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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魂의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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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그리고 아픔

‘김 금 수. 화장 중.’ 영락공원 화장장 벽에 걸린 전광판에 붉은 자막이 흐른다. 이승에서의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핏빛으로 흐른다. 이대로 끝을 내기엔 너무 억울한 엄마의 삶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그 상황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지만 죽음으로 종지부를 찍어버린 엄마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이대로 보내선 안 된다는 죄책감 때문에 나는 혼절할 것 같은 육신을 가누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시간이든 뭐든 멈추어만 준다면 죽음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엄마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내가 지은 죄를 빌 최소한의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승에서 엄마의 삶이 얼마나 곡 졌는지 알고 있는 자식으로서 엄마의 안식을 바란다면 죽어도 품어서는 안 될 소망이다. 아흔둘의 엄마를 보내면서 나는 아무런 준비를 못했다. 안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긴 세월 동안 맺히고 맺힌 한의 매듭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될지를 몰라서다. 엄마에 대한 내 마음을 한마디로는 도저히 나타낼 수가 없지만 사랑과 미움의 뒤엉킴이라고밖에 표현이 안 된다. 평생 엄마에 대한 사랑을 무슨 천형이라도 되는 양 남이 볼까봐 마음속 깊고 깊은 곳에 꽁꽁 숨겨놓고 거칠고 드센 미움으로 엄마를 대했다. 마음 밑바닥 내 삶의 원초적 불행의 근원은 엄마가 아버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오해 때문이다.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자상하지는 않지만 나를 사랑한 것만은 확실했다. 그 또한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어느 날 엄마가 슬픈 얼굴을 하고 큰집으로 갔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랐다. 다만 엄마 따라 간 큰집의 보리밥이 먹기 싫었을 뿐이다. 대여섯 어린 나이에 아침에 큰집에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먹고 논길 밭길 가로질러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우리 집으로 가면 아버지는 출근길에 내 손을 잡고 차부까지 데리고 가서 맛있는 것을 사주었다. 그땐 아버지가 사주는 과자가 좋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는 몰랐다. 그리고 잠시 내 기억은 쉰다. 다시 엄마랑 집으로 왔을 때부터 아버지랑 같이 살지를 않았다. 이건 어쩌면 기억이 아닌, 들어 알고 있는 상황의 종합적인 결론인지 모른다. 희붐하고 막연한 기억이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예닐곱 살 무렵 아버지가 대문이 둘씩이나 달린 큰 집을 샀다. 그때 말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었다. 나는 빨강 모직에 하얀 토끼털이 달린 예쁜 망토를 입고 기분이 한껏 부풀어 양은 냄비 가득히 자잘한 세간을 담아 아버지가 새로 산 집으로 짐을 날랐다. 부지런히 날랐다. 한참을 신바람 난 다람쥐처럼 세간을 나르고 있는데 계속 입맛을 다시면서 갈팡질팡하던 아버지가 내 어깨를 다독이면서 짐을 집으로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그때 아버지는 다니는 버스 회사의 차창과 정분이 나 내심으로 딴살림을 차리기 위해 그 집을 마련했지만 당신의 사회적인 위신 때문에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와의 기 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안다고 생각한 나는 퍼질러 앉아 아망스럽게 울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울면 될 줄 알았다. 아버지가 백기를 들어줄 거라고 믿었기에 일부러 앙앙앙 소리 내어 더 크게 울었지만 아버지는 끝내 내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그게 이별의 서곡, 엄마가 아닌 내가 감지한 아버지와 이별의 시작이었다. 가장 선명한 최초의 기억이다.

여덟 살 3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날 아버지에게 가서 입학식에 아버지랑 같이 가자고 졸라서 약속을 받아냈다. 아버지와 한 최초의 약속인 셈이다. 다음 날 곱게 차려입고 왼쪽 가슴에 이름표와 손수건을 달고 아버지 집으로 갔다. 손잡고 같이 학교에 가자고 계속 졸라도 아버지는 입맛만 다실 뿐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리 팔을 잡아당겨도 꿈쩍도 않으면서 엄마랑 같이 가라고 나를 달랬다.

나는 입학식을 다 마칠 때까지 화가 덜 풀려 씩씩거리며 아버지에게로 달려가서 있는 힘껏 발길질을 했다. 그래도 성이 안 풀려서 아버지의 등 뒤로 가서 수도 없이 아버지의 등을 두들겨 팼다. 주먹으로 아버지의 머리를 쥐어박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두 팔을 돌려 그런 나를 업어주는 시늉을 하면서 내 화풀이를 받아주었다. 등 그네를 태우듯이 일렁일렁 등을 움직여주기도 했다. 아버지의 등에 반쯤 업힌 채로 골이 풀릴 때까지 사정없이 때릴 참이었다. 온갖 응석을 다 받아준 아버지였으니까.

“뭐가 이래 못된 가시나가 다 있노. 안 내려오나.”

아직은 작은엄마라고 불러보기도 전의 작은엄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이 작은엄마에 대한 첫 기억이다. 겨우 여덟 살의 여린 계집아이는 안 그래도 뭔가 안 좋은 느낌으로 가득한 여자의 앙칼진 고함에 겁을 먹고 멈칫 하던 짓을 멈추고 그 여자가 아닌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봤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이상하고 낯선 분위기가 얼마간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보이지도 않는 먼 산을 보는 척, 모른 척, 시침을 떼고 나랑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당연히 그 여자를 나무랄 줄 알았는데 나를 업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풀었다. 아버지의 등에 기대 서서 앙앙 울었다. 평소에 하던 대로 나를 달래달라는, 내편이 되어달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의 신호를 끝내 받아주지 않았다. 엄마에게 가라는 말만 했다.

스스로 의식은 못했지만 나는 그날 아버지를 가슴 어딘가에 묻어버렸던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아버지와 주파수를 맞추는 법을 아예 잊어버리고 말았다. 고작 여덟 살의 계집애였지만 그날의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하고 짙은 아픔이 되었다. 아버지가 날 달래주길 바라며 울면서 아주 천천히 아버지 집을 나왔다. 아버지는 그냥 울면서 가게 나를 내버려두었다. 분명 내 아버진데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여덟 살의 꼬마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겠나? 뒤에 생각해보니 그날의 일은 나와 아버지의 문제기도 했지만 엄마와 작은엄마의 기싸움이었다. 여리디여린 나를 추악한 어른들의 싸움판으로 밀어 넣은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포기했으면 깨끗이 포기할 일이지, 그렇게 나는 엄마 아버지 모두에게서 상처를 받기 시작했다.

큰 집을 샀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상처였다. 규모는 작아도 목욕탕과 화장실이 실내에 있고 좋은 종이로 도배된 큰 방이 셋이나 되고 다른 집에는 없는 복도와 현관이 있어 비가 와도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우리 집도 나쁘지는 않았다. 근데 왜 엄마는 이미 판판이 지고 있는 싸움에 나를 방패로 내세웠는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해가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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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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