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 익은 열매를 달고 있는 꾸지뽕나무.
그런데 도착해보니 꾸지뽕나무는 잔가지까지 거덜 나 있었다. 붉은 단사는 하나도 남아 있질 않았다. 이미 누군가의 손을 탄 지 오래였다.
그 꾸지뽕나무가 내 것이나 됐던 것처럼 속이 상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언제 붕괴할지 모를 것 같은 초경쟁사회 대한민국이다. 꾸물거리다간 자칫 야산의 나무 열매도 차지하기 어렵게 된 게 분명하다. 아닌 게 아니라 올가을엔 산악회에서 떼로 몰려다니는 ‘아줌마부대’도 꾸지뽕에 관심을 보였다. 얼추 비슷하게 생긴 산딸나무 열매를 꾸지뽕이라고 잘못 알고 우루루 몰려드는 꼴도 여러 번 봤다. 심상치 않았다. 몸에 좀 좋다 하면 남아나는 게 없는 세상이다.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 추억과 그리움 때문에 눈길을 주던 하찮은 산열매가 아니다.
산뽕나무와 달리 줄기에 날카로운 가시
꾸지뽕나무를 잘 모르는 이들도 있을 테니 설명을 좀 하겠다. 시골에서 자란 40~50대라면 친숙하겠지만. 이 나무는 우리나라 황해도 이남의 산야 전역에 흔하다. 산기슭 양지쪽이나 계곡 주변, 마을 부근에서 많이 자란다. 잎이나 가지를 꺾으면 흰 뜨물 같은 끈끈한 수액이 뚝뚝 떨어진다. 좀 성가시다. 대체로 키가 작은 관목이다. 그러나 필자가 화순 춘양면 산속에서 본 꾸지뽕나무들은 떡갈나무 같은 주변의 교목들보다도 키가 컸다. 소교목이라 해야 더 맞을 듯하다.
5~6월에 서로 다른 나무에서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 10월경에 암나무에서 붉게 익는 둥그런 열매는 과육이 달고 맛이 있어 날것으로 먹을 수 있다.
뽕나뭇과에 속하지만 생김새가 여러모로 뽕나무와 다르다. 한자로는 ‘자목(木)’ 또는 ‘자상(桑)’이라고 한다. ‘자()’는 산뽕나무를 뜻한다. 그러나 민간에서 흔히 산뽕나무라 부르는 것과는 다르다. 가지와 줄기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게 꾸지뽕나무다. 뽕나무나 산뽕나무에는 가시가 없다. 이 때문에 ‘가시 자(刺)’를 넣어 ‘자자(刺)’, 가시나무뽕이라는 뜻인 ‘형상(荊桑)’으로 부르기도 한다. 잎 모양도 다르다. 뽕잎보다 크기도 작고 뽕잎에는 있는 톱니가 없어서 확연히 구별된다.
열매도 뽕나무의 오디와는 모양이 전혀 달라 호두과자 비슷하게 생겼다. 중국에선 둥근 추를 닮아서 가자(佳子), 또 여지(枝)라는 열매와 비슷하다고 해서 야여지 또는 산여지라고도 한다. 검붉게 잘 익은 꾸지뽕 열매는 단맛이 강하지만 덜 익은 열매는 예의 끈적끈적한 흰 뜨물이 많아서 비위가 상한다.
정약용 같은 실학자는 꾸지뽕을 가리켜 “형상(荊桑)도 양잠에 쓰니 심을 만하다”고 했다. 꾸지뽕이라는 이름도 이 나무의 잎으로도 누에를 키울 수 있어서 ‘굳이 뽕’이라 부르다가 소리 나는 대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중국 고대의 훈고학서 ‘이아(爾雅)’엔 꾸지뽕잎을 먹여 키운 누에를 ‘극견(棘繭)’이라고 하며, 그 실로 금슬을 만들면 소리가 매우 청아하다고 쓰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지역에 따라 굿가시나무라고도 하고, 활뽕나무라고도 한다. 활뽕나무는 재질이 잘 휘고 단단한 이 나무로 만든 활을 최고로 쳤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꾸지뽕을 가리키는 ‘자()’엔 황적색이란 뜻도 있다. 꾸지뽕 나무를 우리면 나무의 수액이 황적색으로 변한다. 이를 자황(黃)이라 하는데, 임금이나 신분이 귀한 이의 옷을 만들 때 쓰이던 물감이었다고 한다. 과거엔 나름대로 쓰임새가 있었던 나무다. 그러던 것이 근대화 이후 양잠농가들조차 사라지면서 촌구석의 어린 애들이나 그 열매를 탐하는, 별 볼일 없는 야산의 잡목이 되었다.
꾸지뽕을 둘러싼 과장 광고
노자는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反者 道之動)’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건 되돌아간 정도가 아니다. 요사이 꾸지뽕은 쓸모없는 잡목에서 ‘단사’와 같은 선약(仙藥)으로 그 신분이 엄청나게 바뀌었다. 위암, 식도암, 폐암, 간암 등 흉악한 병을 고치는가 하면 여성의 자궁질환에 특효여서 자궁암이나 자궁근종을 씻은 듯 낫게 하는 영약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그동안 급격한 변화가 부담스러워 은인자중하며 내공을 키우는 듯하더니 최근엔 행보가 당당해졌다.
얼마 전 사고를 한 건 쳤다. 강원도 모 지역의 영농조합에서 통 크게 중앙 일간지와 경제신문에 이 ‘선약’ 꾸지뽕을 전면광고했다. “100% 국내산 꾸지뽕으로 당뇨, 고혈압을 한방에!” 광고 모델로 나선 신바람전도사 황모 교수의 웃는 얼굴이 실려있다.
선정적인 광고 문구는 위력을 발휘했 다. “꾸지뽕이 그렇게 좋다더구먼.” 필자 주변에서도 갑자기 꾸지뽕에 ‘필이 꽂힌’ 사람 수가 늘어났다. 저런 정도의 광고라면 의약품도 아닌데 허위 과대광고로 문제되지 않을까 했다. 필자가 꾸지뽕 수확의 기쁨을 빼앗긴 것도 이 광고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