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 다가온다. 겁에 질린 여고생이다.
“아, 아저씨…. 살려주세요… 나, 학생이에요.”
“학생이 여기서 뭐하고 있어!”
“죄송해요, 아저씨. 용서해주세요…. 보내주세요, 네?”
망설이던 신병, 소녀를 보낸다.
“빨리 가, 군인들한테 잡히면 큰일나니까 빨리 가.”
고참이 다가오자 당황한 신병, 빨리 뛰란 뜻으로 소녀를 향해 총을 발사한다. 한 발, 두 발.
소녀, 고꾸라진다.
시간이… 흐른다. 짧지만 영원처럼 긴 시간이다. 절뚝거리며 소녀에게 다가간 신병, 천천히 허리를 굽힌다. 축 늘어진 소녀를 안아 일으켜 조금씩 흔든다.
“얘, 일어나. 빨리 일어나서 집에 가……. 일어나, 빨리…… 집에… 가야지….”
멀리서 다가오는 플래시 불빛. 먹먹한 공포에 사로잡혀 숨조차 쉴 수 없는 신병. 집어던질 듯 시체를 세차게 흔들며 정신없이 중얼거린다. 그의 손, 그의 얼굴, 피에 젖었다.
“빨리… 집에 가…… 빨…리……”
마침내 짐승 같은, 짐승의 그것인 목젖 눌린 피울음, 터진다, 흔들리는 불빛 속, 시뻘겋게.
몇 발 떨어져 플래시 비추며 배우들의 열연 지켜보던 이창동 감독. 한 손으로 입 가리고 목이 아프도록 눈물 참는다. 꺽꺽 숨막히는 울음소리, ‘신병’ 설경구의 절규에 묻혀 땅속 깊이 잦아든다.
여기는 영화 ‘박하사탕’의 광주역 촬영현장. 1980년 5월 어느 날로 돌아가, 그들은 울었다. 검붉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