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체적 보편성의 모험’ 문광훈 지음/ 삼인<br>‘풍경과 마음’ 김우창 지음/ 생각의 나무
우리는 보편과 중용을 버리고 극단과 과잉을 취했다. 사유를 폐기하고 화석화된 신념과 상투적인 지혜 및 피상적 정보에 더 의존하며 육체를 더 섬기고 욕망의 직접적인 충족을 우선적 가치로 삼는다. 또 사회의 공적인 주제들을 그저 되풀이되는 관념으로 여긴다.
복합적 사유 실천하는 인문학자
김우창은 사유하는 지식인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그는 문학 사회 문화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복합적인 사유를 실천하는 종합적·대화적·적대적·다면체적 인문학자다. 김우창의 폭넓은 인문학적 교양에 바탕을 둔 사유와 그가 제기한 우리 사회의 실천적 의제들은 충분히 음미할 만한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의 지식사회는 얼마나 궁핍했을까.
‘궁핍한 시대의 시인’과 ‘지상의 척도’를 시작으로 스무 해 넘게 김우창을 흠모하며 그의 책들을 읽어왔지만 여전히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 어려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선 그가 일군 인문학의 도저(到底)한 형이상학적 깊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필자의 천학(淺學) 탓일 테고, 아울러 그가 펼치는 복합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이론들과 끊임없이 근원의 사유로 회귀하면서 분비되는 의미의 과잉을 우리말 통사법이 다 담아내지 못하고 버석거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드넓은 사유의 세계와 표현된 언어체계 사이에는 불균형이 존재한다. 우리말 문장의 통사법이 그의 박학(博學)과 현학의 중력을 감당하기에는 버겁기 때문이다. 통사법의 한계 때문에 그의 사유가 언어체계 안에 다 담기지 못하고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그렇다고 그의 책을 읽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풍경과 마음’은 최근 그의 관심과 사유가 어디에 가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책이다.
문광훈이 쓴 ‘구체적 보편성의 모험’을 ‘풍경과 마음’과 겹쳐 읽어도 좋다. 문광훈의 책은 김우창의 비평에 대한 메타 비평서이다. 문광훈은 김우창의 심미적 이성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바친다. 그는 김우창이 말하는 심미적인 것의 의미 범주를 이렇게 규정한다.
“감각과 이성, 주체와 객체, 나아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그리고 사물과 사물이 만나 어우러진 조화 혹은 일치의 상태를 뜻한다. 그것들이 어우러짐으로써 하나이되 이 모든 것으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김우창은 심미적 이성을 유동적인 현실을 이성의 질서로 거둬들이는 하나의 원리로 규정한다. 왜 화가들은 풍경을 그리는 것일까? 화가들이 그린 풍경이란 우리의 감각적 경험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다. 3차원으로 존재하는 외부 세계를 2차원의 화면에 표현해내는 풍경화는 삶의 자리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서 이를 하나의 전체로 바라보고 여기에 우리가 지각하는 바를 새기고 그 의미를 읽어내려는 의지와 관계된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 공간을 사유를 통해 이해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초월은 모든 진지한 예술의 발생론적 계기와 욕망의 중요한 부분이다. 어느 시대에나 예술가는 ‘여기’에서 ‘저 너머’를 내다보는 자가 아니었던가. 김우창은 이렇게 쓴다.
“예술의 초월에 대한 관심의 동기는 대체로 이 세상에 남아 있으면서 저 세상의 체험까지를 원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우창은 멀고 가까이 있는 산과 하늘을 그리는 풍경화에 개입된 화가의 욕망과 동기를 ‘오리엔테이션’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실재는 일정한 방향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서양의 풍경화는 원근법과 음영의 기법을 개발했다. 동양 화법의 전통은 선을 중시하고, 서양 화법의 전통은 사물의 표면에 있는 질감을 중시한다. 이런 기법으로 객관적 풍경의 세부를 실감나게 재현한다.
하지만 동양의 산수화는 땅에 대한 심미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인 체험과 이를 통한 심리적 현실화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동서양 화법의 차이는 분명하다. 이런 차이는 기법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문화사적 맥락의 다름에서 비롯된다. 서양화가 풍경의 세부, 구체의 과학을 중시하면서 사실적 재현에 공을 들인다면, 동양의 산수화는 풍경의 전체, 직관과 기운으로 파악한 이상향에 대한 추상적인 이념으로서의 풍경을 전달하려고 할 뿐 삶의 자리인 현실 공간의 세부 묘사는 끼어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