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호

6·29 서해교전은 김정일의 ‘6·15 격침작전’이었다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대우 > hoon@donga.com

    입력2004-09-01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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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일은 김대중을 ‘비겁자 게임’으로 몰아넣었다
    • 어민에게 치받치고, 북한에게 짓눌리는 해군…한국 언론도 해군을 공격했다
    • 북한 해군 경비정은 모두 433척
    • 연평해전 패전 후 해상분계선과 통항질서 선포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 서해 분쟁과 한·일간 독도 영유권 분쟁의 닮은꼴과 다른 점
    • 한국의 북진 막기 위해 북방한계선 선포한 클라크 UN군 사령관
    • 대북 정책은 일방적인 햇볕정책에서 조건부 개입정책으로 변해야 한다
    2002한일월드컵 3,4위전이 있던 6월29일 오전 발생한 서해교전은 우리 사회에 많은 상처를 주었다. 오랜만에 욱일승천하던 국운을 느끼던 국민들은 뒤통수를 맞은 듯 어리둥절해했고 햇볕정책을 지지해온 사람들은 배신감에 떨었다. “북한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와 함께 “우리 사회가 강경 일변도로 치달으면 전쟁을 불러온다”는 우려도 나왔다. 6·29교전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심층취재를 시도해 보았다.

    제1부 다큐멘터리 6·29 교전

    6 ·29교전을 분석하는 데 있어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김정일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사실이다. 한국 언론은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으로 호칭하지만, 북한 내에서는 ‘최고사령관 동지’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은 젊은 시절 군에 입대한 사실이 없다. 김정일이 젊었을 때 북한은 의무병제가 아닌 지원병제였다. 김정일은 만 22세이던 1964년 6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에 지도원으로 들어간 후 지금까지 조선로동당 일을 해오고 있다. 김정일은 만 49세이던 1991년 12월24일 갑자기 110만 조선인민군을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었고, 만 50세인 1992년 4월20일 원수 계급을 부여받았다. 국방위원장이 된 것은 1년 후인 1993년 4월이다.

    김일성 탄생 90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4월14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일은 북한군 장성 55명에 대한 대규모 진급 인사를 단행했다. 한국군에서는 진급을 하면 대개 보직이 바뀐다. 사단장을 하던 육군 소장이 중장으로 진급하면 군단장이 되거나 중장을 보임하는 상급 직위로 이동한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그렇지 않다. 진급을 해도 그 보직에 그대로 있는 경우가 많다.



    이날 김정일은 3군단장 장성우(張成禹·67) 대장을 차수로 진급시켜 같은 자리에 유임시켰다. 이로써 조선인민군의 차수는 13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상장(☆☆☆)인 여춘석과 김정각·김윤심을 대장으로 진급시켰다. 여춘석(呂春錫·72)과 김정각(한자 이름과 나이는 확인 안됨)은 인민무력성의 부상(副相, 국방부 차관에 해당)을 맡고 있다가 같은 보직에서 진급했다(인민무력성에는 다섯 명의 부상이 있다). 김윤심은 해군사령관(해군 참모총장과 유사)을 맡고 있다가 역시 같은 자리에서 대장을 달았다. 김정일은 중장(☆☆) 여섯 명을 상장으로, 소장(☆) 다섯 명을 중장으로, 그리고 대좌 40명을 소장으로 진급시켰다(괄호 안의 별은 계급장).

    이러한 진급 인사 중에서 눈여겨볼 사람이 바로 해군사령관 김윤심 대장이다. 김윤심은 1999년 6월 연평해전이 일어날 당시 상장으로 북한 해군사령관이었다. 패전 지휘관이었음에도 그는 해군사령관 지위를 유지하다, 6·29 교전이 일어나기 두 달 전 대장으로 진급했다. 김윤심의 생년월일과 한자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데, 1991년 7월 그는 소장 계급을 달면서 서해함대사령관이 되었다. 이때 비로소 우리 정보기관은 김윤심의 존재를 눈치챘는데, 김윤심을 ‘김윤신(金潤申)’으로 잘못 파악하기도 했다.

    1996년 11월 김윤심은 서해함대사령관 자리에서 중장으로 진급하고, 다섯 달 후인 1997년 4월14일 같은 자리에서 상장 계급을 달았다. 김윤심이 다섯 달 만에 중장에서 상장으로 진급한 것은 당시의 해군사령관 김일철(金鎰喆·69) 대장의 승진과 관련 있다.

    김윤심이 상장이 되던 날 김일철은 차수로 진급하며 인민무력부 1부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두 달 후인 1997년 6월 김윤심 상장이 공석이 된 해군사령관에 보임되었다. 김윤심의 전임자인 김일철은 1998년 9월 이후 지금까지 인민무력상을 맡고 있으며 2000년 9월25일 남북국방장관 회담을 위해 제주를 방문한 바 있다. 북한 해군이 대패한 1999년 6월의 연평해전은 김일철 인민무력상-김윤심 해군사령관 시절에 일어난 것이다.

    김윤심 상장 후임으로 누가 서해함대사령관이 되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부 정보 관계자들은 김윤심이 해군사령관과 서해함대사령관을 겸임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계급의 고하(高下)보다 중요한 것이 최고 실력자와의 관계다. 북한에서는 특히 이러한 현상이 심각한데, 김윤심과 김정일 관계는 매우 좋은 것으로 보인다.

    김윤심은 상장 계급을 달고 해군사령관을 하던 1998년 12월, 김정일을 수행해 군 공훈합창단과 군악단의 합동공연 관람하였고, 1999년 1월에도 김정일을 수행해 군 공훈합창단의 신년 경축공연을 관람하였다. 그리고 연평해전 발생 3개월 후인 1999년 9월, 김정일을 수행해 군 공훈합창단 경축공연을 관람함으로써 그의 해임을 예상했던 우리 정보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정보 중에서 정보관계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6·29교전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2002년 5월1일 김정일이 해군사령부를 방문한 사실이다.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은 이같은 사실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이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은 작전지휘실에 들어가 해군사령관으로부터 정황보고를 받고, 해군력을 강화 발전시키는 데 지침이 될 수 있는 강령적인 과업들을 제시했다고 한다. 또 방송은 김정일이 “전사들에 대한 사상 교양에 언제나 선차적인 관심을 돌려온 결과 우리 군대가 필승불패 사상의 강군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정보 관계자들은 김정일이 해군사령부를 방문함으로써, 북한 해군은 6·29 도발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 북한정보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연평해전에서 패전했다고 책임을 물어 해군지휘부를 교체했으면 북한 군부에서도 동요가 일어났을 것이다. 김정일은 말끝마다 ‘영용(英勇)한 조선인민군’을 들먹이며 ‘선군(先軍) 정치’를 강조해왔으니, 군부를 껴안는 아량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차에 최고사령관 동지가 몸소 해군사령부를 방문했으니, 해군은 충성심을 갖고 보복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고속정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등산곶 경비정도 대단한 상처를 입었다. 등산곶 경비정의 85㎜ 함포와 37㎜ 함포 14.5㎜ 고사총도 초전에 무력화된 듯 더 이상 화염이 튀지 않았다. 등산곶 경비정이 피해를 입은 것은 근처에 있던 2-1 고속정과 기타 함정이 지원 사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등산곶 경비정은 2-1 고속정으로는 단 한 발의 총알도 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북한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대형 함포를 이용해 고속정 한 척은 반드시 잡겠다는 것을 목표로 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2-1 고속정이 위치를 확보해 공격을 가하자 등산곶 경비정의 함교와 85㎜ 함포, 37㎜ 함포에서 화염이 발생했다. 등산곶 경비정도 기관 한 개가 파손된 듯 속력이 줄어들며 크게 원을 그렸다.

    2-2 고속정은 전투 초기 조타실이 파괴되는 바람에 통신시설이 마비되었다. 이때 비상사태가 일어난 것을 안 2함대사령부는 2-1 고속정에 타고 있던 편대장(소령)을 불렀다. 그러나 편대장은 교전 상황에 몰두한 나머지 호출에 응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2함대사령부는 2-2 고속정의 피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교전이 벌어지는 순간(10시25분) 근처에 예비대로 있던 제3편대가 관측을 통해 교전이 벌어졌음을 알고 현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육도 경비정을 따라 서쪽으로 항진하던 제1편대도 관측을 통해 상황을 직감하고 현장으로 긴급히 이동했다.

    10시26분 제1·제3편대를 통해 교전이 벌어진 것을 안 2함대사령부는 어로한계선 근방에 대기중인 초계함 제천함과 진해함에게 북상하라고 지시했다. 10시29분 해병대 연평여단은 포병부대 전원을 전투배치하였다.

    10시30분 고속정 제3편대가 4500야드(4113m) 떨어진 곳에서부터 등산곶 경비정을 향해 사격을 하며 교전 현장으로 들어갔다. 10시33분에는 제1편대도 4000야드 지점에서부터 격파사격을 하며 달려왔다. 6대1의 싸움이 붙은 것이다.

    이후 등산곶 경비정의 대응사격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군 세력이 월등히 우세해진 10시33분부터 2-1 고속정은 피해를 입은 2-2 고속정을 예인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연평도 남쪽의 ○○섬에는 경비정 공격에 적합한 시스쿠아 공대함 미사일을 장착한 해군의 링스 헬기 부대가 있다. 10시30분 2함대사령부는 이 부대에 긴급출격대기 명령을 내렸다. ‘출격대기’는 전투 준비를 마친 후 조종사가 조종석에 앉아 이륙 명령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서해교전 사실은 KNTDS를 통해 합참과 육·공군 주요 전투부대에도 실시간으로 전파되었다. 위급상황이 벌어지면 기동력이 가장 좋은 공군에 비상이 걸린다. 최초 교전 사실이 알려진 10시25분, 공군은 전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1시간 내에 전투기를 탈 수 있는 곳에서 대기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10분 만에 대기시간을 15분으로 줄여, 영외 거주하던 조종사들은 황급히 부대로 들어오게 되었다.

    공군은 작은 경비정에 대한 공격임무는 대함로켓을 장착한 F-5 타이거 전투기에게 맡긴다. 교전이 일어난 10시25분, 공군은 대함로켓을 탑재한 F-5 전투기를 보유한 ○○비행단과 △△비행단에 대해 ‘지상대기(battle station)’ 명령을 내렸다. 지상대기는 2함대가 링스헬기부대에 내린 출격대기와 비슷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받은 조종사는 전투기 조종석에 앉아 출격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므로 ‘좌석대기(座席待機)’로 부르기도 한다.

    공군에서 전투기를 이륙시킬 수 있는 지휘관은 공군작전사령관(중장)과 전투비행단장(준장 혹은 소장)이다. 그러나 두 지휘관은 교육과 훈련 목적일 때만 전투기를 출격시킬 수 있다. 적을 공격하는 작전목적일 경우에는 평시 작전통제권을 가진 합참의장의 명령을 받거나, 합참의장으로부터 명령권을 위임받아야 출격을 명령할 수 있다. 두 지휘관은 합참의장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내릴 수 있는 최고 조치인 지상대기를 발동한 것이다.

    휴전선 남쪽 상공에는 24시간 전투기가 공중전투초계(Combat Air Patrol, 약칭 CAP) 비행을 한다. 마침 서해 부근에서는 ○○비행단에서 이륙한 KF-16 전투기 두 대가 공중전투초계비행중이었다. 초계비행중인 전투기에 대해서는 공군이 이동 명령을 내릴 수 있다. 10시36분 공군은 KF-16 두 대에게 연평도 남쪽의 ○○섬 상공으로 이동해 해군의 전투를 공중 엄호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초계비행에 나선 전투기에는 함정을 공격할 무기를 탑재하지 않으므로 등산곶 경비정을 공격할 수 없었다.

    북한 공군은 황해도 과일·황주·곡산비행장에 미그 15·19·21기 150여대를 배치해놓고 있는데 해전 상황이 다급해지면 공군기를 출격시킬 수도 있다. 북한 전투기들이 이륙하면 KF-16이 가장 먼저 교전에 들어가고 이어 경기도와 충남도 기지에서 이륙한 공군기가 벌떼같이 날아올라 공중전에 가담한다.

    10시41분 세 개 고속정 편대로부터 ‘돌림 빵’을 당하던 등산곶 경비정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2분 후인 10시43분 등산곶 경비정에서 1만1200야드(약 10㎞) 떨어진 수역에서 제천함이 76㎜ 함포 초탄을 발사하며 전진해왔다. 제천함은 10시26분에 기동을 시작했으니, 기동 시작 17분 만에야 비로소 초탄을 발사한 것이다.

    17분 동안 제천함이 전진한 거리는 1만1400야드(1만0420m)였다. 이를 근거로 역산하면 제천함은 시속 37㎞로 달려온 것이 된다. 초계함의 최고 속도는 시속 59.5㎞(32.5노트)인데, 제천함은 왜 3분의 2밖에 되지 않는 속력으로 달려온 것일까. 이유는 침로 곳곳에 놓여 있는 어망 때문이다. 어망이 스크루에 걸리면 배는 완전히 기동력을 잃어버린다.

    10시45분 그때까지 애타게 제2편대장을 호출하던 2함대사령부가 방법을 바꿔 제1편대장을 불러 2-2 고속정의 피해상황을 알리라고 지시했다. 제1편대장은 제2편대장 대신 제2편대장이 타고 있는 2-1 고속정의 정장(최영순 대위)을 불러 “2-2 고속정의 피해상황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2-1 고속정은 2-2 고속정을 2000 야드 정도 예인해 나오고 있었으므로 2-2 고속정의 상황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연락을 받은 최대위는 전탐병을 시켜 “다섯 명이 사망했다”고 알렸고, 제1편대장은 2함대사령부에 역시 “다섯 명이 사망했다”고 통보했다.

    그런데 2함대 상황실장(소령)이 ‘사망자 다섯’을 ‘사상자 다섯’으로 잘못 듣고 기록해 2함대 사령관에게는 ‘다섯 명 사상’이라는 보고가 올라가게 되었다. 합참은 “이로 인해 2함대 사령관은 북한 경비정에서는 큰 화재가 발생했으니 북한이 입은 피해는 크고, 반대로 아군은 피해가 적다고 오판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합참의 이러한 해명은 많은 의문을 일으켰다.

    군에서는 평어(平語)가 아니라 음어(陰語)로 통신한다. 평어 교신이라면 사망자와 사상자의 발음이 비슷해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음어는 전혀 다른 용어로 교신할 텐데 혼동이 일어날 수 있는가. 또 사망자가 사상자로 바뀐 것을 증명할 방법이 있는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국방부 황대변인은 “급할 때는 평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제1편대장과 2함대 상황실장이 교신한 내용은 녹음돼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10시47분 진해함이 1만4800야드(약 13.5㎞) 거리에서 초탄을 발사하며 현장으로 접근해왔다. 덩치 큰 초계함 두 척이 가세하자 북한의 지상기지는 위협을 느낀 듯 10시48분 먼저 초탄을 발사한 제천함을 향해 최대 사거리 45㎞의 스틱스 함대함 미사일을 유도하는 레이더파를 발사했다.

    미사일은 유도 레이더파를 쏜 후 바로 날아올 수 있으므로, 제천함은 즉각 은박지 뭉치인 채프(chaff)탄을 발사했다. 채프가 터지면 미사일은 레이더파를 더 크게 반사하는 채프 속으로 돌진해 자폭한다. 그러나 북한은 스틱스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았다.

    10시51분 화재로 인해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 등산곶 경비정이 한 개 남은 기관을 이용해 북으로 방향을 돌려 뒤뚱뒤뚱 북방한계선 쪽으로 기동하기 시작했다. 등산곶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자 교전에 참여하지 않은 채 대기하고 있던 육도 경비정이 접근해 이 배를 예인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해군 함정은 등산곶 경비정에 대해 사격을 계속했다. 2함대 사령관은 등산곶 경비정이 북방한계선 북쪽 0.5해리쯤의 북한 바다를 통과하던 10시56분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때까지 제천함은 76㎜ 함포를 32발, 진해함은 21발 발사했다. 그러나 등산곶 경비정은 끝내 격침되지 않고 북으로 올라갔다.

    합참은 2함대사령부가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린 것은 이겼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합참은 6월20일 군 당국이 찍은 등산곶 경비정이 전투 배치한 사진 분석을 근거로 제시했다(사진은 공개치 않음).

    이 사진을 보면 37㎜ 포를 조작하는데 10여 명, 14.5㎜ 고사총 조작에 5 명, 그리고 조타실 운영에 10여 명이 배치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군의 사격으로 갑판에 있던 등산곶 경비정 요원들의 상당수가 쓰러지고 불까지 났다. 해군측은 등산곶 경비정에서도 30여 명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상대는 30여 명이 사상했는데 반해 우리는 다섯 명이 사상했으니 2함대는 ‘이겼다’고 판단하고 사격을 중지시켰다는 것이 합참측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우리 함정은 등산곶 경비정을 예인해가는 육도 경비정에 대해서는 단 한 발의 사격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합참은 “육도 경비정은 북방한계선을 다시 넘어오지 않았고 사격을 해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내버려두었다”고 설명했다.

    사격을 중지한 초계함 두 척과 네 척의 고속정은 퇴각하는 북한 경비정을 지켜보며 교전이 벌어진 바다에 머물렀다. 76㎜ 함포의 최대 사거리는 16㎞에 불과하다. 그런데 북한은 장산곶에서 해주 일대에 사거리 20∼27㎞의 해안포를 수십 문 배치해놓고 있다.

    무너진 자존심

    육상에 배치된 해안포는 76㎜ 함포보다 구경이 크고 위력도 강하다. 정각 11시, 2함대는 북한이 해안포나 97㎞의 사거리를 가진 실크웜 지대함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전투기를 출격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전 함정에 대해 퇴각 명령을 내렸다.

    11시6분 사상자가 다섯 명인 것으로 알았던 지휘부는 ○○기지에 있는 공군의 HH-60헬기를 이륙시켰다. HH-60은 12인승인 UH-60 헬기를 개조한 것으로, 구조 및 후송 임무를 수행한다.

    잠시 후 2함대사령부로 ‘2-2 고속정이 입은 인적 피해는 사망자 네 명, 실종자 한 명, 부상자 19명이다’는 놀라운 보고가 날아들었다. 깜짝 놀란 지휘부는 추가로 HH-47 헬기를 이륙시켰다. HH-47은 40인승인 CH-47을 개조한 것이라,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실어 나를 수 있다. 아군의 피해가 큰 것으로 밝혀지자 지휘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11시59분 또다시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2-2 고속정이 예인 도중 침몰했다는 것이다. 전사자와 부상자는 예인하던 고속정으로 옮긴 다음이라 더 이상의 인명 피해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실종자 한상국 중사는 끝내 찾지 못했다.

    사상자를 다섯 명으로 알았을 때만 해도 ‘비겁자 게임’에서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상자가 훨씬 많고 고속정까지 침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낭패감이 감돌았다.

    6·29교전 이후 남한에서는 햇볕정책을 둘러싸고 남남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그런데 7월9일 조선중앙방송은 “남조선측이 침몰 함선을 인양하겠다는 데 대하여 조선인민군측은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양작업이 진행되는 곳은 우리의 수역이므로 새로운 충돌을 막자면 작업 날짜와 시간 등을 미리 조선인민군측에 통보해야 한다”는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의 담화를 보도했다.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이었다. 이에 대해 해군은 북방한계선을 사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해군의 사수 결의는 무너진 자존심을 바로 세우기에 미흡했다.

    제2부 6·29 교전과 햇볕정책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6·29교전과 관계된 제반 논쟁이다. 이 부분은 다양한 갈래로 진행되면서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으므로 조목조목 살펴보기로 한다.

    6·29교전에서 문제가 된 것 중의 하나는 연평도의 어선이 조업한계선을 넘어 해군 작전에 지장을 주었다는 것이다. 6월29일 교전 당시 해군은 안에서는 어선에 치받치고 밖에서는 북한 경비정과 박치기를 한, ‘안팎 곱사등이’ 신세였다. 왜 연평도 어선은 해군을 괴롭힌 것일까. 이유는 조업선 안쪽의 어장이 황폐화돼 어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 해군은 연평도 어장에서 조업선 밖으로 나온 어선 46척을 붙잡아 선장으로부터 조업선 밖으로 나와 조업했다는 자인서를 받았다. 이중 2척은 두 번이나 붙잡혀 두 번 자인서를 썼다. 해군은 자인서를 인천해양경찰청에 넘겼는데 단 두 척에 대해서만 벌금 550만원이 부과되었다. 이러니 처벌받은 어민과 조업선을 지킨 어민 사이에서 서로 시기하는 갈등이 일어났다. 영이 서지 않으니 어선들은 경쟁적으로 조업선 밖으로 나갔고 그만큼 해군은 작전에 영향을 받았다.

    6·29 교전과 관련해 시비거리가 된 또 하나의 주제는 우발적인 교전이냐 의도된 교전이냐는 문제다. 한나라당 서청원(徐淸源) 대표는 7월8일 “임동원 청와대 특보가 국가안전보장회의 직후 서해교전은 우발적이라고 규정하고 햇볕정책은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임특보 측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야당의 정치공세일 뿐이다”라며 부인했다.

    그러나 교전 직후 통일부의 고위 관리들과 재야단체 관계자들은 사견임을 전제로 “우발적인 사건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내비쳤었다. 6·29 교전은 1부에서 상세히 설명했듯 북한이 의도한 도발이다. 그런데도 사건 발생 초기 김대중 정부 일각에서 우발론이 제기된 것은 7월 둘째 주로 예정됐던 제임스 릴리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방북 여부를 성사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관계 전문가는 분석한다.

    교전에도 불구하고 릴리 차관보가 북한을 방문해 “6·29교전에도 불구하고 남북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논평을 내준다면, 햇볕정책이 지속되길 바라는 김대중 정부는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시 미국대통령은 이미 김정일 정권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바 있고, 일본 정부는 동중국해에서 자침(自沈)한 북한 공작선으로 보이는 괴선박의 인양을 추진하고 있다.

    외국에 나가 있는 대사관의 정치담당관이나 정보기관 관계자들이 하는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주재국의 외교 책임자를 만나 비공식적으로 한국 정부 지지를 부탁하는 것이다. 주재국은 이러한 부탁에 대해 슬쩍 언론에 정보를 흘리는 형태로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7월2일 일본의 마이니치(每日)신문은 1면에 ‘한국 정부는 북한군의 통신을 감청한 결과 북한의 무력도발은 우발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이같은 입장을 미국 및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마이니치의 이러한 보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일본 정부는 6·29 교전을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일본 정부에게 부탁할 것을 부탁해야지’ 하는 조롱이 담겨 있다.

    일본에서 이러한 반응이 나왔으면 한국에서도 책임 있는 당국자가 대꾸를 해줘야 한다. 이때는 ‘딱 잡아떼는 것’이 관례다. 이날 임성준(任晟準)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그러한 성격규정(6·29교전을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을 미국이나 일본 정부에 알린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바로 그날부터 미국 언론은 일제히 미국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릴리 특사를 북한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는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미국과 일본 언론에서 이러한 보도가 있은 후 한국 언론에서는 ‘6·29교전에도 불구하고 릴리 차관보가 북한을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는 기사가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6·29교전 직후 김대중 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완패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하면서까지 북한에게 유리한 햇볕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는데, 조선인민군은 침몰한 고속정을 인양하려면 사전에 통보하라고 선언해 김대중 정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왜 북한은 그들에게 우호적인 김대중 정부를 괴롭히는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면 서해 북방한계선 문제에 대처할 수 없다.

    서해에서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일부 진보적인 지식인과 언론은 ‘근본적인 원인은 휴전협정 후 UN군이 일방적으로 그은 북방한계선 때문이다’고 지적 한다. 이들은 정전협정을 맺을 때 육지에 군사분계선을 그은 것처럼 해상에도 분계선을 그었어야 했는데, UN군은 해상분계선 확정에 응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북쪽에 북방한계선을 그었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은 부분적으로는 타당하나, 부분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6·25전쟁 중 UN군 사령부 역할을 겸했던 것은 일본 도쿄에 주둔한 미국 극동군사령부(사령관 맥아더 원수)다. 6·25전쟁 중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한국에 주한연락처(Korean Liaison Office, 약칭 KLO)를 두었다.

    주한연락처는 영어 약칭을 따 주로 ‘켈로(KLO)’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켈로는 북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고트·이글·윔프스·불독·리바이벌 등의 이름을 가진 10여 개의 한국인 첩보조직을 고용했다. 이중 서해에서 활동한 것이 이연길(李淵吉·75)씨가 이끌던 ‘고트(Goat·염소)대’다. 이씨는 1999년 2월 황장엽(黃長燁) 노동당 비서의 망명을 성사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6·25전쟁 중 UN군은 제해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동서해에 있는 북한 지역의 섬은 대부분 UN군이 관할하고 있었다. 이씨가 이끄는 고트대는 대동강 하류에 있는 초도를 본거지로 삼아, 인근의 웅도는 물론이고 평안북도의 대화도와 수운도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백령도는 고트대 요원들이 휴식을 취하려 가는 최후방기지였다. 1951년 1월 고트대는 황해도 옹진군으로 침투, 인민군 상좌를 생포해 미군에 넘기는 등 크게 활약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UN군은 이씨가 이끄는 고트대를 백령도로 불러들였다. UN군은 초도를 비롯한 북한지역의 섬은 방어가 용이치 않아 포기하고 최후방인 백령도까지만 관할하기로 하고 고트대를 불러들인 것이다. 비슷한 시기 UN군은 김종벽(金宗碧)씨를 대장으로 황해도 일대에서 활약한 구월산 유격대도 백령도로 철수시켰다.

    UN군은 게릴라 부대 성격이 강했던 구월산 유격대에 ‘동키(donkey·당나귀) 부대’라는 애칭을 지어주었다. 동키 부대의 주력 세력이 훗날 대북 첩보부대로 이름을 남긴 HID 부대에 참여하게 되었다.

    동해에서는 한국 해병대가 원산 앞 바다의 알섬에 주둔해 있었는데 UN군이 해병대도 철수시켰다.

    주지하다시피 정전협정에서는 지상의 군사분계선만 획정하였다. 정전협상에서는 해상분계선 문제도 논의됐으나, 북한은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5도까지도 돌려 받을 심산으로 “황해도와 경기도 도계(道界)의 연장선으로 해상분계선을 긋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북한지역의 섬을 돌려준 데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한국인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UN군은 한국과 북한 사이에 끼어 안팎곱사등이 신세가 되었다.

    1953년 8월30일 견디다 못한 클라크 UN군 사령관은 UN군 작전규칙의 일환으로 북방한계선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이것이 북방한계선의 시원이다. 북방한계선은 북한의 남침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북한에 있던 점령지를 포기하고 온 한국인들의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선포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전략 도서 방어는 해병대가 담당하므로, 한국군은 백령도와 연평도 등에 해병대를 주둔시켰다. 해병대는 상륙전 부대이므로 기동성이 좋은 자주포로 포병을 무장한다. 백령도의 흑룡여단이나 연평도의 연평여단은 육군 사단에 필적할 정도로 화력이 강해졌다.

    휴전선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40여㎞에 불과하다. 전선에서 가까운 서울을 방어하려면 한국군은 북한군의 동태를 추적하는 조기경보 능력을 갖춰야 한다. 때문에 서해 도서에 장거리 레이더와 감청장비 등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평양측에게는 ‘눈엣가시’가 되었다. 북한은 한미연합군이 북한 심장부를 들여다본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은 온화한 인상을 가졌지만, 공군사령관 시절 북한 전투기를 백령도 상공으로 집어넣는 담대함을 보였다. 전투기를 상대국의 영공에 집어넣는 것은 사실상 전쟁도발 행위다.

    서해 5도가 갖고 있는 힘을 무력화하려는 북한군의 노력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절절하다. 북한군이 서해 5도를 무력화하는 방안으로 함정을 동원해 주기적으로 북방한계선을 침범하는 것이다.

    북, 일방적으로 해상분계선 선포

    1992년 9월17일 한국의 정원식 국무총리와 북한의 연형묵 정무원 총리는 남북기본합의서‘제2장 남북불가침’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에 서명했다.

    이 부속합의서 10조는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 구역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획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고 돼 있다. 한국은 이 조항을 근거로 북방한계선 남쪽은 한국이 관할해왔으니 불가침경계선(해상분계선)이 확정될 때까지는 ‘한국측 바다’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1999년 6월15일 발생한 연평해전은 북방한계선 문제와 관련해 큰 획을 그은 사건이다. 연평해전 직후인 1999년 7월21일 판문점에서 열린 장성급 회담에서 조선인민군 대표 이찬복 중장은 UN군 대표 마이클 던 소장에게 그들이 작성한 해상군사분계선 안을 제시하며 합의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던 소장은 “해상군사분계선은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라 남북한이 군사공동위원회를 열어 결정할 사항이다. 새로운 경계선이 획정될 때까지는 북방한계선을 준수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한 달 보름 후인 1999년 9월2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특별보도’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7월21일 제시했던 것과 같은 내용의 해상분계선을 발표하고, 이 분계선 북쪽의 바다는 ‘조선인민군 해상군사통제수역’으로 지정한다고 선언했다. 이어 총참모부는 “서해 군사분계선을 지키기 위한 자위권을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으로 행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0년 3월3일 김윤심이 이끄는 조선인민군 해군사령부는 “조선 서해에는 오직 우리가 선포한 해상분계선만이 있으며,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은 우리 군대와 인민의 의지와 요구를 똑바로 알고 조선 서해상에서의 모든 군사적 도발행위를 당장 걷어치워야 한다”라고 발표했다.

    2000년 3월23일 조선중앙방송은 ‘중대발표’를 통해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주체88년(1999년) 9월2일 조선 서해 해상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해 선포한 것은 정전협정과 국제법에 부합하는 공명정대한 조치”라며 “조선인민군 해군사령부는 (백령도 등 남측이 점령한) 서해 5개 도서에 대한 ‘통항질서’를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이 발표에서 북한은 “서해 5개 도서로 들어갈 선박과 비행기는 북한이 허용한 폭 2해리의 수로만을 이용하라. 지정된 수로를 벗어나면 북한의 영해와 영공을 침범하는 것이 된다”며 재차 통항질서 준수를 강조하였다.

    그후에도 북한은 해상분계선과 통항질서를 지킬 것을 거듭 강조했다. 2002년 5월3일 평양방송은 또 한번 통항질서 준수를 촉구했는데, 그로부터 50여일 후 6·29교전이 발생했다. 6·29교전은 남북한 간의 바다 분할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6·29교전을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한 대북 문제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햇볕정책을 경의선을 연결하고 북한 경제를 돕는 것으로 이해했지만, 북한은 해상분계선과 통항질서를 준수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햇볕정책에 관해 남과 북은 동상이몽이다. 북한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것은 한국 군부다. 연평해전으로 기가 꺾인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에 응하는 것으로 한국의 경계심을 약화시키고 경의선 연결을 위한 군사실무회담에 응함으로써 2차로 경계심을 약화시켰다.

    군사실무회담 막바지에 한국군의 주적 설정을 포기하도록 주장함으로써 회담을 중단시킬 명분을 얻고 한국 군부에게 굴종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임동원 특보와 박근혜 의원을 불러들여 유화적인 회담을 가진 후 월드컵 기간 중에 기습적으로 도발하였다. 햇볕정책에 대한 남과 북의 시각과 목적은 이렇게 다르다.”

    UN군은 우리 수역이나 영공을 침범한 군사력에 대해서는 UN군 사령관의 ‘승인’을 전제로 추격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6·29교전 이후 보수세력은 북방한계선을 넘어 도주하는 북한 함정을 끝까지 추격해 침몰시키지 않은 데 대해 분노를 표시했다.

    이들은 2함대가 추격권을 포기한 것은 햇볕정책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며 “우리가 퍼다준 대북지원이 총폭탄이 되어 돌아왔다”고 비난했다. 반면 유화론자들은 “그렇게 추격권을 행사하다 사태가 확대돼 전쟁이 일어나면 어찌할 것인가”라며 신중론을 제기했다.

    이러한 논쟁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김정일이 이끄는 북한은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보수파는 북한은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않으니 아예 엉뚱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기회가 올 때마다 짓눌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유화파는 짓누르면 더욱 반발하니 살살 달래서 무장을 해제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북한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판단은 북한을 우리 시각으로만 본 데서 기인하는 오판이다. 북한의 시각에서 보면 북한은 충분히 논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한다. UN군이 응하지 않아 그렇지 북한은 논리를 갖고 해상분계선에 이어 서해 통항질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서해 통항질서 준수를 여러 차례 강조하다 6·29교전을 일으켰다.

    6·29교전 직전에 보인 작전 행동도 지극히 논리적이었다. 꽃게잡이철이자 월드컵으로 인해 한국의 긴장도가 떨어진 6월을 택했고, 6월28일에는 리허설까지 한 다음 재차 월선해 공격을 한 것이 그러한 증거들이다.

    북한의 이러한 행동은 군사 도발을 하지 않아 그렇지 끊임없이 독도 근해로 순시선을 보내는 일본의 행동과 매우 흡사하다. 북한이 서해 5도 수역을 분쟁수역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논리를 만들고 예행연습을 한 후 도발을 한다는 것은, 결코 무턱대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북한은 그들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승산 없는 전쟁, 명분 없는 전쟁은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얘기다.

    대신 북한은 부담이 적은 비겁자 게임 같은 도발은 과감히 선택하는 특성이 있다. 비겁자 게임에서 반복해서 이기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해 전쟁까지 고려하고, 반대의 경우면 위험한 도발을 피하는 것이 그동안 북한이 보여준 행동 패턴이다. 북한은 김대중 정부를 상대로 비겁자 게임을 전개했다.

    Benign Policy

    비겁자 게임에 이기면 연평해전 때처럼 김대중 정부의 인기는 치솟는다. 그러나 햇볕정책은 멀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김대중 정부의 딜레마다. 과연 그런가? 정부는 햇볕정책을 영어로는 engagement policy 혹은 sunshine policy로 적고 있다. 그러나 국제정치학에 sunshine policy라는 용어는 없고 engagement policy만 있는데, 학계는 이를 ‘개입정책’으로 번역한다.

    개입정책은 적성국가가 하는 일에 말 그대로 개입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적성국가가 고분고분하게 나오면 지원을 늘리고 엉뚱하게 나오면 무력까지 동원해 제재를 하며 길들여 나가는 것이 개입정책이다.

    반면 상대 국가에게 무조건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benign(인자한) policy라고 하는데, 김대중 정부가 펼치는 햇볕정책의 뉘앙스는 benign policy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리고 상대국과 거의 대화를 하지 않고 상대를 압도하기 위해 군비경쟁 등을 벌이는 것을 봉쇄(containment) 정책이라고 한다. 봉쇄·개입·선린정책의 공통점은 상대국과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 정책은 전쟁과는 완전 반대편에 있지만, 상대국과의 관계가 어떠냐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차이가 있다.

    상호 신뢰가 쌓여 대화가 시작되면 개입정책을 펼치는데 현재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개입정책을 펼치고 있다. 현재의 남북한 관계는 미국-중국 관계보다 훨씬 더 긴장도가 높은 상태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는 선린정책에 가까운 햇볕정책을 북한에 적용시키고 있다. 영어로는 engagement policy로 적으면서, 실제로는 benign policy를 적용시키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삐걱거리는 것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6·29교전이 발생하기 전까지 서해 북방한계선에서 포착된 북한의 동향이다. 이를 추적해보면 북한의 치밀한 도발 준비와 우리의 방심을 엿볼 수가 있다.

    지난 7월7일 국방부와 합참은 6·29 교전에 대해 아주 상세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결과와 우리 정보기관이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서해 북방한계선(NLL) 부근에서의 북한 해군의 동향과 우리의 안일한 대응을 추적해보기로 한다.

    서해 북방한계선에서는 매년 수십 차례씩 북한 경비정과 어선의 월선(越線)이 일어난다. 월선이 가장 많은 때는 꽃게잡이철인 6월이다. 2002년 6월말까지 북한 경비정과 어선은 모두 14차례(경비정 월선은 11회) 월선했는데, 이중 6월에 절반에 가까운 여섯 건이 발생했다.

    이중에서 한 번(6월20일)은 북한 어선이 넘어온 것이고, 나머지 다섯 건은 북한 경비정이 넘어온 것이었다. 북한 경비정이 저지른 다섯 건의 월선 중에서 한 건만 소청도 근방에서 발생했고, 나머지는 6·29교전이 발생한 연평도 서쪽 해역에서 일어났다. 북한 해군은 연평도 서쪽 수역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5월말 2002한일월드컵이 열려 전국이 축제 분위기로 빠져들었고, 6월13일에는 지방선거가 예정돼 있었다. 안보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온 국민이 흥분에 빠져 있을 때가 가장 취약할 때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의 방해 없이 월드컵을 치르기 위해 나름대로 고심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3일 임동원(林東源) 청와대외교안보통일특보는 북한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해 ‘5월7일 제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경추위)를 서울에서 연다’ ‘(경의선 등을 잇기 위한) 군사 실무자 회담을 재개한다(북한측 표현은 재개하도록 건의한다)’는 내용의 공동보도문을 들고 돌아왔다.

    그런데 지난 4월말 ‘신동아’를 필두로 언론은 북한의 금강산댐 위협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북한은 남조선이 있지도 않은 금강산댐 위협을 거론한다며 5월7일로 약속한 경추위에 불참하고 군사실무회담도 열지 않았다. 이로 인해 북한의 저의를 의심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북한은 박근혜(朴槿惠) 카드를 들고 나왔다.

    5월11일 박의원을 평양으로 초청한 김정일은 박의원을 환대하며 “경의선보다 동해선을 먼저 잇자”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답방하겠다”며 적지 않은 ‘선물’을 안겨주었다. 또 박의원이 베이징(北京)이 아닌 판문점을 통해 돌아가도록 배려해주었다. ‘박정희 딸’과 ‘김일성 아들’의 만남은 경추위 무산으로 인해 긴장했던 햇볕정책 지지자들에겐 큰 위안거리가 되었다.

    6·29교전으로 북한은 우리보다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희생의 대가로 김정일은 상당히 많은 것을 얻었다.

    한국은 6·15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김정일의 답방을 끈질기게 요구해왔는데, 이번 사태로 김정일은 서울 답방의 부담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서해 북방한계선을 분쟁수역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로부터는 더욱 고립되었다.

    김정일은 수십 번 득실을 따져본 후 6·29교전이라는 강수를 둔 것이다. 득실을 따진다는 것은 김정일이 홧김에 전쟁을 일으키는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러니 조련사가 채찍과 당근으로 맹수를 길들이듯 용기를 갖고 개입정책으로 북한을 상대하면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다고 대북전문가들은 충고한다. 한 국제정치학자는 김대중 정부는 서둘러서는 안된다며 이렇게 충고했다.

    “북한이 자꾸 비겁자 게임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benign policy를 택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비겁자 게임을 요구할 때는 개입전략을 택해야 한다. 고분고분 나오면 당근을 주고, 거세게 나오면 채찍질을 하는 개입전략을 펼쳐야 하는 것이다.

    개입전략은 군사와 경제분야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전제로 펼쳐야 한다. 힘이 없으면 이러한 전략은 구걸로 변모한다.

    6·29교전에는 해양 분할의 성격이 있으므로 김대중 정부는 해군력 육성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바다에서 육지를 압도할 수 있는 정도로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면 북한은 더 이상 비겁자 게임을 벌이지 못한다. 김대중 정부는 보다 현명해야 한다.”

    올해 6월 들어 북한 선박의 첫번째 월선은 11일 발생했다. 이날 북한 경비정 한 척이 오후 7시25분쯤 소청도 동남쪽 5해리 해상에서 북방한계선을 0.5해리(약 900m, 1해리는 1.8km다) 정도 넘어왔다가 한국 해군 고속정 편대(두 척)가 출동하자 월선 50분 만인 오후 8시15분쯤 되돌아갔다. 이날 합참은 “북한 경비정은 근해에서 조업중이던 북한 어선들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북방한계선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지방선거가 열린 6월13일, 오전 10시49분쯤 북한 경비정 한 척이 연평도 서쪽 14해리 해상에서 북방한계선을 넘어 4해리 정도 남하했다. 이에 한국 해군 고속정 2개 편대(네 척)가 출동해 0.2해리까지 접근해 경고방송을 하자 북한 경비정은 오후 1시18분쯤 되돌아갔다. 이날도 합참은 “북방한계선 인근에서는 북측 어선 10여 척과 남측 어선 50여 척이 조업중이었다. 북한 경비정은 북측 어선들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침범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7월7일 6·29교전 조사결과를 발표할 때 국방부의 황의돈(黃義敦·육군 준장) 대변인은 “6월11일과 13일에는 북방한계선 인근에 북한 어선이 없었는데, 북한 경비정이 넘어왔다. 우리측 반응을 떠보기 위해 월선한 것 같다”고 말했다. 황대변인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합참은 두 번이나 허위 사실을 발표한 것이 된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6월11일과 13일의 침범은 평범한 월선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과거 북방한계선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은 한국 고속정이 차단기동에 들어가면 함포의 포신을 하늘로 올림으로써 ‘교전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표시하곤 하였다. 그러나 11일과 13일에 월선한 북한 경비정은 퇴각할 때까지 우리 고속정을 향해 모든 함포를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합참은 물론이고 7월7일 조사결과를 발표한 국방부도 이런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6월19일 저녁, 해군 레이더는 한 덩어리의 선박군(群)이 연평도 서남방 25 해리쯤에서 북방한계선으로 접근하는 것을 발견했다. 6월20일 새벽 1시20분쯤 이 선박군은 북방한계선 남쪽 11해리 수역까지 들어왔다. 이것은 6월에 있었던 월선 중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온 것이다.

    월드컵을 틈탄 간첩선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해군은 야간작전이라는 부담을 무릅쓰고 고속정 편대를 출동시켰다. 고속정 편대의 확인 결과 이 어선군은 3t짜리 소라잡이 어선 한 척과 0.5t짜리 전마선(傳馬船) 두 척이었다. 세 척의 어선에는 북한 어민 10여 명이 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검색 과정에서 북한 선원들은 채취한 소라와 고장난 나침반을 보여주며 짙은 안개로 항로를 잃었으며 배를 돌려주면 북쪽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보고를 받은 합참은 단순 월선으로 판단해 그날 오후 5시10분쯤 이 배를 북측에 인도했다. 월드컵 기간 중에 북한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6·29교전이 있은 후 군 정보당국은 “6월20일의 어선 남하는 6·29 교전을 위한 사전 공작이었을 것”이라며 전혀 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북한군은 월드컵 기간 중 한국군이 경계를 강화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경계 태세를 확인하고, 월드컵을 의식해 한국군이 오히려 약하게 대응하지는 않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어선을 내려보냈을 것이라는 분석인 것이다.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이 4강까지 올라 온 국민이 축제 무드에 빠져 있던 6월27일 낮 12시16분쯤 ‘문제의’ 연평도 서쪽 14해리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 한 척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1.5해리까지 침범했다. 북한 경비정은 한국 고속정이 출동하자 오후 1시8분 북쪽으로 돌아갔다.

    이날 합참은 “북한 경비정은 어선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북방한계선을 단순 침범한 것으로 보인다. 특이 동향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7월7일 발표에서 국방부 황대변인은 “27일은 날씨가 좋았다. 북한 어선은 대부분 연안에서 활동했으므로 북한 경비정의 월선은 우리 반응을 떠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며 다르게 설명했다.

    바로 다음날인 28일 북한 경비정은 6·29 교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북방한계선을 넘어왔다. 오전 9시24분쯤 북한 해군 서해함대 8전대 예하 기지인 등산곶에서 출항한 684호 경비정과 육도에서 출항한 388호 경비정은 연평도 서쪽 12해리와 6해리쯤에서 북방한계선을 침범했다가 해군 고속정이 출동하자 1시간여 만에 되돌아갔다.

    8전대는 북한 서해함대의 핵심 부대인데 경비정·어뢰정·유도탄정 등 작은 전투함정 70여 척을 보유하고 있다. 등산곶에서 나온 북한의 684호 경비정은 1999년 연평해전에 참여했다 반파(半破)된 함정이다. 이 경비정에 대해 언론은 ‘소(SO)-1’급으로 보도하다가 PCF로 보도하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PCF는 Patrol Craft Fast의 약어로 우리말로는 ‘고속초계정’으로 번역한다. 고속초계정은 24노트 이상 달릴 수 있는 작은 전투함을 말한다. 반면 24노트 이하로 달리는 작은 전투함은 ‘연안초계정’이라고 하고 영어 약호로는 PC(Coastal Patrol Craft)로 적는다. 육도에서 내려온 북한의 388호 경비정이 바로 PC에 해당한다. 한국 해군은 북한의 PCF와 PC를 통칭해서 ‘경비정’으로 부른다.

    한국 해군이 보유한 작은 전투함은 최고 38노트로 달릴 수 있기에 PKM (Patrol Boat Killer, Medium·중형고속정)으로 분류하고 우리 말로는 ‘고속정’으로 적는다. 이 고속정에 미사일을 탑재하면 PKMM이 된다. 한국 해군은 PKM에 ‘참수리(물가에 사는 독수리)’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따라서 고속정과 PKM·참수리는 같은 배를 뜻하는 것이다.

    전투함정은 다시 어느 조선소에서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졌느냐에 따라 여러 ‘급(級)’으로 나누어진다. PCF로 분류되는 등산곶 경비정은 소(SO)-1급으로 분류되는데, 소-1급은 1960년대 소련에서 제작한 것이다. 북한은 1960년대 소-1급 경비정 19척을 소련에서 도입한 바 있다. 한국 해군은 참수리 한 종류의 고속정을 보유하고 있으나, ‘제인연감’에 따르면 북한 해군은 무려 15 가지의 경비정을 보유하고 있다.

    북한 해군은 오사(8척)·후앙펜(4척)·소주(14척)·코마(9척)·소흥(6척)급 경비정에는 스틱스 함대함 미사일을 장착하고 있다. 반면 해남(6척)·대청(12척)·상해(12척)·소-1(19척)·차호(62척)·청진(48척)·신포(33척)·신흥(92척)·김진(63척)·영도(45척)급 경비정에는 미사일을 탑재하지 않는다.

    북한 해군은 모두 433척의 경비정을 보유하고 있으나, 한국 해군이 보유한 고속정은 ○○척이다. 그러나 질적인 면에서 고속정이 우세하다.

    한국 해군은 연평도에 3개 편대, 도합 여섯 척의 고속정을 배치해놓고 있다. 6월28일 북한이 두 군데에서 경비정을 내려보낸 것은, 6월29일 공격을 앞두고 아군의 고속정 세력을 분산시킬 수 있는지 연습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8일 북한 경비정 두 척의 침범이 있은 후 합참은 “북한 경비정은 조업중인 북한 어선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단순 월선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측의 특이 동향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완전히 오판한 것이다. 이러한 오판은 7월7일 국방부 발표에서 황대변인이 “28일 북한 어선은 연안에서만 활동했으므로 북한 경비정이 단속할 어선이 없었다. 6월28일의 월선은 6·29교전을 위한 사전 연습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힌 데서 분명히 확인된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6월중에 있었던 북한 선박의 월선에 대한 합참의 분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 언론의 보도는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로 전파된다. 따라서 북한은 합참이 오판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소식통은 “합참은 월드컵을 안전하게 치르기 위해 가급적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 했는데, 그것이 북한 해군으로 하여금 한국군이 방심하고 있다고 판단하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서해 5도와 한국군의 약점

    월드컵 3,4위전이 예정된 6월29일 북한 해군은 마침내 도발을 감행했다. 지난 1999년 연평해전에서의 승리를 자랑스러워했던 해군은 6·29교전에서 허둥대다 다섯 명의 젊은이를 잃고 말았다. ‘서해의 비극’을 분 단위로 추적해보기로 하자.

    연평도에는 고속정 3개 편대가 배치돼 있다. 3개 편대를 편의상 제1편대(253)·제2편대(232)·제3편대(256)로 적기로 한다. 제1편대 소속 고속정은 1-1(328호)과 1-2(369호) 고속정으로, 제2편대 소속 고속정은 2-1(358호)과 2-2(357호) 고속정으로, 제3편대 소속 고속정은 3-1(327)과 3-2(365) 고속정으로 적기로 한다(괄호 안의 숫자는 실제 편대번호와 실제 고속정의 함번이다).

    북한 해군은 등산곶을 비롯한 해안에 포와 미사일을 배치해놓고 있다. 북한의 해안포에 대응하는 것이 연평도에 포진한 해병대 연평여단의 포병이다. 해병대는 동급(同級)의 육군부대에 비해 화력과 기동력이 훨씬 강하다. 해병대 연평여단은 육군 군단 예하의 포병여단에서나 보유할 수 있는 사거리 40㎞의 국산 K-9 자주포(155mm)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연평여단의 화력은 연평도라는 좁은 공간에 밀집돼 있어, 유사시 북한군의 집중 포화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약점이다. 또 에서처럼 연평도와 소청도 사이 바다에는 화력부대를 배치할 섬이 없다는 것도, 한국군으로서는 큰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빈 바다를 채워주는 화력이 76㎜ 함포를 보유한 1200t급 초계함이다. 초계함 뒤에는 76㎜함포에 하푼(harpoon·작살) 함대함 미사일까지 탑재한 1800t급의 호위함이 버티고 있다. 그 후방에는 5인치(127㎜) 함포와 하푼 함대함 미사일 그리고 시스패로 함대공 미사일을 장착한 3000t급 구축함인 ‘을지문덕함’이 있다.

    초계함·호위함·구축함으로 이어지는 대형 함 세력은 육지(북한)를 봉쇄하는 ‘떠다니는 포대(砲臺)’다. 대형 함 세력이 없으면 한국은 서해 5도를 방어할 수가 없다. 이 대형 함들은 2함대나 해군작전사령부로부터 북방한계선 남쪽 바다에 경비구역을 할당받아 순회하며 지키고 있다.

    연평도는 어로한계선보다 북쪽에 있는 접적(接敵) 수역이기 때문에 일몰에서 일출 사이에는 모든 어선의 입출항이 금지된다. 어선의 야간이동 금지는, 야음을 틈탄 북한 간첩선이나 북한 전투함의 침투를 조기에 발견해 공격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다.

    6월29일 날이 밝자 연평도에 들어와 있던 56척의 어선들이 꽃게잡이를 하기 위해 서둘러 출항했다.

    연평도 어선은 연평도 주변에 그은 연평어장주변선(이하 ‘조업선’으로 표현) 안에서만 조업해야 한다. 옹진군청 소속의 어업지도선은 어선이 조업선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지도·통제한다. 조업선 밖으로 나가는 어선이 있으면 인천해경청 소속 해경정이 단속을 한다. 조업선 바깥은 해군 작전수역이므로, 해군 고속정은 선 밖으로 나온 어선이 있으면 방송이나 위협기동 등을 해 조업선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래도 들어가지 않으면 고속정은 어선을 붙잡아 선장으로부터 조업선을 넘어왔다는 ‘자인서’를 쓰게 한 후, 자인서를 인천해양경찰청에 넘겨준다.

    과거 이곳에서는 한국 어선이 고장으로 인해 북쪽으로 표류함으로써 남북 해군 함정이 출동하는 경우가 있었다. 때문에 해군은 북방한계선과 조업선 사이에 임의로 ‘통제선(일명 red line)’을 설정하고 이 선을 넘어가는 배가 있으면 무조건 잡아들이고 있다.

    조업선 안쪽 바다가 어선들로 붐비기 시작하자, 이들이 조업선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 해군은 오전 6시30분쯤 고속정 3개 편대를 모두 출동시켰다. 7시30분쯤 어선 20여 척이 조업선을 넘어 조업하기 시작했다.

    가장 멀리 나간 어선은 조업선으로부터 2해리 북쪽까지 올라갔으나 통제선은 넘지 않았다. 이 지점은 대략 북방한계선으로부터 5.5해리 남방에 해당한다. 통제선 밖으로 나가는 어선이 증가하자 고속정 편대는 방송을 하거나 위협기동을 하느라고 매우 분주해졌다.

    해군은 서해에 KNTDS(Korean Naval Tactical Data System·한국해군작전지휘통제시스템)라는 데이터링크시스템을 구축해놓았다. 이 시스템은 서해 각 섬에 설치된 레이더 전탐기지와 각 함정에서 운용하는 레이더가 포착한 정보를 종합해준다.

    때문에 작전부대 지휘관인 합참의장(이남신 대장)-해군작전사령관(문정일 중장)-해군 2함대사령관(정병칠 소장)-해군 2전단장(준장)-고속정 전대장(대령)은 동일 시간에 같은 상황을 지켜볼 수 있다. 서해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돌발 사태가 발생할 경우 특별한 명령이 없으면 2함대 사령관이 지휘권을 행사하는 것이 관례다.

    오전 9시37분. 북한 육도 기지에서 경비정 한 척이 20노트(시속 약 37㎞)의 속도로 남하하는 것이 탐지되었다. 이 경비정은 전날에도 북방한계선을 넘어왔던 경비정이다. 이 시각 육도 앞에서부터 북방한계선 북방 4해리 사이의 ‘북한측 바다’에서는 20여 척의 북한 어선들이 조업하고 있었다. 육도 경비정은 이 어선을 단속하기 위해 나오는 것으로 보였는데 2함대사령부는 고속정 제1편대에 대해 육도 경비정의 움직임에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9시46분. 이번에는 등산곶 기지에서 또 한 척의 경비정이 17노트(시속 약 31.5㎞) 속력으로 나오는 것이 탐지되었다. 이 경비정 역시 전날 북방한계선을 넘어왔었다. 등산곶 앞에서부터 북방한계선 북쪽 3해리 사이의 바다에는 북한 어선 10여 척이 조업하고 있었다.

    등산곶 경비정이 이 어선군을 통과해 계속 남하했는데, 2함대사령부는 제2편대에 등산곶 경비정에 대한 대응 임무를 맡겼다. 제3편대에 대해서는 유사시 1·2편대를 지원하기 위해 출동하는 예비대 임무를 주었다.

    9시51분. 남하하는 북한 경비정이 속도를 늦추지 않자 2함대사령부는 ‘수상하다’고 판단해, 해병대 연평여단에 대해 “어선의 조업을 중단시키고 연평도로 복귀 지시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3분 후인 9시54분 육도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었다.

    그 순간 KNTDS로 지켜보던 2함대사령부는 위기조치반을 소집하고, 연평도 서남쪽 어로한계선 부근에 있던 초계함 ‘제천함’과 ‘진해함’에 대해 유사시 고속정 편대를 지원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제천함은 자기 경비구역에서 5해리 정도 올라간 북쪽 바다에 대기하고, 진해함은 자기 경비구역 최북단에 위치하게 되었다.

    승조원 전원에게 완전군장을 시키고 전투 배치 조치를 취한 고속정 제1편대는 북방한계선 1.8해리 남방에서 약 7㎞ 거리를 둔 가운데 육도 경비정을 발견해 대응기동에 들어갔다. 대응기동은 “북방한계선을 넘었으니 돌아가라”는 경고방송 등을 하며 25 내지 30노트로 빠르게 위협 기동을 하는 것을 뜻한다.

    1999년 연평해전 이후 북방한계선을 월선하는 북한 함정은 항상 정조준을 하고 내려온다. 때문에 우리 고속정도 사격통제 장치를 해제하고 상대를 겨눈 상태에서 대응기동을 한다.

    10시1분에는 등산곶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3해리까지 침범했는데 제2편대는 등산곶 경비정과 12.2㎞쯤 거리를 두고 대응기동에 들어갔다. 10시14분 육도 경비정을 막아선 제1편대가 1000야드(914m) 거리를 두고 차단기동에 들어갔다. 차단기동이란 상대 함정이 진행하는 침로(針路)를 고속으로 가로지르며 위협하는 것을 말한다. 해군은 안전을 고려해 3000야드(약 2742m) 거리를 두고 차단기동할 것을 요구해왔으나, 연평해전 이후 북한 경비정은 3000야드 차단기동은 무시하고 있다. 때문에 고속정 편대는 2함대 사령관의 추인을 받아 1000 야드에서 차단기동을 하고 있다.

    제1편대가 차단기동에 들어가자 육도 경비정은 침로를 바꿔 북상하기 시작했다. 6·29교전 이후 교전 상황을 분석한 합참은 육도 경비정의 회항은 우리 해군의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한 기만 전술로 보았다. 1분 후인 10시15분 2함대사령부는 제2편대에 대해서도 차단기동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는 사이 등산곶 경비정은 꾸역꾸역 밀고 내려와 북방한계선 남쪽 3해리 바다에 이르렀다. 8분 후인 10시23분 제2편대는 1000야드 거리를 두고 차단기동에 들어갔다.

    국제정치학은 전쟁을 다루는 학문이다. 이 학문에서는 복잡한 국제정치 현상을 몇 가지 게임 형태로 단순화해 설명하는 게임이론 분야가 있다. 이러한 게임 이론 중의 하나가 ‘비겁자 게임(chicken game)’이다. 양쪽에서 최고 속도로 자동차를 몰고 정면으로 달려오다가 먼저 핸들을 돌리는 쪽이 지는(비겁자) 게임이다.

    비겁자가 되면 우세한 지위를 뺏기고 상대에게 굴복해야 한다. 비겁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다보면 죽을 가능성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은 ‘너 죽고 나 죽자’의 심정으로 ‘나는 돌진하고 상대는 핸들을 돌리는 것’인데, 이렇게 하다보면 ‘둘 다 죽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한국 고속정과 북한 경비정이 벌이는 것이 바로 비겁자 게임이다. 남과 북의 젊은이들은 자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러시안 룰렛’ 게임을 벌이는 셈이다.

    10시25분 서로 함포를 정조준한 상태에서 제2편대 편대장이 탄 2-1 고속정이 등산곶 경비정 1000야드 전방을 횡(橫)으로 가로질렀다. 이때 2-1 고속정장 최영순 대위는 등산곶 경비정의 모든 포신이 2-1 고속정이 아니라 뒤따라오며 차단기동을 준비하는 2-2 고속정을 향해 있는 것을 목격했다.

    2-1 고속정이 돌진하자 300야드 뒤쯤에서 2-2 고속정도 차단기동에 들어갔다. 이때 등산곶 경비정은 계속 남하하고 있었으므로, 등산곶 경비정과 2-2 고속정간의 거리는 800야드로 줄어들었다. 등산곶 경비정은 이를 노리고 있었다. 2-2 고속정이 길다란 옆구리를 보이며 지나가는 순간 등산곶 경비정의 함수부에 있던 85㎜ 함포가 불을 뿜은 것이다.

    85㎜ 함포는 6·25 전쟁 때 쓰던 T-34 전차의 포신을 떼어내 개조한 것인데, 이 함포의 초탄이 2-2 고속정 함교에 명중했다. 포탄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상대가 두꺼운 장갑(裝甲)판 뒤에 있을 때는 관통탄을 사용한다. 관통탄은 장갑을 찢을 수 있도록 단단하고 무겁게 만들어진다.

    강한 운동에너지로 상대의 장갑을 뚫는 것이 목적이라 상대적으로 화약(고폭약)은 적다. 배가 잔잔한 물에 떠있을 때 선체와 수면이 접하는 분계선을 흘수선(吃水線)이라고 하는데, 관통탄을 흘수선 이하로 사격하면 배에 구멍이 뚫려 침몰하게 된다.

    전차는 장갑이 매우 두껍다. 때문에 전차포는 상대 전차의 장갑을 뚫을 수 있도록 강력한 관통탄을 사용한다. 등산곶 경비정에 탑재된 85㎜포도 이러한 관통탄을 사용했을 것이다.

    무거운 관통탄을 쏘는 포를 탑재한 함정은 그만큼 둔중하다. 반대로 인마살상용탄을 주로 쓰는 함정은 속도가 빠른 게 장점이다.

    관통탄을 탑재할 것이냐 인마살상용탄으로 무장하느냐는 작전 목적에 따라 결정된다. 한국 고속정은 초고속으로 달리며 교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함정이라, ‘가벼운 포에 인마살상용탄’을 더한 조합을 주로 택하고 있다. 고속정은 간첩선을 추적하는 데 탁월하다.

    해전에서는 ‘맷집’이 아주 중요하다. 내가 쏜 포탄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었는지에 대해서 살필 여유가 없다. 그러나 상대가 쏜 포탄이 준 피해는 절실하게 느껴진다.

    내게 닥쳐온 피해를 감내하며 강력한 화력을 쏘아붙이고 기동력을 발휘해 회피해 보는 것외에는 다른 방어수단이 없는 것이 함포전이다. 따라서 내가 당한 피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포탄을 날리는 ‘맷집’이 중요하다. 맷집으로 싸우는 결투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등산곶 경비정의 함포가 ‘번쩍’하는 바람에 2-2 고속정의 함포에서도 불꽃이 튀었다. “콰-쾅”하는 연속 폭음과 함께 둘은 순식간에 난타전에 돌입했다.

    등산곶 경비정의 함포사격을 받은 2-2 고속정은 조타실(함교)이 파괴되었다. 조타실이 파괴되면 배는 방향을 바꾸는 기능을 상실하므로 타력(惰力)에 의해 가던 방향으로만 계속 전진하게 된다. 고속정에는 두 개의 기관이 있는데, 적의 사격으로 한 개 기관도 파손됐다. 고속정은 두 개 기관이 가동해야만 반듯하게 앞으로 가는데 한쪽 기관이 파손됐으니 고속정은 크게 원을 그리며 전진하게 된다.

    조타실이 파괴되는 순간 정장 윤영하(尹永夏) 대위가 전사했고, 함교와 함미에서 20㎜ 벌컨포를 쏘던 조천형(趙天衡·26)중사와 황도현(黃道顯·22) 하사도 사망했다. 엄폐물도 없는 갑판에 M-60을 걸어놓고 방아쇠를 당기던 서후원(徐厚源·22) 중사도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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