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호

‘파격 인사’로 새 질서 짜는 기업들

[재계 인사이드] 올해도 유효한 재계 ‘젊은 CEO’ 바람

  • 김형민 아시아경제 기자 khm193@asiae.co.kr

    입력2025-11-1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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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록’보다 ‘패기’에 승부 건 기업들

    • 세대교체 의지 짙은 HD현대·한화

    • 삼성 회장과 ‘동갑’ 부회장 탄생 주목

    • 젊어지는 CEO 둘러싼 기대와 우려

    재계가 1년 중 손꼽는 3대 시즌(주주총회, 휴가, 인사) 중 하나인 ‘인사 시즌’이 돌아왔다. 시점은 예년보다 빨라졌다. 통상 11월 말~12월 초에 단행되던 인사는 각사 사정에 따라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 달 이상 앞당겨져 발표됐다. 세계시장 상황이 워낙에 수시로 급변해 가늠하기 어려워졌고, 이에 기업들은 내년도 사업을 발 빠르게 준비하기 위해선 경영진 재편을 서둘러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HD현대, 한화, SK그룹 등은 이미 새 인물들의 요직 배치를 끝냈다. 삼성전자, LG, 현대차그룹 등도 곧 인사를 발표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기업들은 올해 인사에서 베테랑의 ‘관록’보단 젊은이들의 ‘패기’에 승부를 걸었다. 30~40대의 젊은 최고경영자(CEO)가 곳곳에서 등장했다. 3·4세대 오너로 지휘봉을 넘긴 기업들도 있다. 나이로 보나, 입사연도, 연차로 볼 때 ‘파격’에 가깝다는 평가도 뒤따른다. 젊은 인물을 중용하는 파격 인사는 최근 2~3년 사이에 기업들 사이에서 자주 보였다. 다만 올해는 그 행보가 더욱 두드러졌다. 파격 인사로 기업들이 기대하는 건 ‘세대교체’와 조직을 환기시킬 ‘새바람’이다. 리더십이 젊어지면, 외부로는 회사의 이미지를 신선하게 만들고, 내부로는 조직문화를 유연하게 바꾸는 효과를 기본적으로 볼 수 있다. 기업들은 이들로 하여금 요동치는 시장 흐름을 빠르게 파악하고 적기에 대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면도 있다. 

    80년대생 오너 HD현대·80년대생 리더 한화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10월 27일 경북 경주 엑스포대공원 문화센터 문무홀에서 열린 APEC CEO 서밋 ‘퓨처 테크 포럼: 조선’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HD현대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10월 27일 경북 경주 엑스포대공원 문화센터 문무홀에서 열린 APEC CEO 서밋 ‘퓨처 테크 포럼: 조선’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HD현대

    올해 인사에서 세대교체 의지가 가장 짙은 곳은 HD현대와 한화다. HD현대는 젊은 오너십을 내세웠다. 1982년생 43세의 정기선 수석부회장이 10월 17일 HD현대·HD한국조선해양 대표이사 회장직에 올랐다. 지난해 11월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한 이후 약 1년 만이다. 그간 회사의 경영 현안에서 전면에 나섰던 정 회장은 이번 승진으로 회사를 본격적으로 진두지휘하게 됐다. 

    정 회장의 승진은 언젠가는 이뤄질,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그 시점이 예상보다 빨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의 장남인 그는 오랜 기간 경영 수업을 받아오며 회사 일에 깊이 관여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고 보스턴컨설팅그룹 컨설턴트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시장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갖고 있다고도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회사 핵심 사업인 조선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힘써왔다. 우리 정부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 합의하고 이행하기로 한 미국 조선업 재건 사업 ‘마스가(MASGA)’ 프로젝트 구상에도 크게 일조했다. 동시에 회사가 이 프로젝트를 앞장서서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여건도 조성했다. 앞으로 그가 할 일은 마스가 프로젝트의 순항과 완성, 그를 통한 회사의 도약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발을 맞추듯, HD현대는 이번 인사에서 마스가 프로젝트를 과제로 짊어진 사업 부문에 대해 승진 인사들을 집중적으로 배출했다. 세부적으론 HD현대 조선 부문에서만 부회장 승진이 1명(이상균 HD현대중공업 사장), 사장 승진은 3명(금석호 HD현대중공업 부사장·주원호 HD현대중공업 부사장·김성준 HD현대조선해양 부사장)에 대해 이뤄졌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8월 26일(현지 시간) 필라델피아 한화 필리조선소에서 열린 미국 해양청 발주 국가안보 다목적선 ‘스테이트 오브 메인’호 명명식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필라델피아=뉴시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8월 26일(현지 시간) 필라델피아 한화 필리조선소에서 열린 미국 해양청 발주 국가안보 다목적선 ‘스테이트 오브 메인’호 명명식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필라델피아=뉴시스

    한화그룹은 11월 5일 발표된 인사에서 신규 임원으로 총 76명을 승진시켰는데, 그 가운데 10명 가까이가 40대 초중반의 젊은 리더들이었다. 1983년생 42세의 김동관 부회장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회사 경영체제에 힘을 싣고 빠르고 활력 있는 사업 운영을 도모하고자 한 것으로 풀이된다. 젊은 인재들이 주로 현장 경영과 연구개발(R&D) 사업 등에서 강점을 보여온 것도 고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한화에너지, 한화토탈에너지스, 한화파워시스템, 한화엔진 등 에너지 4개사 승진 명단에 1980년대생 5명이 이름을 올려 젊은 리더들의 약진이 돋보였다. 

    10월 30일 나온 SK그룹의 사장단 인사도 세대교체와 즉시 전력으로 뛸 수 있는 젊은 리더들의 전진 배치로 정리된다. 인물 면면이 획기적으로 젊어진 것은 아니지만, 40대 후반, 50대 초반 인사들이 요직에 배치되면서 연령대를 내렸다. SK스퀘어의 기업가치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 한명진(52) 대표의 거취가 주목을 받았는데, SK텔레콤 통신 사내회사(CIC) 사장으로 이동했다. 이번에 SK가 해킹 사태 등 문제를 빚었던 SK텔레콤 등 정보통신기술(ICT) 부문에 초점을 맞춰 중요 인물들로 재배치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회사가 한 대표의 능력을 믿고 요직을 맡긴 것으로 풀이된다. 

    한 대표가 떠난 SK스퀘어 사장에는 김정규(49) SK㈜ 비서실장이 낙점됐다. 이형희 SK㈜ 부회장의 승진으로 새 인물이 필요해진 SK수펙스추구협의회 커뮤니케이션 위원장으론 염성진(53) 사장이 배치됐다. 

    삼성도 곧 인사, 회장과 ‘동갑’ 부회장 탄생 주목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0월 3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엔비디아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0월 3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엔비디아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삼성전자는 이르면 11월 중순께 인사를 단행할 것이란 전망이 재계에서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7월 17일 부당합병·분식회계 사건과 관련해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 사법리스크를 완전히 해소한 후 처음으로 하는 인사다. 이로 인해 그의 결단에 재계의 이목은 더욱 집중되고 있다. 젊은 임원들의 승진과 세대교체가 이뤄질지도 화두로 떠오른다. 그간 이 회장은 검찰 수사, 법원 재판을 받는 사법리스크의 여파로 새로운 인물을 중용하는 일에 소극적이었다. 본인이 언제든지 법정 구속돼 회사 경영에 공백이 발생할 수 있는 변수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익숙한 인물들을 그대로 두고 안정적인 인사 조치만을 단행해 왔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하지만 10년간 이어져 오던 사법리스크가 완전히 사라지면서 이번 인사에선 파격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주요 인물 가운데선 노태문 디바이스경험(DX) 부문장 직무대행(사장)이 주목받고 있다. 직무대행의 꼬리표를 떼는 동시에 부회장으로 승진할지 여부가 관심거리다. 삼성이 자랑하는 스마트폰 ‘갤럭시 시리즈’의 신화를 만들고 지금도 새로이 쓰고 있는 그의 승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인다. 노 사장은 특히 1968년생, 57세로 이재용 회장과 동갑인 점도 일각에서 주목받는다. 회장과 부회장이 동갑내기인 경우는 재계에선 흔치 않은 풍경이다. 노 사장이 승진하면 이와 같은 이례적인 그림이 완성된다. 나이는 큰 의미가 없다고도 볼 수 있지만, 회장과 부회장이 동갑인 풍경이 연출될 만큼 경영인들 간 나이의 간극도 좁아지는 시대 흐름을 방증하는 대목이란 평가가 나온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회장과 부회장이 동갑이라면 서로 같은 시대상을 경험하고 공유했다는 점에서 시너지를 낼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삼성은 인사 폭을 크게 갖고 가지 않고 몇몇 주요 자리에만 변화를 줄 가능성도 있다. 노 사장의 부회장 승진에 따른 모바일경험(MX) 사업부장에 대한 신규 선임과 전영현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부회장)이 겸직 중인 메모리사업부장에 대한 인사는 이뤄질 여지가 크다. MX사업부장은 노 사장이 DX 부문장 직무대행을 하면서 함께 맡아왔다. 이 자리를 맡을 만한 차기 인사로는 지난해 사장으로 승진한 최원준 MX사업부 개발실장 겸 최고운영책임자(COO)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새로운 메모리사업부장에는 송재혁 DS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 겸 반도체연구소장(사장)과 황상준 D램 개발실장(부사장)이 하마평에 오르내린다. 최원준 사장은 1970년생으로 올해 55세, 송재혁 사장은 1966년생으로 올해 58세, 황상준 부사장은 1972년생 올해 52세로 세 사람은 모두 50대다. 

    현대차와 LG도 인사 발표를 목전에 두고 있다. 소폭의 인사를 점치는 시각이 지배적이나 그 가운데서 파격이 깃들 가능성도 없지 않다. 현대차는 미국이 자동차에 대한 관세를 15% 부과함에 따라 올해와 내년에 수조 원대의 적자가 발생할 것이란 우려가 안팎에서 나오는 만큼, 이에 잘 대응할 수 있는 인재를 전진 배치할 필요가 생겼다. 그 적임자로 젊은 인사들이 선택받을 가능성이 있다. LG그룹도 인사의 범위를 크게 가져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내부에선 조주완 LG전자 사장과 정철동 LG디스플레이 사장의 부회장 승진 여부가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룹 차원에서 디스플레이, 전장, 2차전지 등 미래 기술을 중심으로 한 조직개편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혁수(55) LG이노텍 대표와 이선주(55) LG생활건강 사장 등 40~50대 젊은 임원이 승진과 함께 전면에 나설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다. 

    젊어지는 CEO 둘러싼 기대와 우려 

    최근 젊은 경영진의 비중이 높아지는 흐름은 대기업의 이야기로만 국한되진 않는다. 시야를 넓혀 살펴보면, 우리 산업계 전반에서 두드러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각종 지표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8월 12일 매출 상위 500대 기업 중 사업보고서를 제출한 369개사의 CEO 517명을 분석한 결과, 올해 CEO 평균연령은 59.8세였다. 2023년 61.1세, 지난해 60.3세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 처음으로 환갑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특히 60대 CEO에서 40대 CEO로 교체한 회사가 많아 평균값을 끌어내린 것으로 보인다. 

    한솔제지는 46세의 한경록 대표가 63세의 한철규 전 대표의 자리를 대신하도록 했다. GS리테일은 48세의 허서홍 대표가, 메리츠화재는 62세의 김용범 전 대표에 이어 지난해부터 48세의 김중현 대표가 수장으로 회사를 이끌고 있다. CEO 중 최연소는 이재상(43) 하이브 대표다. 오너 일가이면서 회사를 경영하는 이들 중에서는 구웅모(36) LT 대표이사 전무와 권혁민(39) 도이치모터스 대표가 30대, 박주환(42) TKG태광 대표와 김슬아(42) 컬리 대표가 40대로 젊다. 

    젊은 경영진을 많이 택한다는 건, 시대와 시장의 요구를 기업들이 수용한 데 따른 결과다. 하루 사이에도 트렌드가 바뀌는 최근 시장 상황에서 젊은 CEO들은 적기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민첩함과 요즘 세대의 관심사를 캐치해 새로운 사업 기회의 문을 열 수 있어, 남다른 경영 감각을 갖췄다는 평가를 대체로 받는다. 또 최근 디지털매체를 바탕으로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린 영향도 크다. 디지털 환경에 둔한 50~60대보단 어린 시절부터 디지털의 태동을 경험하고, PC와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사용에도 익숙한 30~40대들의 시장 이해력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시대 흐름과 시장 환경이 결국 기업들로 하여금 젊은 CEO를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기대만큼이나 우려도 분명히 있다. 젊은 CEO들의 경영은 보통 장기보단 단기에 맞춰지는 경향이 강하다. 당장 주가를 높일 사업을 찾고, 설익은 기술로 무리수를 두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다. 세상을 바꿀 만한 기술과 제품은 장기적 투자와 연구, 개발을 통해 나오는 것이 진리지만, 이를 따를 만한 인내심이 있을지도 분명하지 않다. HD현대가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경영권을 정기선 회장에게 맡기면서도 그 아래 요직에는 60대 베테랑들을 낙점한 것도 세대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 이런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나온 결정으로도 풀이된다. 

    젊음은 전진을 돕는 좋은 동력임에는 틀림없지만, 경험의 양에선 늘 부족함이 있어 약점이 있다. 젊은 CEO들은 그 약점은 감내하고,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앞으로 키워나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우리 산업 전반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젊은 CEO들이 차츰 성장해 나가는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주변의 우려와 스스로의 문제들도 하나씩 풀어나가려는 도전도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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