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황토’가 ‘찰흙’을 이긴 까닭은?

  • 권삼윤 < 문화비평가 > tumida@hanmail.net

    입력2004-09-01 1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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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00년 전 벼농사를 지은 흔적이 발견되면서 세계 고대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한 중국 강남 변방의 작은 나루 허무두(河姆渡). 이곳은 중국대륙의 젖줄 노릇을 하며 황허문명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찬란한 문화를 일궈낸 창강문명의 원류다. 산 설고 강 선 허무두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러나 그곳에선 자연과 공존을 추구한 아름다운 고대인들과의 가슴 벅찬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날씨가 좋지 않았다. 전날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침까지 주룩주룩 내렸다. 시야가 흐려 사진을 찍기 힘들 것 같아 시후(西湖)로 가는 일정을 다음 날로 미루고 허무두(河姆渡)부터 찾기로 했다.

    항저우(杭州) 최대의 명물인 시후는 그리 크지 않은 호수이나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터라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또한 그 한 쪽에는 허무두 유적에서 발굴한 유물들이 전시된 저장성(浙江省) 박물관까지 있어 그곳부터 찾는 게 순서지만, ‘하늘’이 그걸 허락지 않으니 항저우의 동부터미널에서 사오싱(紹興)으로 가는 마이크로버스에 몸을 싣는 수밖에 없었다.

    터미널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차를 타는 사람이 드물어 ‘이번에는 좀 편히 가나’ 싶었는데, 차가 큰길로 들어서자 승객이 계속 밀려들어 통로까지 가득 차는 바람에 옴짝달싹할 틈도 없었다. 중국엔 과연 사람이 많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만원을 이루는 마이크로버스를 타보면 누구나 이를 실감할 수 있다.

    7000년 전, 벼농사를 짓다

    ‘여행은 만남’이라 생각하는 터라 나는 차를 타고 이동할 때 가능하면 옆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 대개의 경우 그 결과는 성공적이다. 여기에서 ‘성공’이라 함은 상대가 호감을 갖고 나를 대해주는 것, 그리고 그들로부터 생각지도 않은 귀중한 정보를 얻는 것을 일컫는다. 사실 일정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만큼 얘기를 나누기에 좋은 짝도 없지 않은가.



    중국에서도 그랬다. 중국어를 못하기 때문에 변변찮은 실력으로 메모지에 한자를 써서 내 의사를 전하는데도 중국인들은 기꺼이 대화에 응해줬다. 덕분에 별 탈 없이 중국의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었고, 때론 재미난 일도 만들었다.

    사오싱으로 가는 차에서 내 옆자리에 앉았던 린진청(林金成)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는 한자 필담과 영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나눴는데, 그는 베이징대학에서 지질학을 공부했고 사오싱의 한 여행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대뜸 “그럼, 관광지의 지질분석을 하나요?” 하고 물었다. 그는 “물론, 전공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이죠”라고 답했다. 순간, ‘내가 너무 오버했구나’ 싶었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바보짓이 처음 만난 사이의 거리감을 없애주기도 한다.

    그는 내게 사오싱으로 가는 까닭을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혹시 허무두란 곳을 아세요? 위야오(餘姚)란 곳에 있는 작은 나루인데, 7000년 전에 벼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져 고고학적으로는 아주 유명한 곳이 됐답니다. 중국을 대표하는 황허문명보다 2000년 정도 앞서 문명이 태어난 곳이라 해서 찾아가는 길입니다.”

    “사오싱에 산 지 꽤 오래됐지만 허무두란 말은 처음 듣습니다. 선생은 고고학자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문명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생입니다.”

    “아무리 봐도 학생 같지는 않은데요.”

    “‘학생(學生)’, 즉 배우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하하, 선생은 중국어를 나보다 더 잘하는군요.”

    그의 농담에 우리는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사오싱에는 볼 일이 없습니까? 그러시다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텐데요. 잘 아시겠지만 사오싱은 소설 ‘아큐정전’의 저자 루쉰(魯迅)의 고향이라 그의 생가도 남아있고,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생가도 가볼 만합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 것 같군요. 사오싱에는 ‘난정(蘭亭)’이란 곳도 있죠. 4세기 동진(東晋)시대의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가 시를 짓고 글씨를 썼다는 곳 말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곳부터 찾고 싶습니다. 왕희지의 글씨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그렇군요.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사오싱을 찾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꼭 사오싱을 찾아주세요.”

    린씨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사오싱에 내리면 위야오나 허무두로 가는 차편이 있을까’ 하는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허무두란 곳이 워낙 작은 마을이라 많은 자료를 뒤적여 보았으나 교통편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만한 정보를 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이런 경우를 한두 번 겪은 바가 아니기에 몸 달아할 것까지는 없었지만, 현장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몰라 솔직히 걱정스러웠다.

    내가 이런 속을 털어놓자 린씨는 “일단 사오싱으로 가봅시다. 해결방법이 있을 겁니다”라며 나를 달랬다. 사오싱에 도착하자 다행히 비는 그쳤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차창에 비친 사오싱 시내의 길은 아주 길고 곧았다. 최근에 새로 닦은 듯했다.

    린씨는 터미널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매표소로 달려가 위야오로 가는 차편을 알아보았다. 오후 2시35분에 출발하는 차가 있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나마 오후엔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허무두는 몰라도 위야오는 제법 큰 도시로 알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는 차가 하루에 세 편밖에 없다는 말을 들으니 적이 실망스러웠다. 위야오를 지나면 동중국해를 끼고 있는 닝보(寧波)라는 대도시가 있고, 더구나 중국은 아직도 대중교통에 수송의 상당 부분을 의지하는 실정 아닌가.

    위야오에서 사오싱으로 돌아오는 차편도 알아보았다. 차편 자체가 아예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루 두 편이 운행되는데, 이미 그곳을 출발했다는 것이다. 잠시 표정이 굳어 있던 린씨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택시밖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한번 알아보자”고 했다.

    터미널 앞이라 택시는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가 “허무두!”라고 외치자 한 젊은이가 아는 체를 해왔다. 언젠가 한번 다녀온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는 길을 알고 있다는 게 일단 마음에 들었다. 린씨는 그에게 얼마면 다녀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더도 덜도 말고 300위안(약 4만8000원)을 달라고 했다. 버스를 이용하면 30위안 정도면 될 터라 그 10배를 줘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려 “250위안이면 어떠냐”고 되묻자 그는 “가는 데 2시간, 오는 데 다시 2시간, 둘러보는 데 2시간 해서 6시간이 소요되는 데다, 오고 가는 길에 톨게이트 비용만 100위안이 든다며 그 아래로는 절대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때가 11시50분. 오후 6시 전후해서 돌아올 요량을 하고 그 젊은 친구에게 의지해 허무두로 향했다. 린씨에게는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이메일 주소도 주고받았다.

    시내를 벗어나자 차는 곧장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하자 택시기사인 한펑(韓峰)은 자신이 태권도 2단이라며 자랑했다. 20대 중반의 혈기 넘치는 젊은이라 그런지 엄청나게 속도를 냈다. 별로 좋아 보이지도 않는 차로 가끔은 시속 170km까지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대는 바람에 불안하기 그지 없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그의 처분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필담을 나누기도 어려워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자 그는 일본 가요 테이프를 틀었고,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인도음악으로 바꿔 틀었다. 나도 인도음악을 좋아하는 터라 “음악이 마음에 든다”고 하자 흥이 나는지 노래를 따라불렀다. 그는 일본음악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는데, “한국 노래는 좋아하지 않느냐”고 묻자 “별로”라고 했다. 왠지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척 솔직한 친구였다.

    야오강(姚江)을 건너서

    사오싱도 그렇지만 위야오도 항저우만에 연해 있기에 지형은 평탄했다. 그래서 주위는 온통 파란 벼가 자라는 논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사이로 달리는 수로는 잘 정비돼 있었고, 띄엄띄엄 나타나는 마을은 개량작업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깔끔하고 산뜻해 마치 서유럽의 농촌마을을 보는 듯했다. 이런 농촌지역에까지 ‘중국식 새마을사업’이 진행된 것을 보면 중국의 개혁정책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추진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중국에선 고속도로가 아닌 도로에서도 톨게이트료를 받는다. 대중교통수단에는 더러 면제해주는 곳도 있으나, 승용차나 택시는 예외없이 돈을 내야 했다. 그들 말로는 그 돈을 새로운 도로 건설에 쓴다고 했다. 기름값보다 톨게이트비가 무서워 차를 끌고 다니기 어렵다고 하는 중국인들도 많이 봤다. 나는 한펑이 톨게이트 요금을 낼 때마다 걱정이 됐다. 너무 비싸서 그걸 내고도 남을 게 있을까 싶어서였다.

    사오싱을 떠난 뒤로 몇 개의 대교를 건너고, 또 몇 개의 도시를 지나자 닝보로 가는 길을 알리는 도로표시판이 나타났다. 닝보는 9세기 장보고 선단이 활동한 바가 있어 우리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당시 신라인들은 이곳에서 이슬람 상인들과 만나곤 했는데, 이런 전통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는지 고려 사신들이 머물던 고려관 터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그 길을 따라 얼마간 달리자 ‘허무두 유지(遺址)’로 가는 길을 일러주는 팻말이 보였다. ‘앞으로 5km’라는 글귀와 함께. 팻말이 이끄는 대로 고속도로를 벗어나 2차선 길을 달려 막다른 데까지 이르렀다. 그때 ‘허무두 유지’란 안내판이 우리를 맞았으나 아무리 주변을 살펴봐도 유적지 같은 곳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숲속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보았으나 거기서도 시야를 가로막고 나선 것은 유적지가 아니라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었다. 강 건너편에 뭔가 있나 하고 살펴보니 돌을 세워 만든 푯말과 전시관 같은 것이 어슴프레하게 눈에 들어왔다. 유적지는 강 저편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안내판을 이쪽에다 세워둔 것일까. 강폭은 못돼도 200m는 될 것 같았다.

    더욱이 강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강 위를 오가는 보트도 보이지 않았다. 도움을 청할 데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날씨는 잔뜩 흐려 당장에라도 장대비가 퍼부을 것 같았다. 어렵사리 여기까지 왔는데, 강을 못 건너 그냥 이대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나는 강가의 돌계단에 풀썩 주저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할 말을 잃기는 한펑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허무두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한 그의 말도 거짓임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그의 안쓰러워하는 표정에서 어떻게 해서든 나를 강 건너로 데려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면 되는 것 아닌가.

    바로 그때였다. 천만다행으로 강 저편에서 배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가 노를 젓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공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소리도 질러댔다. 사공이 우리를 봤는지는 몰라도 배는 서서히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신이 났고, 한펑의 얼굴도 환하게 피어났다.

    그렇게 한 10분쯤 지났을까. 마침내 배가 우리 앞에 닿았다. 여자 손님 두 사람이 배에서 내렸다. 한펑은 급히 사공에게 다가가 무어라 하고는 나를 향해 빨리 타라는 시늉을 했다. 차를 강가에 세워둔 채 우리는 배에 올랐다.

    우리가 건너는 강은 야오강(姚江)이었다. 사공은 “야오강은 양쯔강의 지류로 항저우만으로 흘러든다”고 했다. 강폭이 넓고 수량도 많았으나 강이 굽이를 이뤄 물살이 느린 곳에는 누군가가 쳐놓은 그물도 보였다. 물빛이 흐린 게 고기가 많을 것 같았다.

    배가 닿은 곳은 유적지 입구였다. 그걸 알리는 푯말은 무척이나 컸다. 아무렇게나 생긴 두 개의 큼지막한 돌 위에 길쭉하고 커다란 돌 하나를 올려 뉘어 놓은 것인데, 그 표면에는 두 마리의 새가 마주보며 둥근 태양을 껴안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유적지에서 발굴된 상아 조각의 그림을 확대한 것으로, 그 문양은 어느새 허무두 문화의 상징물이 되어 그렇게 입구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걸 보면 허무두인들은 새가 태양을 동에서 서로 이동시킨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이들보다 훨씬 후대에 압록강변에 살았던 고구려인들도 무덤 속 벽면에 태양과 함께 ‘삼족오(三足烏, 다리가 셋인 까마귀)’를 그려놓지 않았던가(이를 ‘日中 三足烏’라 부른다). 새만이 하늘을 날 수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이해못할 바가 아니다.

    태양은 하루도 쉬지 않고 운행을 계속해야 한다. 테오티오칸인들과 아즈텍인들, 그리고 마야인들은 태양이 노쇠해서 식어버리면 어쩌나 하고 인신공희(人身供犧)를 행했다지만 허무두인들은 새를 그려 태양의 안전 운행을 믿었다. 얼마나 인간적이고 아름다운가. 새의 알에서 제왕이 태어난다는 난생설화는 이런 문화의 소산이다.

    그렇게 되려면 태양을 움직이게 하는 새 또한 죽지 않아야 한다. ‘불사조’란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그러므로 새 숭배신앙과 태양숭배 신앙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그렇다고 새가 영생, 불사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자의 역할도 해냈다. 무덤 속에 삼족오를 그렸던 고구려인들이 그 새의 힘을 빌려 승천하고자 기원했던 사례가 이를 말해준다. 영생의 장소가 하늘이라고 한다면 영생과 승천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태양숭배는 삶의 많은 부분을 태양의 운행에 의지해야 하는 농경민들에 의해 주로 행해졌기에 농경문화의 한 특징을 이룬다. 새와 태양을 함께 새긴 허무두 유적의 조각은 그러므로 이곳이 농경문화권이었음을 말해주는 물증 구실도 해내고 있는 것이다.

    허무두 유적이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배수펌프 설치공사를 하다 우연히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인 홍도(紅陶)와 흑도(黑陶)를 발견한 1973년 9월의 일이다. 본격적인 발굴작업을 편 결과, 새와 태양이 새겨진 상아조각 이외에 불에 탄 벼이삭, 벼의 모습이 새겨진 토기, 벼농사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뼈로 만든 연장 등이 출토됐다.

    이들 유물은 벼 재배가 시작된 곳이 인도의 아삼지방과 양쯔강(揚子江) 상류지역인 윈난(雲南) 일대라는 종래의 정설을 일거에 뒤엎는 결과를 가져왔다. 5000년 전 윈난에서 재배하기 시작한 벼가 3000년 전 양쯔강 하류로 전래됐다는 학설로는 7000년 전 허무두에서 벼가 재배됐다는 사실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우리나라에선 最古의 벼농사 흔적이 한강 유역에서 나타나 중국 남방으로부터 전래됐다는 남방전래설이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젖줄 창강

    양쯔강 하류의 강남 땅은 늘 후진 지역으로 대접받았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래 역대 왕조의 도읍지는 창안(長安·지금의 시안[西安])과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베이징 등 황허(黃河) 유역의 중원(中原)에서만 맴돌았지 강남 땅으로는 내려간 적이 없다. 요나라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남하해야 했던 남송(南宋)이 항저우를 도읍지로 삼은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사건일 뿐이다.

    그런데 허무두 유적의 발굴로 7000년 전 강남 땅에서 벼농사를 일구며 수준 높은 문화를 영위한 무리가 있었음이 밝혀졌으니 중국 고고학계는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사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허무두 문화와 그보다 약간 후대인 기원전 4000년경 항저우 일대에서 신석기 문화를 꽃피웠던 량주(良渚)문화(벼농사, 흑도, 옥기, 토담 등이 주내용이다) 등을 한데 묶어 ‘창강문명(長江文明)’이란 이름을 붙였다.

    창강문명이란 명칭은 황허문명을 의식해서 고안해낸 것이다. 황허문명에 대한 중국인들의 강한 집착이 그런 결과를 빚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황제(黃帝·중원은 황토 땅이라 이런 말이 생겨났다), 중국, 중화 등 그들의 정체성을 일컫는 말들 모두가 황허 유역의 ‘중원’에서 나왔다.

    중국에는 강을 일컫는 단어가 두 개 있다. 하나는 ‘강(江)’이고, 다른 하나는 ‘하(河)’다. 강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원주민인 몽족과 크메르족의 언어에서 개울(川)을 뜻하는 ‘크룽(kroung)’에 기원을 둔 것으로 주로 강남지역에서 쓰인다. 하는 개울이란 뜻을 가진 몽골어 ‘율(yool)’에서 나온 것으로 강북에서 주로 통용된다. 중국의 고대 상형문자에선 강이나 하는 나오지 않고 오직 천(川)만 나타나는데, 이는 강이나 하가 후대에 생겼거나 외부에서 들어왔음을 말해준다.

    중국대륙의 남부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며 흐르는 양쯔강(중국인들은 그저 ‘창강’이라 부른다)은 아시아 최대의 강이다. 길이가 6300km나 되기에 유역면적만도 1800만㎢에 이른다. 이는 중국 전체 면적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식량의 40%, 비단과 목재의 32%, 담수어의 65%가 이곳에서 나고, 수력발전 잠재력의 50%를 담당한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이곳에 모여 산다. 이렇듯 풍요로운 창강 일대가 오랫동안 미개의 땅으로 낙인찍혀 온 사실은 좀체 납득하기 어렵다.

    잘 알려진 대로 세계 4대 고대문명은 큰 강 유역에서 태어났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황허문명을 제외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은 북위 25도에서 35도 사이에서 발아해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다. 창강 하류지역도 지리적으로는 이와 꼭 일치한다.

    그러나 창강문명은 여느 문명과는 여러가지 점에서 구별된다. 다른 문명권에서는 밀과 보리 등을 주식으로 한 데 비해 창강문명권에선 쌀을 주식으로 삼았다. 물이 넉넉해 많은 양의 물을 필요로 하는 벼를 재배하기에 적합했던 것이다.

    벼는 밀이나 보리보다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때문에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 실제로 수(隋)의 양제(煬帝)는 강남의 물자를 북방으로 운반하기 위해 대운하를 건설하기도 했다. 중화제국을 오랫동안 지탱케 했던 원동력은 강남의 풍족한 곡물에서 나왔다고 해도 지나친 얘기가 아니다.

    창강문명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자연과의 공존을 추구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비교적 건조한 땅에서 태어난 다른 고대문명은 어쩔 수 없이 삼림을 파괴해야 했지만, 벼농사 지역에선 물이 넉넉해 모든 것이 잘 자랐으니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벼농사문명권에선 자연의 순환을 거스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순환만 제대로 이뤄진다면 자연이 설령 오염된다고 해도 곧바로 정화될 것이고, 먹는 문제 또한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유목문명권에선 그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자연의 순환을 앉아서 기다리다간 굶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서에 모든 것을 맡기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그걸 이용해야만 했다. 그게 지금의 서구문명이 걸어온 길이다.

    내가 창강문명에 관심을 갖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최근 이곳이 세계 고대문명 발생지의 반열에 오르면서 ‘세계 4대 고대문명’이란 말이 ‘세계 5대 고대문명’으로 바뀐다고 해서가 아니다. 자연과의 대결이나 파괴를 본질적 요소로 하는 밀·보리·유목문명과는 달리 자연과의 공존을 도모한 창강문명권 사람들의 삶 속에서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고질들을 치유할 수 있는 힌트나 정보를 찾아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목책으로 둘러싸인 유적지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매표소가 보였다. 유적지와 인근 박물관을 함께 관람할 수 있는 입장권이 25위안이다. 중국의 박물관이나 명소의 경우 중국인들의 수입을 고려하면 입장료가 결코 만만찮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그만큼 형편이 좋아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옛것에 대한 중국인들의 사랑이 그만큼 지대하다는 의미도 된다. 중국인들의 소득이 그들의 문화적 욕구를 뒷받침해줄 만큼 늘어난 것이다.

    매표소 앞에는 목구(木構)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허무두인들이 살던 고상식(高床式) 주거의 기단부분인데, 700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말짱하다. 오랫동안 바람이 통하지 않는 뻘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했기에 그렇다고 한다. 1990년대 들어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옮겨놓았다.

    그 다음엔 광장이 나왔다. 크지는 않았지만 벼 재배 사실을 알리는 높다란 기념조각이 서있었다. 길다란 벼 줄기에 낱알이 빼곡히 달려있는 게 보기 좋았다.

    허무두인들은 어쩌다 벼를 재배할 생각을 했던 것일까. 들과 늪에는 수많은 풀과 나무가 자라고 있었을 텐데, 그 가운데서 왜 하필이면 벼를 선택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광고문구처럼 그들의 그런 선택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으니 ‘벼 조각’은 단순한 조각일 수 없다. 역사의 대전환을 알리는 기념비인 것이다.

    공원은 녹색 천지였다. 파란 잔디가 땅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거기에 수목과 늪, 못 등이 가세했다. 남겨진 목구를 토대로 복원한, 지붕이 높은 고상식 주거는 그 품속에 안겨 있는 형국이었다. 집 밖에는 허무두인들의 생활상을 집짓기, 사냥, 어로, 양잠, 취사 등의 행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고, 그 안에서는 부부생활, 자녀양육, 신앙생활의 모습을 모형을 동원해 설명했다. 관람자들은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시간여행을 떠나면 됐다.

    몸에 걸친 것은 지극히 간단했지만, 7000년 전의 허무두인들은 작은 힘으로도 큰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전시된 도구는 한둘이 아니었다. 가족들이 모여 도구들을 이용해 뭔가를 만들고 있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삶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쉽게 절망하거나 비탄에 젖는 사람은 이곳에 와서 허무두인들이 살아간 모습을 볼 일이다. 매일 태양이 떠오르듯 인생은 계속될 것이라 믿었던 그들을 보면 희망이 얼마나 큰 힘이고 복임을 깨닫게 될 터다.

    부부생활관에는 ‘허무두인들은 족내혼과 족외혼을 혼용했지만 일부일처제를 줄곧 유지했다’고 설명해놓았다. 그렇다면 인류는 과연 언제부터 일부일처제를 생활화한 것일까. 일부일처제는 자연의 섭리였을까.

    그들은 풍요와 다산의 상징물로 풍만한 몸매의 여성(이를 흔히 ‘비너스’라 부른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남근을 주로 이용했다. 현장에는 그 물증도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벼농사와 함께 수렵과 어로, 양잠을 행하였으니 남성우월사상이 지배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공원 어디에도 성벽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성벽을 세우지도 않았고, 청동기나 철기 같은 금속기도 사용하지 않았던 듯하다. 나무나 돌, 동물의 뼈 등을 다듬어 도구로 사용했는지, 어딜 가나 그런 것들만 눈에 들어왔다. 문자 또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일부에선 창강 하류의 문화를 문명이라 부르기에는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성벽과 금속기, 문자가 문명의 필수조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허무두인들은 그 대신 누에를 길러 비단을 만들었고, 옥을 다듬어 옥기를 사용했다. 칠기도 만들어 썼으며, 차도 마셨다.

    그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말을 들었을 만큼 손재주가 뛰어났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옥기(玉器)다. 이는 권력자의 존재를 증명하기 때문에 주목받고 있는 것으로, 항저우의 저장성 박물관에 전시된 진품은 중국 역사상 옥기가 가장 빛을 발했다는 황허문명권의 은(殷)대의 것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흔히 비취라 부르는 옥은 처음에는 수렵이나 전쟁의 무기로 쓰였다. 그러다가 그 특유의 반짝거림을 본 사람들은 생명력의 상징으로 여겨 귀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옥이 사(邪)나 재앙을 막아줄 것이라며 몸에 지녔고, 급기야는 권력자의 증표나 상징으로 쓰이기에 이르렀다. 허무두에서 발견된 다량의 옥기는 그러므로 이곳에 권력자가 존재했다는 물증이라 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문명이란 이름을 붙여줘도 되는 것이 아닌가. 잉카인들도 문자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당당히 ‘잉카문명’이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던가.

    창강문명은 창강 하류에서 일어난 독자적인 문명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강북지역으로도 확산됐다. 중국대륙을 서서히 문명의 땅으로 만들어갔던 것이다. 그 기운을 받아 중원의 황허 유역에서도 새로운 문화의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 첫 주자가 기원전 4000년경 지금의 후난성(湖南省) 황허 유역에서 태어난 ‘양사오(仰韶)문화’다. 양사오문화는 산둥(山東)반도에서 발흥한 ‘롱산(龍山)문화(BC2500~2000)’의 밑거름이 돼주었다. 그 결과 황허 유역에서도 드디어 문명의 꽃이 피어난 것이다. 이게 바로 황허문명인데, 하(夏)·은(殷)·주(周) 시대에 그 절정을 이뤘다.

    황허문명의 특징은 청동기와 갑골문자, 옥기로 요약된다. 창강문명에 비해 매우 공격적인 성격을 지녔다. 이러한 공격성은 창강문명마저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황제(黃帝)의 승리가 그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황토’가 ‘찰흙’을 이긴 것이다. 성벽과 금속제 무기를 갖지 못한 탓에 창강문화권은 북방으로부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창강문명의 몰락으로 중국문명은 공격적이고 권력지향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틀이 바뀐 이래로 단 한번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의 역사이고 문명이다.

    신화는 무궁한 에너지원

    1992년 9월에 문을 열었다는 허무두 유지 박물관은 유적지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었다. 전날 내린 비로 길은 질퍽거렸다. 유적지와 박물관 사이에는 매점과 방문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을 뿐 민가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밭과 수목이 우거진 동산이 빈 공간을 채웠다.

    박물관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전시물도 많았으며 종류 또한 다양했다. 허무두가 어떤 곳인지,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어떤 것이 있는지, 출토 유물들은 각기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7000년 전 이곳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등을 유물과 사진, 자료 등을 통해 알기 쉽게 보여주고 있었다. 박물관 개관식 때는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참석해 개관 테이프를 끊고 현판까지 썼다. 중국정부가 이 박물관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눈에 거슬리는 것도 있었다. 박물관의 지붕이 일본의 전통형식이라는 ‘도리’식이었던 것. 유적 발굴과 박물관 건립에 일본이 관여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허무두인들의 고상식 주거의 지붕이 원래 그랬는지는 몰라도 도리식 지붕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박물관에는 볼 것이 많아 오랜 시간이 필요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사오싱으로 돌아갈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상상력을 발휘해 허무두인들의 생활상을 그려놓은 대형 그림 앞에서 한참 서있었다. 상상도의 중앙에는 둥근 태양과 새 두 마리, 남녀 두 사람이 정답게 손을 맞잡고 있었고, 그 주위에다 농경, 수렵, 어로, 양잠, 춤, 불 피우기, 취사 등 허무두인들의 일상생활을 상하 3단으로 나누어 잔뜩 그려놓았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대작 ‘천지창조’를 방불케 했기에 그걸 하나하나 살펴보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건장한 체격의 어른과 아이, 남녀 모두 표정이 밝았다. 그들 곁에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거대한 에너지원인 태양과 불사조가 있으니 왜 그렇지 않겠는가. 걱정하고 불안해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신화를 갖는다는 것은 무궁한 에너지원을 소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 그림 앞에서 새삼 깨달았다.

    박물관에 들어온 뒤로는 택시기사 한펑도 바빴다. “신기한 게 많다”며 이것저것 살펴보느라 내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 그가 한번은 “이것 좀 보라”며 나를 불렀다. 그가 가리킨 것은 흑도였다. 그런데 그 표면에는 긴 주둥이를 가진 돼지가 아주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평소 돼지를 농경문화의 상징물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나는 호기심을 갖고 그 돼지를 살펴봤다.

    집에서 기르는 돼지는 주둥이가 짧은데 흑도에 그려진 놈은 그게 앞으로 툭 튀어나와 무척 길어 보였다. 멧돼지에 가까웠다. 주둥이가 길다는 것은 누군가가 주는 먹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둥이로 땅을 파서 먹을 것을 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허무두인들은 왜 그런 돼지를 음식을 담아 먹는 그릇의 표면에 새겨놓았을까. 그들이 매일 만나는 돼지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것은 돼지가 야성을 버리지 못해 진화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 않다면 허무두인들이 돼지를 최고의 식물(食物)로 여겼기 때문일까.

    중국인들은 ‘고기(肉)’ 하면 먼저 돼지를 떠올릴 정도로 돼지고기를 좋아한다. 지금도 농촌마을에선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기둥에 매달아 보관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만약 허무두인들이 고기를 식용으로 즐겼다는 표시로 자신들의 그릇 표면에 큼지막하게 돼지를 그렸다면 중국인의 돼지 식용 역사는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 그릇은 이토록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는 재미있는 유물이라 우리는 꽤 오랫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돼지가 그려진 흑도는 홍도보다 낮은 온도에서 제작됐다. 화력이 낮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앞선다는 것을 말한다. 허무두나 량주문화권에서 흑도가, 양사오문화권과 롱산문화권에서 홍도가 집중적으로 발굴됐다면 그들 간의 선후관계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박물관 관람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가슴에 달고 있는 명찰을 보니 그 지방의 공무원들이었다. 이들을 맞은 박물관의 연구원들은 유물과 도판을 통해 허무두의 역사와 문화를 들려줬다. 방문자들은 마치 견학온 학생들처럼 그들의 설명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박물관 밖으로 나오자 마당에는 그들이 타고 온 대형버스가 있었다. 우리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이곳을 찾았는데 그들은 어떻게 해서 버스로 올 수 있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그 사정을 안다고 달라질 것은 없기에 그냥 발길을 옮겼다. 사공에게 미리 일러뒀기 때문에 이번에는 쉬 배를 탈 수 있었다.

    시계는 4시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시간 45분을 이곳에서 보낸 것이다. 나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보는 재미에 푹 빠진 한펑은 돌아가자고 채근하지도 않아 느긋한 마음으로 둘러볼 수 있었다. 대신 돌아가는 길에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 덕분에 120km 거리를 1시간 만에 달려 6시 정각에 사오싱 버스터미널에 닿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한펑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감사하다는 말도 잊지 않고.

    사오싱에서 항저우로 갈 때는 모처럼 고속버스를 탔다. 몸도 피곤해 10위안 짜리 마이크로버스 대신에 18.5위안 하는 고속버스를 택한 것이다. 좌석이 넓고 통로에 서 가는 사람도 없어 편안했다.

    그 다음날엔 미뤘던 시후행(行)을 실천했다. 오전엔 시후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겼고, 오후에는 항저우가 자랑하는 그 유명한 ‘롱징(龍井) 차’를 한 잔 하고는 호수변의 ‘꾸산(孤山)’이란 곳에 자리한 저장성 박물관을 찾았다. 이 박물관도 규모가 무척 컸다. 그 속에서 허무두 출토 유물의 진품들은 빛을 발했고, 강남지역에서 꽃을 피웠던 문화유산들은 이제껏 숨겨온 비밀들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이 박물관은 청의 건륭제(乾隆帝)가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보관하기 위해 항저우에 세운 ‘문란당(文瀾堂)’까지 거느리고 있어 볼 것들이 많다(‘사고전서’는 인근 도서관으로 이관했고 문란당은 박물관 전시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허무두 문화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항저우를 찾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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