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北 견제 위해 핵추진잠수함 필요”
40여 년 이어진 진보의 반미 정서 균열
문재인식 ‘친중반일’ 이젠 안 통해
반사이익 누리던 보수, 이대로는 안 돼
이재명 대통령이 11월 14일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에서 한미 양국 간 합의 내용이 담긴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 작성 완료를 알리며 이같이 말했다. 이 대통령은 11월 23일 튀르키예 언론 ‘아나돌루’와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NPT(핵확산금지조약) 체제 아래서 핵무기 확산을 막고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만 이용한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지지하고 있다”면서도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 정부는 국민의 안전을 무엇보다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있다”고 밝혔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기점으로 나타난 일련의 행보에서 이재명 정부의 성격이 명료하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 적대적이고 중국·북한에 우호적인 진보진영의 관성을 무작정 따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황금 왕관’을 선물하며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바 있다. 관세 협상에서 목표를 상당 부분 관철했고, 핵추진잠수함 건조도 승인받았다. 특히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 핵추진잠수함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발언했다고 알려졌는데, 그동안 진보진영 출신 대통령에게서 들을 수 없던 말이었다. 자연스레 보수진영에서도 호평이 나왔다.
40여 년 이어진 진보의 반미 정서 균열

이재명 대통령이 11월 14일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에서 한미 양국 간 합의 내용이 담긴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 관련 발표를 하고 있다. 뉴스1
반미 운동의 열기는 신군부가 물러난 뒤에도 식지 않았다. 오히려 걸핏하면 일어나는 주한미군 관련 사건·사고가 국민의 반미 감정에 불을 붙였다. 1992년 경기 동두천 기지촌에서 윤금이 씨가 미군 이병 케네스 마클에게 살해당했다. 사건 현장은 대책위원회도 사진 공개를 고민했을 만큼 참혹했다. 2000년 서울 이태원에서는 미군 상병 크리스토퍼 매카시가 술집 여종업원을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가장 많은 공분을 일으킨 사건은 2002년 6월 13일 경기 양주에서 발생했다. 월드컵 열기로 뜨거웠던 그날, 두 명의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것이다. 주한미군은 “우발적인 사고였고 누구에게도 책임질 만한 과실이 없다”고 발뺌했고, 미군 피고인 두 명은 모두 무죄 평결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2000년대 반미 감정은 국내 요인으로만 형성된 것은 아니다. 미국은 2001년 9·11테러를 겪은 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등지에서 전쟁을 전개하며 세계 질서를 뒤흔들었다. 미국이 일으킨 전쟁은 전 세계 사람들의 의분을 자극했다. 조지 W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한국에 이라크 파병을 압박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와 동시에 거센 압박에 직면했다. 진보진영 내에서 “명분 없는 침략 전쟁”이라는 반발이 일었지만 거부할 방도가 없었다. 노무현 정부는 결국 이라크 치안 유지와 재건을 목적으로 자이툰부대 파병을 결정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도 곤욕을 치렀다. 되돌아보면 세계화와 글로벌 분업이 고도화하는 시점에 한미 FTA 체결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 개인에게 한미 FTA는 비극이었다. 진보진영은 “미국에 경제주권을 내줬다”며 그를 맹비난했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로 그의 지지층은 사실상 해체됐다. 처음부터 지지기반이 단단하지 않았던 노 전 대통령은 쓸쓸하게 임기를 마쳐야만 했다.
문재인식 ‘친중반일’ 이젠 안 통해

2019년 8월 2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긴급 국무회의에서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며 강경 대응 의사를 밝히고 있다. 뉴시스
그런데 2010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2경제대국으로 떠오른 중국이 숨겨둔 발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시진핑 체제에 이르러선 주변국을 향한 위협이 한층 강화됐다. 한국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이후 진행된 일련의 압박 속에서 그러한 위협을 체감할 수 있었다.
외교적 압박보다 반중 정서를 자극한 건 일상에서 빚어진 마찰이었다. 대표적 사례가 미세먼지다. 중국의 산업이 성장할수록 한반도로 날아드는 미세먼지도 기승을 부렸고, 국민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대선을 앞두고 미세먼지 공약을 내걸었고, “중국에 할 말은 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집권하자 말이 달라졌다. “미세먼지의 절반 이상이 한국에서 발생했다”고 강조한 것이다. 물론 미세먼지의 책임이 100% 중국에 있었다고 할 순 없다. 전 세계가 중국에 공장을 지었고, 그 공장에서 배출된 매연이 우리에게 날아든 측면이 있다. 하지만 미세먼지가 중국에서 온 게 아니라고 하는 건 결이 다른 이야기다.
미세먼지만 문제는 아니었다. 중국에 대한 ‘저자세 외교’도 국민의 분통을 터뜨렸다. 문 전 대통령은 2017년 12월 15일 중국 베이징대 연설에서 한국을 “작은 나라”로 낮추고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 “대국”으로 높이며 “중국몽에 함께하겠다”고 했다. 물론 연설에서 자국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말은 할 수 있다. 전날 문 전 대통령의 국빈 방문 행사에서 한국 언론인들이 중국 경호원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한 사실만 없었다면 말이다. 당시 중국 외교부는 “한국 주최 행사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외면했다. 문 전 대통령은 그런 상황에서 “중국몽”을 이야기했다.
중국에 한없이 너그러웠던 진보진영은 일본에는 대단히 엄격했다. 2019년 일본은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빌미로 반도체 원자재 수출 규제를 단행했다. 문재인 정부와 여당은 즉각 반기를 들었다. 문 전 대통령은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며 결의를 다졌고,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조국 전 조국혁신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죽창가’를 소셜미디어에 게시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앞다퉈 ‘노 재팬’ 캠페인을 벌였다.
그래서일까. 최근 민주당 의원들이 경쟁적으로 이른바 ‘혐중 발언 처벌법’을 발의하자, 이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여권의 과거 행보와 대비된다는 이유에서다. “반미 시위나 ‘노 재팬’ 운동을 주도하던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혐중은 잘못됐다’며 중국에 대한 과한 비난을 징역형으로 처벌하겠다는 것이냐”는 비판이 나온다.
반사이익 누리던 보수, 이대로는 안 돼

보수성향의 단체들이 9월 19일 서울 종로구 일대에서 ‘반중 시위’를 하고 있다. 뉴스1
“저는 다카이치 총리가 개별 정치인일 때와 일본 국가 경영을 총책임질 때의 생각과 행동은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저도 야당 지도자일 때와 온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일 때 판단과 행동이 달라야 한다. 정치는 전쟁이 아니지 않으냐.”
빈말이 아니다. 이 대통령은 8월 19일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인터뷰하면서도 비슷하게 답했다. 심지어 박근혜·윤석열 정부가 일본과 맺었던 합의에 대해 “국가로서의 약속이므로 뒤집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진보성향 시민단체들은 반발했지만, 이 대통령이 정면 돌파를 택하니 민주당도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이 대통령은 외교 행보가 거듭될수록 그간 자신에게 씌워졌던 반미·반일·친중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있다. 그는 후보 시절부터 줄곧 국익 중심 실용 외교를 강조했다. 외교는 결과로 보여주는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은 한국을 소국으로 낮추면서까지 중국몽에 동참했으나 한한령을 풀어내지 못했고, 윤석열 전 대통령은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앞에서 ‘아메리칸 파이’를 열창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반면 이 대통령은 관세 협상 등에서 우려했던 것보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나가고 있다.
국민의힘은 그간 진보진영의 반미·반일·친중 기조에 반사이익을 누린 측면이 있었다. 외교 문제에서 나타난 진보진영의 이념적 경직성은 중도층의 반감을 살 수밖에 없었고, 그 반감의 일부는 보수진영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제는 녹록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을 “피스메이커”로 치켜세우고, 사나에 총리를 “같은 생각 가진 훌륭한 정치인”으로 평가하는 이 대통령에게 반미·반일 딱지를 붙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국민의힘은 ‘중국인 3대 쇼핑(의료·선거·부동산) 방지법’을 발의하는 등 반중 정서에 기대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당장은 호응이 있을지 모르지만 지나치면 어느 쪽이든 반감을 사게 마련이다. 이 대통령은 외교를 자신의 중도 확장 무대로 삼고 있다. 그가 반미·반일·친중이라는 진보진영의 기존 관성을 깨뜨릴수록 국민의힘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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