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앞으로는 퀴즈의 질문과 답변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세계 어느 곳에 가든 만날 수 있는 한국 제품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풍산의 소전(素錢)이다. 풍산은 전세계 60여 개국 동전을 만들어 수출하고 있고, 특히 EU 단일통화인 유로화 동전까지 납품하며 소전 분야에서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동전으로 세계를 제패한 풍산의 세계시장 공략기를 살펴본다.
풍산이 생산한 세계 각국의 소전과 압인을 한 동전.
EU는 유로화의 역내 조달을 원칙으로 내세웠다. 니켈 알레르기가 많은 유럽인의 체질을 고려해 구리와 아연, 주석과 알루미늄으로 구성된 4원 합금 노르딕 골드가 유로화의 소재로 채택됐다. 이전까지 동전은 직경과 두께, 표면강도 등의 요건을 갖추면 됐지만 노르딕 골드는 위조방지를 위한 전기전도성 검사를 의무적으로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노르딕 골드를 최초로 개발한 핀란드 업체에서조차 대량 생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노르딕 골드가 내구성이 좋고 빛깔이 아름답지만, 대량 생산을 위해 거쳐야 하는 열간압연과정에서 깨지기 쉬운 단점이 있었던 것. 유럽 업체들은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틀을 좁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생산성이 뚝 떨어졌다. 결국 유로화 발행에 맞춰 충분한 물량을 납기 내에 납품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가 불거졌다.
노르딕 골드를 개발하라
# 1997년 10월
울산 온산공단 풍산 내 소전공장 소전생산팀에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유럽 업체가 유로화 소재인 노르딕 골드를 기한 내에 납품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공장에서 개발할 수 있을까요?”
본사 해외영업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김원헌 차장(현 이사)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답했다.
“우리 회사 기술력이면 노르딕 골드 생산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유럽에 납품하려면 일단 특허 문제부터 해결돼야 합니다.”
통화를 마친 김 차장은 김인달 개발팀장을 급히 찾았다.
“영업부에서 노르딕 골드 양산 가능성을 묻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우리 기술이면 충분히 개발할 수 있습니다만, 특허가 문제입니다.”
보고를 받은 김 팀장은 ‘특허 문제만 해결되면 수요가 팽창할 유로화 시장에 진입할 좋은 기회인데…’라는 생각에 즉시 소전생산팀 주요 간부 대책회의를 열었다. 하나같이 제품 개발에는 문제가 없다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김 팀장은 특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저 없이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검사를 마친 유로화 소전이 캐리어에 가득 쌓여 있다.
유로화 발행 문제를 담당하는 스페인 조폐국 책임자와 풍산의 김 팀장, 김 차장 등이 마주 앉았다. “노르딕 골드에 대한 특허 문제만 풀어준다면 우리가 개발해보고 싶습니다.” “괜히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풍산만 손해 아닙니까” “손해를 보더라도 우리 회사가 보는 것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노르딕 골드를 개발해서 대량 생산체제를 구축하도록 하겠습니다. 특허 문제만 해결해주시면….” “좋습니다. 노르딕 골드는 4원 합금 소재라 쉽지는 않을 겁니다.”
반신반의하는 조폐국 책임자를 뒤로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온 김 팀장과 김 차장은 쾌재를 부르며 본사에 연락했다.
“특허 문제는 구두 승인 받았으니 제품 개발을 서둘러주세요.”
# 1997년 12월. 울산 풍산 소전공장
소전생산팀은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노르딕 골드 시제품을 만들었다. 샛노란 금빛의 노르딕 골드가 쏟아지자 공장 안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제품 개발에 착수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시제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본사 영업부에서조차 예상하지 못한 속도였다.
“노르딕 골드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김 팀장은 스페인 조폐국 책임자에게 들뜬 목소리로 성공 사실을 알렸다. “벌써요? 정말 성공했습니까?”
며칠 뒤 스페인 품질관리 임원이 한국으로 날아왔다. 울산 풍산 소전공장에서 노르딕 골드 생산 공정을 둘러본 이 임원은 “원더풀”이라며 오른손 엄지를 치켜세워보였다. 그는 테스트용으로 노르딕 골드 500개를 들고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10만개 샘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또 얼마 뒤에는 100만개로 수량을 올렸다. 샘플 수가 점점 많아지는 것은 양산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였다.
소전개발팀은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유로화 소재인 ‘노르딕 골드’를 개발해냈다.
김원헌 소전생산팀 이사는 “IMF 외환위기로 한국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던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풍산 온산공장은 ‘돈’(소전)을 만들어 ‘돈’(외화)을 벌어들이느라 하루 3교대로 24시간 공장을 풀가동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풍산은 2001년 상반기까지 EMU(Economic and Monetary Union · 유럽경제통화동맹) 회원국 12개 국가 가운데 10개국(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독일 그리스)에 2만2000t, 약 1억달러어치의 유로 소전을 공급한 데 이어 현재까지 벨기에 핀란드 슬로베니아 사이프러스 등을 추가해 EMU 회원 14개국에 총 3만7000t을 공급했다.
지구에서 달까지 6번 왕복할 ‘길이’
소전은 무늬를 새겨 넣기 직전의 동전을 의미한다. 보통 동전 앞뒷면에는 인물과 그림 등 각종 도안과 액면가, 발행연도 등을 새겨 넣게 마련이다. 소전은 압인가공(금속을 무늬가 있는 틀 사이에 넣고 눌러 금속 표면에 무늬를 새기는 일)을 거쳐야 비로소 동전으로 완성돼 시중에 유통된다. 동전으로 인정받기 위한 최종 승인과정인 압인은 엄격한 화폐관리 등을 위해 대부분 각국 조폐국이 직접 담당한다.
풍산은 소전 분야에서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1973년 대만 수출을 시작으로 현재 전세계 6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고, 풍산이 만든 소전을 30억명 가까운 인구가 사용하고 있다. 풍산이 지금까지 생산한 소전은 880억장에, 무게 44만t에 달한다. 880억장의 소전은 한데 이으면 지구에서 달까지 6번 왕복하고, 지구를 55바퀴 돌 수 있는 양이다.
2009년 12월8일. 울산 온산공단에 위치한 풍산 울산사업장을 찾았다. 공장 안쪽에 소전공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소전은 언뜻 동전 모양의 금속 조각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자판기에 넣으면 돈으로 인식돼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소전공장 출입을 위해서는 금속탐지기 검색 등 철저한 보안 검색과정을 거쳐야 한다.
공장을 안내한 홍상호 과장은 “자판기가 공장 안에도 여러 대 있는데, 소전이 하나라도 나오면 검색 담당 직원이 사직해야 할 만큼 보안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전했다.
소전의 생산 공정은 소재를 녹이는 주조를 시작으로 열간압연과 냉간압연을 거쳐일정 두께의 판으로 만들고, 타발공정으로 동전 모양으로 뚫어낸 뒤 테두리 성형으로 매끄럽게 만든다. 이후 내부 조직을 균일하게 하기 위해 일정 온도로 가열한 다음 천천히 식히는 소둔과 불순물 제거를 위한 산세 과정을 거친다. 마무리 공정으로 표면광택 작업을 한 뒤 건조시켜 검사단계로 넘긴다.
소전공장을 둘러보는 동안 180㎜의 두꺼운 금속덩어리가 불덩어리로 만들어진 뒤 레일 위에 놓여 여러 번 왕복하며 눌려 10㎜ 두께의 납작한 판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잠시 지켜봤다. 2~3m 이상 떨어져 서 있는데도 압연 중인 쇳덩어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후끈 느껴졌다. 레일 위를 왕복할 때마다 엿가락이 늘어지듯 점점 길어지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일정 두께로 압연된 판은 동그랗게 말려 다음 공정으로 넘어간다.
김인달 개발실장
타 타 타 타. 탁 탁 탁 탁.
기계와 사람의 눈으로 흠집 난 불량품을 골라내는 검사 단계에서는 검사를 통과한 소전이 캐리어에 떨어지는 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마치 카지노에서 잭팟이 여기저기 터져 동전이 쏟아지는 소리와 흡사했다.
소전 검사는 기계로 한 번 하고, 사람이 다시 한 번 한다. 기계도 정확하게 불량품을 골라내지만, 육안으로 잡아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한다. 수십 개의 소전이 쉴 새 없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움직이는 동안 손과 눈을 이용해 불량품을 찾아내는 검사요원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세계 시장점유율 1위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공정마다 ‘달인’의 손길이 필수적인 모양이다. 검사를 마친 제품은 포장 뒤 발주처로 출고된다.
풍산의 소전은 세계 동합금소전 입찰시장의 60%가량을 점유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수출품이다. 일반적으로 화폐인 동전은 자국의 자존심과 직결되기 때문에 되도록 자국 내에서 조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만약 우리나라의 100원, 500원 주화를 일본이나 중국 등 해외에서 수입해서 만든다고 생각해보라.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어느 나라든 보이지 않는 거부감과 장벽이 존재하는 소전을 풍산이 세계 각국에 수출하게 된 비결은 뭘까. 개발실장을 맡고 있는 김인달 전무의 설명이다.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내면서도 가격을 낮추고, 제때 납품해왔기 때문에 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할 수 있었습니다. 소전 시장은 나라마다 자존심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습니다. 그렇지만 품질과 가격을 앞세워 뚫었지요. 풍산 직원들의 성실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또 아이디어를 내서 원가를 절감해온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됐고요.”
풍산은 ‘소전’생산을 위한 일관시스템을 구축했다.
동전 제작은 어느 나라든지 해당국가 중앙은행에서 총괄하기 때문에 풍산의 비즈니스 파트너는 자연스럽게 각국 정부와 공무원들이다. 특히 국가 예산이 결정된 뒤 입찰을 통해 공급업체를 정하기 때문에 품질은 물론 가격 경쟁력 없이는 시장을 장악할 수 없다.
1993년 풍산이 필리핀 중앙은행에 제안해 대대적인 화폐개혁을 이끌어내며 시장을 개척한 일은 지금도 소전 사업의 모범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당시 필리핀은 같은 단위의 화폐가 4종류씩 유통되는 등 동전 종류만도 40여 종이 넘어 자국 국민조차 동전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풍산은 2년여에 걸쳐 필리핀 정부에 화폐 정리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결국 대대적인 동전 통폐합을 이끌어내 입찰을 통해 교체물량의 70%를 따냈다.
이밖에도 풍산은 브루나이 정부에 주화 체계 전반에 대한 컨설팅을 진행, 선진화된 소재와 규격 변경을 제시함으로써 브루나이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했다. 이 같은 컨설팅 노력은 경쟁이 치열한 소전 시장에서 풍산이 단발성이 아닌 장기적인 거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풍산의 소전을 취재하면서 문득 동전의 미래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우리는 지갑에 지폐 대신 신용카드를 넣고 다니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버스를 탈 때도, 지하철을 탈 때도 동전이나 지폐 대신 카드를 사용하는 게 현실이다. 그뿐인가. 고속도로 통행료도 카드로 결제하는 시대다.
그러나 김인달 개발실장은 ‘어두운 동전의 미래’에 대한 질문에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전자화폐를 도입할 수 있는 인프라가 잘 갖춰진 선진국에서는 점점 동전 사용량이 줄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요. 그렇지만 지구상에는 전자화폐를 사용할 수 있는 인프라가 깔려 있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인구가 훨씬 더 많습니다. 당분간 동전 수요는 더 늘어날 것입니다. 풍산의 소전 시장 개척 전략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남미와 아프리카 등 인구가 많고 개발이 덜 된 국가에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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