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3년 10월17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한하운 관련 기사.
기사가 나간 후 ‘문화계에 간첩이 있다’는 주장이 떠돌고 국회에서 대책 촉구 발언이 나올 정도로 의혹이 확산되자 시인은 경찰 조사를 받았고, ‘서울신문’ 사회부장 오소백(吳蘇白)과 차장 문제안(文濟安)이 신문사를 떠나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필화(筆禍) 차원을 넘어 1950년대 문단과 언론계를 짓누르고 있던 적색 알레르기 분위기를 가늠하게 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한하운 필화사건의 뇌관에 불을 붙였으며 결국 피해자가 된 오소백은 신문사를 떠나 1954년 2월부터 대중잡지 ‘신태양’에 ‘올챙이 기자 방랑기’를 연재하고, 이듬해 7월에는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도 출간해 일반에도 널리 알려진 언론인이다. 오소백은 ‘올챙이 기자 방랑기’의 ‘라 시인(癩 詩人) 사건’ 편에 한하운의 ‘전라도 길’을 앞에 내세우고 자신이 겪은 사건의 경위를 기록했다. “이 사건을 빚어낸 모략중상과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끝끝내 싸운 경위는 문단, 지식인, 정치인, 수사당국자 및 신문인 여러분에게 많은 참고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히면서. ‘올챙이 기자 방랑기’ 기록을 토대로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자.
‘레프라 왕자’의 근황
1953년 10월15일 오후 ‘서울신문’ 편집국에 허름한 옷차림을 한 청년이 나타났다. 오소백은 시청 출입기자를 통해 그가 유명한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란 것을 알고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사회부 차장 문제안에게 한하운에 관해 정확히 취재하도록 지시했다. 마침 얼마 전에 한 주간신문에서 한하운이 실존인물이 아닌 유령인물이라 하여, 화제를 모은 일이 있었던 터라 알리바이와 확증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하운은 운동선수처럼 몸이 튼튼해 보였다. 시인은 기자의 물음에 답한 후 앉은자리에서 한 편의 시를 썼다. ‘보리피리’였다. 오소백을 비롯한 사회부 기자들은 한하운이 돌아간 뒤 시를 보고 매우 놀랐다. ‘보리피리’를 낭독하며 모두 좋은 시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기자들이 한하운이 만진 펜에 레프라(leprae·나병)균이 붙었다고 소란을 피운 통에 오소백은 원고지로 펜을 똘똘 말아 휴지통에 내던졌다. 그리고 10월17일자 신문에 “하운(何雲) 서울에 오다, ‘레프라 왕자’ 환자수용을 지휘”라는 3단 제목으로 한하운에 관한 기사와 그가 쓴 시 ‘보리피리’를 실었다.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면
봄언덕
故鄕 그리워
필- 닐리리
보리피리 불면
꽃靑山
어린때 그리워
필- 닐리리
보리피리 불면
인환(人?)의 거리
人間事 그리워
필- 닐리리
보리피리 불면
放浪의 幾山河
눈물의 언덕과 눈물의 언덕을
필- 닐리리
(1953년 10월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