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호

침묵 강요하는 ‘입틀막 사회’에 외치는 “카르페 디엠!”

[황승경의 Into The Arte]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90)

  • 황승경 예술학 박사·문화칼럼니스트 lunapiena7@naver.com

    입력2025-12-1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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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답과 규율로 이뤄진 학교에 부임한 키팅

    • 자유를 향한 외침 “오늘을 붙잡아라”

    • 닐의 죽음, 영혼이 소모되는 사회의 초상

    • 떠나는 키팅, 교실에 심은 자유·존엄

    • “대장님”은 함께 길을 찾는 사람…우리는?

    미국의 명문 사립학교 웰튼 아카데미. 이곳에 새로 부임한 영어 교사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이 학생들을 처음 만나 책상 위에 올라선다. IMDB

    미국의 명문 사립학교 웰튼 아카데미. 이곳에 새로 부임한 영어 교사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이 학생들을 처음 만나 책상 위에 올라선다. IMDB

    2025년 11월 14일 금요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다음 날이다. 오랜만에 늦잠을 자는 청소년들, 붐비는 분식집과 노래방, 그리고 “이제 자유”라는 광고 문구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오래가지 않는다. 대학 입학 원서를 쓰는 시기가 오면 성적에 따라 어떤 학교를 지원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표가 교실 한복판에 붙는다. 유튜브 등 온라인에는 재수학원 광고가 넘친다. 입시는 끝났지만, 그 그림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열여덟의 청소년은 ‘성인’으로 불리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정답을 외우며 자란 이들은 대학에서도, 사회에서도 또 다른 시험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입시가 끝나면 경쟁도 끝날 줄 알지만, 세상은 또 다른 시험지를 내민다. 이름만 달라진 경쟁과 서열, 복종의 세계. 교육은 인간을 기르는가, 아니면 인간을 점수로 환원하는가. 그 질문이 떠오르는 밤, 한 편의 오래된 영화가 다시 떠오른다.

    규칙에 저항하는 사람 그리는 감독 피터 위어

    피터 위어(81) 감독의 ‘죽은 시인의 사회’다. 영화의 각본가 톰 슐먼(75)은 자신의 학생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슐먼은 이 영화로 1990년 아카데미 오리지널 각본상을 받았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의 명문 사립학교 웰튼 아카데미. 이곳에 새로 부임한 영어 교사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이 학생들에게 “카르페 디엠(Carpe Diem·오늘을 붙잡아라)”이라고 말하며 정답과 규율로 봉인된 교실에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등장인물 ‘닐 페리(로버트 숀 레너드)’가 연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요정 ‘퍽’ 역을 맡아 연기하고 있다.  IMDB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등장인물 ‘닐 페리(로버트 숀 레너드)’가 연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요정 ‘퍽’ 역을 맡아 연기하고 있다.  IMDB 

    학생들은 밤마다 몰래 모여 시를 낭독하는 비밀 모임 ‘죽은 시인의 사회’를 만든다. 그러나 그 자유의 끝은 너무 빨리 찾아온다. 연극을 사랑하던 학생 ‘닐 페리’(로버트 숀 레너드)은 연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요정 ‘퍽’ 역을 맡아 꿈을 이룬다. 하지만 연극이 끝나자마자 아버지에게 끌려가며 학교를 떠난다. 

    닐의 아버지는 당장 다음 날 닐을 사관학교에 입학시키겠다고 통보한다. 이에 닐은 압박감과 절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연극용 소품이던 가시관을 머리에 쓴 뒤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 사건으로 키팅은 학교에서 쫓겨난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학생들은 책상 위에 올라서 “대장님(Oh Captain, My Captain)”을 외친다. 그것은 존경의 표현이 아니라, 억압된 세계에 대한 첫 저항의 언어였다. 영화가 던진 질문은 자연스레 이 작품을 연출한 감독에게 이어진다.

    피터 위어 감독은 호주 태생이다. 그는 1970년대 ‘호주 뉴웨이브’라고 불린 젊은 감독들과 함께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사회의 규칙, 그리고 그 규칙의 틈새를 발견하고 흔드는 사람이 자주 나온다.

    ‘피크닉 앳 행잉 록’(1975)에서는 규칙이 엄격한 여학교의 학생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사건을 통해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속에 숨겨진 욕망과 긴장을 보여준다. ‘갈리폴리’(1981)에서는 전쟁 속에서 젊은이들이 국가를 위해 희생되는 비극을 담는다. ‘위트니스’(1985)에서는 복잡한 현대사회 속에서 순수한 공동체인 ‘아미시(미국의 기독교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고, ‘트루먼 쇼’(1998)에서는 현실이 거대한 상품이 된 세계에서 자유를 찾으려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 위어의 영화는 항상 ‘체계에 저항하는 사람’을 그린다. 그의 작품은 겉으로는 조용하고 아름답지만 그 안에는 언제든 터질 수 있는 균열과 긴장이 숨어 있다.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이 학교를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학생들이 책상 위에 올라 “대장님”을 외친다. IMDB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이 학교를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학생들이 책상 위에 올라 “대장님”을 외친다. IMDB

    위어 감독은 큰 폭발이나 거센 반항보다 조용하게 틀을 벗어나는 순간을 그린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정해진 규칙 속에서 숨겨진 감정을 깨닫고, 그 작은 깨달음이 천천히 세상의 질서를 흔들기 시작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교실은 그의 세계관의 완벽한 축소판이다. 게일 놀런 교장(노먼 로이드)은 제도와 권위의 얼굴이고, 교사는 규율의 전달자다. 그러나 키팅이 등장하면서 교실은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로 올라서라고 한다. 시점 하나가 바뀌면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 이 단순한 행동 안에 피터 위어가 말하는 자유의 모습이 응축돼 있다. 자유란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만의 시선을 잃지 않는 능력이다. 

    위어의 연출은 절제돼 있다. 교실의 차가운 대리석 복도, 닐이 연극 연습을 하던 무대 위의 조명, 동굴 속에서 울리는 시 낭독 소리. 모든 장면은 빛과 어둠의 대비 속에서 움직인다. 그는 드라마틱한 대사보다는 조용한 공간을 찍는다. 그 고요 속에서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정신이 싹튼다.

    로빈 윌리엄스, 웃음으로 슬픔을 감싼 배우 

    로빈 윌리엄스(1951~2014)의 얼굴에는 언제나 웃음과 눈물이 함께 있었다. 그는 1970~80년대 미국 코미디를 대표하는 배우였고, 즉흥과 재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피터 위어는 그 웃음 뒤에 드리운 외로움을 보았다. 2014년, 로빈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목소리와 시선은 여전히 누군가를 일으켜 세운다. 닐의 죽음이 키팅을 학교 밖으로 밀어냈듯, 로빈의 부재는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어떤 언어로 타인을 이끌고, 어떤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는가. 키팅의 미소는 유쾌하지만 그 안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다. 그는 웃으며 말한다. “카르페 디엠.” 이 말은 가벼운 낭만이 아니라, 삶을 진심으로 응시하라는 초대다. 로빈의 연기는 절제돼 있다. 큰 몸짓 대신 교탁에 기대거나, 학생 곁을 스치며 전하는 시선 하나로 마음을 건넨다. 감정은 폭발하지 않고 여백 속에서 울린다. 

    책상 위에 오르는 장면조차 명령이 아닌 제안이다.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겠니?” 이 겸손한 제스처가 영화를 단순한 교사 이야기에서 사유의 영화로 만든다. 그는 구원자가 아니다. 타오를 작은 불씨 하나만 남기고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퇴장은 비극이 아니라 완성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연출한 피터 위어(81) 감독. 뉴시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연출한 피터 위어(81) 감독. 뉴시스 

    영화의 감정은 토드 앤더슨(에단 호크)과 닐의 이야기를 통해 깊어진다. 토드는 형의 성취에 눌린 내성적인 소년이다. 키팅은 그에게 시를 낭독해 보라 권한다. 키팅은 토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실은 목청을 낮추지 않는다.” 토드는 조금씩 용기를 내 시를 읽는다. 떨리는 숨이 언어가 되고, 언어가 세계를 연다. 그 순간 교육은 암기가 아니라 탄생이 된다. 

    반면 닐은 재능과 열망을 지녔지만, 아버지의 권위 속에서 점점 질식한다. 무대 위 미소는 찰나의 해방일 뿐, 조명이 꺼지면 현실이 돌아온다. 닐의 죽음을 감독은 과장 없이 담는다. 열린 창, 흩날리는 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닐의 아버지는 “너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그 말 속 ‘너’는 모호하다. 아이의 꿈인가, 부모의 욕망인가. 사랑은 명분이 되고, 명분은 통제로 변한다. 위어는 고요하지만 단호하게, 교육이란 미명하에 행사하는 폭력의 얼굴을 드러낸다.

    정답 찾는 대신 질문하는 법 가르친 키팅 

    한국 관객에게 이 영화는 단순한 입시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영화의 초점은 점수나 대학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어떻게 다음 세대로 복제되는지에 관한 질문이다. 웰튼 아카데미는 미국 상류층의 사립학교이자 사회적 지위를 연결하는 통로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질문하는 법이 아닌, 이미 정해진 ‘올바른 답’을 말하는 법을 배운다. 한국의 입시가 생존의 장이라면, 웰튼의 교육은 계급을 유지하는 장치다. 

    1980년대 말, 미국은 신자유주의의 기세 속에서 성취가 인격이 되고, 효율이 미덕이 되던 시대였다. 위어는 자유가 규율의 이름으로 포장되는 장면을 보았고, 그 위선은 오늘의 한국과도 겹친다. 닐의 죽음은 한 소년의 비극이 아니라, 성공이라는 이름 아래 영혼이 소모되는 사회의 초상이다.

    카르페 디엠은 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생각하는 용기다. 키팅의 교실은 빛과 숨결이 머무는 공간, 강요된 지식이 사라지고 자유의 감각이 태어나는 장소다.

    퇴장을 앞둔 키팅을 향해 학생들이 책상 위에 올라 “대장님”을 외칠 때, 그것은 복종이 아니라 동행의 언어다.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이 링컨 대통령 사망 후 그를 애도하는 시 ‘Oh Captain My Captain’에서 따온 ‘Captain(대장님)’은 지식을 주는 손이 아니라, 함께 길을 찾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장면에서 교실은 민주주의의 모형이 된다. 정답을 요구하는 교실은 질문하지 않는 시민을 만든다. 질문이 사라진 교실은 질문이 사라진 사회를 만든다.

    학교는 키팅을 불편한 가시처럼 여겼다. 학생에게 질문하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키팅을 학교에서 쫓아냈으나 이미 늦었다. 학생들은 변해 있었다. 자유는 한번 경험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교실에서 시작해 결국 사회의 풍경으로 이어진다. 책상 위에 올라선 소년들의 발끝은 단순히 교사를 향한 존경이 아니라 스스로 서고자 하는 첫 시도였다. 그래서 이 영화는 35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받는다. 

    영화 속에서 키튼이 속삭인 “오늘을 붙잡아라”는 말은 권력을 쥐거나 다른 자리로 향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눈을 뜨고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며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다시 표현해 보라는 권유다. 

    영화 속 교실에는 늘 오후 햇빛이 비스듬히 비춘다. 오래된 책상은 줄지어 놓여 있다. 키팅은 교탁을 버리고 학생들 사이에 서서 말을 건넨다. 아이들은 숲으로 나가 촛불 아래 시를 속삭이고, 밤공기 속에서 두려움과 설렘을 함께 배운다. 조용한 순간이 이어지며 교실의 공기는 천천히 변화한다. 어느 날 문득 책상다리가 날개인 듯 보이고, 세상은 정답 대신 가능성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마지막 책상 위 장면은 갑작스러운 반항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인 깨달음의 결실이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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