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공원들
2013년 7월 27일 밤 아홉 시, 런던 블룸즈버리 고든스퀘어. 굵은 빗줄기가 어둠을 뚫고 거리에 쏟아지고 있다. 비바람에 맞서 우산 손잡이를 꽉 그러쥐고 공원 입구 안내 푯대와 마주하고 섰다. 거기, 익숙한 얼굴의 흑백사진이 빗줄기에 젖은 채 어둠 속을 향하고 있다. 다음 날 아침 오전 10시, 나는 다시 이곳을 찾아 그 얼굴과 마주하고 있다. “고든스퀘어 가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두 남녀가 그곳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담배를 피우는 중에 잠시 들고 있는, 도도한 듯 예민해 보이는 여인은 버지니아 울프다. 그녀가 카메라 렌즈에 잡힌 것은 1923년 ‘시간들 The Hours’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소설을 쓰기 시작한 때다. 이 ‘시간들’은 ‘집에서’‘파티’라는 제목을 거쳐 2년 뒤 ‘댈러웨이 부인’으로 출간된다. 그녀가 앉아 있는 이 고든스퀘어 가든은 그녀가 살던 집(고든스퀘어 빌딩 46번지) 앞의 아담하고 조용한 공원이다.
런던 체류 닷새 중 이틀을 이 고든스퀘어를 배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국주의 왕조국가 영국을 소설을 통해 비판한 지성인,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인권을 주창한 페미니즘의 선봉자로 대변되는 버지니아 울프의 글쓰기란, 정상과 비정상(신경증) 두 세계를 줄타기하듯 아슬아슬하게 오가야 했던 쐐기풀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철저히 ‘자기만의 작품’이 아니던가. 하긴, 구원의 글쓰기가 아닌 작품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싱그러운 아침 공기를 마시며 공원 저편 블룸즈버리 그룹의 주축인 버지니아 울프와 경제학자 케인스가 살았고, EM 포스터가 드나들었던 고든스퀘어 빌딩 46, 50, 51번지를 차례로 건너다본다. 햇살이 일으킨 현기증 때문인지 울프가 창문으로 내다본다는 착각에 빠진다. 환청인가. 멀리 빅 벤의 시종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신호라도 되는 양 나는 고든스퀘어 파크의 문을 나선다. 어디로 갈 것인가. 하이드 파크? 아니면 리전트 파크!
그는 발길을 돌렸다. (…) 어디로 간다지? 어디면 어때. 그럼 리전트 파크 쪽으로 좀 올라가 볼까. (…) 찬란한 아침이기도 했다. 완벽한 심장의 고동과도 같이, 생동감이 길거리를 뚫고 지나갔다. (…) 어렸을 땐 곧잘 리전트 파크를 거닐곤 했었다. -이상한 일이야. 어린 시절 생각이 자꾸만 나다니. 아마 클라리사를 만났기 때문이겠지. 여자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과거에 살거든, 하고 그는 생각했다. 여자들은 특정한 장소에 애착을 갖지. (…) 리전트 파크는 환히 기억하고 있었다. 곧장 가는 긴 산책로, 왼쪽에는 풍선을 사던 작은 집, 어딘가 명문이 새겨져 있던 기묘한 조각상. 그는 빈자리가 있나 둘러보았다.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소리, 소리들
이 소설에서 공원은 서사를 이끌어가는 거리들만큼이나 중요한 공간이다. 소설의 출발점인 빅토리아 거리는 버킹엄 궁과 웨스트민스터와 인접한 세인트 제임스 파크로 이어진다. 댈러웨이 부인과 더불어 소설의 또 다른 중심인물인 셉티머스가 주로 시간을 보내는 곳은 작가가 유년기를 보낸 하이드 파크 북쪽의 리젠트 파크다. 그리고 댈러웨이 부인과 셉티머스를 차례대로 만나고 스치도록 등장시킨 피터 월시는 빅토리아 거리에서 리젠트 파크까지 이동한다. 이 피터라는 인물은 30년 전 그녀가 리처드 댈러웨이와 결혼하기 전의 첫사랑이다. 모험심이 강하고 도발적인 캐릭터인 이 인물이 인도에서 잠시 돌아와 댈러웨이 부인, 아니 클라리사를 방문하고 나오는 과정에서 소설의 회상 영역은 객관적으로 확장되면서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된다.
거리와 공원에서 줄기차게 진행되는 여러 인물의 상념을, 곧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을 하나의 주제로 바로잡아주는 장치가 필요한데, 버지니아 울프가 고안해낸 방법은 웨스트민스터의 종소리다. 정시, 15분, 30분, 45분에 울리는 이 종소리는 끝없는 과거 회상에 빠진 인물들을 현실로 데려오는 구실을 한다. 런던 사람들이 여왕을 섬기듯 모두 이 종소리 아래 살아가고 있는 듯, 소설의 시간과 공간을 종소리가 지배한다.
댈러웨이 부인과 셉티머스라는 두 중심 인물 사이사이 피터 월시, 루크레치아(셉티머스의 아내)는 물론 꽃집 여자, 익명의 거리 행인들까지 각자의 시점으로 서술되는데, 각자의 음색과 음역을 표출하면서 한 편의 작품 속에서 입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나가는 교향악처럼 다성적인 울림이 절묘하다. 눈으로 상상으로 런던 곳곳을 여행하고 싶다면, 댈러웨이 부인과 함께하는 소설 여행을 권한다.
웨스트민스터에 살다보면-얼마나 되었지? 20년도 넘었어-이렇게 차들이 붐비는 한복판에서도, 또는 한밤중에 깨어서도, 간혹 특별한 정적 내지는 엄숙함을 느끼게 되지. (…)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정지의 순간, 빅 벤이 시종(時鐘)을 치기 직전의(독감 때문에 그녀의 심장이 약해져서 그런 거라고 하지만) 조마조마함. 아, 마침 종이 치네! 종소리가 퍼져나간다. 음악적인 예종(豫鐘)이 울리고, 이어서 시종이 친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종소리가 겹겹이 묵직한 원을 그리며 공중으로 흩어져간다.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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