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故) 박완서 작가가 타계 전까지 살았던 경기도 구리시에 고인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자료관이 건립된다. 국립국악당, 독립기념관 등을 설계한 건축가 김원씨가 책임을 맡았다.“떠들썩한 문학관은 싫다”던 작가의 생전 뜻에 따라 관내 도서관 부속 건물 형식을 택했지만, 김씨는 “소박하되 옹색하지 않은 공간을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작가 구효서씨가 고 박완서 선생을 추모하며 ‘현대문학’에 기고한 에세이 ‘지난 겨울은 추웠네’의 한 부분이다. 지난 1월 박완서 선생이 타계했을 때 공개된 영정 속에서도 작가는 이렇게 웃고 있었다. 고인을 기억하는 이들은 작가가 그 미소만큼이나 소박하고 ‘가지런한’ 이였다고 말한다.
마지막 모습도 그랬다. 그는 생전에 지어놓은 이야기만 남긴 채 먼 길을 떠났다. 애초에 구리시는 고인이 타계 전까지 살았던 관내 아치동에 ‘박완서 문학마을’을 조성하려 했다. 자택 주위에 문학관, 문학공원, 문학비를 만들고 작가의 산책로를 따라 ‘문학 둘레길’을 닦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맏딸인 수필가 호원숙씨 등 유족들이 “어머니가 원치 않으실 것”이라며 정중하게 거절함으로써 작가는 책으로만 이름을 남기게 됐다.
9월 중순, 추석을 앞두고 고인의 자택에서 호씨를 만났다. 지금은 대를 이어 딸이 살고 있는 집이다. 그는 “어머니가 생전에 ‘나중엔 네가 여기서 살아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기념관이나 문학관 만들지 말고 그냥 살아라’ 하신 게 돌아보면 어머니의 유언이었다”고 했다. 작가의 타계 후 출간된 책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 서문에서도 호씨는 이러한 어머니의 뜻을 밝혔다.
“차가운 돌로 된 명패와 기념관보다는 따뜻하게 가족이 모여 숨을 쉬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식탁을 차리고 포도주 잔을 부딪히기를 바라신 게 아닌가. 새 생명 아기가 태어나고 자라 노할머니가 무릎을 꿇고 가꾸던 잔디 위에서 걸음마를 배우고 발에 흙을 묻히기를 꿈꾸신 게 아닐까.”
책 쓰는 할머니
특히 작가는 당신의 이름이 화려한 문학관을 통해 기억되는 것을 피하려 했다. 호씨에 따르면 생전에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문학관을 짓자는 제안을 해올 때마다 “나는 책으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가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림 같은 건 보관하려면 공간이 필요하지만 책은 얼마나 심플하냐. 나는 책으로 남는다. 책이 있으니 나를 기억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런 작가가 생전에 단 한 번, 자신의 이름을 허락한 곳이 있다. 구리시 인창도서관의 ‘박완서 자료실’이다. 구리시는 2009년 도서관 내에 66㎡ 규모의 방을 만들고 작가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데뷔작 ‘나목’의 초판을 비롯한 출간 서적과 친필 원고, 사진 등을 전시한 이 자료실은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운영 중이다. 호씨는 “사실 그때 나는 반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왕 하실 거라면 좀 더 좋은 모습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마을에 있는 공공도서관 아니냐’며 오히려 나를 나무라셨다”고 회고했다.
작가는 생전에 자택 근처 마을회관에 책 1000권을 기증했을 정도로 ‘동네 도서관’을 아꼈다. 호씨는 구리시에서 ‘박완서 마을’ 조성 계획을 발표했을 때 어머니의 그 자료관이 떠올랐다고 했다.
“아이들이 와서 책을 읽으며 ‘작가 할머니’에 대해 알게 되는, 작지만 알찬 공간을 원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형제들 의견도 마찬가지여서 구리시에 ‘새로 뭔가 짓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미 마련돼 있는 자료실을 잘 가꿔달라’는 뜻을 전했습니다.”
구리시 아치울마을 자택에서 딸 호원숙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생전의 박완서 작가.
이후 자료관 건립은 급물살을 탔다. 구리시는 추경을 통해 예산을 마련했고, 9월14일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가 설계를 맡기로 확정됐다. 국립국악당·독립기념관 등을 지은 김 대표가 525㎡(약 159평) 규모로 예정된 공공도서관 부속 건물의 건축을 맡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김 대표는 “구리시의 전화를 받자마자 ‘하겠다’고 했다. 박완서 선생을 기념하는 일에 힘을 보태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했다.
“전북 고창에 있는 미당시문학관도 제가 지었습니다. 고창군수가 중학교 은사인데 ‘설계비 공사비 합쳐 4억원밖에 없다. 이래도 할 수 있겠느냐’ 하시더군요. ‘당연하지요’ 말씀드리고 바로 현장에 내려갔어요. 미당의 생가 옆 문학관 터에 가만히 서 있으려니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집디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던 미당의 시 ‘자화상’이 떠올랐습니다.”
김 대표의 말이다. 이 첫 느낌이 설계의 단서가 됐다. ‘높이 올라가는 전망대를 만들자, 바다가 보이고 바람이 느껴지고 그래서 ‘자화상’이 절로 떠오르게 하는 공간을 짓자.’ 미당시문학관의 18.35m 전망대는 이렇게 탄생했다. 꼭대기에 서면 누구나 ‘자화상’의 그 바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좋은 문학관이 꼭 거대한 건물일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예산 문제로 노출 콘크리트 전망대에 아무 치장도 할 수 없었는데, 대신 심은 담쟁이가 벽을 타고 올라가 이제는 어떤 장식보다도 근사한 마감재가 됐습니다. 예산 적고, 땅이 좁은 것은 좋은 건축을 하는 데 아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박완서의 네 남자
김 대표가 기자를 만난 날은 마침 그가 구리시 토평도서관을 막 답사하고 온 다음날이었다. 그는 “시 관계자는 도서관 부속건물이라 공간이 너무 좁지 않은지 계속 걱정하던데, 나는 마음에 들었다. 박완서 선생의 명성에 비춰 결코 옹색하지 않은 자료관을 만들 자신이 있다”고 했다.
“경복궁이 자금성에 비해 작다고 한국 건축이 보잘것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거대한 성당보다는 아무 장식 없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기도실이 더 큰 감동을 주는 법이지요.”
그가 구상하는 ‘박완서 자료관’이 바로 그런 공간이다. 그는 “도서관 내 부지에 서니 선생이 살던 아치울 마을이 건너다 보였다. 선생이 산책을 다녔다는 길도 지척이더라. 땅을 통해 선생의 삶과 이야기가 전해져오는 게 참 좋았다”고 했다.
“아직 건축 콘셉트를 정하지는 못했어요. 오늘이 구리시에서 제안을 받은 지 꼭 7일째 되는 날입니다. 원래 생각하는 게 느린 편이라 한참은 더 숙성시켜야 할 것 같아요. 그 과정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요즘은 하루 종일 선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아요. 선생의 작품뿐 아니라 문인들이 선생에 대해 쓴 글도 찾아 읽고 있습니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도서관에 마련된 박완서 작가 자료실. 구리시는 이 공간을 ‘자료관’으로 확대 이전할 계획이다.
“생전에 선생을 몇 번 뵌 적이 있어요. 함께 식사한 기억도 있고요. 그런데 그 조그만 부인의 따뜻하고 수줍은 모습 속에 이런 아픔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자기한테 소중한 것을 누군가가, 하나씩 순서대로 빼앗아간 것 아닙니까. 아버지부터 아들까지 차례차례. 그때마다 당신의 하늘이 무너졌을 거예요. 그 경험을 하면서 어떻게 그토록 고운 글을 썼을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 같은 게 있었을 텐데 그걸 어떻게 삭였을까, 그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벌떡 깹니다. 당분간은 선생의 삶에 대해, 또 네 명의 남자에 대해 좀 생각해봐야겠다 마음먹고 있습니다.”
김 대표는 전남 보성군의 태백산맥문학관도 설계한 인물이다. 이때 그는 산줄기를 끊어 거대한 동굴을 파고 건물을 땅 밑으로 집어넣었다. “‘태백산맥’처럼 뼈아픈 이야기를 기념하는 공간을 만들면서 사람들이 우러러보게 하면 안 된다. 사람들이 문학관에서 건축이 아니라 아픔, 분단,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을 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학관 양옆으로 유리 탑을 올리고 밤마다 벌겋게 불을 밝힌 것은 억울한 원혼들, 수많은 죽은 이의 영혼이 밤에도 잠들지 못하고 떠 있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문학관은 이렇게 작품과 작가의 삶을 담는 공간이다. 규모가 작을지언정, 자료관일지언정 박완서 선생을 위한 공간도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시간이 갈수록 아름답게
김 대표는 “아직은 자료관을 통해 선생의 문학을 보여줄지, 아니면 삶을 보여줄지 결정하지 못했다. 이 자료관이 사실상 문학관과 같은 구실을 하는 거라면 그 안에서 어떤 프로그램이 돌아갈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이 ‘박완서 자료관’에 기대하는 내용을 알아보고 하나씩 생각의 갈래를 정리하려 한다”고 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지금은 ‘토평도서관 내 박완서 자료관’으로 시작하지만, 언젠가는 그 공간이 ‘박완서 자료관이 있는 토평도서관’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작가의 딸 호씨의 바람도 그렇다. 그는 자료관이 소박하지만 정성과 진심이 담긴 공간, 세월이 흐르고 깊이가 담길수록 아름다워지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에밀리 브론테나 괴테의 문학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작가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그곳이 바로 거창한 문학관이 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후손들의 삶은 이어지고, 작가를 잊지 못하는 추모객들은 그곳을 찾아오고…. 그렇게 서로의 시간과 이야기가 맞물리면서 자연스레 영원히 작가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남게 된 거죠. 저는 어머니도 그렇게 기념되면 좋겠어요. 제가 지금 어머니의 집에 계속 사는 건 어쩌면 그 소임을 하기 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이곳까지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기꺼이 문을 열어주고 있어요. 언젠가 제가 세상을 떠나면 누군가 또 이 역할을 하게 되겠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곳이 어머니의 기념관이 된다면, 어머니도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구리시는 토평도서관 인접 부지를 매입해 ‘박완서 자료관’ 규모를 좀 더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러나 역시 기본 바탕은 ‘품격과 내실’이다. 한국 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대작가이면서도 늘 몸을 움츠린 채 수줍게 웃던 고인의 미소만큼, 따뜻하면서도 아름다운 공간이 완성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