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깎아놓은 듯 강인한 얼굴, 그러나 그 속에 숨어 있는 한줄기 불안감. 한국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잘생긴 배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남궁원의 이미지는 그런 것이었다.
- ‘누구나 신뢰할 만큼 강인한 남자’가 처참하게 무너질 때 관객이 받는 충격은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 남궁원이라는 배우가 보여준 작지 않은 연기 폭은 그 자리에 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흠 없는 모범생의 이미지는 남궁원에게 평생 넘을 수 없는 어떤 굴레를 동시에 선사한 ‘절반의 축복’이었다. 1960년대 신화적 이미지의 미남배우로 007을 연상케 하는 액션물이나 멜로물, 전쟁영화, 사극 등을 두루 거치며 전성기를 누리던 그는, 1980년대 들어서는 점차 임금이나 양반, 사장 같은 이 사회의 권위를 표상하는 한정된 역할에 머무르게 된다. 평범하고 자상한 아버지나 신분의 벽에 괴로워하는 머슴 같은, 한마디로 ‘신발에 흙이 묻어 있는’ 그런 역할은 그가 소화하기에 너무나 지상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50~60년대 한국 영화계의 전성기를 구가한 배우들이 영화계를 떠난 1970~80년대에도 남궁원은 영화판을 지키며 그 중심에서 비켜서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2000년까지의 이 긴 시간 동안 그는 크게 다섯 개의 이미지로 압축할 수 있는 다양한 연기를 구축하며 끝내 자리를 지켜왔다.
그 첫 번째는 ‘자매의 화원’이나 ‘남과 북’ 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호남(好男) 혹은 신사의 이미지다. 데뷔 초창기였던 이 시기에 남궁원은 연기보다는 분위기와 외모의 힘으로 관객에게 어필한다. 두 번째는 신상옥 감독의 ‘내시’나 이두용 감독의 ‘내시’에서 엿보이듯, 잔인하고 이기적인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계급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 아마도 남궁원의 가장 오래된, 가장 길게 지속된 이미지였을 것이다.
세 번째는 ‘여섯 개의 그림자’ ‘국제 간첩’ ‘하얀 가마귀’ ‘전쟁과 인간’ 등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007류의 호쾌한 액션 영웅. 네 번째는 ‘청녀’ ‘화녀’ ‘산배암’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내면의 성적 욕망을 억압하고 있지만 결국 여성의 유혹에 넘어가는 우유부단한 중년 남자의 이미지다. 이들은 특히 1970년대 산업화의 와중에서 주변부의 신산한 삶을 살았던 여성들과 한 쌍으로 묶여 있는 역할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일그러진 욕망과 집념에 사로잡혀 있는 광인의 그림자가 너울거리는 인간형. ‘다정다한’이나 ‘피막’ ‘화분’ 같은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 마지막 이미지는 남궁원으로 하여금 1970년대 이후 각종 상을 휩쓸게 만들어준 ‘대기만성형 연기’의 동력이 되었다. 1973년 최하원 감독의 ‘다정다한’에서 그는 아내와 자식이 살해당한 뒤에도 예술에 몰두해 삶을 버텨나가는 도공의 집념을 연기함으로써 대종상 주연상을 수상했고, 1980년 ‘피막’에서는 천대받는 피막지기 역으로 역시 대종상 주연상을 따냈다. 그리고 하길종 감독의 ‘화분’에서는 애증에 사로잡힌 동성애자의 모습으로, 이두용 감독의 ‘내시’에서는 사디즘적인 내시감이라는 악역을 소화하면서 그때까지의 이미지에 파격을 가한다.
지극히 모범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살았던 그가 지극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광인의 면모로 연기의 정점에 다다랐다는 모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시 평생 무의식 깊은 곳에 품고 있었으나 실생활에서는 한번도 발휘한 적이 없는 그 자신의 그림자를 보여준 것은 아닐까. 남궁원이 어떤 연기자보다도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백지 같은 배우’였음을 입증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70줄에 들어서는 그를 다시 만났다. 만남의 첫 느낌은 ‘신은 불공평하다’는 것이었다. 세월은 아직도 그를 비켜가고 있었다. 갓 쉰이 넘었을까 싶은 외모에 매혹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전히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처럼 선이 굵은 배우를 다시 만날 수 없음을 한탄하는 순간 그의 얼굴 위로 또 다른 한 배우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바로 그레고리 펙이었다. 모범적인 가정생활에 스캔들 한번 없는 성실함,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도 끝까지 정치의 유혹을 물리치고 영화판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까지, 남궁원 그는 끝까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마다했던 그레고리 펙과 실제 인생조차 닮은 삶을 살고 있었다.
-잔 모로라는 프랑스 여배우와 인터뷰할 때도 똑같은 질문으로 시작했는데요, 평생을 잘생긴 남자로, 누가 봐도 잘생긴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온 기분이 정말 궁금합니다. 말 그대로 ‘대표적인 미남배우’잖아요.
“그런 얘기 참 많이, 오래도 들었죠. 지금은 어디 가서 그런 얘기 들으면 쑥스럽기도 하고.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과연 괜찮다’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그러니까 저는 잘생겼다는 감이 없어요. 밉게는 안 생겼나 보다, 남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구나 그런 정도죠.”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로서는 드물게 180cm를 넘는 큰 키가 고민이었다는 일화도 있더군요.
“그랬죠. 제가 처음 나왔을 때는 영화배우 중에서 그렇게 큰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여배우들과 연기할 때는 상대역 발 밑에 벽돌이나 나무조각을 괴어놓고 대사신을 찍곤 해서 굉장히 어색했죠. 한번은 최은희씨하고 신상옥 감독이 한 마디 하더군요. ‘너는 지금 나온 게 참 안됐다. 10년이나 15년 후에 나왔으면 좋았을 걸.’ 당시에는 ‘벙어리 삼룡이’처럼 토속적인 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 저는 그런 역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물론 내 자신 양복이나 군복 같은 정장을 입어야 더 보기 좋다는 것, 꼭 외국사람처럼 보인다는 건 잘 알죠. 그렇지만 나는 순박하고 한국적인 머슴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유럽인 스타일의 이미지가 방해가 되어 못했던 거죠.”
―남궁원씨가 머슴 역할을 하고 싶었다니 상당히 의외네요(웃음). 우선 어떻게 데뷔하게 됐는지부터 짚어주시죠.
“학교 다닐 때부터 그런 제의가 많았어요. 유명한 감독들이 대학교(한양대 공대) 다닐 때부터 심심찮게 쫓아다녔죠. 원래는 졸업한 후에 유학을 갈 생각이었어요. 콜로라도 주립대학에 장학금 수속까지 다 밟아놓고는 영어공부만 열심히 하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자궁암 3기 진단을 받으셨어요. 두 달밖에 안 남았다는 거였죠. 급한 마음에 찾아간 사람이 친구 아버지였던 아세아영화사 사장 이재명씨였죠. 배우를 하겠다고 하니 굉장히 큰돈을 내주었어요.
그 돈을 받아서는 제가 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어머니 치료에 쏟아부었죠. 장남이다보니 어머니께 잘하고 싶었거든요. 평소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얼마 못 사신다고 하니까 앞뒤 잴 겨를이 없었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조금 더 넓게 생각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 바람에 영화계에 나오게 됐습니다.”
―원래는 학자나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교수가 아니면 외교관이 될 생각이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5일장을 치르고 나니 영화사에서 촬영을 하자고 나서더군요. 눈앞이 깜깜해졌죠. ‘아 이렇게 딴따라가 되는구나.’ 그때 기분이 참 아이러니했어요. 아버지도 허탈해 하셨고요.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출연한 첫 영화가 노필 감독의 ‘그 밤이 다시 오면’이었어요. 소박한 시골 선생 역할이었죠. 연기의 연자도 모르면서 촬영을 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첫 컷은 여선생과의 이별 장면이었어요. 대본 대로 ‘나 가봐야겠어. 시간이 없어서’라고 대사하고 시계를 보는데 손이 천근만근이더라고요(웃음). 친구들이 주위에서 보고 있으니까 더 창피한 거예요. NG를 열 번도 넘게 낸 뒤에야 겨우 성공했어요.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선배님들이 많이 도와주셨다는 거죠. 내 외모가 선하게 생긴 덕분인지 격려도 많이 해주시고 참 아껴주셨죠.
촬영이 끝나고 개봉을 할 무렵에는 ‘혜성처럼 나타난 사나이’ 어쩌고 하면서 신문에 막 나더라고요. 단성사에서 개봉했는데 아주 반응이 좋았어요.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손짓하면서 수근거리는 게 느껴졌죠. 명동에 가면 여자들이 사인해달라고 나서곤 해서 무척이나 쑥스러워 했어요. 그렇게 시작된 거예요.”
남궁원의 다양한 영화 속 모습. ①잔인한 절대권력자 이미지를 보여준 ‘내시’ ②광기어린 인물을 표현한 ‘업’ ③호쾌한 액션영웅 역을 맡은 ‘원산공작’ ④불안한 중년남성을 연기한 ‘충녀’<자료제공·한국영상자료원>
“글쎄요, 한마디로 몸 둘 바를 몰랐죠. 걱정이 많던 중에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씨가 전속 계약을 맺으려고 나를 찾는 거예요. 돈이 얼마가 들든지 남궁원을 잡아라, 그런 분위기였죠. 그렇게 신프로와 전속계약을 맺었는데 한동안은 작품을 많이 못 했어요.
그러다가 5·16이 일어났죠. 그때 영화를 그만두려고 했어요. 공부를 다시 하든 아니면 시장에서 포목장사를 하더라도 스스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슬슬 오기가 나는 거예요. ‘내가 인물이 남보다 못한가, 가정환경이 못한가, 아니면 공부를 덜했나’ 싶었죠. 당시 활동하던 김승호, 이대엽 같은 선배들, 강수일 같은 또래 배우들보다 내가 못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한번 해보자’고 다시 마음을 먹은 거예요. 그 무렵 신상옥 감독이 영화합작을 위해 저를 홍콩에 데려갔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공부를 시작했어요.”
―당시 평가를 살펴보면 남궁원씨가 신필름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가다듬었고 배우로서도 입지를 다졌다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연기를 다듬기 위해 애를 많이 썼어요. 남산 드라마센터에 가서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역을 맡아보기도 하고, 시민회관에서 ‘닥터 지바고’ ‘부활’의 주인공도 하곤 했는데, 연극 몇 개 한다고 연기가 금방 늘지는 않지요. 대신 홍콩에 가서 6개월, 8개월씩 혼자 있는 동안 공부하듯 연기를 파고들었어요. 할 일이 없을 때면 노트 하나 들고 극장에 갔지요. 샌드위치 하나로 하루종일 버티면서 다른 배우들은 어떻게 우는지, 어떻게 입을 벌리고, 어떻게 눈을 찡그리고, 누가 죽으면 어떻게 절규하는지, 흡사 초등학생처럼 일일이 메모했어요. 그러다보니 대학노트 한 권이 가득 차더군요.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혼자 산꼭대기에 올라 상상하며 연습하고 그랬어요. 그 공부가 큰 도움이 됐어요. 이후 한국에 와서 ‘빨간 마후라’를 찍었는데 신상옥 감독이 깜짝 놀라더군요. ‘와, 많이 발전했는데’ 하면서.” (웃음)
―그럼 남궁원씨 스스로 연기에 만족하게 된 것은 ‘빨간 마후라’부터였군요.
“그때부터 비로소 내 연기가 뭔지 생각하게 됐어요. 연기란 게 본래 남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도취해야 제대로 나오는 거잖아요. 황정순씨나 김승호씨 같은 선배들을 보면 옆에 누가 있든 말든 스스로 취해서 눈을 뒤집어가며 역할을 합디다. 그런데 나는 자꾸 ‘이걸 남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다보니 어색해지는 거예요, 마음이 약해지고. 그러던 것이 슬슬 대담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상대방이 연기하는 걸 받아서 액션을 할 수 있게 되고.
여담이지만 당시에는 몰입하며 연기할 분위기가 안돼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 무렵 한번은 제가 문정숙씨와 장충단 주택가에서 키스를 하는 장면을 찍었는데, 입술이 닿지 않게 한다고 담뱃갑의 셀로판지를 대고서 키스를 하는 정도였으니까요. 여배우가 꼭 그러길 원해서라기보다는 당시 분위기가 그랬어요. 감독도 으레 그러려니 했고. 그러니 연기가 자꾸 형식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 시대가 있었어요. 옛날 얘기지만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웃음)
신상옥 감독과의 만남
―신상옥 감독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인물인데, 북한에 납북되었다 돌아오는 바람에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해 많은 영화인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촬영장에서의 모습이나 연출 스타일이 궁금한데요.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부부였어요. 최은희씨에게서도 후배로서 도움을 많이 받았고, 함께 촬영도 많이 했죠. 저에게 누이처럼 연기지도도 많이 해주셨죠.
신상옥 감독은 뭐랄까, 한마디로 ‘미친’ 사람이에요. 영화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촬영장에서 구도를 잡느라 뷰 파인더를 보며 뒷걸음질 치는데, 미처 확인을 못하고 논두렁에 빠졌어요. 흙탕물 속에 넘어져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는 거예요. 그럴 정도로 집착하는 사람이었으니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죠. 물론 영화도 참 잘 만들었고요.
유현목 감독은 소위 문예물을 많이 만들었지만 신상옥 감독은 리얼한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데 탁월했어요. 흥행 실적도 좋았고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감독이었죠. 당시만 해도 동양에서는 일본 다음에 한국영화가 제일이었으니까요. 대만이나 홍콩에서 신감독을 초청해 함께 작업하는 경우도 많았고요.”
신상옥 감독은 1961년 ‘연산군’을 만든 이래 많은 역사극을 연출했다. 그가 만든 사극의 특징은, 정확한 역사적 고증보다는 의상과 세트 등 시각적인 화려함을 추구하는 동시에 1960년대 당시 감히 표현할 수 없었던 시대적 욕망을 스크린에 불어넣었다는 데 있었다.
‘연산군’의 경우 유부녀를 사랑하는 연산의 내면적 광기와 욕정이 묻어나는가 하면,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을 연상케 하는 1967년작 ‘다정불심’의 경우에는 원나라 노국공주가 죽자 공민왕이 그 시체를 사랑하는 시체성애나 노국공주와 똑같이 생긴 여인을 사랑하는 도플갱어적 상황이 그려지기도 한다.
그 무렵 남궁원이 출연했던 작품 가운데 단연 주목할 만한 영화가 바로 신상옥 감독의 1968년작 ‘내시’다. 남궁원이 맡은 역할은 많은 후궁을 거느린 임금 역. 그의 에로틱한 연기가 장안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영화 ‘내시’는 임금 단 한 사람의 남자만을 허용하는 궁 안에서 피어나는 후궁과 내시의 사랑, 왕을 포함한 각 인물들이 벌이는 애욕의 드라마였다. 후궁과 내시는 물론 임금마저도 궁중에 내려진 절대적인 규칙과 억압에 항거하기 위해 성적인 모험과 인간적인 감정을 고집한다. 신상옥 감독은 본인 특유의 폐쇄적인 화면짜기로 숨막힐 듯한 왕실의 폐쇄성을 시각화한 다음, 그 안에서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개인의 욕망을 은밀히 끄집어낸다. 그것은 아마도 멀리 동떨어진 시대적 배경을 통해 1960년대를 은유하고자 했던 신상옥만의 스타일이었을 것이다.
얼음물 먹어가며 베드신 촬영
-저는 운 좋게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내시’를 봤는데요, 잊을 수 없는 명작이더군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우선 당시 한국영화로서는 너무나도 스펙터클하고 색감이 화려합니다. 또한 에로틱한 장면을 이끌어내는 신상옥 감독의 연출이 절묘하고요. 1970, 80년대 에로와는 전혀 다른, 격이 있으면서도 대담한 관능미가 인상적이었어요. 그 때문에 화제가 되기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영화가 문제가 되어 신상옥 감독이 외설 혐의로 고발되기도 했죠. 내가 재판정에 가서 증언도 하고 그랬어요. 촬영하면서 에피소드도 많았어요. 상대역이었던 윤정희씨하고 내가 촬영장이었던 큰 창고에서 러브신을 하는데 영하 20℃가 넘는 한겨울이었어요. 아무리 히터를 틀어봐야 소용이 없었죠. 땀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물방울을 잔뜩 뿌려놓았는데, 얼마나 추웠는지 입에서는 하얗게 입김이 나오는 거예요. 새벽 3시가 다 되도록 구경하고 있던 동네 노인들이 얼음물을 마시면 입김이 없어진다고 참견을 하더라고요.
그 추운 날씨에, 거의 벌거벗다시피 하고, 온몸에 물방울까지 뿌려 놓았는데 얼음물까지 마시니 이건 뭐 상상할 수가 없어요. 5분마다 한번씩 얼음물을 입에 물어가며 밤새도록 촬영을 했죠. 사실 그런 고충은 배우들끼리만 알죠. 남녀 배우가 사랑에 빠지기 쉬운 것도 모두 그런저런 고통을 함께 겪기 때문이거든요.
그렇게 고생하며 찍은 영화니 당연히 시사회장에 집사람과 같이 갔지요. 처음에는 집사람도 ‘분장도 좋고 참 잘했다’고 칭찬했거든요. 그런데 며칠이 지나니 집사람 친구들이 전화를 하기 시작한 거예요. ‘너는 그 에로신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았냐’는 거죠. 그 말을 듣고 이 사람이 혼자 영화를 보러 다시 극장에 갔다 왔어요. 처음에는 나랑 같이 봤으니까 그냥 연기로 생각했는데, 혼자 관객입장에서 보니까 이게 너무 진하거든. 그 다음 한동안은 집사람 입이 댓발은 나와 있었죠(웃음). 집사람이 봐도 그럴 정도니 신문에서 외설이다 뭐다해서 분분한 것도 당연했어요.”
―사실 남궁원씨는 지금도 충무로에서 ‘베드신을 가장 잘 리드했던 배우’로 기억되곤 하는데요.
“당시 군사독재 시기다보니 사상적인 뉘앙스가 있는 작품은 못하잖아요. 기껏해야 ‘자유부인’처럼 바람 피우는 이야기 외에는 별다른 스토리가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대부분 에로틱한 줄거리였고, 나도 그런 영화를 많이 찍을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외국에 나갈 때면 제일 먼저 사는 게 잠옷이었어요. 영화마다, 침실 장면마다 같은 잠옷을 입고 나올 수는 없으니 잠옷을 수집한 거죠. 몇 개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어요.” (웃음)
―당시 라이벌이 있었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선배들 중에는 신영균씨, 최무룡씨가 있었고, 나보다 어린 축에는 신성일씨가 있었죠. 그렇지만 각자 역할이 달랐어요.”
필자가 보기에 남궁원의 라이벌은 역시 신영균이었다. 신사적이면서도 남성적인 이미지가 매우 흡사했던 까닭이다. 최무룡의 이미지는 두 배우와 약간 달랐다. 이는 세 배우가 함께 출연한 김기덕 감독의 ‘남과 북’을 살펴보면 좀더 분명해진다. 신영균과 최무룡이 각각 남북의 군인으로 나오는 이 영화에서 남궁원은 최무룡의 상관으로, 중간에서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을 조정하며 아내를 찾아주는 역을 맡았다.
이 영화 중에는 남궁원이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48시간. 내일모레까지 여자를 데려다 놓겠다. 만약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거든 날 쏴라.’ 필자는 아마도 이것이 남궁원이 가진 이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강직하고 신사적이고 약속을 지키는 남자의 이미지.
-‘남과북’에서의 역할이 남궁원씨의 이미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배역이기는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혹시 신영균씨나 최무룡씨의 역할을 보고 ‘내가 저 역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럼요, 그런 게 있었죠. 영화를 봐도 속으로는 항상 ‘나 같으면 저 연기를 이렇게 했을 텐데…’ 생각하곤 했어요. 예술가끼리는 친구가 없어요. 모두 경쟁자니까요. 내가 제일 존경한 사람은 최무룡씨였어요. 디테일한 연기를 참 잘하는 배우였어요.”
최무룡은 당시 충무로에서 연기를 잘하기로 첫손에 꼽히는 배우였다. 섬세하고 디테일한 그의 연기에는 다른 배우들이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으며, 또한 그는 ‘레디 고’를 외치기 전에 이미 연기를 시작하는 철저한 배우이기도 했다.
―중후하고 신의가 있는 이미지가 어떤 경우에는 개성적인 역할을 맡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됐던 거군요.
“마이너스죠. 예전에 한 평론가가 ‘남궁원과 신성일 때문에 한국영화가 몇 년 퇴보했다’는 말을 했어요. 요즘처럼 개성적인 연기파 배우들 위주로 영화계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인물 위주의 미남배우들을 중심으로 하는 작품이 많았다는 거죠. 좀 심하게 꼬집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앤터니 퀸이 있다면 그레고리 펙도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영화판이다. 비극이라면 우리나라에는 ‘로마의 휴일’ 같은 멋진 영화가 없었다는 것 뿐. 1960년대 이후 남궁원은 데뷔 시절 ‘자매의 화원’ 등에서 보여준 달콤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다소 상반된 연기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대표적인 것이 첩보물이나 전쟁물에서 보여준 007 비슷한 이미지다.
-‘여섯 개의 그림자’ ‘국제간첩’ ‘하얀 가마귀’ 등의 영화에서 보여준 냉철하고 완벽한 스파이의 이미지가 남궁원씨의 또 다른 연기모습일 텐데요.
“양복을 입으면 멋있다는 이유로 그런 역할을 많이 맡았어요. 홍콩, 프랑스, 대만 등 외국으로만 다니면서 촬영을 했죠. 상대 여배우들은 외국배우였고. 말 그대로 국제간첩이니까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잠도 번쩍번쩍한 호텔에서 자고 최고급 자가용을 몰고 다니고 옷도 최고급만 입고 다니는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였어요.”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영화들도 007류의 할리우드 영화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영화적으로는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아들의 고뇌 같은 멜로적인 요소가 강했다는 점이 대표적인 차이점이고, 배경적으로는 악역이 항상 북한 공작원, 그때말로 ‘빨갱이’들이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달랐다.
“나는 만날 스파이가 되어 빨갱이를 죽이기만 하는 거예요. 비슷한 역, 좋은 역, 정의로운 역만 계속되니까 재미가 없잖아요. 나도 빨갱이 역할을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제작자는 일단 허락을 했는데, 나중에 대본을 검토한 중앙정보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잘생긴 사람이 간첩을 하면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거죠. 뭐라고 해야 하나, 그동안은 정의의 사도였는데 갑자기 간첩이 되면 혼란을 줄 수 있고 아이들이 따라 할 수도 있다는 거였어요. 그 무렵 영화에서는 하다못해 옷도 북한 사람에겐 구질구질하게 입히던 시절이니까.”
―그때 사고방식으로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웃음)
“그래도 고집을 피워서 결국 정진우감독의 ‘하얀 가마귀’를 하게 됐어요. 원하던 대로 북한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남한에 침투하는 대장 역할을 맡았죠. 똑딱선을 타고 은밀히 침입하다가 그만 우리 군함에 발견이 돼서 폭격을 당하는 장면이었어요. 해군에서 지원해준 군함에서 공포탄 다섯 발을 쏘면 배 주변에 장착해둔 TNT 5파운드짜리 폭탄이 터져 물기둥이 솟는 그림을 만들기로 미리 준비를 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체되니까 군함에서는 빨리빨리 하라고 자꾸 난리를 치고, 그러다보니 소품 담당하는 친구가 우물쭈물 하다가 폭탄 하나를 배 위에서 터뜨린 거예요. 그 친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조감독 둘이 중상을 입었어요.
나도 원래 상체가 날아갈 판이었는데, 다행히 쇠밧줄이 가려줘서 얼굴만 다쳤어요. 온통 난리가 났죠. 해군 헬기를 타고 진해로 갔는데 국경일이라 의사가 없어서 한참 애 먹었죠. 얼굴 여기저기를 40바늘도 넘게 꿰맸어요. 지금도 흉터가 있을 정도니까요. 신문에서도 ‘남궁원 중태’ 하면서 대서특필하고, 가족들도 놀라서 달려왔죠.
한동안 안정을 취하고 있는데 대만에서 난리가 났어요. 합작영화를 하기로 약속했는데 늦어지면 곤란하니 대만에 와서 치료를 받으라는 거였죠. 별수 있나. 얼굴에 붕대를 감고 외국 항공사 비행기에 올랐죠. 거기서 스튜어디스였던 우리 마누라를 처음 만난 거예요. 재미있는 것은 그때 우리 집사람은 한국영화를 거의 안 봐서 나를 잘 몰랐다는 거예요. 그냥 주위에서 배우라고는 하는데 얼굴은 상처투성이니 불쌍했던 모양이지.”
―그 잘생긴 얼굴을 다 감추고 갔는데도 인연을 만나셨네요.
“나한테 친절히 잘해주니까 어머니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게 바로 인연인 거 같아요. 너무 고마워서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니까 적어주더라고. 그래서 저녁에 만나서는 데이트를 한번 했죠. 그때부터는 외국에 나갈 때마다 꼭 연락해서 집사람을 만나곤 했어요.
그렇게 결혼을 하고 나서는 인생이 확 바뀌었어요. 그 무렵 내 형편이 말이 아니었거든. 영화는 많이 찍었지만 혼자 살면서 외국을 나다니다보니 펑펑 쓰게 되고요. 내 집 한 칸 없이 달랑 전셋집이었어요. 결혼하고 나니 집사람이 혼자 계획을 세우더니 미장원에도 안 가고 돈을 모아서 3년 만에 집을 사더라고요. 또 3년이 지나니 훨씬 큰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고요. 이게 내조의 힘이구나 생각했죠.”
‘자연인 홍경일’의 삶
―부인 말고는 연애하던 분은 없었나요.
“결혼하고 나서는 없었지만 솔직히 결혼하기 전에는 몇 명 있었죠. 여배우도 있었고요(웃음). 사실 내가 어머니 사랑만 받고 자라서 젊었을 때는 이성을 전혀 몰랐어요. 대학교 다닐 때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으니 참 순진했죠. 여자들 앞에만 서면 얼굴이 빨개지고 그랬어요. 중학교 다닐 때 전차를 타고 가면 여학생들이 따라오곤 해요. 그러면 나는 또 막 도망 다니고. 순진했어요. 천성이 그랬던 것 같아요.” (웃음)
말이 나온 김에 영화배우 남궁원이 아닌 자연인 홍경일(그의 본명. 남궁원은 그가 데뷔시절부터 사용해온 예명이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배우로서뿐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그는 부러움을 살 만한 삶을 살았다. 외모와 부와 명예와 존경과 성공적인 자녀교육까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갖춘 사람.
요즈음 그는 ‘영화배우 남궁원’보다 ‘홍정욱(코리아헤럴드·헤럴드경제신문 사장)의 아버지’라는 타이틀로 더 유명하다. 최근 그의 이름을 인터넷 기사검색에서 찾아보면 홍정욱씨 기사에 ‘곁다리’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은 혹시 약간 기분 나쁘지 않을까 싶어 물었더니 대답이 의외다. ‘홍사장 앞에 붙은 남궁원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언제 사라지나 했더니 이제야 제대로 됐다’는 것이었다.
―홍정욱씨 이미지도 남궁원씨와 비슷하거든요. 뭐랄까, 어려움 없이 자랐으면서도 자기 일을 똑부러지게 잘 해낼 것 같은 야심가 이미지죠.
“다른 건 다 좋은데 약간 차가워요. 정은 많은데 표현을 잘 안 하거든요. 공부할 때 보면 시험이 내일인데도 노는 척하다가도 꼭 1등을 하죠. 내적으로 강해요. 어렸을 때도 자의식이 남달리 세서 항상 겸손하라고 가르치곤 했죠. 그래서인지 공부는 외국에서 했지만 성격은 굉장히 고전적이에요. 먼 길 갔다 오면 꼭 부모한테 큰절을 하는 식이죠. 그리고 어떤 열망이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꿈이 컸거든요. 지는 걸 싫어하고요.”
―자녀를 키우면서 특별한 교육원칙 같은 게 있었나요.
“워낙 젊었을 때부터 금실 좋은 부부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후배들한테서 ‘남궁원 선배 부부처럼 되고 싶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고요. 그러다 보니 더 가정에 충실해질 수밖에 없어요. 집사람도 아이들 교육에 대해 집착한다고 말할 정도로 고집이 있었고요.
집사람이 참 철저했어요. 아이들이 잘못하면 한 번, 두 번까지 용서하지만 세 번은 습관이 된다 해서 화장실 데리고 들어가서 문 잠궈놓고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매를 댔어요. 반면에 나는 오히려 촬영 갔다 오면 함께 놀아주느라 바빴죠. 밤을 새고 와도 꼭 아이들은 내 손으로 씻기고 그랬으니까요. 그러니 아이들은 ‘우리 아빠 멋쟁이’ 그러면서 굉장히 따랐죠.”
영화계에서 금실 좋은 부부로 소문나 있는 남궁원 양춘자씨 부부
“이두용 감독은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저를 야비한 사기꾼 같은 이미지로 많이 써먹었어요. 이감독이 만들려다 실패했던 ‘월광무’만 해도 내 역할은 굉장히 잔인한 인물이었거든요. 사람들은 왜 그런 역할을 하느냐고 묻곤 했지만, 사실 나는 그런 역이 재미있었어요. 호기심도 있었고.”
이두용 감독은 ‘돌아온 외다리’나 ‘사생결단’, 전영록 주연의 ‘돌아이’ 등 액션영화뿐 아니라 여러 장르에 능통한 감독이었다. 특히 1980년대 들어서는 이미숙 주연의 ‘뽕’, 유지인 주연의 ‘피막’ ‘여인 잔혹사 - 물레야 물레야’ 등의 토속적인 에로물도 많이 만들었다.
이 가운데 1981년 만들어진 ‘피막’은 윤삼육이 각본을 쓰고 유지인, 남궁원, 김윤경 등이 출연한 영화였다. 조선시대 개가(改嫁)를 금지하는 규율에 따라 청상과부로 수절하며 일생을 마쳐야 했던 여인들의 업보와 샤머니즘 세계를 미스터리 기법으로 보여준 이 사극에서, 남궁원은 청상과부인 주인집 며느리와 정을 통하게 되어 죽임을 당하는 피막지기 역을 맡았다.
악역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악역을 할 때와 선한 역을 연기할 때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가 크죠. 선한 역할은 주로 내성적이고 내면적이지만 악역은 밖으로 표출하고 쏟아내는 역이죠. 좋게 말하면 훨씬 더 역동적이고 외향적인 연기 화법을 구사할 수 있어요.”
―그런 작품들이 계속 이어진 것을 보면 악역에서도 충분히 연기력을 인정받았다는 이야기인데요. ‘화분’에서는 동성연애자 역할을 맡기도 했죠.
하길종 감독의 1972년작 ‘화분’에서 남궁원은 삼각관계 속에 놓인 사장(현마)의 역할을 맡는다. 묘한 것은 여자(미란)뿐 아니라 삼각관계의 경쟁자인 남자(관주·하명중 분)와도 동성애 관계를 맺는 인물이었다는 점. 어항 속의 물고기를 손으로 쥐어 터뜨려 죽이는 장면이 인상적인 이 영화에서 그는 자신을 거부하는 미란과 관주에 대해 강박관념을 쏟아내는 연기를 섬뜩하게 표현해 냈다.
하길종 감독은 1941년에 태어나 1979년에 뇌졸중으로 요절한 수재 감독이었다. 당시로는 드물게 미국에서 영화 이론과 연출을 공부했으며, ‘화분’ ‘수절’ ‘한네의 승천’ 등 일종의 회화적 상징주의로 현실을 비판한 작품들과 ‘바보들의 전성시대’ ‘병태와 영자’ 같은 청춘물을 만들었다. 그의 데뷔작이기도 한 ‘화분’은 난해하면서도 우화적인 상징으로 가득찬 문제작이다.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인 ‘푸른 집’은 하길종 감독이 청와대로 대표되는 당시 지배계급을 비판하고 싶었음을 암시하는 장치. 영화에서 나타나는 동성애 또한 인간 본연의 욕망 문제보다는 현마라는 억압계급과 관주라는 피억압계급 사이의 갈등과 공모를 함께 보여주는 장치로 해석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 무렵 찍었던 영화들이 상당히 강했어요. ‘화분’의 경우는 이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피막’의 피막지기만 해도 굉장히 이미지가 강한 역이었어요. ‘다정다한’의 도공 역할도 마찬가지였고. 그렇듯 약간 비정상적이거나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인물을 연기한 경우에 더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에요. 만날 미남 역할만 하던 친구가 뭔가 전혀 다른 것을 보여주니까 독특하다고 느꼈겠죠. 멜로드라마 같은 틀에 박힌 역이 아니었거든요.”
―남궁원씨의 이미지 변천 마지막에는 우유부단한 중년남자가 서 있습니다. 처음에는 욕망을 억제하지만 결국에는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서 신세를 망치는. ‘청녀’ ‘화녀’ ‘산배암’ 등의 영화가 대표적인 경우였는데요.
“‘청녀’는 이만희 감독 작품이었죠. 이만희 감독은 영화에서 ‘남궁원의 이미지’를 없애고 싶어했어요. ‘시장’ 같은 작품에서는 일부러 제 얼굴을 부스스하게 만들어서 노름꾼 건달로 만들기도 했죠. 이감독은 아주 멋쟁이였고 머리가 좋았어요.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대사를 멋있게 고치거나 촬영을 쉽게 끌어 갔기 때문에 배우들이 홀딱 반할 수밖에 없는 순발력 있는 감독이었습니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에서 맡았던 작곡가 역할도 비슷했어요. 쉽게 말해 바람 한번 잘못 펴서 신세 망치는 역할이었죠. 당시 사회 풍토가 그런 작품을 나오게 하지 않았나 싶어요. 김기영 감독은 아주 괴상한 분이었어요. 우리끼리는 ‘변태’라고 수근거렸을 정도니까. 말이 거의 없는 대신 혼자 생각을 많이 하고 독특한 행동을 많이 하는 양반이었어요. 연기를 지도할 때도 상상할 수 없는 걸 시키는 일이 많았어요. 그런 성격이 작품에도 많이 드러나 있죠.”
김기영 감독의 ‘화녀’는 본인이 1960년 만든 ‘하녀’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1971년 리메이크한 작품이었다. 공장직공 출신의 가정부가 중산층 가정에 들어와 그 가정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얘기. 성적 억압에 시달리는 중산층 계급의 무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농촌 출신 여자가 도시 가정을 무너뜨리는 구조에는 당시 근대화 과정에 있던 한국 사회와 여성들의 계급성 문제가 함께 녹아 있다. ‘화녀’에서 하녀 역할을 맡은 윤여정은 대종상 신인상을 거머쥐게 된다.
“그 모두가 내 안에 있던 것들”
― 이제까지 남궁원씨의 전성기 시절 이미지를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잘생기고 호쾌한 사나이, 절대권력을 갖고 있는 잔인하고 억압적인 남자, 욕망을 억제하는 우유부단한 중년 남성, 호쾌하고 섹시한 스타일이 있는 액션 영웅, 마지막으로 일그러진 욕망이 있고 집념과 집착이 강한 약간은 비정상적인 인물. 이 다섯 가지 유형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이미지는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작품에서 내가 참 잘했다, 나에게 잘 맞았다 그런 건 없는 거 같아요. 그 많은 역할, 다양한 이미지 중에서 만족스러운 것도 없고요. 그 중에 어느 게 내 본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죠. 남궁원이라는 사람이 겉으로는 아무리 온순해 보여도 실제로 그 안에는 잔인하고 무서운 인간 본연의 일면도 있는 거니까. 그 요소들 가운데 하나하나를 감독이 끄집어내는 거죠. 내 속에 없었다면 감독이 아무리 뛰어나도 끄집어낼 수 없었을 거예요. 결국 그 다섯 가지 모두를 내가 갖고 있는 셈이죠.
―1980년대는 한국영화의 암흑기였습니다. 뛰어난 감독도 여건 때문에 졸작을 양산하던 시절이었고요. 이 시기 많은 배우가 영화계를 떠났는데 남궁원씨는 계속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영화계에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영화계를 완전히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그 무렵 내가 다른 일을 안 한 것은 아니에요. 정치권에서도 유혹이 있었고, 나도 마음이 흔들려서 정당 가입원서를 쓰려고 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집사람이 정치하면 이혼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사업도 했어요. 외국계 엔지니어링 회사의 한국지사장을 맡아 큰 공사도 여럿 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덕분에, 경제적으로 크게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꾸준히 영화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짬이 날 때마다 영화에 출연할 엄두를 낼 수 없었겠죠. 죽을 때까지 배우는 배우다, 이건 그대로 지키겠다 그런 생각을 하곤 했어요.”
섭섭하다, 그러나 감사하다
-어떤 배우들은 연기생활을 오래 하기 위해서 무척 노력합니다. 안성기씨나 한석규씨 같은 경우는 긴 공백을 둬서라도 배우로서 길게 남으려고 애쓰거든요. 그런데 남궁원씨야말로 자연스레 긴 연기생활을 해온 ‘복 받은 배우’인 셈입니다. 그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실 나는 사교성이 별로 없어요. 영화사를 찾아다니면서 ‘나 이 배역 주시오’ 해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누가 역할을 주면 그저 열심히 했지. 오히려 내가 오래 영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몰라요. 다른 이들에게 나쁜 인상 주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던 것, ‘저걸 꼭 해내야지’ 하며 무작정 욕심부리지 않았던 것, 그런 게 오히려 길게 가는 데는 도움이 됐어요.”
그러나 최근 그는 거의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생각은 많은데 출연제의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신화적 이미지’에 가까운 그의 마스크는 요즈음의 한국영화가 필요로 하는 ‘평범하고 비루한 아버지’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먼 거리에 서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신구가 보여준 것 같은 모습을 그에게서 기대할 수 있을까. 그의 이미지는 여전히 CF에 나오는 귀족에 가깝다.
“물론 나도 잘 압니다. 요즘 영화에 나이 먹은 사람 역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과연 내게 맞을까 싶은 생각이 들곤 하죠. 한번은 신상옥 감독이 그러더군요. ‘네 역할은 따로 있다’고. 어쩌면 그래서 더 갑갑한 측면도 있지만, 어떡하겠습니까. 연기하는 내내 ‘나’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영화 인생에 후회는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한 노릇이죠. 이제는 그걸 알 만한 나이가 됐다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