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현대경제연구원은 특급 싱크탱크?

‘MJ노믹스’ 만드는 사람들

  • 글: 김기영 hades@donga.com

    입력2002-11-04 13: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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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파트 절반 값 공급, 2층 고속도로 건설, 금융실명제 즉각 실시, 30~40대 여성장관 기용…. 92년 대선에서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였던 정주영의 공약들이다. 정몽준은 어떤 공약으로 아버지의 ‘명성’을 이을까. ‘MJ노믹스’를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현대경제연구원은 특급 싱크탱크?

    정몽준 의원의 가장 큰 재산은 ‘월드컵 성공개최의 일등공신’이라는 평가다.

    정몽준(鄭夢準) 의원은 가진 것이 많은 정치인이다. 단지 재력(財力)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정의원 주변에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정의원에게는 사람이 없다. 사람은 많지만 그가 마음을 터놓고 상의하고 일을 맡기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뜻이다.

    정의원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꼽는다. “낯을 너무 가린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함께 지낸 사람이 아니면, 더구나 생소한 인물에게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사람을 뽑을 때도 대단히 신중하다.

    정의원은 비서진 한 명을 뽑을 때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 몇 달씩 결정을 미루기도 한다. 사실상 채용결정이 나도 출근 날짜를 정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 사이 정의원과 친한 인사들이 채용 예정자를 만난다. 이런 식으로 아는 사람을 통해 채용 예정자를 만나보게 하고 그들의 평가를 들어본다는 것.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채용 예정자는 정의원으로부터 “식사나 같이하자”는 연락을 받는다. 괜찮은 식당에서 단둘이 만난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정의원은 “같이 일해보자”며 출근 날짜를 통보한다.

    비서진 한 명을 뽑을 때도 여러 사람을 통해 선을 보게 하고 최종적으로 자신이 직접 만나 식사를 하는 신중함. 정의원의 신당창당 작업이 더딘 것도 이런 신중함과 낯가림 때문이다.

    낯가림 심한 정몽준



    사람에 대한 신중함과 낯가림은 공식적인 관계보다 비공식적인 관계를 선호하는 성향을 낳기도 한다. 정의원의 경우에도 그렇다. 신당창당과 동시에 대통령선거를 준비해야 하는 정의원이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는 두 가지다. 신당을 함께 할 사람을 모아야 하고, 국민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정강정책과 대선공약을 만들어야 한다.

    사실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하자면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한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조직원이 총동원돼 매달려도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기가 쉽지 않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정몽준 의원이 신당창당 선언을 할 때 정가에선 앞날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예상을 했었다. 이런 어려움에 더해 정의원의 신중함이 일의 진행에 적지 않은 장애가 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정의원 측근 그룹과 영입인사 사이의 갈등으로 일부 인사가 신당행을 포기하는 등 창당작업이 시작부터 삐그덕거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이런 혼란 속에 과연 정몽준 의원만의 차별화된 집권공약, 이른바 ‘MJ노믹스’는 가능할 것인가. 9월17일 대선출마선언을 하면서 정의원은 집권공약을 이렇게 소개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은 결국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교육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교육에 대한 투자를 과감히 늘리겠습니다. 교육이야말로 우리나라의 희망 아니겠습니까?”

    교육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선언한 뒤 정의원은 “외교, 안보, 경제, 농어업, 문화, 사회, 여성, 환경 등 각 분야에 포부와 비전을 갖고 있지만 구체적 생각들은 정치개혁방안과 함께 신당이 창당되면 말씀드리겠다”고 덧붙였다.

    정의원이 제시한 일정대로라면 MJ노믹스는 신당창당과 함께 공개돼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쯤 신당추진위 정책팀에서 정강정책과 대선공약 수립 작업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의원의 대선공약과 정책은 신당추진위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듯하다. 체계를 갖춘 조직이 아닌, 정의원과 개인적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당추진위의 한 관계자는 “여러 곳에서 나누어 정책수립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신당추진위 정책팀은 이렇게 각각의 분야에서 진행하는 작업을 총괄한다”며 “현재로는 정책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개적으로 알려진 정책책임자는 정의원의 손위 처남인 김민녕 한국외국어대 교수(경제학)다. 김교수는 정의원의 정책자문역으로 시내에 사무실을 두고 지식인들을 관리하고 있다.

    김교수는 “어디까지나 자원봉사 차원에서 돕는 것이다. 사무실이나 인원 등은 정책이 완성돼 당으로 넘길 때까지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다”며 언론의 관심에 부담스러워했다.

    이밖에 정의원이 직접 챙기는 대학교수 30여 명으로 구성된 자문단이 꾸려졌지만 신당 창당까지는 참여자를 밝힐 수 없다는 것이 신당추진위측 말이다. 하지만 신당 주변에서는 평소 정의원과 부부동반 식사를 하며 돈독하게 지내온 이홍구 전 국무총리를 비롯, 구본호 전 KDI원장, 임기영 한국외국어대 교수와 외교 및 행정 경험이 풍부한 학계의 K, H, O, P씨 등이 정의원의 자문에 응하며 정책수립에 도움을 주는 지식인 그룹이라고 보고 있다.

    정후보의 중앙고 및 서울대 동기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도 정의원과 언제라도 연락이 닿는 인사다. 1992년 국민당 시절부터 정의원을 도와온 이달희 보좌관은 외부 정책전문가들과 정의원을 잇는 가교 노릇을 하고 있다. 이보좌관의 주선으로 몇몇 소장 학자들이 MJ노믹스 만들기에 힘을 보태고 있다.

    최근에는 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가 운영하는 미래연구소도 MJ노믹스 만들기에 참여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개연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신당추진위 한 관계자는 “미래연구소는 신당추진위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있던 이 전총리의 개인 연구소다. 그 연구소에서 신당의 정책을 연구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만약 신당과 관련이 있다면 (정의원)비서실에서 직접 관리할 것이다”고 말했다.

    신당추진위 관계자들의 설명과 신당 주변의 전언을 종합하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지식인 그룹을 정의원 측근 몇 명이서 개별적으로 연락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MJ노믹스의 틀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공업적’ 작업으로 과연 제대로 된 집권 청사진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의구심을 갖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이유로 정치권에서는 한때 정몽준 의원이 대표이사를 지낸 ‘현대경제연구원(현경연)’을 주목하는 이들도 있다.

    현경연은 1986년 출범한 현대그룹 계열 연구소로 경제, 사회, 남북문제 등 핵심 국가적 주제에 대해 조사와 과제연구를 하는 민간 연구기관. 정의원은 1990년부터 1년간 대표이사를 맡아 연구원들과 인연을 맺었다. IMF 외환위기와 2000년 현대그룹 내 2세 경영자들 사이의 다툼인 ‘왕자의 난’을 겪으며 현경연은 구조조정과 지분변경 등의 어려움을 겪었는데, 현재 정의원은 주식 1만주(0.5%)를 소유한 ‘주요 주주’다. 현경연 지분은 하이닉스(35.1%), 현대증권(20%), 현대중공업(14.4%), 현대자동차(14.9%), 현대건설(0.5%) 등이 나눠 갖고 있는데 정의원은 개인으로는 가장 많은 지분을 갖고 있다. 현경연 김중웅 원장은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사위로 정치감각도 뛰어나 정의원과는 말이 잘 통하는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이런 정의원과 현경연의 인연 탓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몽준 신당의 사실상 ‘정책 뱅크’는 현경연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992년 대선 때 현경연은 정주영 후보와 국민당의 조사연구기관으로 중요한 몫을 했다.

    국민당 출신 한 정계인사는 “특히 경제정책 분야에서는 현경연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일상적인 대선 여론조사도 현경연이 맡아서 했던 것으로 안다. 아예 현경연과 국민당 사이를 오가는 전담 직원이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매주 여론조사 실시

    신당추진위측은 현경연과 신당의 관련설에 대해 “터무니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현재 만들어지는 신당은 현대경제연구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신당 구성원이 현경연 소속 연구원에게 사적으로 자문했을 수는 있어도 당 차원에서 현경연의 도움을 받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현경연 측도 같은 반응이다. 현경연에 정치권의 관심이 집중되자 현경연은 “1992년 대선 때는 3월부터 거의 매주 여론조사를 하고 국민당의 정강 정책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의원측으로부터 아무 요청도 없고 함께하는 작업도 없다”고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정의원을 지원하지는 않았다 해도 은근히 도운 흔적은 남아 있다.

    최근 몇 달 사이 현경연이 내놓은 연구자료 목록을 보면,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정의원의 정치적 부상(浮上)에 도움이 됐을 법한 것이 적지 않다. 결과적으로 정의원을 도와준 현경연의 연구자료들은 주로 월드컵 유치와 한국팀 4강 진출의 사회·경제적 이득에 관해 분석한 것이다.

    현경연은 월드컵 한일공동개최가 결정된 후 10여 건의 월드컵 관련 자료를 발간했다. 1996년에 ‘월드컵 한일공동유치’라는 연구자료를 통해 월드컵 공동개최가 양국관계 발전에 끼칠 영향을 분석했다. 이를 시작으로 ‘월드컵 공동개최, 효과적으로 치를 수 있는가’(1996년 8월) ‘월드컵과 지식산업’(2000년 11월) ‘월드컵과 문화자본’(2002년 5월) ‘월드컵의 경제적 효과 전망조사’(2002년 5월) ‘월드컵을 통한 국가브랜드 제고방안’(2002년 5월) 등의 자료들을 내놓아 월드컵 붐 조성에 적잖이 이바지했다. 지난 6월 월드컵이 개막된 후에는 더욱 많은 연구 자료를 내놓았는데 대부분 월드컵이 가져올 금전적 효과를 알리는데 집중돼 있었다.

    6월5일 현경연은 ‘월드컵 1승의 경제적 효과’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6월4일 폴란드와 첫 대결에서 승리한 직후였으니까 이 보고서는 언론이 받아쓰기 좋은 소재였다. 보고서는 한국팀의 월드컵 첫 승리가 총 14조원 가량의 경제적 효과를 낼 것이라고 분석했다. 1승으로 당장 나타나는 소비증대 효과만 1조5000억원이고 월드컵 이후 공식 후원사를 비롯한 기업들의 광고효과와 국가이미지 제고 등 장기적 이익까지 고려하면 14조원에 달한다는 것이었다.

    현경연의 ‘장밋빛 리포트’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6월10일, 미국전(戰)에서 비긴 직후 현경연은 ‘월드컵 16강 진출의 경제적 효과’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하면 소비 진작 등 직접적인 경제효과만 3조원이 넘을 것이라고 전제한 뒤, 수출신장 등 장기적 기업이익까지 고려하면 직·간접적인 경제효과는 18조원이 넘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앞서의 ‘1승 보고서’가 나온 뒤 일주일 만에 월드컵으로 얻을 이익이 4조원 이상 늘어난 셈이다.

    며칠 뒤 현경연은 ‘Reds Economy의 의미와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전국이 붉은색 응원열기에 넘실대는 것에 착안해 ‘Reds Economy’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보고서에서 연구원들은 환상적인 조어(造語)능력을 뽐낸다. “Reds Economy에서 RED의 첫 알파벳을 풀어보면 R은 Resilient(끈기있는), E는 Enthusiastic(열정적인), D는 Dynamic(동적인)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경연은 보고서 말미에 “한국인의 열정과 단결력에는 우리 경제 위기를 극복하거나 세계경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내재적 동력이 있었다”며 “넘치는 에너지를 결집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결론내렸다.

    6월25일 현경연은 ‘포스트월드컵 발전전략과 정책과제’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는데 이번에는 월드컵 4강 진출에 따른 직·간접적 경제효과가 열흘 전 보고서보다 8조원 이상 늘어난, 26조2200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보고서는 국민들의 자발적이고 질서 있는 응원문화와 관련, “소수 엘리트에 의해 야기된 고질적 지역감정과 이념대립의 망국병을 치유할 수 있는 통합적 분위기가 형성됐다”며 “이런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잠재역량을 극대화시키고 이를 국가 에너지로 승화시킬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거듭 새로운 리더십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현경연은 얼마 뒤 ‘붉은악마’의 붉은색의 영어표현 red를 근거로 ‘R세대’라는 신조어도 선보였다. ‘R세대의 등장과 국가 기업의 과제’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R세대는 자발적이고 열정적이고 개방적인 세대라고 정의하고, “자발적 동기부여의 신(新)리더십 구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7월에도 현경연의 월드컵 마케팅은 그치지 않았다. 현경연은 월드컵 개최와 4강 진출로 한국이 거둔 경제효과만 올 국가예산에 버금가는 100조원에 이를 것이고 국가 브랜드 이미지 고조로 한국 수출상품의 가치는 10% 이상 올라갈 거라고 예측했다. 국민들 머릿속에 서서히 월드컵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인 지난 9월에도 ‘월드컵을 지렛대로 활용한 유로 공략마케팅’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어색한 신조어 만들기

    이처럼 현경연은 월드컵 기간에도 비교적 냉정했던 다른 연구기관과 달리 월드컵이 국가경제에 가져온 이익과 사회질서 변화에 대해 유난하다 싶을 정도로 의미를 부여했다. 생소한 영어단어를 조합해 국적불명의 용어도 계속 만들어냈다. 14조원에서 시작해 한국이 1승을 거둘 때마다 값이 올라가더니 마침내 월드컵 성공으로 100조원의 경제효과가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에 이르자 환호하는 국민들도 있었지만 냉소를 보내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 무렵, 이 모든 ‘수선’이 특정인을 띄우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아무튼 공식적으로 현경연과 정몽준 의원의 신당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지만 정의원은 ‘월드컵 성공개최의 주역’이라는 평가를 재산으로 대선에 뛰어들었다. 따라서 정의원의 출마선언에 앞서 유난하다 싶을 정도로 월드컵 성과 알리기에 열을 올린 현경연을 정의원의 친위부대로 보려는 항간의 시각이 틀렸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속내를 잘 이해하는 측근을 선호하는 정의원의 용인술에 비추어, ‘월드컵 이데올로그’로서 사실상 정의원을 띄워준 현경연은 요긴한 파트너임에 분명하다. MJ노믹스의 실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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