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이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일은 없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인식하는 색, 우리가 모종의 의미를 부여하는 색으로서만 존재한다. 색의 그런 성격을 잘 보여주는 책이 ‘블루, 색의 역사: 성모 마리아에서 리바이스까지’(한길아트)다. 고대 서양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역사 속에서 파란색이 지녀온 의미의 변천사를 풍부한 그림 자료를 곁들여 설명했다.
고대 로마제국에서 파란색은 천대받았다. 파란 눈을 가진 여자는 정숙하지 못한 사람, 남자는 무식하고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졌다. 심지어 무지개에도 파란색이 안 들어있다고 우길 정도였다. 라틴어나 희랍어엔 아예 청색을 나타내는 단어조차 없었으며, ‘블루’라는 말은 독일어에 연원을 두고 중세 이후에야 등장했다. 그런 파란색이 득세하게 된 것은 중세에 아들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를 묘사하면서 비탄과 애도를 의미하는 색으로 널리 사용되면서부터다.
파란색은 18세기 낭만주의시대에 들어와 결정적으로 ‘승리’했다. 프랑스혁명 즈음엔 진보, 자유, 꿈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고,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이 입은 청색 연미복은 최첨단 패션으로 인기를 끌었다. 20세기 들어 블루진이 자유와 개방의 이미지로 등장하면서 1950년대 이후 파란색은 적어도 서구에서 가장 환영받는 색이 됐다.
색이 지닌 문화사적 의미들
색의 역사를 주제로 다룬 책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지식과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색채사를 새로 쓰겠다는 의욕을 과시한 ‘색채, 그 화려한 역사’(까치)가 그것이다. 의욕이 의욕이니만큼 읽기 또한 결코 쉽지 않은 이 책에서 저자 만리오 브루사틴은 뉴턴과 괴테, 즉 과학과 예술을 축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색채를 기본적으로 빛의 전달작용이라고 볼 때, 뉴턴으로 대표되는 물리학은 빛의 분할을 통해 색채지각작용을 분석하려 했다. 다른 한편 괴테는 색채를 지각하는 주체의 주관성을 인정함으로써 예술가들의 몫을 폭넓게 확보하려 했다. 저자는 빛의 과학, 색의 예술, 색을 만드는 기술 등의 변천사를 종횡으로 넘나든다.
이 책이 아니면 알기 힘든 사실 몇 가지. 고대 희랍에선 주황색 염료를 착색하려 사춘기 이전 어린이의 소변을 사용했고, ‘향긋한 포도주를 마신 술 취한 사람의 오줌’을 쓰기도 했다. 인간이 화학적 방법으로 원하는 모든 색채를 만들어내는 일은 20세기 초에 와서야 가능했다.
색의 문화이론에 해당하는 책으론 ‘색깔 이야기: 공포증과 탐닉증, 그 편견에 대하여’(아침이슬)가 있다. 원제가 ‘색깔공포증’인 이 책에서 저자 데이비드 바츨러는 서구인들이 오랫동안 색의 가치와 의미를 폄훼하고, 이를 낯선 타자(他者)로 여겨왔다고 지적한다. ‘색깔 있는 것’을 원시적·유아적·여성적·감정적인 것으로 여겼으며, 나아가 천박하고 부차적이며 장식적인 것으로까지 여겼다는 것이다.
색에 대한 서구인들의 이런 관념은 색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 과도하게 억압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졌다. 저자가 말하는 ‘색에 대한 공포’란 색을 타자로 정립시켜놓고 문화 속에서 색을 억압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뜻한다. 다음은 저자의 말이다.
‘서구에서는 고대 이래로 색이 체계적으로 옆으로 밀려나 비방을 받고, 그 가치와 지위가 격하돼 왔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몇 세대에 걸쳐 철학자들, 예술가들, 미술사가들, 문화이론가들이 색에 대한 편견을 살아있는 것, 선정적인 것으로 부추기고 내세워왔다.
그런데 색에 대한 그 모든 편견들, 선언 형식들, 혐오는 어떤 공포를 숨기고 있다. 그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거나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 같은 어떤 것이 가져다주는 오염과 타락에 대한 공포다. 이런 식으로 색이 불러올지도 모르는 타락으로 인해 색을 혐오하고 공포스러워하는 현상은 이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바로 색깔공포증(Chromophobia)이다.’
지금까지 거론한 책들이 역사와 예술, 문화이론 등 인문지식의 측면에서 색을 말하는 데 비해 실용성의 관점에서 색을 말하는 책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컬러 비즈니스’(오늘의 책)가 있다. 소비자들의 상품에 대한 첫인상의 60% 정도가 상품 색상에 좌우된다고 보는 저자는 다음과 같은 색깔 마케팅 사례들을 제시한다.
품질이 같은 상품을 색만 다르게 해서 가격 차이를 둔다면 소비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놀랍게도 소비자들은 가격 차이를 수긍한다. 애플사는 블루베리, 라임, 포도, 오렌지, 딸기 등 5가지 새로운 색상의 아이맥(iMac) 제품을 내놓아 젊은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컴퓨터 색깔에 대한 통념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블루베리색 컴퓨터는 포도색 컴퓨터에 비해 50달러, 딸기색 컴퓨터보다는 100달러나 비쌌다고 한다. 자동차의 경우 빛의 각도에 따라 보라에서 진한 청록으로 변하는 무지개색 무스탕이 표시가격보다 5000달러나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 그밖에도 여러가지 색의 알 초콜릿이 한 봉지에 든 초콜릿 상품은, 초콜릿 본래 색만으로 봉지를 채웠을 때보다 매출액이 3배 이상 증가했다.
리더십 유형을 무지개의 일곱 색깔에 견주어 설명한 ‘컬러 리더십’(더난출판사)도 특기할 만하다. 저자 신완선 교수(성균관대 시스템경영공학부)에 따르면 빨강은 따뜻한 가슴의 봉사자, 주황은 튀는 아이디어의 브랜드, 노랑은 동고동락하는 사이드, 초록은 성실한 추진력의 파워, 파랑은 풍부한 지식의 슈퍼, 남색은 강한 카리스마의 비전, 보라는 장기적 경쟁력을 지닌 변혁적 리더십을 상징한다. 저자가 이렇게 리더십을 분류한 까닭은, ‘나’와 잘 어울리면서 가장 효과적인 자신만의 리더십 패턴을 찾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의 리더십 색깔은 어떨까? 박정희 전 대통령은 남색 비전리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초록색 파워리더, 노태우 전 대통령은 노란색 사이드리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주황색 브랜드리더, 김대중 대통령은 파란색 슈퍼리더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대표팀을 이끈 히딩크 감독은? 변혁적 리더인 보라색에 해당한다. 변혁적 리더는 구성원들에게 비전을 제시한 뒤 그들과 함께 혁신하고 매진할 것을 호소한다. 히딩크는 16강 진출을 비전으로 제시하고 기초체력을 다질 것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인문지식과 실용적 주제로서의 색 이외에, 심리학적 주제로서의 색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컬러테라피, 즉 색채의 심리적 치료효과에 주안점을 둔 ‘색채심리’(예경)에 따르면 노란색과 검은색의 옷을 입은 여인, 그러니까 극단적인 색상 배치를 보여주는 여인은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큰 고민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또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색채는 사실상 무한정에 가깝고, 아직 색깔 개념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어른에 비해 색으로 자신의 감정과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데 매우 솔직하다고 한다.
색과 친해지기
이와 관련해, 최근 가장 많이 판매된 책 ‘색의 유혹: 재미있는 열세 가지 색깔 이야기’(전2권, 예담)는 독일 전역에서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색에 대한 설문조사에 바탕을 뒀다. 색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을 조사한 것이다. 작가이자 색채심리 연구가인 저자 에바 헬러는 다양한 색을 심리, 언어, 상징 등의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색에 얽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책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명화 ‘모나리자’의 주인공이 피렌체 출신 은행가의 두번째 부인이란 설과 그렇지 않다는 설이 있는데, 저자에 따르면 그녀가 귀족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당시 귀족은 녹색 옷을 입지 않았다. 반면 나폴레옹은 녹색을 가장 좋아했다. 그가 유배 생활을 한 세인트헬레나섬의 집안 가구나 카펫 등이 모두 녹색으로 꾸며졌다. 당시 녹색 물감은 구리 조각을 비소에 용해해 만들었는데, 유배지의 습한 기후로 인해 물감 속 비소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스로 변해 뿜어져 나왔다. 결국 나폴레옹은 만성 비소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노란색은 중세의 불행을 상징했다. 창녀는 노란 머릿수건이나 노란 망토, 노란 구두끈을 사용해야 했고, 유대인도 노란 고리를 옷에 매달고 다녀야 했다.
색이란 주제는 우리와 무척 가깝고 일상적인 만큼 등한시하기 쉽다. 가깝지만 멀어지기도 쉬운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최근 출간되고 있는 색 관련도서들의 의미는 각별하다. 색이란 하나의 주제를 교양과 지식, 실용정보, 심리분석 등 다양한 성격의 책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은 요즘의 독서인이 아니면 누리기 힘든 행복이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우리 문화와 역사를 배경으로 색깔 이야기를 솜씨 있게 풀어낸 책을 찾기 힘들다는 점. ‘우리 색의 역사: 청자빛에서 붉은 악마까지.’ 이런 책 한 권쯤 누군가 집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