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송창식은 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를 완전히 정복한 주인공이다.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상징된 그 시대 포크문화를 대표하면서 그의 노래들은 모든 세대와 계층의 가슴에 메아리쳤다. 대학생들은 저항의 찬가인 양 ‘고래사냥’을 목놓아 외쳤고, 동네 코흘리개 아이들은 마냥 ‘왜 불러’를 따라 불렀으며,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도 ‘상아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트로트에서 느끼는 구수함과 애절함을 맛보았다.
그다지 잘생긴 얼굴도 아니었지만 듀오 트윈폴리오 시절 부른 ‘하얀 손수건’은 그를 여학생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존재’로 만들었고, 대중가요를 외면한 고매한 사람들마저 가곡풍의 ‘그대 있음에’에 감동했다. 그가 포크가수 가운데 유일하게 방송사의 가수왕(1975) 자리에 오른 것도 그처럼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한 광대한 흡인력 때문일 것이다. 국민가수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는 이미 국민가수였던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1980년대가 조용필, 1990년대가 서태지 시대라면 ‘1970년대는 송창식 시대였다’는 규정은 아주 자연스럽다.
밤창식, 별창식, 왜창식
그런 시대의 거목을 만난다는 것은 필자에게도 충분히 흥분되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은 두려웠다. 그에게 따라붙는 무수한 수식들과 별명들이 다소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았다. ‘낭만파 시인’이나 ‘저잣거리의 현자(賢者)’와 같은 그럴듯한 것들도 있지만 밤에만 활동한다고 하여 ‘밤창식’ ‘별창식’, 모든 말에 의문을 제기한다 해서 붙은 ‘왜창식’이란 별칭이 먼저 떠올랐다. 한마디로 ‘기인(奇人)’임을 말해주는 수식들이 아니던가.
올해 초 서유석, 김도향, 남궁옥분 등 포크 가수들 9명이 모여 만든 앨범 ‘프렌즈’ 때도 송창식은 홍보를 위한 TV 출연 섭외를 거절했다. 아직도 그의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으련만 그는 좀처럼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오전 5시 취침, 오후 2~3시 기상에 깨고 난 뒤에도 몇 시간 운동’이라는 오랜 생활패턴은 누구도 파고들지 못하는 ‘금지영역’이다. 그래도 그의 지인들은 불만의 토를 다는 적이 없다. ‘송창식이니까’ 하는 말은 그들의 오랜 양해사항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