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토탈 이클립스’는 두 상징주의 시인 랭보와 베를렌의 비극적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 천재 시인 랭보로 분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가 돋보이는 이 작품 전반에 독주 ‘압생트’가 등장한다. 압생트는 19세기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법적 금지 품목이 됐다. 19세기 예술가들을 매료시킨 이 술의 매력은?
1871년 9월 파리에서 이미 기반을 잡은 젊은 시인 베를렌(데이비드 툴리스 분)은 샤를빌 마을에 살고 있는 랭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라는 16세 소년이 보낸 8편의 시를 받는다. 랭보가 쓴 시의 천재성과 비범함에 탄복한 베를렌은 즉시 답장을 쓴다. ‘위대한 영혼 내게 오소서, 이는 운명의 부르심이니.’
랭보는 어린 나이에 이미 현대시의 전형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은 지극히 조숙한 혁명적 천재다. 프랑스가 낳은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그를 가리켜 ‘어린 셰익스피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실제 그의 시 대부분은 불과 16세에서 19세 사이 씌어졌다.
베를렌이 랭보와 첫 편지를 주고받을 당시 프랑스 사회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1870년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시작된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여파로 사회·정치체제에 불만을 가진 노동자와 군인이 주도한 파리코뮌(Paris Commune) 혁명정권이 짧게 거쳐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두 시인의 위험한 애정행각
어쨌든 베를렌의 초청으로 랭보는 파리에 도착한다. 당시 베를렌은 세계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은 파리에서 임신한 어린 아내 마틸드(로맨 보랭제 분)와 함께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다. 베를렌과 랭보는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의 시적 영감을 바탕으로 강한 친밀감을 느낀다. 처음에는 시적 교감으로 만나던 이들이 점점 동성애라는 묘한 애정 관계로 발전한다. 동성애가 도덕적으로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범죄로 취급되던 시절이다. 더구나 베를렌은 랭보와의 애정 행각뿐만 아니라 알코올중독과 심한 주벽으로도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심지어 아내의 머리카락을 불로 태우는 기행을 보이기까지 했다.
영화 중반에 랭보와 베를렌의 금지된 사랑은 그들의 시적 천재성과 광적인 영감을 배경으로 애증을 넘나들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대사들이 어린 천재 랭보의 개성을 잘 드러내 보인다. ‘사랑이란 원래 없다. 가족이나 결혼을 지속시켜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나 이기심, 공포 따위다.’ ‘나는 미래의 근원이 되고 싶다.’ ‘폭력을 하려거든 도도하게 하고 나중에 동정하는 걸로 상대를 모욕하지 말라.’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참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베를렌 또한 이에 못지않게 ‘영혼을 사랑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육체는 시들기 때문에 지금 사랑해주어야 한다’고 응수한다. 랭보에게 ‘내가 널 먹여 살리면 너는 나의 녹슬어버린 영감을 되살려주겠다는 것이냐?’고 말하기도 한다.
결국 이 둘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목적으로, 또한 베를렌의 경우 파리코뮌에 참여한 전력 때문에 체포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 도피 행각을 벌인다. 그러나 브뤼셀로, 런던으로 떠돌면서도 그들이 갖고 있던 내면의 근본적인 갈등은 해소되지 않는다. 이러한 둘의 관계는 브뤼셀까지 쫓아온 베를렌의 아내 마틸드로 인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된다. 마틸드는 이혼 소송으로 베를렌을 위협한다.
이 와중에 1873년 어느 날 심리적 갈등을 견디다 못해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진 베를렌이 흥분 상태에서 랭보에게 총을 쏴 손을 다치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된 베를렌은 재판 과정에서 동성애에 대한 죄목이 추가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는다. 감옥에서 베를렌은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형기를 마치고 출감한 그는 독일에서 랭보와 마지막 재회를 하고 쓸쓸히 헤어진다.
랭보는 베를렌과 헤어진 1875년경부터 점점 문학에 흥미를 잃고 유럽 각지와 인도네시아 자바 등 여러 곳을 떠돌며 유랑생활을 한다. 1880년에는 아라비아의 아덴으로 갔으며, 그 후에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서 교역에 종사했다. 1891년 오른쪽 다리에 암이 발병하자 프랑스로 돌아와 마르세유에서 다리를 절단한다. 그 후 3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시인의 제3의 눈’
개기일식(Total eclipse)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 전편에 걸쳐 인상 깊은 술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매혹적인 초록빛깔의 ‘압생트(Absinthe)’가 그것이다. 이 술은 영화 도입부의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베를렌이 랭보의 여동생을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랭보에 대한 긴 회상이 끝나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베를렌이 랭보의 여동생을 보내고 다시 두 잔의 압생트를 주문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음주 장면에 비중 있게 등장한다.
압생트에 대한 당시 파리 예술계의 반응은 참으로 대단했다. 베를렌은 랭보와의 첫 술자리에서 이 술을 ‘시인의 제3의 눈’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압생트는 예술가의 영감을 고취시키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았다. 압생트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당시 분위기는 랭보와 베를렌이 참가한 파리 시인들 모임에서 한 시인이 낭송한 ‘초록빛 압생트’란 제목의 시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초록빛 압생트는 저주의 음료/ 혈관을 타고 흐르는 죽음의 독약/ 아내와 자식은 빈민굴에서 울고 있는데/ 주정뱅이는 압생트를 머릿속에 부어 넣는다.’
압생트는 암울한 시의 주제로 등장하는 것 외에 반 고흐, 피카소, 드가, 마네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당대의 유명 화가들의 작품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문호 오스카 와일드도 압생트에 대한 글에서 ‘계속 마시다 보면 당신이 보기 원하는 것들을 보게 되는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 당시 매혹적인 초록빛깔과 뇌쇄적인 맛으로 ‘녹색요정(green fairy)’이란 별칭까지 붙은 압생트는 과연 어떤 술이었을까? 압생트를 한마디로 말하면 알코올 농도 55~72%의 증류주로, 여러 가지 약초를 포함하고 있는 리큐르의 일종이다. 술의 주재료는 쓴쑥(wormwood)과 아니스. 이 중 아니스는 이집트가 원산지인 미나릿과 식물로 유럽, 터키, 인도, 남미 등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다. 그 열매인 아니시드는 독특한 향으로 향료나 빵, 술의 재료로 사용된다. 아니스를 이용한 술은 압생트뿐만 아니라 터키의 라키(raki), 그리스의 우조(ouzo), 이탈리아의 삼부카(sambuca), 프랑스의 파스티스(pastis) 등 지중해 주변 국가들에서 오래전부터 광범위하게 제조되고 있다. 이들 술에서 풍기는 강한 아니스 향은 한번 경험하면 절대 잊지 못할 정도로 독특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압생트를 정작 유명하게 만든 재료는 쓴쑥이다. 쓴쑥은 유럽 원산의 국화과 다년생 식물로 글자 그대로 쓴맛이 강한 식물이다. 쓴쑥의 라틴 학명 ‘Artemisia absinthium’에서 압생트란 술 이름이 유래했을 정도로, 쓴쑥은 압생트의 중요한 재료다. 주된 성분은 투존이라는 화학물질인데, 압생트가 유발하는 각종 부작용, 즉 불안 경련 현기증 근육장애 등의 진범이라는 인식이 당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압생트의 부작용과 연이은 사건들
거슬러 올라가면 압생트는 1789년 정치적인 이유로 스위스에서 살고 있던 피에르 오디네르(Pierre Ordinaire)란 의사가 처음 만들어 만병통치 성격의 치료용 음료로 사용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관련 학자들은 당시 그 지방에 이미 존재하던 술을 오디네르가 처음 세상에 널리 알린 것으로 생각한다. 그 유래야 어찌됐건 이 술의 제조법은 그 후 여러 사람을 거쳐 메이저 듀비드(Major Dubied)란 사람에게 넘어갔고, 그는 아들 사위와 함께 1797년 본격적인 압생트 제조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사위 페르노(Pernot)가 훗날 압생트를 상업적으로 성공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압생트는 19세기 중반 알제리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열병 예방 및 치료제로 널리 사용되면서, 전쟁 후 군인들에 의해 그 인기가 더해졌다. 더욱이 필록세라 병충해로 프랑스 술시장의 전통적 지배자였던 포도주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때마침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가격이 떨어진 압생트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그야말로 프랑스 전역의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
그러나 압생트의 인기에도 서서히 먹구름이 다가왔다. 압생트의 시작이 의사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 쇠락의 단서 역시 의사들이 제공했다. 1860년대부터 파리의 한 정신병자 보호소의 주임의사였던 발렌틴 매그낭(Valentin Magnan)의 논문을 시작으로 압생트가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 특히 신경정신 계통 부작용에 관한 부정적인 의견들이 꾸준히 제기됐다. 때마침 필록세라에서 회복한 포도주의 부활과 사회 전반에 걸친 절주, 금주 분위기도 압생트의 쇠락에 영향을 미쳤다.
지금 와서는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압생트의 주성분인 투존이 불안, 경련, 현기증, 근육장애 등을 일으키는 주범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급기야 인상주의 대표화가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가 자기 귀를 자르고 끝내 자살하는 일련의 정신착란적 행위조차 압생트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해석됐다. 이런 와중에 1905년 스위스의 한 농부가 압생트를 마신 상태에서 부인과 두 딸을 총으로 살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당시 악소문에 시달리고 있던 압생트의 위상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사실 이 농부는 평소에도 하루 5ℓ씩 포도주를 마시던 알코올중독자였다. 사건 당일만 해도 압생트보다 훨씬 많은 양의 포도주와 코냑을 마신 상태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압생트에 대한 싸늘한 시선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압생트는 벨기에(1906), 브라질(1906), 네덜란드(1908), 스위스(1910), 미국(1912) 등에서 제조 및 판매가 금지되고, 1915년에는 본산지 프랑스에서도 법적 금지 품목이 되었다.
영화 ‘토탈 이클립스’
이후 압생트는 스페인, 포르투갈 등 일부 국가에서 소량이나마 계속 생산되면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했지만, 오랫동안 어둡고 비정상적인 술이라는 인식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1990년대 초,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자유시장의 신시대를 맞이한 체코를 중심으로 압생트의 새로운 장이 열린다. 체코의 의욕적인 주류업자 래도밀 힐(Radomil Hill)에 의해 본격적으로 생산이 재개된 압생트는 전통적인 압생트와 다르다는 일부 비판에도 불구하고 영국 시장 등을 중심으로 그 판매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 영향으로 체코 내에서뿐만 아니라 프랑스 등지에서도 압생트 제조회사들이 생겨나면서 조심스럽게 재도약을 기대하고 있다.
그간 압생트에 대한 의학적, 과학적 검증도 대부분 확립됐다. 여러 학술적 연구를 통해 지나치게 많은 양이 아니면 압생트의 핵심 성분 투존이 신경학적 합병증을 초래한다는 우려는 과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유럽연합(EU)에서는 법적으로 10㎎/lℓ 이하의 투존 함유량을 허용하고 있다.
압생트는 보통 알코올 농도 70% 전후의 고농도 독주에다 특유의 쓴맛까지 있어 스트레이트로 음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보통은 설탕을 첨가해 쓴맛을 다소 완화시켜 마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전통적 프랑스식으로 먼저 압생트가 들어있는 잔 위에 작은 구멍이 송송 뚫린 특별한 전용 숟가락을 걸쳐놓는다. 그리고 숟가락 위에 각설탕을 놓고 그 위에 물을 조금씩 떨어뜨려 설탕을 녹이면서 압생트에 설탕물을 혼합한다. 이 과정에서 고농도의 알코올에 녹아있던 아니스의 에센셜 오일(essential oils)이 해리되면서 술에 부유물이 생기듯이 점차 혼탁해지는 것을 즐길 수 있다.
영화 ‘토탈 이클립스’나 1888년 영국에서 일어난 창녀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조니 뎁 주연의 ‘프롬헬(From Hell)’이라는 영화에서 바로 이 방법으로 압생트를 음용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프롬 헬’은 19세기 말 잔인하면서 불가사의한 행적을 보였던 실존 연쇄살인범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를 다룬 영화다. 당시 무성한 소문과 공포를 양산했던 잭 더 리퍼는 1888년 런던을 배경으로 장장 10주에 걸쳐 창녀들을 대상으로 잔인하기 그지없는 살인을 저질렀다. 잭 더 리퍼는 최초로 신문이 주목한 희대의 살인마라는 평까지 받았으나 끝내 체포되지 않았다. 암울한 분위기의 이 영화에서 압생트는 꿈속에서 범인을 감지하는 예지력을 지닌 조사관 프레드 애벌린(조니 뎁 분)과 함께 마약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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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생트를 음용하는 또 다른 방법은 체코에서 개발됐다. 숟가락 위에 놓인 각설탕을 압생트에 적셔서 불을 붙인 다음 압생트와 혼합하는 방법이다. 압생트 전통주의자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못 받고 있지만 시각적인 효과가 훌륭해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압생트는 현재 국내에는 수입되지 않고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미국에서도 2007년 5월에야 겨우 다시 합법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했으며 자체 생산도 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대중화되지 않았다.
어디에서건 혹시 기회가 닿아 압생트를 접하면 견문을 넓히는 기분으로 한잔 정도 맛보길 권한다. 그 매혹적인 초록색을 바탕으로 랭보와 베를렌을 넘나들며 역사를 마시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