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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등산(天登山)이 거느리는 시간과 풍습

제천

천등산(天登山)이 거느리는 시간과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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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둥산은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세월은 빠르게 흘렀다. 서울의 어두운 술집 골목에서 문득 ‘천둥산 박달재-’를 흥얼거리다보면 그 혹독한 어린 날들이 단번에 망막에 펼쳐져 눈앞이 흐려진다. 그러나 이 늦은 나이, ‘천둥산이 나의 이마 높이로 와 닿아 있고
  • 박달재의 긴 구렁 짧은 구렁이 내 가슴까지 와 있다는 것을’ 조금 눈치 채기는 하겠는데 역사가 뭔지 인간이 뭔지 그리고 내 삶이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원서문학관’에 다다르기 전, 예까지 온 김에 천등산이나 먼저 올라보겠다는 즉흥으로 다릿재 터널을 지나자마자 큰길을 벗어나 백운면 소재지로 들어섰다.

“천등산 다릿재 터널을 지나면 백운면 입구를 알리는 첫 번째 안내판이 길가에 있고 거기서 500~600미터를 더 진행하면 같은 내용의 두 번째 간판이 있습니다. 그 두 번째 간판이 있는 곳의 갈림길로 나와 ‘애련리’ 표시를 보고 계속 오시면 문학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문학관 초청장에는 길 안내문까지 상세히 적어놓아 초행인 나도 손쉽게 나들목을 찾을 수 있었다.

이른 아침, 천등산으로 올라가는 옛 도로에는 오가는 차량 하나가 없다. 고개 마루턱 못미처에 외따로 선 휴게상가의 공터에 차를 세우고 신발을 바꿔 신었다. 상점조차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시각이었다. 상가 뜰 한쪽에 있는 샘물 파이프에서는 맑은 물줄기가 콸콸 쏟아진다. 때마침 물을 길으러 온 주민 두셋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 물이 산허리에서 뿜어 나오는 약수라고 자랑을 했다. 그들에게서 등산로 입구를 확인한 뒤, 나도 수통에 물을 채웠다.

이른 아침에 만난 천등산



숲 속 산길에 들었을 때야 비로소 새벽 햇살이 퍼지기 시작한다. 이렇듯 이런 시각 홀로 녹음의 산길을 걷는 기분만큼 삽상한 것이 또 있을까. 내 몸이 금세 초록으로 물들고 햇살로 환해지는 그런 느낌.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정상에 섰다. 너무 손쉽게 올라왔다는 느낌에 조금 머쓱하기도 하다. 해발 806m의 산 높이가 예사로운 것은 아니지만 천등산 산행이 의외로 쉽다는 정보는 사전에 얻고 있었다. 산행 시작점인 휴게상점 근처가 벌써 해발 400m가 넘기 때문이다. 정상 바위를 디디고 선 채로 충주, 제천 쪽을 휘둘러본다. 이곳에서의 조망도 시원스럽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하는 노랫가락이 떠오르지 않는바 아니지만 남이 다 가지는 상념에 소리까지 흥얼거리는 것은 분명 쑥스러운 짓이다. 산 아래 원서천 물줄기를 내려다보며 또다시 내가 좇아가야 할 길들을 확인하곤 산을 내려온다.

덧붙이자면, 우리 님이 울고 넘은 박달재는 천등산 맞은편 시량산에 있는 고개다. 이곳 천등산에는 박달재가 아닌 다릿재가 있으며 두 고개는 20리 남짓의 거리를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노랫말에도 나오는 ‘천둥산’이란 산 이름 또한 현지인들이 익숙하게 부르는 것이며 정식의 산 이름은 ‘천등산(天登山)’이다.

시와 영화의 마을을 흐르는 강줄기

천등산에서 애련리로 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여느 산간 농촌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평화롭고도 고요하다. 원서천 맑은 냇물이 계속 길을 따른다. 더러 야영객들의 차량이며 천막들이 길가에 서 있는 곳도 있다. 좀전에 내가 올랐던 천등산은 여전히 자신의 넉넉한 품으로 이들 풍경을 감싸준다.

이쯤에서 시 한 편을 떠올려봄도 괜찮다.

천둥산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모두 보냈다 산은 편안하게 강 건너 멀리 앉아 있었다 흐린 날이면 이마를 구름으로 가리고 비가 오면 비 뒤에 숨었다 산불이 났을 때 아무도 산에 올라가 볼 엄두도 못 내고 동네가 두런두런 두려움으로 납작해졌다 / 밤이 되면 박달재를 넘어 흑인병정들이 여자사냥을 나왔다 헬로! 쪼꼬레뜨 기부미 기부미! 후레쉬를 번쩍이며 여자를 찾는 병정들을 따라다니며 나는 손을 내밀었다 재수가 좋은 날은 하나 얻어먹었다 어른들은 밤늦도록 잎담배만 말아 피웠다 / 천둥산 산불이 아침이면 저절로 꺼져서 햇빛 속에 빛나는 것도, 내 뱃속에 들어간 쪼꼬레뜨가 동네여자들의 몸값이라는 것도 나는 몰랐다 누룽지를 달라고 보채다가 부지깽이로 얻어맞고 눈물 흘리며 바라보면, 높고 평화로운 산이 미웠다 돌멩이를 걷어찼다 발톱이 아파서 깨끔발로 뛰기만 했다 / 어두운 술집 모퉁이에서 천둥산 박달재를 흥얼거리는 지금도 나는 잘 모른다 천둥산의 산불도, 동네에 자욱했던 잎담배의 연기도, 숯처럼 까만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리던 창덕이엄마의 한숨도, 나는 하나도 모른다 천둥산이 나의 이마 높이로 와 닿아 있고 박달재의 긴 구렁 짧은 구렁이 내 가슴까지 와 있다는 것을 그저 눈곱만큼 눈치 채고 있을 뿐, 정말이다 하나도 모른다 몰라!

- 오탁번 시 ‘천둥산 박달재’ 전문

산문처럼 읽기 편한 말들을 늘여놓고 특별히 행도 나누지 않은 탓에 언뜻 시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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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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