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은 경기도의 대표적인 도·농 통합도시. 안성에 도착한 버스는 폭포수처럼 뿜어나오는 소독약 세례를 받고 시내로 들어섰다.
안성시청은 시장의 취임식을 준비하느라 부산했다. 한 공무원은 “시 문화회관에서 취임식을 열 예정이었으나 구제역 때문에 취소했다. 대신 시청 강당에서 면장과 공무원들만 참석해 조촐하게 치렀다”고 귀띔했다. “시장님은 행사 직후 구제역 발생 현장으로 출발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안성시 축산과는 직원 대부분이 현장으로 떠나고 없어 썰렁했다. 혼자 자리를 지키던 축산과장에게 상황을 물었다.
“구제역 확산을 막기 위해 전 공무원이 두 달째 총동원됐습니다. 집에도 거의 못 들어가고 있어요. 어제까지 ‘살처분(殺處分)’을 마무리하고 사후관리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돼지 7만9519마리, 한우 347마리, 젖소 967마리를 매립했어요. 보상은 현시세를 기준으로 하는데, 말이 많습니다. 농림부가 관장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축산농가와 정부 당국간 갈등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보상문제와 구제역 발생원인 및 확산의 책임소재를 놓고 논란을 빚고 있어요. 구제역은 전파속도가 빠른 데다, 의심되는 지역의 가축을 모두 도살해야 하기 때문이죠. 자세한 것은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의 역학조사 결과가 나와야 알겠지만, 누군가의 실수가 남에게 엄청난 피해를 미치니까 갈등의 불씨를 낳는 거죠. 다들 사정이 딱해요. 지금 이천으로 들어가는 경계지역 도로를 봉쇄하고 있는데, 이천 사람들이 얼마나 전전긍긍하고 있겠어요. 벌써 책임소재를 놓고 논란이 일어 당혹스럽습니다. 구제역은 공기를 통해서도 전파되고 야생동물이나 까치 같은 새가 옮길 수도 있어 답답할 수밖에요. 일단 초소를 30개 이상 운영하면서 위험지역 안에서의 이동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더 확산되지 않게 하는 게 최우선 과제입니다.”
축산업 본고장 덮친 재앙
서울과 가깝다는 이점과 축산에 적합한 지형 때문에 경기도에는 국내 젖소·돼지 등 축산농가의 40%가 몰려 있다. 예로부터 소를 사려면 안성과 평택으로 가라는 말이 있듯이 안성은 소를 사육하기에 알맞은 구릉지와 목야지가 많아 일찍부터 축산업이 발달했다.
안성시 일죽면은 인구 8600명의 조용한 농촌 마을이다. 그럼에도 결코 ‘조용하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은 단합된 농민회가 있기 때문이다. 소값, 돼지값, 쌀값 파동이 일 때마다 안성시의 각종 농민회 회원들이 앞장서서 머리띠를 동여맸다. 그래서 농림부도 안성 농민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김대중 정부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은 김성훈 장관이 취임 후 처음 방문한 곳도 안성이다.
축산업의 본고장이라 할 이곳에 재앙이 닥쳐온 것은 5월2일. 일죽면과 이웃한 삼죽면 율곡리의 한 농장에서 구제역으로 의심되는 돼지가 발견된 것이다. 구제역은 주로 우제류(偶蹄類·소, 돼지, 염소, 사슴 등 발굽이 2갈래로 갈라진 동물)에 발생하는 강력한 전염성을 지닌 바이러스성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코와 구강부의 점막이나 발굽 주변부의 피부에 특징적인 수포가 형성된다. 발병한 가축의 치사율이 50%에 이를 만큼 치명적이다.
대만은 구제역에 미흡하게 대처하는 바람에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1997년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 초기 대응에 소홀했다가 무려 380만마리의 돼지를 도살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00년 봄에 처음으로 구제역이 발생했다. 북한에 가로막혀 대륙과 이어지는 육상 교통로가 없는 우리나라도 구제역이라는 세계적 질병의 전파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당시 구제역은 경기도 파주, 화성과 충남 홍성, 연기 등지에서 잇따라 발생했다.
그때의 재앙에서 가까스로 비껴났던 일죽면 축산농민들이 구제역을 두려워하지 않을 리 없었다. 농림부와 검역원은 매주 수요일을 방역의 날로 정해 소독을 독려했다. 농민들은 그것도 부족해서 일주일에 한 차례씩 더 모여 축사와 길목 곳곳을 소독, 방역활동에 나섰다. 봄이 오면 기온이 올라가면서 구제역이 발병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에 2000년 구제역 파동 이후 이 지역 축산인들은 겨울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2월부터 방역작업을 벌였다. 그런데도 구제역이 찾아든 것이다.
일죽면으로 가기 전에 구제역 첫 발생지인 삼죽면에 들렀다. ‘안성시 구제역 긴급방역 통제본부’가 삼죽면사무소에 설치돼 있었다. 삼죽면으로 들어서는 입구부터 전투경찰과 군인들이 경계를 풀지 않고 길목마다 진입하는 차량을 세우고 마치 세차하듯 소독약을 퍼부었다.
통제본부에는 전날 농림부 장관 일행이 다녀갔기 때문인지 지도며 브리핑 자료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5월2일 구제역을 처음 신고한 삼죽면 율곡리 율곡농장은 8000마리의 돼지를 키우고 있었다. 큰 규모의 농장인 만큼 구제역으로 인한 피해는 엄청났다. 그간 꾸준히 방역활동을 해온 안성과 용인 일대 축산농민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율곡농장 주인 유모씨는 인천에서 사업을 하느라 농장을 위탁 경영해왔다. 이 때문에 방역활동이 다소 부실했고, 농장관리도 소홀했다고 한다. 더욱이 농장 직원들은 구제역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적어 구제역이 상당히 퍼진 후에야 신고를 했다. 농장주는 구속됐고, 구제역 발생농가 반경 500m 이내 지역에 대해 선별적인 살처분 권고가 내려졌다. 발생농가를 중심으로 3km 이내는 위험지역으로, 10km 이내는 경계지역으로 선포됐다.
지난 6·13 선거에서 안성시장에 당선된 이동희 시장이 취임식을 마치자 마자 통제본부로 달려와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다.
“시에서 할 수 있는 행정지원은 모두 쏟아부었습니다. 예비비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시예산에 한계가 있지만 수매는 농민들이 원하면 다 해주고 있어요. 더 이상 병이 확산되지 않도록 전 공무원이 나서서 방역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통제본부가 해야 할 일은 간단치가 않다. 구제역 방역과 관련된 일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이다. 신고가 접수되면 검역관이 출동해 진단을 내리고, 방역반과 공무원들이 사후처리를 한다. 농림부 총괄 아래 각 행정기관이 이를 지원하며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이 진단을 책임진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최대한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 신고 후 24시간 안에 결정적 조치가 완료돼야 한다.
공무원들은 24시간 3교대로 초소 근무를 계속한다. 경찰들은 방역 및 차량통제 현장에 투입되고, 군인들은 살처분 명령이 떨어진 농가의 돼지들을 도살해 매립하는 일을 맡고 있다. 소방서 직원들은 방제약에 사용하는 물을 지원하고, 시청과 면사무소 직원들은 방제약 공급, 식사 등의 행정지원에 매달린다. 한마디로 농협과 축협도 축산농민들에 대한 지원과 관리에 소홀할 수 없다. 마을 전체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일죽면 주민의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양돈축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논농사만 지어서는 큰돈을 만져보기 어려운 형편이라 많은 농민들이 농협과 축협에서 돈을 빌려 양돈사업에 뛰어들었다. 모돈(母豚)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국내 굴지의 다비농장도 이곳에 있다. 이 일죽면에 구제역이 직격탄을 날렸다. 16개 구제역 발생 농가 중 다섯 농가가 일죽면에 있고, 여섯 농가는 일죽과 이웃한 마을에 있다. 구제역 확산을 막기 위해 도살된 돼지의 절반 가까이가 일죽면에서 기르던 돼지다.
월드컵에 가린 구제역
구제역 여파로 거리는 눈에 띄게 한산했다. 방역작업을 철저히 해서 구제역을 몰아내자는 구호들이 곳곳에 붙어 있을 뿐이다. 상인들은 구제역이라는 말만 꺼내도 진저리를 쳤다.
한국농업경영인 안성시연합회 안정열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빨리 진정돼야지, 정말 죽겠소. 두 달째 불안에 떨다보니 이젠 정말 포기하기 일보 직전이오. 보상도 제대로 안해 주면서 방역책임을 농가에 떠넘기고 구제역 확산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모두 우리한테 돌려대니 정말 미치겠어요.”
일죽에서 돼지를 키우고 있다는 한 농민은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냈다.
“농림부의 초기 대응이 미흡했다고 봅니다. 언론도 월드컵 때문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요. 보상원칙에도 문제가 있어요. 시가대로 보상한다는데, 축산업은 제조업과 사정이 다릅니다. 그냥 돈으로 사준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키우던 돼지를 다 내놓으면 최소한 1년은 공쳐야 하는데 누가 ‘내 돼지 죽여주시오’ 하고 나서겠습니까. 축사에 돼지가 없으면 축사는 썩기 마련입니다. 돈이 안 들어오니 직원들도 다 내보내야죠.
더구나 이 작은 지역공동체가 구제역 원인 논란으로 갈갈이 찢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농민더러 방역을 하라더니 이제 와선 ‘농민들이 밖으로 나다니면서 구제역을 퍼뜨린다’고 비난합니다. 그래서 아예 사람 만날 생각은 않고 꼭 필요한 물건을 살 때나 집 밖으로 나옵니다. 농민들 처지를 배려해야 합니다. 자기가 기르던 가축을 생매장하는 심정을 누가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2000년 봄의 구제역 파동은 전국민적 관심사였다. 영국에서 광우병 소동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기 때문이다.
광우병은 소에게서만 발병하고 병의 원인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구제역은 그렇지가 못하다. 전염 가능성이 다양하게 열려있기 때문이다. 구제역은 사람의 옷이나 차량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면 공기로도 전파된다.
마지막 구제역 발생지인 신흥리로 들어가는 88번 국도변 초소에는 방역팀이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사흘 동안 여관에서 눈을 붙였다는 조현호 검역관은 “6월23일 이후에는 구제역이 추가로 발생하지 않아 다행이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고 했다. 말이 ‘초소’지, 작은 텐트 하나 쳐놓은 게 고작이다. 조검역관은 푹푹 찌는 날씨에 몸 전체를 가리는 검역복장을 한 채 땀을 비오듯 흘렸다.
농장에는 차들이 많이 드나든다. 인공수정, 사료와 기자재 공급, 신문배달을 위해서도 차가 드나들어야 한다. 구제역은 타이어 틈새에 낀 미량의 가축 대변으로도 전파될 수 있어 ‘완벽한 방역’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차량을 통제하던 한 의경은 이렇게 토로했다.
“공무원들은 잠도 제대로 못자고 방역에 나서고 있는데, 자기 차에다 방제약 뿌린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심지어는 방역을 피해 가려고 일부러 좁은 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제역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데 대한 공감대가 부족한 것 같아요.”
2000년에 발생한 구제역의 원인은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수입 건초와 해외여행객에 의한 병원균의 유입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발병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黃砂)가 원인이라는 설도 한때 유력하게 제기됐다.
이번 구제역도 첫 발생 농장에 대한 역학조사가 끝나지 않아 발병경로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완벽한 방역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너무나 쉽게 전파되기 때문에 발생원인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때문에 방역작업이 어렵게 되고, 발생 농가와 피해 농가간에 책임소재를 놓고 공방이 벌어지기도 한다.
구제역이 발생하면 가축을 도살해 확산을 막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래서 반경 500m 이내에서는 대부분 살처분 권고를 하고, 3km 이내의 위험지역에선 선별적으로 살처분하고, 농가에서 동의할 경우 정부가 시가로 가축을 수매한다. 살처분 가축에 대해서는 시·군의 ‘구제역 살처분 가축 보상평가위원회’가 축종·품종별로 제시한 금액이 보상금으로 지급된다. 사료 등의 오염피해에 대해서도 위원회에서 제시한 금액이 지급된다.
언뜻 보면 농가에겐 별로 손해될 게 없는 것 같지만, 농민들의 주장은 그렇지가 않다. 안성양돈회 관계자는 이렇게 사정을 설명했다.
“수매는 현 시가로 해준다고 했는데, 구제역 파동으로 ‘현 시가’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농민들이 수매를 기피하는 겁니다. 수매가 협상이 안되니 구제역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되고, 그러다보면 구제역이 확산되는 거죠.”
젖소를 살처분한 농가들의 처지도 비슷했다.
“4월에 마리당 180만원 하던 소값이 정부에서 젖소 도태정책을 쓰니까 150만원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구제역이 터지니까 65만원으로 곤두박질쳤어요. 정부에서 도태를 권장하니까 도매상들이 장난을 칩니다. 요즘은 30만원 하는 소도 있으니 우리가 계속 불리해지는 것 아닙니까.”
보상단가에 대한 시각차가 큰 것은 돼지의 가치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새끼를 6번 이상 나을 수 있는 모돈의 가치는 자돈(仔豚)과는 천양지차. 그러나 모돈이 새끼를 몇 번 낳았는지 쉽게 알아볼 수 없다.
감가상각비를 어떻게 적용하느냐도 가격차이를 크게 한다. 농민들은 모돈의 경우 미래가치까지 따져서 마리당 90만원 이상을 요구하는 데 비해 농림부는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과 전례를 들어 50만원대를 제시했다. 농민들은 엄청난 손실을 보상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반면 농림부는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손실분 전액을 보상해준 경우가 없다”며 원칙을 고수하려 한다.
“미래의 손실까지 보상하라니…”
논쟁은 농민들의 ‘휴업보상’을 놓고서도 빚어졌다. 두 달째 돼지를 키우지 못하고 있는 피해농민들은 “앞으로 석 달 동안은 돼지를 키울 수 없으며, 모돈을 받아 1세대인 F1(종돈에서 나온 선별돈)을 키우고 이들에게서 난 돼지들을 시장에 내다팔 수 있으려면 적어도 1년이 넘게 소요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1년 이상의 휴업기간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소를 키우는 농가들은 “최소한 2년은 지원해줘야 축산 인프라가 부족한 국내 여건에서 낙농업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축산농가들은 대개 과도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다. 평균 2억원 이상의 빚을 떠안고 있는 상황에서 돈이 돌지 않으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자를 탕감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정부는 정부대로 살처분 농가에 대한 시가보상과 경영자금 지원, 농가 자녀 학자금 지원, 영농자금 저리융자, 세금감면 등의 직·간접적인 보상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농민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농림부 관계자의 항변.
“정부가 농가의 미래 손실까지 보상하기는 어렵습니다. 농민들이 지나친 요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가 전세계적으로 가장 후하게 보상을 해주고 있어요. 영국에선 살처분된 가축 시세의 40%밖에 보상해주지 않았어요. 만일 살처분 가축에 대해서는 물론, 농민들이 앞으로 입을 피해에 대해서도 100% 보상해준다면 어느 축산농가가 스스로 방역활동에 나서겠습니까.”
처음에는 몇몇 농민들이 살처분처리에 대해 반발했다. 반면에 어떤 농가들은 자진해서 수매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으나,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은 멀쩡한 가축을 땅에 묻어야 한다고 하니 울화가 치밀 수밖에 없었던 것. 정부는 강제집행권을 갖고 있지만 사유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구제역 발생농가 반경 500m 이내의 위험지역에 살처분 권고가 내려지자 발생농가에 원망이 쏟아졌다. 방역작업을 하느라 그렇게 고생했는데 결국 그 농가 하나 때문에 마을 전체가 피해를 입게 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5월2일 율곡농장에서 구제역을 신고한 후 10일을 전후해서 7건, 18일을 전후해서 4건이 신고됐다. 공기나 황사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인근 축산농민들의 접촉과 차량에 의한 전염이었다. 그러자 다시금 강력한 방역대책이 실시되면서 위험지역내 농민들의 접촉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하지만 이동을 제한한다고 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상대로 한 싸움이 쉽게 끝날 리는 없었다. 농민들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방역활동을 벌였고 보상대책을 상의하기 위해 모이거나 살처분 현장에 직접 나가보기도 했다. 방역대책에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었다. 100% 이동통제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안성돼지는 이미 시장에서 배척된 지 오래고, 발생농가 주인들은 죄인처럼 숨어 지내야 했다. 구제역 발생 농장의 이웃 주민들은 이들을 탓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애써 기르던 가축을 도살했다. 발생농가와 비(非)발생농가, 발생지역과 비발생지역 간에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발생농가 주인들은 “우리도 방역에 최선을 다했다”며 억울해했다. 더구나 이들은 보상도 훨씬 적게 받는 데다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판이라 속이 터질 노릇이다. “구제역은 까치나 들짐승, 호흡기를 통해서도 전염된다”고 항변했지만, 때늦은 일이었다.
갖가지 유언비어도 나돌았다. “○○농장주가 살처분 현장에 가 있었다” “△△농장주는 방역을 영 게을리하더라” “□□농장주가 구제역 발생농가 주인들을 만나고 다녔다”…. 주민들은 서로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사람 만나는 것을 꺼렸다. 한 농민은 “구제역이 가져온 가장 큰 피해는 경제적 손실보다 주민들 간에 쌓인 불신이다”고 한탄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8번째 발생지역까지는 최초의 구제역 신고가 있기 전에 이미 바이러스가 잠복해 있던 상태였다고 한다. 구제역이 확산된 원인을 농민들의 부주의에만 돌릴 수는 없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6월10일 다비농장에서 구제역이 발생하자 농민들은 역설적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비농장은 모돈을 생산하는 국내 유수의 양돈업체. 이곳의 방역시설과 ‘방역 마인드’는 국내 최고 수준이다. 외부인이 출입할 때는 팬티까지 벗겨서 소독을 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방역에 철저했다. 농장에 상주하는 직원들은 구제역 발생 이후 아예 농장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구제역의 마수를 피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후에야 안성의 축산농민들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의혹의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것은 체념에 가까웠다.
“다비농장도 걸렸으니 구제역은 인력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게 아닌가보다. 빨리 날이나 뜨거워져야 할 텐데….”
농민들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점은 위험지역 반경 3km 이내 농가들에 대해 처음부터 강력하게 살처분조처를 했다면 확산을 줄일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이게 제대로 되지 않아 종국에는 위험지역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16건의 피해가 발생, 10만마리의 돼지를 땅에 묻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의 의견은 좀 달랐다. 3km는 커녕 500m 이내 지역이라고 해도 무조건 살처분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는 것. 도로 등의 지형적 조건과 역학조사 결과를 근거로 효과적으로 살처분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견해다. 검역원측은 “구제역이 폭발적으로 전파된다는 확증이 없는 이상 앞으로 다른 지역에서 구제역이 발생하더라도 긴급행동지침(SOP·Standard Operation Procedure)에 따라 처리해 나갈 것”이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더구나 양돈축산 관련단체들의 입김도 무시할 수 없어 살처분 조처를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
이번 구제역이 3km 이내의 위험지역 내에서 소에게 확산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해외 전문가들은 “앞으로는 발생농가 3km 이내에서 사육되는 소에 대해서도 필요하다면 예방적 살처분도 고려하라”고 충고했다.
살처분 정책과 백신정책
2000년에는 구제역이 주로 소에게서 발병했다. 산발적인 데다, 이동경로를 알 수 없을 만큼 무차별적으로 발병했다. 그래서 살처분보다는 백신정책에 의존했다. 이는 우선 발생농가 주변에 살처분조처를 한 뒤 위험지역 3km 밖에서 띠를 형성하며 안으로 좁혀들면서 가축에게 백신을 맞히는 방역대책이다.
일부 농민들은 이번 살처분으로 농가 피해가 크자, 백신정책에 대해 막연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당시 백신 맞은 돼지고기를 수출하지 못해 시름이 컸지만, 어쨌든 돼지를 다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농장은 굴러갔고, 그래서 큰 손해를 보진 않았거든요.”
이에 대해 농림부 상황실을 총괄하고 있는 이주호 방역부장은 이렇게 반박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얘깁니다. 돼지 구제역은 소 구제역과 접근방법이 달라요. 더구나 우리가 백신정책을 채택하면 백신을 맞은 다른 나라 돼지에 대한 수입금지조치를 취할 수가 없습니다.”
돼지의 구제역과 소의 구제역은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성격의 병이다. 돼지는 구제역에 걸리면 소보다 1000배나 많은 바이러스를 방출한다. 소는 대개 수십마리씩 함께 키우지만, 돼지는 1000마리 이상을 함께 키운다. 따라서 돼지 구제역은 순식간에 인근 축산농가를 쑥대밭으로 만들 만큼 파괴력이 엄청나다.
또한 소는 백신을 맞히면 1주일 만에 구제역 바이러스에 내성을 가진 항체가 생성되지만, 돼지는 항체 생성에 적어도 2주가 걸린다. 돼지 구제역의 전파속도에 비해 백신정책의 효과는 너무도 느린 것이다. 따라서 이번 구제역의 경우엔 살처분조처가 옳았다고 볼 수 있다.
백신정책은 또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다. 유럽에서는 1990년대 이전에는 백신정책을 고수하다가 1990년대 들어 소각과 매립정책으로 선회했다. 수출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낙농업은 유럽에서 가장 비중이 큰 산업 가운데 하나다. 구제역에 감염된 가축과 예방접종된 가축을 수의학 기술로 구별해 낼 수 없기 때문에 1992년 세계무역기구(WTO)의 ‘예방접종된 육류 및 가축의 수입금지’ 조치에 따라 백신정책은 폐기됐다.
25℃ 이상 고온에서는 구제역 바이러스가 저절로 소멸한다는 일각의 주장도 농민들을 시름에 빠뜨렸다. 날이 더워져도 구제역이 계속 발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나 대만 같은 더운 나라에서도 구제역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 온도는 물론 습도도 구제역이 창궐하는 환경을 만든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비록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구제역은 언제든 빈틈만 보이면 다시 나타날 위험이 있다.
7월3일, ‘농림부가 방역수칙을 위반한 구제역 발생 농장주에게 국가나 주변 농가들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이 소식에 일죽면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부리나케 이장단회의가 소집됐고, 농민회들도 바빠졌다. “성명서를 내자”느니 “축산농민들이 집단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등 강경한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어느 누가 구제역이 발생하길 바라겠습니까. 구제역 피해를 입은 것도 억울한데, 손해배상까지 해야 한다면 누가 돼지 키우려고 하겠습니까. 자기 농장에서 구제역을 옮긴 게 죄라면 그 죗값만 치르면 되지, 가뜩이나 빚투성이인 농민들로부터 뭘 더 얻어내겠다는 겁니까. 기가 찹니다. 정부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우리도 강력하게 나갈 겁니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형국입니다. 농가들이 금전적,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한 지경인데, 구제역 파동이 완전히 수습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런 발표를 한다는 게 도의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하지만 누구보다 발생농가의 책임이 크다는 게 농림부의 시각이다. 일죽면을 방문한 한 농림부 직원은 “그렇게 홍보를 하고 주의를 줬는데도 구제역이 발생한 농장주가 사람들을 만나고 돼지를 다른 축사로 옮긴다는 게 말이 됩니까. 발생농가에게 책임을 지워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고 지적했다.
전염병의 예방 및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발생 초기에 신속한 역학조사를 수행, 감염경로 등을 파악해 철저히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구제역 역학조사에서는 감염경로를 구체적으로 밝혀내기 어렵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동경로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민들과 차량이 농장을 언제 어떻게 드나들었는지를 추적하는 게 역학조사의 주작업이다.
역학조사 결과 구제역이 마지막으로 발생한 최모씨의 농장에서는 빈 축사로 돼지를 이동시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록 자기 농장 안에서지만, 이른바 ‘위험지역’ 안에서 가축을 옮겼기 때문에 이는 가축전염병예방법을 위반한 것이다. 하지만 가축을 옮긴 행위가 바이러스를 전파시켰다는 구체적 물증이 되긴 어려우므로 최씨에 대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다 해도 승소할 가능성은 미지수다. 이런 사정 때문에 농림부는 손배소 방안을 “검토중”이라고만 했다. 농림부의 한 관계자도 “이는 사람의 접촉과 차량의 이동으로 구제역이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경고’의 성격이 짙다”고 말했다.
매립정책의 문제점
검역원들도 답답해하기는 마찬가지다. 역학조사가 축산농민들의 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에서 손해배상 청구까지 한다면 구제역이 재발할 경우 농민들의 협조를 제대로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한 검역원의 말.
“역학조사의 1차적인 목표는 바이러스의 이동경로를 확인해 효과적이고 과학적인 방역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농민들과 검역당국의 협조가 무엇보다 중요해요. 농장주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면 구제역 발생농가들의 협조를 얻어내기 어려울 겁니다.”
영국의 경우 강력한 처벌조항을 마련, 시행하고 있다. 영국 법원은 구제역 원인을 제공한 발생농가에 대해 3개월간 출입금지조치를 취하고 농장주에게 15년 동안 축산업에 종사하지 못하게 하는 엄벌을 내렸다. 우리나라도 이번 구제역 사태를 계기로 SOP를 엄하게 개정하고 이동을 더욱 철저하게 통제할 수 있는 법률제정 준비에 들어갔다.
이번 구제역 파동에서 전염위험에 노출된 돼지들은 즉시 도살되어 매립됐다. 그런데 가축을 매립해서 야기되는 환경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유럽의 광우병 파동 때처럼 가축을 소각하는 방식은 어떨까. 이에 대해 검역원 관계자는 “전세계적인 경험에 비춰보면 매립이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구제역에 걸린 가축을 소각하면 바이러스가 공기 중에 대대적으로 확산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매립 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선 농가가 밀집된 좁은 땅에 돼지를 묻어야 하기 때문에 행정적인 문제가 불거지곤 합니다.”
유기물을 땅에 묻으려면 철저한 환경평가가 전제돼야 한다. 그렇지만 구제역의 경우는 전염이 우려되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신속하게 묻는 것이 원칙이다. 매립할 때는 우선 구덩이를 파고 지하수가 흐르는지의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매립된 가축에서 나오는 침출수는 지하수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 지하수가 있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시멘트로 바닥을 다지고 비닐로 충분히 가린 다음 톱밥을 넣는다. 그후 가축을 전기충격이나 약물로 마취시킨 뒤 몰아넣고 생석회와 흙으로 덮어준다.
이것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생석회와 유기물이 만나면 가스를 방출한다. 사체는 썩으면서 땅이 꺼져간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며 흙을 계속 덮어주고 가스도 빼줘야 한다.
이번 구제역 파동에서는 좁은 땅에 수만마리의 가축을 한꺼번에 묻다보니 많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침출수 문제가 대표적이다. 한강의 상류지대인 안성은 수자원 보호를 위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50곳 이상의 매립지를 만들어 가축을 묻어야 했다. 이 때문에 한강 상수원이 오염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신흥리 근처의 한 농민은 “이제 우리는 ‘육수’를 퍼마셔야 한다”며 씁쓰레했다. 아직도 식수를 지하수에 의존하는 농촌 주민들은 기분이 유쾌할 리 없다. 이에 따라 농림부는 지하 깊은 곳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도록 관정을 뚫는 데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앞으로는 매립지의 깊이를 얕게 하겠다는 말도 나왔다.
매립지를 선정하는 문제를 놓고서도 잡음이 일었다. 매립지가 농장 소유가 아닌 경우가 특히 그랬다. 땅주인이 “내 땅에 묻은 돼지를 파내가지 않으면 행정소송도 불사하겠다”고 맞서는 바람에 매립한 돼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다 묻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매립은 신속하게 이뤄져야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꺼번에 워낙 많은 수의 가축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매립지 구하기가 여의치 않아 일단 시유지로 몰아넣었다가 옮겨 묻었다. 그러는 중에 자연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구제역이 마지막으로 발생한 것은 6월23일이지만, 매립이 완료된 것은 7월1일이다.
안성시 일죽면 주민들이 구제역으로 입은 직·간접 피해는 막대하다. 6월 말에는 일죽면내 모든 초·중·고교에 휴교령이 내려질 만큼 주민들의 이동이 통제됐다. 이동이 불편한 것만으로도 경제활동은 제약되기 마련이다. 위험지역 안의 농민들은 농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고, 상인들의 수입도 급감했다. 돼지 10만마리를 땅에 묻은 것만으로도 1000억원이 넘는 손해를 봤다. 정부도 막대한 지원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어느 정도나 비용이 더 들어갈지 예측하기 힘들다. 농민들은 “‘보상’이 아니라 ‘배상’을 받아야겠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방역효과 높인 ‘간이 진단키트’
그런 중에도 구제역이 안성지역을 넘어가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진천군과 평택시에서도 구제역이 한 건씩 발생했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추가로 발생하진 않았다. 두 지역은 이미 경계지역에서 해제됐다.
7월4일에는 세계적인 역학전문가들이 구제역 상황을 관찰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다. 뉴질랜드의 매크레스씨 등 3명의 전문가는 우리나라의 구제역 대처조치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의 역학조사팀은 감염농장에 대한 자료 수집과정에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살처분 정책과 이동제한을 포함한 방역조치들이 구제역의 전파를 한정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다는 증거들이다. 우리 평가팀은 한국 동물방역당국 관계자들이 구제역에 대응하면서 보여준 능력과 완벽함에 감명 받았다.”
7월 말까지 구제역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면 올해 구제역은 이 정도로 끝나고 넘어갈 수 있을 듯하다. ‘선방(善防)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국처럼 한 해에 1000여 건의 구제역이 발생하는 나라와 비교하긴 어렵지만, 우리나라의 방역체계는 이미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립수의과학 검역원의 안수환 연구부장은 “특히 구제역 신고와 가검물 처리, 정밀진단과 의사결정에 이르기는 과정을 24시간 안에 처리하는 시스템은 독보적이다”고 평가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간이 진단키트’의 정확성 덕분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용된 이 휴대형 키트는 국립수의과학검역원과 미국 기업이 공동연구 끝에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10분 만에 양성 구제역인지 아닌지를 가려낼 수 있는 도구인데, 신고가 들어온 34개 농장에서 사용한 결과 100%의 정확성을 나타내 향후 세계적으로 각광받을 전망이다.
이번 방역현장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원칙의 준수, 그리고 그 원칙을 준수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의 조성과 정책의 일관성이다. 당국은 허술한 축사관리와 구제역 발생 이후에도 끊이지 않은 잦은 회합 등 농민들이 원칙 준수에 투철하지 못했던 점을 비난했다. 이에 비해 농민들은 당국이 이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금전적 손실은 물론 모든 책임을 자신들에게 전가하고 있다고 맞받았다. 부실한 축산 인프라와 빚을 얻어가면서 축산업에 매달려야 하는 농민들의 절박한 형편도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원칙준수’와 ‘환경조성’ 사이
구제역과 관련해 단골로 인용되는 나라가 영국이다. 유럽에선 낙농업이 공업 다음으로 중요한 산업이기 때문에 구제역과 광우병의 고통은 영국의 축산농가를 비참한 수준으로 몰고갔다. 축산농민들은 축사를 지키기 위해 몇날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웠고, 자신들이 키우던 소가 도살될 처지에 이르자 소에게 독극물을 주입하는 수의사들을 ‘살인자’라고 부르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실의에 빠진 농부들이 자살하는 사태가 잇따라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구제역으로 사회적 갈등이 커진 영국의 사례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일죽면의 황혼은 여느 소도시의 그것과 다름없이 아름다웠지만, 한편으로는 더없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일죽면은 해방 이후 8·15 광복절을 동네의 가장 큰 잔칫날로 여겨온, 역사의 뿌리가 깊은 고장이다. 하지만 올해는 광복절을 구제역이라는 역경을 극복한 축제로 맞이할지, 아니면 정부에 대한 대규모 시위로 대신할지 누구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