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댈러웨이 부인 <br>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나는 열 시간 전 뉴욕을 떠나 밤새 대서양을 건너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고, 하이드 파크 옆 숙소에 짐을 부려놓자마자 거리로 튀어나온 참이다. 런던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이번에는 작정하고 웨스트민스터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런던의 공원과 아침 거리를 걸어보리라 생각했었다, 댈러웨이 부인처럼.
꽃은 자기가 사오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 (…) 얼마나 상쾌한 아침인가. (…) 열린 창문 앞에 서 있노라면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잠시 서서 피카딜리를 지나가는 버스들을 바라보았다. (…) 차를 타고 공원을 가로질러 집에 가던 일, 한번은 서펜타인 호수에 1실링 동전을 던진 것도 기억났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기억은 있는 법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지금 여기 이것, 그녀 앞에 있는 것이었다.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거리, 거리들
버지니아 울프가 1925년에 발표한 ‘댈러웨이 부인’은 1923년 6월 어느 하루 저녁 파티를 준비하려는 댈러웨이 부인과 같은 날 그녀의 파티가 열리는 시각, 전쟁 후유증으로 환각에 사로잡혀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셉티머스라는 낯모르는 이웃 청년, 이 두 존재의 서로 다른 하루 행로를 런던의 거리와 공원, 빅 벤의 종소리를 통해 재현한다. 댈러웨이 부인이 처한 현재의 거리와 공원은 과거 어느 한때로 이어지는 시간과 공간의 통로들이다. 그녀가 거리를 걸어가고, 신호등 앞에 멈춰 서고, 공원을 가로지르고, 벤치에 앉고, 공원을 나가는 사이 현재와 과거의 장면들-에피소드들이 영화의 필름처럼 돌아간다.
우리는 참 바보라니까, 그녀는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건너며 생각했다. 왜 그렇게 삶을 사랑하는지, 어떻게 삶을 그렇게 보는지, 삶을 꿈꾸고 자기 둘레에 쌓아올렸다가는 뒤엎어 버리고 매 순간 새로 창조하는지 (…) 지금, 이 시간에도, 점잖은 노부인들은 자동차를 타고 쏜살같이 지나간다. 점원들은 진열창에서 인조 보석이며 다이아몬드, 미국인들을 유혹하느라 18세기 풍으로 세팅한 연푸른 바다 빛깔 브로치 같은 것들을 진열하느라 바쁘다. (…)
“난 런던 거리를 걷는 게 좋아요.” 댈러웨이 부인이 말했다.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이 소설은 아일랜드의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즈’(1922), 프랑스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8)와 함께 ‘의식의 흐름’ 기법을 구사한 20세기 모더니즘 소설로 꼽힌다.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란 ‘개인의 의식 속에서 감각, 상념, 기억, 연상 등이 계속적으로 흐르는 자유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생각이 합리화하기 전의 의식 상태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심리학의 원리’(1892)에 처음 사용하면서 파급된 심리학 용어로 문학, 특히 인간의 마음 상태를 들여다보고 다루는 소설 장르와 관계가 깊다.
의식의 흐름이 소설과 접목되면, 거대한 회상의 메커니즘을 통해, 마치 강의 물줄기가 바다를 향해 흘러가듯이 현재와 과거, 의식과 무의식이 뒤섞이며 장면이 창출되고 서사가 진행된다. 의식 속에 출몰하는 생각들을 서사로 이끌어가려면 장치가 필요한데, 바로 인물을 거리로 내보내는 것이다.
‘댈러웨이 부인’과 의식의 흐름 기법 면에서 쌍벽을 이루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의 경우,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한 문장으로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의 하루 더블린 거리 헤매기’다. 주인공 댈러웨이 부인이 저녁 파티에 쓸 꽃을 사기 위해 빅토리아 스트리트의 집을 나서서 본드 스트리트의 꽃집에 이르는 과정의 소설 전반부는 런던 템스 강 서쪽 웨스트민스터 지역의 거리 순례기라고 할 정도로 거리명들이 수시로 출몰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더블린이나 런던에는 ‘블룸을 따라 더블린 걷기’‘댈러웨이 부인을 따라 런던 걷기’ 같은 프로그램이 문학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