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집 ‘할미꽃(WindFlower)’을 영어로 번역한 최월희 선생의 주말 주택을 찾아간 것이었다. 시차에 지친 몸을 잠시 침대에 누이는 둥 마는 둥 하고 어느 새 뿌옇게 밝아오는 창문을 열었더니 평화롭고 아름다운 우드스탁이 천국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원시림 사이로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찍힌 사슴 발자국마다 햇살이 꽃잎처럼 피어 있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송이가 무게를 더는 감당하지 못하고 땅에 떨어질 때마다 새들이 화들짝 날개를 펴고 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우리는 곧 거실 통나무 식탁에 둘러앉아 한국어로 된 시를 영어로 옮길 때 생기는 여러 문제점을 꺼내놓고 진지한 토론을 시작했다. 공역자인 로버트 학스 선생의 깊고 넉넉하고 사람 좋은 미소 속에서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문제가 하나하나 정리되어갔다. 이 통나무 식탁은 말하자면 한국의 시가 영시로 몸을 바꾸는 의미 있는 징검다리인 셈이었다. 물론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몇 년 동안 한국과 미국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e메일과 전화로 많은 것을 조율한 터였다.
오후 늦게야 작업을 겨우 마무리하고 나는 난생처음 그분들을 따라 요가를 했다. 그리고 눈 속에 지어놓은 별채 스팀 통속으로 들어가 물방울로 목욕을 했다.
거실에는 로버트 씨가 직접 도끼로 패놓은 장작이 벽난로 속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신선한 숲 향기를 내뿜었다.
사람이 이렇게도 사는구나! 싶었다. 서울에 두고 온 바쁜 일상이 해독하기 힘든 전생(前生)의 기억처럼 까마득하니 떠올랐다. 결코 부자가 아니지만 단순하고 정갈하고 지적(知的)인 삶을 사는 두 부부의 모습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정경이었다.
우드스탁의 만남 이후 얼마 안 가 드디어 나의 시편들은 한 권의 영문판 시집으로 묶여 세상에 나왔다. 뉴욕 맨해튼 10가 오래된 인문서점 세인트 마크 책가게의 쇼윈도에도 꽂혔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책 코너에도 진열됐다. 아름다운 여인이 큰 항아리를 들여다보는 김원숙 화백의 표지화가 시집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두 번역자의 노력으로 나는 쿠퍼 유니온 대학의 메모리얼 홀 무대에서 시낭송을 할 기회도 얻었다. 마침 이 대학 부학장이기도 한 로버트 씨의 특별 배려였다. 시낭송을 겸한 출판 기념행사가 열린 이 공간은 링컨 대통령이 최초의 대중연설을 한 홀이어서 문화재로 등록돼 있다고 했다.
그날 메모리얼 홀에는 뜻밖에도 많은 뉴요커 시인과 한국 출신 예술가들이 참석해 작은 축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무대에 올라가 ‘찔레’라는 시를 한국어로 읽으며 감격에 목이 꺽꺽 메어오는 것을 간신히 억제했다.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그루/ 찔레로 서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 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시를 낭송하는 동안 나는 내내 가난과 열망으로 허우적거렸던 젊은 날들을 아프게 떠올렸다. 천둥벌거숭이로 2년 동안 뉴욕을 떠돌다 지친 몸으로 한국에 돌아와서 이 시를 썼더랬다.
그때 한국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채국가였고, 5·18민주화운동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아 암울하기만 했다. 또한 남북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나간 후라 누구라 할 것 없이 부끄러움도 잊고 눈물을 많이도 흘린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단순히 남녀간의 사랑을 읊은 시가 아닌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미국에 유학생으로 왔다가 그만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눌러앉아 교포로 살아가는 한 여성은 “한국어가 코리아타운에서 듣던 생존(生存)을 위한 언어가 아닌, 한 편의 시(詩)로서 울려오는 것을 콧대 높은 뉴요커 시인들이 경청하는 것이 감격스러워 속으로 울었다”고도 했다.
이렇듯 최월희 선생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문학과 나를 아낌없이 지원해주었다. 아니 한국의 시를 미국에 제대로 상륙시키기 위해 진심을 다했다. 정교하고 탁월한 안목을 가진 학자로서 그녀는 한국문학을 누구보다 깊이 사랑한 분이었다. 발랄한 ‘K-팝’의 상륙도 좋지만 여러 장르의 예술과 문학이 함께 소개돼 균형 있는 문화국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기를 진심으로 바란 그녀였다.
미국 뉴욕 남동부에 자리한 우드스탁.
비트 시대의 작가 잭 케루악의 연인이 살았다는 그녀의 빌리지 작은 아파트 다락방을 부러워하는 나에게 기꺼이 그 방을 내준 적도 있고, 허드슨 강가에 있는 ‘시인의 집’에 데려가 디렉터에게 나를 소개하며 상설 전시관 한쪽에 한국 시인의 시집을 전시해두게 하려고 애를 쓴 적도 있다.
지난해 봄인가 다시 뉴욕에 간 나는 차이나타운에서 그녀와 저녁을 먹었다. 이 거리에서 최초로 에스프레소를 끓였다는 100년이 넘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맨해튼을 함께 걸었다. 여느 때처럼 그녀는 나에게 세계적인 감독들의 새 영화와 신간들을 소개하며 수준 높은 자극을 주었다. 우드스탁에 가서 며칠 쉬며 책을 읽고 그때처럼 다시 맑은 아침을 맞고 싶다는 나에게 예의 화장기라곤 없는, 지적이고도 잔잔한 미소로 꼭 한 번 다시 가자고 약속해주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영원히 지켜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가 갑자기 타계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우리가 다시 가자고 약속했던 그 우드스탁의 숲에서였다고 한다. 산책을 하기 위해 자동차를 주차하고 막 숲 속을 걸어가려던 순간 쓰러진 것이다.
거짓말 같은 이 현실을 한동안 받아들이지 못해 로버트 씨는 미국인답지 않게 심하게 허둥거려서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고 한다. 최월희 선생의 타계 소식은 나에게 한 쪽 팔이 떨어져 나간 듯한 슬픔과 허전함을 안겨주었다.
번역서로 ‘기생 시집(song´s of Kisang)’과 정현종 시집, 내 시집을 남겼다는 약력과 함께 그녀의 죽음을 보도한 한국의 한 일간지는 한국문학을 미국 문단에 알리려고 노력한 분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좋은 가정의 명민한 딸로 태어나 최고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미국에 가서 대학교수가 된 자랑스러운 엘리트 한 분이 이렇게 홀연 떠나버린 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우드스탁의 아침은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자유와 젊음이 물결치던 우드스탁의 록 음악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듯이 우리의 열정과 사랑으로 만든 작은 시집이 지금 내 서재 한 귀퉁이에서 많은 이야기를 자아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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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모든 순간이 꽃이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이별이 있어 더욱 아름다운 것이 생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새 달력 앞에서 생명과 희망을 말하기보다 이렇듯 다시 만들 수 없는 아프고 그리운 순간들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왜일까? 아니, 제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이란 끝없는 질문이 전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