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호

런던은 어떻게 세계 금융의 심장이 됐을까

[‘돈’으로 본 세계사] 국채 발행으로 글로벌 금융 패권 쥔 ‘런던’

  • 강승준 서울과기대 부총장·경제학 박사·前 한국은행 감사

    입력2025-12-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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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명예혁명 후 왕과 의회 손잡고 ‘국민국가’ 형성

    • 골드스미스 은행, 은행권 시초 ‘금교환증’ 발행

    • 영란은행, 정부에 돈 꿔주고 국채 발행 대행

    • 영국의 ‘파운드화’ 세계의 기축통화 등극하다

    • 세계 금융의 역사는 ‘시티오브런던’의 역사

    17세기 영국 왕실의 주조국이 위치한 런던탑은 상인들에게는 오늘날 공공 금고 역할을 했다. Gettyimage

    17세기 영국 왕실의 주조국이 위치한 런던탑은 상인들에게는 오늘날 공공 금고 역할을 했다. Gettyimage

    매년 국회에서 정부 예산안을 심의하는 시즌이 되면 국가채무 비율이 도마에 오른다. 2026년에는 우리나라 국가채무 비율이 50%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한쪽에서는 “너무 높다. 증가 속도가 빠르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국제 수준과 비교하면 양호하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맞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면, 세계 최초의 국채 발행이 어떤 연유로 이뤄졌는지 살펴보는 것이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영국이 세계 최강국 된 3가지 이유

    16세기까지 영국은 유럽에서도 후진국에 속했다. 당시 영국 경제는 백년전쟁 이후 플랑드르에서 건너온 상인들과 이탈리아계 롬바르드족이 주도했다. 이런 영국이 18세기를 거치면서 세계 최강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해상권 장악을 통한 무역과 상업의 발달이다. 17세기 세계 최고의 무역국인 네덜란드를 집요하게 추격해 따라잡은 것이다. 세 차례 영란전쟁 등 총력전을 펼쳐 이뤄낸 결과였다. 둘째는 실용주의를 통한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다.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셋째는 금융의 발전이다. 전쟁이든 산업이든 모든 것에는 자금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성과는 정부와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민주주의가 정착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이뤘다는 것이 영국의 큰 장점이었다. 왕과 의회가 손을 잡고 국민국가를 형성하면서 정부가 국가 발전을 이끈 것이다. 해상권 장악도 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지만 특히 금융산업의 발달은 정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중심에는 ‘국채’라는 금융상품이 있었다.

    국가가 국채를 발행해 재원을 조달한 것은 이전에 군주가 메디치가나 푸거가 같은 대상인들에게 돈을 꾼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중세 영국의 왕들도 주로 메디치가 등 대상인에게 돈을 빌렸다. 하지만 이들은 빌린 돈을 갚지 않았고, 이는 금융가의 몰락을 가져왔다. 체계적 금융시스템이 갖춰지지 않는 상황에서 군주는 금융가의 무덤이었다. 하지만 국채를 발행하면서 달라졌다. 국채는 은행을 통해 체계적으로 관리됐고, 국가가 원금과 이자 지급을 보증했다. 국가 재정과 금융기관이 연결된 것이다. 국가가 지급을 보증하니 국채는 안정적이고 인기 있는 자산이 됐고, 결과적으로 정부는 낮은 이자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이 역할을 한 곳이 바로 영란은행이다. 최초의 국채 발행이 어떻게 시작됐고, 국채 발행을 담당한 영란은행이 어떻게 설립됐는지 살펴보자.

    영국 최초의 은행 설립자는 금세공업자

    영국에서 은행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영란은행이 설립되기 이전에도 은행이 있었을까. 이야기는 17세기 스튜어트 왕조에서 시작된다.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는 의회 반대로 증세를 할 수 없게 되자, 런던탑에 보관돼 있던 상인들의 ‘금’을 강탈했다. 왕실 주조국이 위치한 런던탑은 영국 최고의 보안 시설로, 상인들에게는 오늘날 공공 금고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상인들은 분노했고, 런던탑에 보관했던 금을 빼내서 사설 금고를 갖고 있던 민간 금세공업자, 즉 골드스미스(goldsmith)에게 맡겼다. 이렇게 해서 골드스미스 은행이 생긴 것이다. 



    골드스미스의 은행업은 저축 업무로 시작했다. 예금주가 금이나 금화를 맡기면 금세공업자는 보관 수수료를 받고 표준 양식의 금교환증을 발행해 주었는데, 이는 이슬람 세계에서 발달한 어음과 유사한 것으로, ‘은행권(bank note)’의 시조였다. 금세공업자에게 금화를 맡겨놓은 상인들은 상거래를 할 때 금화 대신 금교환증을 주고받았다. 이것을 골드스미스 은행에 가져가면 즉시 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언제든지 금교환증을 제시하면 실제 금이나 금화로 교환해줘야 하는 완전한 지급준비금 체계로 운영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금세공업자들은 금교환증을 가져와 실제 금으로 교환하는 예금주들이 극히 적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이들은 금고 안에서 잠자고 있는 금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이 찾아오면 금을 빌려주거나, 금교환증을 주고 이자 수익을 챙겼다. 대출 업무를 시작한 것이다. 점차 수익이 늘자 은행은 예금을 확대하기 위해 예금에 이자를 붙여주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골드스미스 은행은 예금 업무와 대출 업무를 동시에 하는 오늘날 은행업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은행업(대부업)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골드스미스 은행을 은행의 기원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골드스미스 은행의 등장이 세계 금융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은행권의 시초라 할 수 있는 금교환증을 발행해 유통시켰고, 예금과 대출을 통해 신용 창출 기능을 수행했다. 본격적인 은행업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런던에 있는 영국 중앙은행의 효시인 영란은행. Gettyimage

    런던에 있는 영국 중앙은행의 효시인 영란은행. Gettyimage

    중앙은행의 효시, 영란은행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의 설립은 명예혁명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세기 후반 유럽의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1672년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네덜란드를 침공한다. 네덜란드와 해상권 경쟁을 하던 영국은 프랑스 편에 섰다. 프랑스·영국·독일 공국 연합군과 네덜란드·에스파냐·신성로마제국 연합군 간의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제3차 영란전쟁’이라고 하는 전쟁이다. 네덜란드 측 연합군 사령관은 오렌지공 빌럼(윌리엄)이었고, 세파르디계 유대인들이 그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6년간의 긴 전쟁 끝에 빌럼은 루이 14세의 야망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그 후 영국에서는 1688년 영국 의회의 양당이 하나가 돼 제임스 2세를 끌어내리고 네덜란드의 빌럼과 메리 부부를 국왕으로 추대하는 명예혁명이 발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전까지 적국이었던 나라의 왕을 자기 나라의 왕으로 추대한 것이다. 이는 왕과 의회의 대결을 종식하고 의회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의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무혈혁명으로 인해 재정 수요가 급증하는 일이 발생한다. 프랑스로 망명한 제임스 2세는 프랑스 군대를 앞세워 복위를 노렸고, 급기야 1690년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프랑스 함대에 패하면서 영국은 강력한 해군 재건이 시급해진 것이다. ‘창문세’ 등을 부과해 세금을 늘렸지만, 전비를 마련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자 1692년 국채를 발행한다. 그동안 왕실의 엉성한 대부 방식을 체계적이면서도 명확한 정부 채권 매매 방식으로 대체하고, 의회가 국채에 대한 원금과 이자 지급을 보장하도록 했다. 이런 조치로 인해 국채의 안정성이 높아지고 국채의 인기가 상승했다. 하지만 시중에는 국채를 소화할 충분한 자금이 모이지 않았고, 국채를 통한 전비 마련은 머나먼 길이었다.

    지지부진하던 국채 발행 문제를 해결해 준 사건이 바로 1694년 영란은행의 설립이었다. 은행이 정부에 돈을 꿔주고 국채 발행을 대행한 것이다. 국채는 영구채로서, 정부는 원금을 갚을 필요 없이 매년 8%의 이자만 지급하면 됐고, 이자 지급은 선박세와 주세로 담보됐다. 영란은행은 대출에 대한 반대급부로 정부로부터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냈다. 은행은 정부에 돈을 대출해 주면서 일부는 은행권 형태로 지급했다. 정부는 이 은행권을 이용해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사들였고, 은행권은 시장에서 돈처럼 유통됐다. 국채와 화폐의 발행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영란은행이 국채 업무를 전담하면서 정부는 전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상인들은 정부로부터 이자 수입을 안정적으로 챙기는 은행가로 변신했다. 모두에게 윈-윈 게임이었다. 영란은행의 설립에는 상인들을 대표해 영란은행 설립 법안을 주도한 윌리엄 패터슨의 역할이 컸다. 패터슨 뒤에는 시티 상인들로 구성된 신디케이트가 있었고, 여기에는 많은 유대인 상인이 가입돼 있었다. 국채 발행으로 조성된 자금 대부분은 해군력 강화에 사용됐다. 전함 건조를 위해 철강업과 같은 중공업의 육성이 필요했고, 이는 영국의 산업구조에 변화를 불러왔다. 영란은행의 설립, 국채 발행의 선순환을 통해 1707년 결성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은 강력한 해군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은 이를 바탕으로 전 세계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식민지 개척에 박차를 가한다.

    파운드화와 금본위제

    영란은행은 1694년부터 은행권, 즉 지폐를 발행해 왔다. 최초의 지폐는 수기로 제작한 것이었고, 인쇄기로 찍어낸 지폐는 1725년부터 발행됐다. 인쇄된 지면에 은행장이 수기로 서명해 지급을 보증했다. 서명까지 인쇄돼 나온 지폐는 1855년부터 발행됐다.

    영국의 화폐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은 19세기 초 금본위제의 채택이었다. 금본위제는 한 국가의 통화량이 금의 보유량에 의존하는 시스템, 쉽게 말해 금을 화폐의 근본으로 삼는 시스템을 말한다. 영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하기 전까지는 은을 기준으로 삼는 은본위제도, 그리고 금과 은을 동시에 기준으로 삼는 복본위제를 운용했다. 금은 너무 비싸서 일반 거래에는 은화를 사용했다. 고대 로마의 데나리우스, 8세기 때 샤를마뉴가 도입한 페니(데니어), 에스파냐 달러, 그리고 19세기에 존재한 독일의 탈라 등이 모두 은 주화였다. 금 주화는 국제무역 결제에서나 사용됐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금본위제가 도입되고 정착된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당시 영국의 대외 거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18세기 브라질 금광에서 발견된 대규모 금의 유입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청나라와의 무역적자로 영국의 은이 중국으로 계속 유출된 것이다. 쉽게 말해, 금은 풍년인데 은은 씨가 마른 것이다. 여기에 전쟁과 무역 확대로 금을 장악하게 된 영국과 영란은행의 이해타산도 금본위제 도입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19세기 초 영국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금은 복본위제도에서 금본위제로 전환했다. 첫 번째 조치는 21실링(기니)을 7.32g의 순금을 가진 20실링 금 소버린으로 대체한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브리튼 금 소버린(1파운드)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유통된 주화였다. 두 번째는 1819년 현금지급조례를 제정해 1823년부터 영란은행권(파운드화)을 소버린 금화로 교환할 수 있게 했다. 세 번째는 1844년 ‘필 은행 조례’를 제정해 영란은행이 보유한 금 보유량과 영란은행이 발행할 수 있는 은행권 총량 사이에 비율을 정하고 다른 은행들의 지폐 발행을 금지한 것이다. 영국은 이렇게 금과 파운드화를 하나로 묶는 금본위제를 정립했다. 파운드 지폐의 금 태환이 법으로 보장되자 사람들은 비로소 종이화폐를 완전한 화폐로 인정했다. 파운드화가 세계의 기축통화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유대인과 영국 금융의 발전

    고대로부터 유대인들은 대대로 무역과 대부업에 종사했고, 그들의 지식과 노하우를 후손들에게 전수해 왔다. 암스테르담과 뉴욕 등에서 활약한 유대인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런던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데에도 이러한 유대인들의 공이 컸다.

    유대인들은 13세기 말 에드워드 1세 때 영국에서 추방당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볼 수 있듯 16세기에도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을 다시 영국으로 불러들인 사람은 청교도혁명에 성공한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네덜란드의 유대교 랍비인 마나세 벤 이스라엘이 올리버 크롬웰을 만나 유대인의 영국 재입국을 청원했고, 크롬웰은 이를 받아들였다. 성경을 중시하고 성실한 노동을 통해 이룩한 부를 존중하는 등 여러 면에서 청교도와 유대교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빌럼이 영국에 상륙했을 때 많은 유대인이 그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 당시 영국으로 건너간 네덜란드인은 3만 명 정도였는데, 이 중 유대인이 8000명 정도 됐다. 그들 대부분이 상인이나 금융인이었다. 빌럼은 윌리엄 3세 왕이 된 후 유대인에게 포용 정책을 펼쳤다. 덕분에 유대인들은 어려움 없이 영국 사회로 진입할 수 있었고, 유대인들은 그들을 받아준 나라에 경제발전으로 보답했다.

    경제적 측면에서 올리버 크롬웰의 공적은 항해조례의 공표를 비롯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시티’라고 하는 경제특구 ‘시티오브런던(City of London)’의 조성이다. 이곳은 지금의 지하철 뱅크(bank) 역을 중심으로 1제곱마일(약 2.59㎢)에 불과한, 여의도 크기보다도 작은 지역이다.

    시티의 경제와 금융은 17세기 유대인들이 쇄도하면서 더욱 활성화됐다. 이미 중세 때부터 이곳에 은행을 열었던 이탈리아 상인들은 금융의 패권을 놓고 유대인들과 경쟁했다. 1571년 왕립거래소를 시작으로, 1691년엔 로이드보험의 전신인 로이드 커피하우스, 1694년엔 영란은행이 시티에 들어섰다. 시티는 전 세계의 자금을 빨아들였다. 유럽의 큰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시티에 지점을 냈고, 세계의 주요 외환·주식·파생상품·선물 거래 등이 시티 안에서 이루어졌다. 세계 금융의 역사는 ‘시티오브런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티는 세계 금융의 심장부가 됐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세계 금융의 심장 구실을 한 ‘시티오브런던’. Gettyimage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세계 금융의 심장 구실을 한 ‘시티오브런던’. Gettyimage

    영국에 정착한 유대인 로스차일드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유대인 가문은 로스차일드가다. 이 가문의 일원 중 시티에 자리를 잡은 이가 네이선 로스차일드인데, 그의 아버지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게토 출신의 마이어 암셀이다. 그가 국제금융업에 뛰어든 것은 18세기 말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자금 수요가 증가하고 무역 규모가 확대되면서 지급결제가 대폭 늘어났고, 한편으로는 나폴레옹전쟁이 일어난 시기다. 마이어 암셀이 살던 게토의 집에는 붉은 방패(red shield) 간판이 달려 있었는데, 여기서 그들의 성, 로스차일드(Rothschild)가 나온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폴레옹전쟁 때 엄청난 부를 쌓는다.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자 영국 경제도 혼란 속에 빠졌고, 이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네이선은 영국 정부가 전비 마련을 위해 2000만 파운드의 국채를 발행할 때 국채 사업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으로 금융업을 시작한다. 19세기 초 네이선은 영란은행의 주주가 됐고, 자신의 재력과 권한을 활용해 전쟁 시 가장 중요한 금을 확보하면서 그 유통도 장악해 나갔다. 1814년 네이선은 영국 정부로부터 유럽 대륙에서 금과 은을 최대한 많이 모아 영국군 총사령관 웰링턴 장군에게 전달하라는 임무를 맡는다. 그는 엄청난 양의 금을 확보했고, 금 시세차를 이용해 부를 늘려갔다. 당시 유럽 금 유통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됐다.

    19세기 세계 최강국이 된 영국

    1815년 세계 역사의 운명을 결정할 전쟁이 브뤼셀 근교의 워털루에서 벌어졌다. 나폴레옹은 영국의 웰링턴이 지휘하는 연합군에 패한다. 네이선은 이 소식을 영국 왕실보다 먼저 입수했다. 하지만 네이선은 오히려 영국 국채를 내다 팔았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영국이 패배했다고 생각해 앞 다투어 영국의 국채를 내다 팔았다. 국채와 주식 가격이 폭락해 순식간에 휴지 조각이 되자, 네이선은 채권과 주식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다음 날 영국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국채와 주식은 다시 천정부지로 뛰었다. 네이선은 이날 이 사건으로 천문학적 매매차익을 챙겼다. 이 돈으로 네이선은 영란은행 주식 대부분을 사들였고, 영국의 화폐 발행과 금 가격을 포함한 주요 결정권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영국을 샀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 후 로스차일드가는 미국으로도 진출한다. 미국의 거부 JP모건의 돈줄이 로스차일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로스차일드와 모건가는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유대인 가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타격을 받고 2선으로 후퇴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들은 대리인들을 통해 세계 금융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국 정부가 전비 마련을 위해 국채 발행을 시작했지만, 아이러니하게 국채의 확대로 런던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가 됐다. 많은 국가가 런던에 지점을 개설하고 채권을 발행했다. 세계의 돈이 런던으로 몰려들었다. 영란은행 설립 당시 120만 파운드였던 국채는 1783년에 2억5000만 파운드, 1815년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시점에는 8억2000만 파운드로 급증했다. 국내총생산(GDP)의 250%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때 확보한 자금을 바탕으로 영국은 세계 해상권을 장악하고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이 됐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전쟁이 끝나고 빅토리아 여왕의 ‘팍스 브리태니카’ 시대가 열렸다. ‘해가 지지 않는 영국’, 초강대국 영국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세계 정세가 안정되자 영국은 정부 주도의 정책 방향을 선회해 자유무역과 시장경제를 추구했다. 정부지출을 줄이는 동시에 소득세 등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면서 국채 규모를 대폭 축소했다. 이후 영국의 시장자본주의는 전 세계로 확대되고, 파운드화는 한 세기를 풍미한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세계 무역 거래는 대부분 파운드화로 결제됐고, 시티는 세계 금융의 심장이 됐다. 

    그렇지만 달도 차면 기운다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했고, 영국의 위상은 점차 하락했다. 뉴욕이 시티를 제치고 세계 제일의 금융시장이 됐다. 1944년에 브레턴우즈체제가 들어서면서 파운드화는 기축통화의 지위를 미(美) 달러에 넘겨주었다. 하지만 시티는 죽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시티는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서 건재하다. 예전처럼 독보적 존재감은 없어졌지만, 위기 때마다 금융혁신을 통해 변신하면서 뉴욕·홍콩 등과 함께 세계의 금융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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