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블레
지금 하회마을은 구석구석 상술에 찌든 완벽한 관광지대다. 그것도 유교니 선비니 하는 우리 ‘전통’은 물론, 대영제국의 할머니 여왕까지 동원해 ‘국제’를 내세우는 ‘세계적 관광단지’가 됐다. 돌아오며 나는 결심했다. 그 곳에 다시는 가지 않으리. 함께 탈춤을 본 외국인들에게 나는 그들이 알고자 하는 ‘옛날’을 심드렁하게 설명했다.
우리 역사에서 안동이 어떤 곳인지, 그곳 양반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여기서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안동에 머문 며칠간 몇몇 양반 집은 그 큰 대문을 굳게 처닫고 있었고, 개방된 한 두 곳은 여자는 사당에 들 수 없다며 우리 일행의 출입을 금했다. 나머지 대부분은 ‘열린’ 집들의 관광 식당이거나 상점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곳은 옛날부터 ‘쌍놈’의 집이었는지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쌍놈은 먹고살기에 바쁜 것인지 또한 모르겠다.
‘쌍놈’이란 표현에 화내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쌍놈을 자처하고 자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공부하는 노동법을 쌍놈법이라 부른다. 수업 첫 시간이면 ‘노동자는 쌍놈이었고 나는 그 후손’이라는 말부터 한다.
1971년, 대학생이 된 나는 그 몇 달 전에 분신 자살한 전태일의 뜻을 새기는 모임을 준비하다 구속됐다. 그 당시 나를 ‘지도’한 교양학부장 이기영 교수는 나에게 자신이 연구한 원효나 퇴계를 비롯한 우리 전통 사상이나 탈춤을 비롯한 민중문화 공부를 권했다. 대신 어제의 민중이 아닌 오늘의 민중 전태일의 민속, 노동현장의 민중문화는 금지 당했다.
나는 1970~1980년대의 탈춤을 비롯한 민중연희 부활에 딴죽을 걸 생각은 없다. 그러나 솔직히, 그 모든 것에 그다지 감동하지 못했음을 이제는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공옥진의 춤을 보며 분노했다는 외국인처럼 우리 문화에 대한 ‘무식’을 공유했음도 고백해야겠다. 그 후 나는 삶의 현장, 데모의 현장 밖에서 민중을 느끼지 못했다.
월드컵 응원은 민중 축제였나
지금 우리에게는 민중축제가 있는가? 누구는 ‘붉은 악마’ 응원을 민중축제라고 불렀다. 심지어 그 민중을 ‘붉은 민중’으로 본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 전부터, 그리고 월드컵 기간의 선거 결과를 보며 더욱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그래서 저 올림픽 때와 같이 3S현상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나, 푸코의 몸 철학까지 들먹이며 새로운 몸의 정치, 심지어 새로운 인권 운동 운운하는 사람들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과연 그럴까? 그것이 지금 우리의 민중문화인가? 또는 이미 박제가 된 역사 속의 탈춤 등 이른바 민속놀이가 우리 민중문화인가? 록 페스티벌 등의 언더그라운드가 민중문화인가? 선거판에 벌어지는 막걸리 잔치나 관광버스 속 막춤이 민중문화인가? 저 토끼장 같은 막간에서 벌어지는 가라오케가 민중문화인가?
역사적으로는, 르네상스 이후 민중축제는 사라졌다고들 한다. 그 민중축제란 1년에 3개월간이나 계속된 광란의 축제이며 고급문화를 포함한 지배 체제에 대한 반란이었다. 그것은 위계에 대한 반대, 모든 가치의 상대화, 권위에 대한 비판과 개방, 즐거운 무정부 상태, 모든 독단에 대한 조롱, 이단의 주장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우리의 월드컵 ‘붉은 악마’ 응원이 그런 것이었나? 너무나도 익숙했던 관제 응원이 아니라 자발적 응원이었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것을 민중축제로 볼 수 있을까? 질서로 예찬 받은 그 응원이 과연 광란의 반체제적 축제였을까? 그 응원이 어떤 반위계·반가치·반권위·반독단의 것이었단 말인가?
물론 민중축제를 르네상스의 경우와 달리 규정하면 답 또한 달라질 것이다. 모두가 즐겁게 참여하여 몸으로 함께 움직이는 응원의 도취를 몸의 정치학이나 민중축제라 보지 말란 법도 없다. 그렇다면 탈춤도, 록 페스티벌도, 막걸리 막춤도, 가라오케도 민중축제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글에서는 역사상 최후였다는 르네상스 민중축제를 라블레를 통해 살펴본다. 물론 그 부활을 꿈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