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대를 이어 증거를 모으고 사건을 복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의 이탈리아 토스카나, 전쟁의 광기 속에서 벌어진 참혹한 민간인 집단학살은 그렇게 긴 시간의 터널을 넘었다. 26세의 청년 나치 장교가 백발의 91세 할아버지가 되어 받은 심판이었다.
8월11일 독일 뮌헨 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요제프 쇼잉그라버 전 나치 독일군 소위.
그를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지역 주민들은 피고석에 앉은 그의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다. 뮌헨 인근 오토브룬에서 가구점을 운영하며 성실하게 살아왔다. 20년 동안 지역 의회에서 활동했고 오랫동안 자치소방대장으로 봉사했다. 2005년에는 지역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지역 의회로부터 시민메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인을 바라보는 방청객의 시선은 싸늘했다. 법원 앞에서는 연일 노인의 유죄를 주장하는 피켓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이 무력한 노인은 얼마나 큰 죄를 지은 것일까.
판사가 판결문을 읽기 시작하자 법정에는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1944년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한 마을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혐의를 인정해 피고에게 종신형을 선고합니다.”
눈을 감은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방청석에선 박수가 터져 나왔다. 희생자 가족들은 주저앉아 기쁨과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전 나치 장교 요제프 쇼잉그라버(91)는 65년 만에 역사의 단죄를 받았다. 그가 26세 젊은 나이에 저지른 일이었다. ‘유죄’라는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또 아들로 대를 이어온 가족들의 기나긴 싸움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고 AP통신과 슈피겔 등 언론은 상세하게 보도했다.
학살의 기억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6월. 전쟁과는 무관하게 평온하던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팔자노 디 코르토나’는 한순간에 피로 붉게 물들었다. 독일군이 병사 2명이 숨진 데 대한 앙갚음으로 마을 주민들에게 무차별 보복을 벌인 것.
상황은 이렇다. 쇼잉그라버 소위는 토스카나 주둔 독일 818산악공병대대의 소대장이었다. 부대의 주요 임무는 연합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도로와 교량을 파괴하거나 이탈리아에서 퇴각하려던 독일군의 퇴로를 복구하는 것. 6월26일 그는 부하 3명을 인근 마을로 보내 수레와 말, 식량을 징발토록 했는데 이들이 이동 중 계곡에서 빨치산의 공격을 받고 2명이 숨졌다. 분노한 쇼잉그라버는 사단에 보고하고‘잔혹행위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보복은 신속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현장 주변을 수색해 의심스러운 자들을 체포하고 불응하면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부하들은 거리에서 74세의 노파를 붙잡아 ‘빨치산을 숨겨줬다’며 총살한 뒤 집을 불태웠다. 다음 날인 27일 아침 남성 3명을 역시 같은 이유로 살해했다. 빨치산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어 마을을 샅샅이 뒤져 남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10대 소년에서 60대 노인까지 나이에 관계없이 끌려 나왔다. 독일군은 체포한 남성 11명을 인근 농가에 몰아넣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죽은 동료들 장례식을 치른 독일 병사들은 이른 오후에 보복을 결행했다. 하나하나 죽이는 것도 귀찮았던 것일까. 그들은 다이너마이트로 집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방식을 택했다. 몇 명은 폭발 직후 즉사했지만 잔해더미 속에서는 몇 분 동안 고통스러운 비명과 신음이 새어 나왔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애원했지만, 독일 병사들은 잿더미 위에 총을 난사하며 확인 사살했다.
이 지옥 같은 현장에서 당시 15세 소년이던 지노 마세티(80)씨는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폭발과 함께 대들보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두 명이 쓰러지면서 그의 몸을 덮었다. 덕분에 파편과 총알이 빗발치는 속에서도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 온몸에 화상을 입고 생사의 기로를 헤매던 그는 6시간 만에 이웃주민에게 발견됐다. 기적이었다.
하지만 홀로 살아남은 것은 고통이었다. 마세티씨는 훗날 “괴로운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라며 “차라리 그때 나도 죽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학살은 마을 사람들의 삶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가족을 잃은 아픔과 분노, 이웃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끔찍한 기억에서 벗어나려 사람들은 하나 둘씩 마을을 떠나갔다.
이제 마을에는 단 여섯 가구만 남았다. 아버지와 오빠를 잃은 젤라시아 트라세니씨는 “짐승 같은 삶을 살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가장을 잃고 난 뒤 생계는 늘 힘겨웠고 어머니는 끝내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해 글도 못 깨쳤다”고 말했다. 한 유족은 “아직도 누군가 독일어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 두려움에 숨이 막힌다”고 토로했다.
2006년 1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히브리어로 ‘희생자들의 이름을 기억하자’는 뜻)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방문해 희생자를 위해 묵념했다.
희생자 가족들은 아픈 기억을 묻어두지만은 않았다. 내 아버지를, 내 남편을, 내 아들을 누가 죽였는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 밝혀내야만 했다. 책임자를 역사의 법정에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유일한 생존자 마세티씨를 제외하면 목격자도 없었다. 그나마 마세티씨에게도 끔찍한 기억의 편린만 남았을 뿐이었다. 가족들은 모자이크를 하듯 사건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마을 인근에 어떤 부대가 주둔했는지, 부대원들은 누구이며 어디에 살고 있는지, 책임자를 증명할 문서는 없는지 하나씩 뒤져나갔다. 시간과의 지난한 싸움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족들은 가슴에 한을 안고 하나 둘 숨을 거뒀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대를 이어 힘겨운 투쟁을 이어갔다. 이번에 공동 원고로 유죄판결을 이끌어낸 마르게르타 레스카이(66·여)씨는 참사 당시 겨우 한 살, 안졸라 레스카이(60·여)씨는 사건 5년 뒤에야 태어났다.
60여 년이 지나서야 노력은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2006년 9월 이탈리아 라스페치아 군사법원은 궐석재판을 통해 쇼잉그라버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독일 측이 ‘당사자의 동의가 없는 한 자국민을 외국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법률에 따라 쇼잉그라버의 송환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이제 판결자료를 들고 독일로 향했다. 결국 독일 검찰은 지난해 9월 쇼잉그라버를 살인죄로 기소했다.
독일 재판과정에서 쇼잉그라버는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는 자신이 살해를 지시하지도 않았고 현장에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군의 철수를 위해 24시간 내로 다리를 보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다른 지역에 있었으며 이 명령이 당시 나에겐 최우선 임무였다”고 항변했다. 생존자 마세티씨는 법정에서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장교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에 등장했다”며 “그가 병사들에게 뭔가 명령하는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쇼잉그라버는 “단지 장교였다는 이유만으로 죄를 덮어씌우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간단치 않은 싸움이었다.
결정적 증언
재판이 진행되면서 정황증거가 속속 확인되기 시작했다. 폭발 직전 사건현장 근처에서 거행됐던 독일 병사들의 장례식에 쇼잉그라버가 참석했음을 보여주는 사진이 제출됐다. 그가 있었다는 다리 보수현장도 사건장소에서 가까워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됐다.
결정적인 것은 전쟁 후 쇼잉그라버가 운영하던 가구점 직원의 증언이었다. 그는 “1970년대에 쇼잉그라버가 ‘2차대전 중에 발생한 일 때문에 이탈리아를 방문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유를 거듭 묻자 ‘10여 명을 쏘고 폭파시켜버린 일과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는 것. 그는 “쇼잉그라버가 ‘내가 명령을 내렸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말했다”고 증언했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부하들의 죽음에 책임을 느낀 피고가 다른 부하들의 두려움과 증오, 무력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학살을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며 “병사들이 독자적으로 조직적인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피고는 명령을 내릴 만한 위치에 있었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장교였다”고 밝혔다. 법원은 10명에 대한 살인과 1명에 대한 살인미수 혐의를 인정해 종신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법원은 폭발사건 전에 4명을 학살한 것에 대해서는 “피고가 명령을 내렸다고 확신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집단적 책임의식
판결을 지켜보러 이탈리아에서 독일까지 온 희생자 가족들은 ‘드디어 한이 풀렸다’며 판결을 환영했다. 마세티씨는 “복수를 바라진 않는다”며 “이제는 끔찍한 순간들을 잊고 싶다”고 말했다. 안졸라씨는 “평생 이런 날을 기다리던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것”이라며 “오래 시달려온 고통과 살인자에 대한 증오에서 벗어난 느낌”이라고 흐느꼈다.
선고공판 뒤 쇼잉그라버는 TV 인터뷰에서 “판사들 모두 65년 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들이 전쟁과 나치즘에 대해 뭘 알겠는가”라며 결백을 거듭 주장했다. 쇼잉그라버 측이 즉시 항소하면서 현재 사건은 연방법원에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나치전범 재판 가운데 하나가 될 가능성이 큰 이번 재판은, 현재 진행 중인 몇 안 남은 나치 관련 판결에 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법원은 확실한 증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일부 증언과 역사적 문건, 전문가들의 분석 등 정황증거에 바탕을 두고 결론을 내렸다. 나치 전범을 추적하는 유대인 인권단체 시몬 비젠탈 센터의 슈테펜 클렘프 연구원은 “쇼잉그라버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졌더라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라며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있으면 피고에게 유리한 판단을 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과거에는 강력한 증거를 갖추고도 무죄판결이 난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판결은 앞으로 나치 전범 사건 재판에 좋은 징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10월 뮌헨 지방법원에서 시작될 예정인 ‘공포의 이반’ 사건도 비슷한 절차를 밟을 가능성이 크다. 독일 검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수보비르 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유대인 2만9000여 명의 살해를 적극 도운 혐의로 ‘공포의 이반’ 존 뎀얀유크(89)를 기소했다. ‘공포의 이반’은 뎀얀유크의 본명인 이반을 공포통치로 유명한 러시아의 황제 이반 4세에 빗댄 것이다.
미국에 거주하던 그는 5월 독일로 송환됐다. 종전 후 미국으로 이주했던 그는 1986년 미국에서 추방돼 이스라엘로 송환됐다. 하급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93년 이스라엘 대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 적이 있다.
독일의 나치 청산 노력은 이렇듯 집요하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나치 학살의 희생자에 대해 집단적 책임의식을 갖고 있다.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과거의 일로 치부하지 않고 최후까지 추적해 역사의 법정 앞에 단죄하고 있는 것.
독일 정부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성의 있는 자세를 보인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9월1일 폴란드 그단스크 베스테르플라테 요새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70주년 기념식에 참가해 머리를 숙였다. 그는 “오늘은 나치 독일의 죄악을 기억하는 날”이라며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세계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고 그 일에 책임을 통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악행의 상처는 영원히 남을 것”이라며 “독일의 침공으로 고통 받았던 폴란드인들,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 희생자들, 죽음의 캠프에서 끔찍하게 숨진 이들, 독일에 맞서 싸우다 스러져간 수백만명을 기억한다”고 사죄의 뜻을 전했다. 전범 국가였던 독일이 현재의 통합 유럽에서 여전히 지도력을 발휘하는 이유다.
“너무 늦은 진실은 없다”
팔자노 디 코르토나 마을 학살의 희생자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단죄가 아니라 진정한 화해와 용서였다.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지 않은 90대 노인에게 굳이 종신형을 선고한 것은 그를 단죄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판결 이후 마세티씨도 “그가 감옥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미 용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진실을 제대로 드러내 피해자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풀어내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희생자 가족 대표인 안드레아 비그니니 코르토나 시장의 말은 곱씹을 만하다.
“우리가 원한 것은 ‘정의’라는 말을 다시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판결이 너무 늦었다고 말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의의 필요성은 시간이 지난다고 작아지지 않는다. 너무 늦은 진실이란 없다. 이 판결은 마침내 죽은 자들과 살아있는 자들 모두에게 평화를 가져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