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동쪽 끝, 중국 西安 아닌 경주?
전성기에는 인구 100만 넘는 대도시로 성장
풍요롭고 살기 좋아 외국인도 서라벌에 정착
APEC 통해 다시 한번 세계 외교통상 중심지로

경주시 천궁동 경주타워 신라문화역사관에 복원한 8~9세기 신라왕궁모형. 동아DB
일단 경주가 가진 문화적 상징성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천년 수도인 경주는 한국 역사와 문화가 집약된 도시다. 불국사, 석굴암, 경주역사유적지구, 양동마을, 옥산서원 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도 대거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APEC 로고에도 경주의 문화재가 녹아 있다. 로고 오른편에는 ‘얼굴무늬 수막새(보물·7세기)’를 형상화한 그림이 들어가 있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경주가 지닌 국제적 위상이다. 여기서 일부 독자는 의문이 들 것이다. 한국인에게는 경주가 유명 관광지이겠으나 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의 경주는 지금과 위상이 달랐다. 경주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엿보려면 1000여 년 전 고대 신라로 돌아가야 한다.
실크로드 동쪽 끝, 西安 아닌 경주說
경주는 고대 동북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국내 학계를 중심으로 실크로드의 동쪽 시작점이 경주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실크로드는 기원전 8~9세기부터 근대까지 중국 심장부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거쳐 지중해까지 이어진 무역로다. 세계 사학계에서는 실크로드의 동쪽 시작점을 중국의 시안(西安·당시 장안)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하지만 실크로드가 경주까지 이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물이 적지 않다. 1973년 미추왕릉에서 출토된 유리구슬이 대표적 예다. 이 유리구슬 안에는 네 사람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얼굴무늬 수막새의 친근한 얼굴이 아니다. 눈은 파랗고 코는 높다. 피부는 백지장처럼 희다. 이 유리구슬의 원산지는 인도네시아 동자바섬이다.
이외에도 1924년 금령총에서 출토된 유리잔을 비롯해 다양한 유리그릇이 경주의 무덤에서 나왔다. 이 그릇은 4~5세기 로마제국기에 성행한 ‘로만 글라스’나 3~7세기 페르시아에서 유행한 ‘사산 글라스’와 닮았다. 신라시대 왕이나 귀족들이 당시 서양 국가들과 교류하면서 유입된 각종 외래 문물을 접했다는 증거다. 일본의 고미술사학자 요시미즈 쓰네오도 각종 저서를 통해 “로마제 유리 제품과 황금 보검 등이 경주에서 출토된 사례를 토대로 고대 로마와 신라의 교류가 활발했다”고 주장했다.
APEC을 맞아 경주에 모이는 신라 금관도 실크로드가 경주까지 이어졌을 것이라는 학설에 힘을 싣는다. 웨이정(韋正) 베이징대학 고고문박학원 교수는 2013년 8월 15일 중국 시안(西安) 섬서사범대학에서 열린 제2회 국제학술대회 ‘고대 동아시아 불교문화 교류와 실크로드’에서 신라의 금관이 쿠샨 제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을 폈다. 쿠샨 제국은 1~4세기경 서쪽으로는 마케도니아 그리스왕국, 동쪽으로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일대까지 걸쳐 있던 유목 제국이다. 웨이정 교수는 그 근거로 쿠샨 제국의 주요 터전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시바르간에서 출토된 ‘보요관’과 신라 금관이 형태적으로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꼽았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순금제 금관이 13개 정도 발굴됐는데 그중 6점이 신라 경주에서 출토됐다. 그만큼 희귀한 유물에서 유사성이 드러난 셈이다. 마침 APEC을 맞아 경주에서 출토된 금관 6점이 전부 국립경주박물관에 모인다. △금관총 금관 △금령총 금관 △서봉총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관 △천마총 금관 △교동 금관 등 국보·보물급 유물이 그 주인공. 1921년 금관총 금관이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다시 본 뒤 104년 만의 집결이다. 이들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나뉘어 소장돼 있었다.
8세기경 세계 4대 도시 반열에 오늘 경주
신라는 교역 등으로 쌓은 부를 바탕으로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다. 경주의 유명 유적지만 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경주의 대표적 사찰인 불국사(佛國寺)는 그 이름대로 신라 땅을 부처의 땅으로 만들었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따르면 당대 불국사는 80종 건물에 2000여 칸의 방이 있었을 정도로 대규모 사찰이었다. 석굴암은 당대 신라인들의 미술과 건축 실력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인도나 중국처럼 연약한 자연 암반을 파서 만든 석굴이 아니다. 단단한 화강암을 짜맞추어 인공적으로 석굴암을 만들었다.
1921년 국내 최초로 출토된 금관인 금관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통일신라의 전성기인 7~8세기의 경주는 당대 최고의 도시였다. 이는 ‘삼국유사’에도 드러난다. “수도에는 17만8936호가 기와로 지붕을 얹고 숯을 때며 산다.” ‘삼국유사’에서 신라가 가장 번성했던 7~8세기의 경주의 생활상을 묘사한 구절이다. 당시 한 호(가구)에 6명이 살았다고 가정하면, 100만이 넘는 대도시다. 지금 경주시(약 25만 명) 보다도 인구가 4배 많았다. 지금도 국내 인구 100만이 넘는 도시가 많지 않음을 생각하면 당시 기준으로는 세계적 대도시였던 셈이다.
숯으로 음식을 조리했다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나무가 아닌 숯으로 음식을 했다는 것은 연기에 집이 그을리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다. 그만큼 집들이 가까이 붙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경주시 천궁동 경주타워 신라문화역사관에는 ‘삼국유사’ 등 기록과 유물을 종합해 당시 경주의 모습을 추정한 모형이 있다. 모형을 보면 왕궁인 월성(月成)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이어진 주작대로가 뻗어 있었다. 도시 전체에는 격자식 도로가 깔려 있다. 고대도시라기보다는 근현대의 계획도시와 가까운 형태다.
당시의 외국인들은 신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중동 상인들의 신라에 대한 기록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고대 페르시아의 지리학자 이븐 코르다드베(Ibn Kordadbeh·?~846)는 저서 ‘도로와 왕국과 책’에서 신라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신라에는 많은 산과 많은 왕이 있는데 특히 금이 많다. 이슬람인 중에 그곳에 정착한 이도 있는데 살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10세기경 바그다드의 지리학자 마수디(Masudi·?~957)도 비슷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저서 ‘황금초원과 보석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라크인과 일부 외국인이 신라와 주변 섬에 정착했으며, 그곳을 고향으로 선택했다. 신라는 공기가 맑고, 물이 깨끗했으며 농토가 비옥했다. 또한 보석과 광석물이 많은 데다 획득하기도 쉬웠다. 그래서 신라에 정착한 대부분의 사람은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떠나는 이도 극히 적었다.”
당시 중동인들이 신라에 정착했음을 엿볼 수 있는 유적도 있다. 신라 원성왕(재위 785∼798) 무덤인 괘릉(掛陵) 묘역에는 서아시아 사람의 용모를 가진 무인(武人) 석상이 서 있다.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크며 잘 다듬은 턱수염에 이슬람식 예배 모자인 ‘타키야(Taqiyah)’를 쓰고 있다. 영락없는 중동인이다.
이와 같이 신라, 서라벌은 이미 8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튀르키예 이스탄불), 장안(중국 서안), 바그다드(이라크 바그다드)와 더불어 세계 4대 국제도시의 반열에 올랐다. 물류가 융성한 도시로 알려지고 이에 따라 방문하는 외국인들도 많았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 교역지로서 신라는 세계인들과 소통하며, 문화와 사람이 오고 가는 열린 도시였다.

1995년 불국사와 함께 국내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석굴암. 유네스코
중세에는 중동의 황금향으로 부상
한편 신라에 금이 많고 부유한 나라라는 기록도 있다. 고대 중동의 작가 이븐 나딤(Ibn Nadim·?~995)은 저서 ‘세계 각 나라의 목록’에 “신라는 가장 아름답고 부유한 나라다. 그곳에는 금이 아주 많다”라고 적었다. 당대 중동의 여행자 마르위지(S.Z.T. Marwzi·?~?)도 저서 ‘동물의 자연적 번성’에서 신라를 “무슬림이나 어느 이방인이든 그곳에 가면 정착하고 결코 떠나지 않는 곳이며 유쾌하고 살기에 좋다”며 “많은 금이 거기에서 발견된다”라고 묘사했다.신라는 935년 경순왕(재위 927~935)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며 멸망했으나 그 뒤에도 중동인에게 신라는 신비와 부유함의 나라였다. 중세 중동의 지리학자 무함마드 알이드리시(Muhammad al-Idrisi·1100~1166)가 그린 세계지도에는 신라가 중국 남부 연안의 6개 섬으로 그려져 있다. 이 지리학자는 저서 ‘천애갈망자의 선택’에서 “신라를 방문한 여행자들은 누구나 그곳에 정착해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알이드리시는 이 책에서 “신라는 모든 것이 풍요롭고 이로운 것이 많다. 금은 너무도 흔하다. 그곳 사람들은 개의 목걸이나 원숭이의 목줄도 금으로 만든다”고도 적었다.
13세기 중동의 여행 작가 바크란(M.N.Bakran·?~1208)도 저서 ‘세계 이야기’에서 신라를 일종의 이상향으로 표현한다. “(신라같이) 예쁘고 풍요로운 곳은 (쉽게) 발견할 수 없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 도시까지 여행할 수 있다. 너무나 살기 좋은 곳이라서, 이 도시에 한번 가기만 하면 떠나지 않는다.”
한자문화권 밖 아랍 지역에서 아시아의 동쪽 끝 작은 나라, 신라를 이렇게 많은 책자에서 묘사하고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신라는 조그만 ‘은둔의 나라’가 아닌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동방의 이상향’이자 ‘유토피아’ ‘황금의 나라’로 불렸다. 그래서 9~11세기의 중동의 지리학자들은 여러 지도에 신라(Silla)라는 지명을 표시했다. 당대 최고의 지리학자 알 비루니(Al Biruni)는 그의 세계지도 ‘알 카눈(Al Qanun)’에 신라의 위도와 경도까지 표시하며 관심을 나타냈다.
당시 중동은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를 맞았다. 중앙아시아는 물론 지중해까지 영향을 미쳤을 정도다. 유럽에서도 신라를 유럽과 비슷한 시각으로 바라봤을 가능성이 높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신라와 경주는 당시 세계인의 황금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의 수도 경주는 APEC을 계기로 다시 한번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됐다. 8~9세기 경주가 화려한 모습으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처럼 21세기의 경주는 한국 문화예술의 중심지로서 다시금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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