 지난해 계획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일정이 몇 차례 연기된 끝에 9월중 다시 추진될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를 계기로 노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에너지·철도 협력을 통해 동북아 구상의 일부를 열어보일 것이라는 관측이 일고 있다.

    동북아위 관계자는 “시나리오는 여러 가지다. 러시아의 에너지를 우리가 사주는 대가로 북한 철도 현대화 사업에 러시아의 협조를 구하는 방법도 있다. 열쇠는 우리가 쥐고 있는 만큼 얼마든지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해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6월말 사할린 주지사와 러시아 산업에너지부 고위 관계자 일행이 동북아위를 방문한 자리에서 문정인 위원장과 정태인 기조실장을 만나 에너지 협력을 논의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러시아와의 협력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동북아위의 몇 가지 아이디어는 실제로 노 대통령의 이번 러시아 방문 과정에 실현될 예정이다. 노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기간중 현지에서 ‘KBS 열린음악회’를 열고 한·러 경협에 관한 공동 세미나를 개최하는 방안 등이 이미 초읽기 단계에 들어갔다.

    노무현 대통령은 러시아를 포함하는 철도 연결 프로젝트에 강한 집념을 보인 바 있다.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 한반도종단철도(TKR) 및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개발 운영을 위한 다국적 유라시아철도공사를 설립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물론 이 계획은 국가간 관할권 문제 등이 정리되지 않아 실현 가능성이 작은 것으로 드러나기는 했지만 노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철도 협력과 관련해 어떤 카드를 내놓을지에 여전히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동북아위의 한 관계자도 “현재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동북아 지역의 에너지 협력이지만 진척도가 빠른 것은 철도 연결 분야이다. 철도 연결과 관련해 머지 않아 중요한 발표가 나올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아세안+3’을 주목하라

    또한 외교가에서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3(한중일)이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에서 노 대통령이 동북아 구상과 관련한 모종의 ‘카드’를 내놓을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특히 아세안(ASEAN)+3(한중일) 정상회의에서 제시된 동아시아비전그룹(EAVG)과 동아시아연구그룹(EASG) 등이 모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작품’으로 아세안을 낀 한중일 협력구도에서는 한국이 일종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셈이기 때문에 이런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예를 들어 동북아 역내 금융협력과 관련해 포스트 치앙마이 구상이 한국을 중심으로 구체화할 가능성도 있다. 포스트 치앙마이 구상이란 지난 2000년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아세안(ASEAN)+한중일 재무장관 회담에서 합의한 아시아 역내국가간 통화스와프(swap) 협정, 즉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의 후속작업을 말한다.

    지난 1997년 비슷한 시기에 통화위기를 경험한 아시아 각국은 유사 사태가 발생할 경우 상호 유동성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를 맺은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을 실천하기 위한 정책감시기구가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을 뿐 중국과 일본의 신경전으로 인해 아직까지 이 기구를 어떤 형태로 어디에 두어야 할지에는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시아 통화협력의 사무국 역할을 하게 될 이 기구는 아시아 외환위기 직후 일본 주도로 추진되다가 미국 등의 반대로 인해 좌절된 아시아통화기금(AMF) 구상과 관련해서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동북아위의 한 민간위원은 “각국의 환율이나 거시 동향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사무국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놓고 중국과 일본이 치열한 물밑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중재자 역할을 맡아 제3지대로 한국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2기 동북아위 민간위원들에게 위촉장을 준 자리에서도 일부 위원이 포스트 치앙마이 구상을 언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메뉴의 종류만 많다고 해서 식당에 손님이 들어차지는 않는 법. 앞으로 동북아위가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도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다. 우선 각 부처간 참여와 협력을 어떻게 끌어낼 것이냐는 문제가 남는다. 동북아위 출범 당시부터 이미 위원회와 재경부 사이에는 위원회의 위상을 놓고 신경전과 줄다리기가 끊이질 않았었다.

    동북아위의 ‘지적재산권’을 갖고 있는 노 대통령 핵심 측근들은 산업 클러스터 구축을 강조했고 금융 허브론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재경부측은 금융허브와 물류중심지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뿐 클러스터 구상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다. 본래 금융허브와 물류 중심지 구축은 재경부가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추진해오던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구상의 핵심이었다.

    ‘미니 내각’수준까지

    이러다 보니 동북아위의 구상이 구체화할수록 사업추진 주체를 놓고 미묘한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동북아경제위에서 물류 중심지 구축을 위한 물류정책추진기획단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단장을 위원회 쪽에서 맡을 것인지 정부 쪽에서 맡을 것인지를 놓고 갑론을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치열한 논란 끝에 ‘단장을 해양수산부가 건교부측에 넘겨줄 경우 동북아경제위는 바지저고리가 된다’는 위기의식이 먹혀들면서 청와대가 동북아위측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각 부처의 행정력까지 장악한 동북아위의 ‘파워’가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소극적으로 일한다면 순수한 대통령 자문에 그칠 수도 있고 적극적으로 일한다면 장관도 갈아치울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것이 동북아위’라는 말도 나온다. 한 민간위원은 “결국 물류, 외자유치, 남북협력 등 각 분야를 책임지고 있는 전문위원장들의 리더십에 달린 일”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경제부처 공무원들만 파견근무하던 동북아경제위 당시와는 달리 현재 동북아시대위원회에는 외교부 통일부 문화관광부 공무원까지 합류해 조직이 비대해졌다. 위원회 산하 전문위원회도 5개에서 7개로 늘어났다. ‘미니 내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소관 업무의 폭이 확대된 것이다. 당연히 각 부처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물밑 신경전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으로는 고구려사 왜곡 문제나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등이 발목을 잡을 가능성도 크다.

    고구려사 문제에 대해 문정인 위원장이 “고구려사 문제의 출발점인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중앙정부 차원의 프로젝트라기보다 지린성(吉林省) 등 동북3성 지방정부의 관광사업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자마자 중국 일부 언론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승인과 비준 아래 동북공정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동북아위가 걱정하는 것은 국가균형발전위원회나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등과 달리 국민들 앞에 가시적으로 내놓을 만한 ‘물건’이 없다는 점이다. 동북아위 업무의 대부분이 중장기 전략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동북아위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위원회의 성격상 중국이나 일본 등 주변국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대부분이어서 당장 가시적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고 호소하고 있다. ‘동북아 구상을 대통령 프로젝트라는 식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주문도 덧붙인다.

    또다른 관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동북아 구상을 꺼낸 만큼 임기중 뭔가 실적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임기 중 작은 것 한두 가지만 성공하면 된다. 일단 기업들이 ‘되는 사업’이라고 확신을 갖게 되면 현재 내수나 국내투자 부진 문제도 한꺼번에 뚫을 수 있다”고 답변했다. 흡사 지난 2000년 총선 직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중동 특수(特需)를 능가하는 대규모 북한 특수가 있을 것’이라던 발언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김 전 대통령이 언급했던 ‘대규모 북한 특수’는 결국 그 해 6월 남북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중소기업에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투자 기회가 열릴 것’이라던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은 결국 ‘애드벌룬’이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정말 이 관계자의 지적대로 ‘작은 것 한두 가지’가 아닐까. ‘작은 것 한두 가지’에 최대한 선택과 집중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동북아위의 무성한 아이디어가 이벤트성 ‘제안’이나 그럴듯한 ‘구상’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1년6개월 만에 노 대통령의 애초 구상으로 유턴한 동북아위가 적재용량을 초과해 짐을 실은 과적차량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과적차량을 단속하는 이유는 사고 위험 때문만은 아니다. 도로 파손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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