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이 일상과 다른 점은 의식이 열려있다는 점이다. 일상 속 섹스와 죽음은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퍼포먼스와 순환현상의 단면이다. 반면 예술에 나타난 그것은 깨어있는 의식이 톡톡 튀는 표출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무슨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성전환수술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섹스어필하기 위한 패션, 깡마르고 아름답기를 원하는 현상과 페미니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제반 이슈는 예술에서는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가.
죽음이란 생명체에 가해지는 영원한 종지부를 말하는 것인가. 종교적 차원의 영혼 구제나 영혼 불멸의 논의를 벗어나 생명권 안에서의 죽음의 해석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가. 몸의 부패가 죽음을 재확인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면, 방부제로 처리한 뒤 전시한 시체에서 죽음을 더 리얼하게 느낄 것인가, 아닌가. 예술에선 죽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이 글은 이런 이슈들에 대한 한 예술가의 지적 고찰이다. 동시에 인간의 행위로 나타난 현상과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숨은 연출자인 의식에 관한 얘기다. 예술에 나타난 섹스와 죽음을 살펴봄으로써 예술가들이 지닌 열린 의식이 사회 통념을 어떻게 뒤집고 있는지를 볼 것이다. 열린 의식은 살아있는 의식이며 진화의 의식이다. 모든 생명체는 진화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으며 생명체의 진화는 그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의식의 진화가 선행돼야 가능하다.
섹스는 가장 위대한 퍼포먼스(performance·행위예술)다. 섹스는 순환이다. 한 생명체와 또 다른 생명체와의 토털 커뮤니케이션(total communication)이다.
섹스는 토털 커뮤니케이션
토털 커뮤니케이션이란 몸짓과 소리를 포함한 격렬하면서도 섬세한 감정의 교류가 액션과 리액션(action and reaction)의 지속적인 순환을 통해 이루어지는 총체적 대화를 말한다. 섹스는 생명체 중에서 인간이라는 종(種)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퍼포먼스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이나 곤충에겐 번식의 본능에 충실한 교미가 있을 뿐 토털 커뮤니케이션의 개념은 개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물이나 곤충에겐 섹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도 토털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지 않는 섹스는 엄밀히 말해 섹스가 아니다. 성폭행을 섹스라 부를 수 없는 이유는 서로 토털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일방통행의 강압이기 때문이다.
원조교제도 서로 다른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에 토털 커뮤니케이션이 완벽할 수 없고 따라서 섹스라 부를 수 없다. 결혼한 부부도 예외일 수 없다. 냉랭한 감정을 지닌 채 몸만 받아 주는 행위라면 그것은 섹스라 부를 수 없다. 섹스는 인간만이 누리는 현란한 퍼포먼스이며 그것은 이미 예술행위이기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동성애와 이성애는 성적 성향의 차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향이지 선택이 아니다. 다시 말해 동성애자는 바캉스를 갈 때 해변가를 택할 것인가 산을 택할 것인가 하는 취사선택의 여지를 부여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동성애자들은 필연적으로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하게 돼있는 성향을 타고났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과학이 자기 성향에 더 잘 맞아 과학자가 되었다고 문학하는 사람이 과학자를 나무랄 수 없듯이, 이성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동성만을 사랑하는 사람을 힐난한다면 모순이다. 그것은 성향의 문제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에 대한 끌림은 인간의 의지와 판단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동성을 사랑하는 성향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적당한 환경이 마련되면 터져나오듯 지극히 자연스런 인간의 한 속성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미술 유학생 시절 생활비를 벌기 위해 미국집 머슴살이를 한 적이 있었다. 신문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간 집이 하필이면 게이 아저씨 두 사람이 사는 집이었다. 강한 호기심도 작용했지만 막상 다른 마땅한 곳을 찾을 수도 없어서 인터뷰할 때 “게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나한테만 하지 않는다면 상관없는 일”이라고 해버리고 그 집에서 살게 되었다.
꼬박 석 달 열흘을 두 게이 아저씨들과 같이 살면서 게이들의 생활과 그들의 사랑, 비애를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두 게이 아저씨들을 인연을 맺고 있는 여러 게이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알게 된 게이들은 무척이나 따뜻하고 인간적이었다. 지극히 보통 사람들이었다. 단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남자면서도 한결같이 남자를 애인으로 두었다는 점이다. 애인을 위해 쏟는 정성은 애절할 정도였다. 그들도 질투하고 다투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게이가 아닌 나보다 더 순수했다. 뉴욕의 예술계와 패션계를 휘어잡는 일류들이 거의 다 게이일 정도로 게이들 중엔 탁월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 많다. “매력 있고 쓸 만한 남자들은 다 게이니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뉴욕의 노처녀 친구인 아네트는 농담조로 한탄한다.
당신은 과연 이성만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이 글을 읽는 거의 모든 사람은 “물론이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것이다. 어떻게 동성을 사랑해? 그 짓은 구역질 나는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게이와 스트레이트(straight·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와는 종이 한 장 차이도 나지 않는다. 물론 허튼소리라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관습과 미풍양속이라는 늪 속에서 오랫동안 절어서 고정관념에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못 보고 있다. 우리 각자는 동성애의 성향을 다 지니고 있다. 단지 그 성향이 어느 정도 많은가 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뉴욕 미술계의 악동이란 별명을 지닌 사진작가 앙드레 세라노(Andres Serrano)는 그의 전시 ‘성의 역사(History of Sex)’에서 동성애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도판 1). 이 사진은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이제는 한국에서도 흔히 벌어지고 있는 게이들의 사랑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세라노의 또 다른 작품(도판 2)은 페니스에 오럴섹스를 하는 주체가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었을 뿐 상황 설정은 동일하다. 이 두 작품은 섹스의 사회적 관습과 그 관습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으려는 작가의 선구자적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두 작품 다 오럴섹스를 당하는, 즉 서비스를 받는 주체가 흑인이란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반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주체는 백인 남녀다.
서구사회에서 핍박받는 흑인의 위치를 이 두 작품에서는 우월 위치 내지는 향유 위치로 전환하고 있으며 두 흑인의 시선에서 그 전환은 극치를 이룬다. 오럴섹스를 해주는 백인 남자를 내려다보는 흑인의 약간 화가 난 듯한, 지배자로서의 거만한 시선. 백인 여자가 베푸는 오럴섹스에 무관심한 듯 먼 수평선을 쳐다보는 흑인 남자의 아랑곳하지 않은 도도한 시선. 세라노의 이 두 작품에서 또 한 가지 특이한 시각은 이러한 오럴섹스의 상황이 은밀한 내부공간에서 벌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푸른 하늘과 수평선의 대자연을 작품배경으로 설정해 오럴섹스에 신성함마저 불어넣고 있다. 즉, 늘 발생할 수 있는 친숙한 환경을 걷어치우고 동성애와 오럴섹스를 떳떳한 대자연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일상적 사고의 뒤통수를 친다.
동성애를 예술의 주제로 다루는 작가를 언급하자면 반드시 떠오르는 작가가 있다. 미국의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옵(Robert Mapplethorpe, 1956∼89). 그 자신 역시 게이로서 동성애를 다룬 걸출한 작품을 남겼다.
일상적 사고에 뒤통수
여기서 잠시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천재화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7∼1610)의 ‘토마스의 불신(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1∼02)’(도판 3)이라는 작품을 살펴보면서 메이플소옵에게 접근하고자 한다. 성서에 따르면 예수가 부활한 후 12사도들 앞에 나타났을 때, 성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나타난 성 토마스는 “내가 직접 내 손으로 예수의 상처 난 옆구리를 찔러보기 전에는 그가 부활했다는 소리를 믿을 수 없노라”고 천명했다.
일주일 후에 예수는 성 토마스에게 자기의 상처 부위를 손으로 만져보라고 하면서 장엄한 메시지를 전했다. “나의 부활을 목격은 못했지만 그 사실을 믿는 모든 이에게 신의 은총을!” 상처가 그대로 드러난 예수의 오른쪽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후벼파듯 확인하는 성 토마스의 제스처를 표현한 이 작품을 보는 관람자는 오른쪽 옆구리를 스치는 아픔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아픔까지는 아닐지라도 예수의 몸에 난 상처의 쓰라림이 관람자에게 매우 강렬하게 전달되고 있다.
이 강렬한 아픔은 3세기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메이플소옵에게 와 닿았다(카라바조와 메이플소옵의 비교는 난해하기로 정평이 난 미술평론가 데이비드 히키(David Hickey)의 관점이다). 메이플소옵은 카라바조가 표현한 아픔의 경험을 남성의 페니스로 옮겨 호모섹슈얼리티의 아픔으로 재해석했다(도판 4). 소변과 정액이 분출되는 페니스의 요도 속으로 새끼손가락을 쑤셔넣고 있다. 요도 내부의 세포조직의 섬세함과 새끼손가락의 직경을 감안할 때 행위자의 아픔은 직접적이다.
이 작품을 보는 관람자는 간접적으로 그 아픔을 전달받지만 리얼리티의 충격은 결코 만만치 않다. 메이플소옵은 자신의 충혈된 페니스를 움켜잡고 있는 흑인 남자 손의 제스처에서 동성애란 자연스런 개인의 성향이므로 사회의 온갖 질시 속에서도 놓아버릴 수 없는 본성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사회 속에서 아픈 경험을 겪어야 하는 게이의 현실에 대한 예술적 고발이기도 하다. 300여 년 전 제작된 카라바조의 명화에서 얻은 영감을 살아있는 21세기 현실의 이슈로 탈바꿈시킨 메이플소옵의 시각은 고정되지 않은 예술가의 깨어있는 의식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몸에 대한 아픈 경험이 앙드레 세라노의 사진작품(도판 5)에서는 페미니즘과 연결된다. 예술세계에서 여성만이 지닌 내밀한 경험(female intimacies)을 여성의 시각으로 표현할 때 페미니즘의 정신을 고수할 수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예술적 접근은, 직접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여성 자신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고 승화되어야 한다.
여성만이 겪는 체험은 큰 범주로만 묶어도 상당한 수에 이른다. 초경과 월경, 첫 섹스 경험, 임신과 그 과정, 그리고 출산, 사산의 경험, 여성 생식기의 내밀한 구조에 대한 배려, 성적 오르가슴의 이해, 여성다움의 직·간접 강요, 사회적 성차별, 여성에 가해지는 성폭행, 불임의 문제, 자식에 관련되는 에너지, 남성의 지속적인 성적 공격에 대비한 삶, 유방의 문제, 남편 가족과의 관계, 남편으로부터의 폭행, 여성의 고등교육과 비효용성, 비만과 체격의 문제, 허영과 패션의 문제.
여성 체험의 직·간접 표현으로 접근하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라노의 작품은 과격한 페미니즘이다. 여성의 손뿐만 아니라 팔뚝까지도 남성의 항문 속으로 깊이 삽입시켜 무거운 아픔을 경험케 하고 있다. 어쩌면 작가가 여성이 아닌 남성의 입장에서 본 공격적인 페미니즘으로도 보인다.
세라노의 다른 작품(도판 6)에서는 공격적 페미니즘이 절정에 이른다. 바닥에 누운 남자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 남자의 벌린 입에 여성은 서서 방뇨를 한다. 이에 비하면 미국 사진작가인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54∼ )의 접근은 여성만이 펼칠 수 있는 페미니즘의 내밀성에 충실하고 있다. 셔먼이 집요하게 추구해온 ‘여성’은 나약한 여성상이 아닌 오브제로서의 여성상이다. 오브제로서의 여성은 섹스가 주제일 경우 섹스의 대상이 아니라 섹스에 가담하는 남성과 동등한 주체자로 등장하고 있다.
패션이 주제일 경우 여성이 허영의 대상이 아닌 자기표현의 적극적 연출가로서 당당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자기 작품의 모델로 사용하고 있으며(도판 7, 무제 1994) 그녀 작품에 나타난 그녀 자신은 외부적 변신(화장과 분장 도구에 의한)의 다양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고수하고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여성 본질의 내밀성을 잃지 않고 있다.
영국의 작가 제니 새블(Jenny Saville, 1970∼ )은 패션현상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져 새로운 각도로 페미니즘을 보고 있다. 새블은 깡마르고 싶어하는 현대 여성들의 일반적인 패션 염원을 거대한 불도저로 밀어붙이고 있다. 500호 가까이 되는 화폭을 그녀는 지방질이 불거져 나오는 비만의 여성으로 메우고 있다(도판 8, 9, 10, 11). 실물 크기의 네댓 배나 되는 거구의 나체 여인상이 거친 붓 터치로 전면에 나타나고 있으며 때론 여러 명의 나체가 생선 통조림처럼 빼곡히 들어차 있다.
새블에게 페미니즘은 깡마르고 각진 모습에서 오는 불모성(不毛性)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풍만하고 마음껏 늘어난 육체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비옥성에 대한 당당함으로 나타난다. 새블은 “왜 마르고 각이 진 몸매만을 여성들이 추구해야 하는가?”라고 묻지는 않는다. 그녀의 그림에 나타난 비대한 체구의 여체들은 거의 다 자화상이다. 다이어트를 해도 더는 날씬해질 수 없는 몸매를 숨김없이 드러내,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페미니즘을 부르짖는다.
제니 새블과 앙드레 세라노의 성전환에 관한 작품도 이색적이다. 새블의 유화에서는 한 남성이 페니스까지 거세한 자리에 여성의 버자이너를 만들어넣고 가슴도 여성화시켰다(도판 12). 세라노의 사진작품에서도 남성이 여성화를 시도하고 있다(도판 13). 유방의 외형적 구조에서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 아래 남성 페니스의 온전한 노출은 관람자를 잠시 혼돈스럽게 만든다. 남녀의 성전환에서 여성이 남성으로 변하는 경우는 드물다. 외과적 수술의 한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사실상 여성의 남성화보다는 그 반대인 남성의 여성화가 일반적인 추세로 나타나고 있다.
남성이 지닌 섹스에 대한 게걸스러움을 신랄히 비꼬고 있는 미국의 퍼포먼스 작가 폴 맥아티의 설치작품(도판 14)에서 우리는 성의 또 다른 속성을 본다. 성적인 배설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인가. 패스트푸드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도판 15)하고 있는 맥아티는 현대 문화현상 중 섹스와 패스트푸드에 관한 일련의 풍자적인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도판 16).
지금까지 예술에 나타난 섹스와 관련된 사회 현상을 몇몇 주요 작가의 작품을 실례로 들어 살펴보았다. 이제 예술에 나타난 죽음의 문제를 논하기 전에 죽음의 물리학적 지도를 잠시 훑어보자. 그에 앞서 물리적 죽음에 접근하기 위해 두 가지 전제를 설정해보았다.
죽음이란 몸의 파장화
물질은 파장이다. 죽음이란 몸의 파장화를 의미하며 우주적 차원에서 볼 때 재생산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단계이자 또 다른 시작이다.
현대 양자물리학에서의 접근은 흥미롭다. 물질을 쪼개고 분석하는 일에 능숙한 과학자들은 물질의 최소 입자인 분자를 쪼개어 원자를 밝혀내고 다시 원자핵의 극소단위를 찾아내었으며, 이어 가장 강력한 현미경으로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한계까지 무수히 쪼개고 분석해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은 쪼갤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무언가 보이고 잡히는 것이 있어야 더 쪼갤 수 있을 터인데 이젠 더 쪼갤 그 무엇이 없는 극치의 단계까지 들어섰다. 그 최종 단계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다, 즉 무(無)의 상태다. 물질을 분석해 들어가 더 이상 쪼갤 것이 없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도달하니 그곳엔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에너지의 파장’만이 감지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여기서 재미있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물질을 분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과학(기독교 사상과 함께 발전된 서구의 과학)은 이제 물질의 제일 마지막 구성단위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감지되는 파장의 에너지’임을 천명했는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뒤집기를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물질=(無)의 파장(에너지)’이라는 공식을 끌어냈음에도 ‘물질은 곧 무의 파장이다’는 개념의 확대를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물질=무의 파장’이라는 등식은 뒤집어보면 ‘무의 파장=물질’이라는 등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과학자들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다.
둘째, 동양철학에서는(인도철학이나 불교사상을 토대로 볼 때) 수천년 전 이미 모든 물질의 본질은 무, 무는 모든 물질의 근본임을 대 화두로 삼고 있다. 불교사상에서 ‘색(色)이 공(空)이고 공이 색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는 핵어(核語)는 첨단의 물리학을 송두리째 집어삼켜 버리고도 남는 여여(如如)한 풍요로움을 드러내고 있다.
동양에서 말하는 무는 아무것도 없는, 물질 부재의 텅 빈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의 총괄 상태의 텅 빔을 가리킨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상태지만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에너지가 충만해 있는 거대한 블랙홀의 무를 뜻한다.
그러면 어떻게 수천년 전 동양에서는 이러한 사유를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수천년 전에 가만히 앉아서 오늘날의 첨단을 뛰어넘는 대 지혜를 열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마음의 눈으로 현상을 볼 수 있는 깨인 의식에서 비롯됐다.
죽음이란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몸의 해체를 대전제로 삼고 있다. 몸은 물질이다. 물질의 해체, 즉 쪼개어짐은 궁극적으로 물질을 이루는 근본단위인 무의 파장에까지 다다른다. 죽음을 몸의 해체로 보는 시각에서는 죽음 그 자체를 물질의 파장화로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물질=무의 파장, 무의 파장=물질’의 등식을 상기할 때 파장은 다시 물질을 만드는 근본 에너지로 직화(直化)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생명체가 지닌 몸의 파장화로 볼 수 있으며 파장의 에너지는 언젠가는 다시 물질(몸)로 바뀔 수 있는 순환의 고리체계 속에 존재한다. 순환의 고리체계는 지속적인 흐름을 토대로 움직이며 죽음이란 몸의 해체와 재결합하는 순환체계의 한 현상이다. 물을 보라.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은 따뜻한 온기를 받아 증발하고 그 수증기가 모여 구름을 만든다. 구름이 뭉쳐 무거워지면 비가 되어 내려 웅덩이의 물을 만든다. 웅덩이의 물은 다시 증발한다. 이렇듯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순환의 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으며 이 사실을 존중한다면 생명체의 죽음, 즉 몸의 해체도 같은 맥락 속에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죽으면 반드시 새로 탄생한다.
나 자신의 죽음을 가장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로 인한 시각의 편협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죽으면 반드시 새로 태어난다’는 말에는 무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죽고 그런 후 ‘내’가 다시 태어난다는 ‘나’ 위주의 시각에서 벗어나 지구 전체 생명체의 흐름을 보라. 이 순간에도 무수한 생명이 죽어가고 무수한 생명이 태어나고 있다. ‘내’가 죽어도 ‘다른 생명’이 어디선가는 태어나니 우주 전체 차원에서 본다면 죽음이란 순환 속의 마지막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앙드레 세라노와 영국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 1965∼ )는 죽음이라는 같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표현하는 매체가 다른 까닭에 상이한 연상을 유도하고 있다(도판 17, 18) 세라노의 사진작품 가운데 잘라낸 소의 머리는 시간의 멎음을 포착해 죽음이 순간으로 정착되고 있다. 반면 어린 송아지의 머리에서 꼬리 쪽을 향해 몸의 한가운데를 절단해 포르말린 액체가 담긴 투명한 유리 박스 속에 넣어둔 작품에서는 부패되지 않는 죽음을 현재성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허스트는 1996년 뉴욕에서 가진 스튜아트 모건(Stuart Morgan)과의 인터뷰에서 “몸의 완전한 부패가 곧 죽음(The absolute corruption of life which is death)”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즉 몸의 부패가 죽음을 확인하는 가시적 증명법임을 역설하면서도 허스트는 이를 역이용하고 있다. 죽은 몸은 반드시 부패해야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그 현상을 붙잡아두고 죽음을 재인식시키고 있다. 허스트는 동물의 몸을 절단해 방부제에 담가 관람자들이 절단된 부위까지도 볼 수 있게끔 투명 유리관 속에 전시하는 방법으로 설치미술을 하고 있다(도판 19, 작업실에서 황소를 방부제 처리하는 모습).
몸의 부패 포착 죽음 재인식
인간의 죽음에 대한 세라노의 시각은 부검이라는 몸의 일시적 해부 상태를 다시 봉합한 모습만 보여줌으로써 부검 과정을 더 생생하게 포착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도판 20). 제니 새블은 위의 두 작가와는 달리 생사의 기로에 있는 생명에 초점을 잡는다(도판 21). 그녀의 매체가 회화이기에 그렇겠지만 새블은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의 응급실 환자를 모델로 삼는다. 물감을 묻힌 붓의 터치가 캔버스 위를 스칠 때마다 모델의 생사가 엇갈리듯 그녀가 던지는 잔잔한 충격은 세라노나 허스트의 강한 쇼크보다 더 오랫동안 여운이 남을 수 있다.
예술이 일상의 평범과 다른 점은 예술에는 의식이 열려있다는 점이다. 일상 속의 의식이 고정돼 있어 평범하다면 예술에 내재된 의식은 척후병의 깨어있는 의식이다. 깨어있는 의식은, 진화를 모색하는 감각돌기의 세포가 24시간 살아 꿈틀거린다.
예술에 나타난 섹스와 죽음이라는 주제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연출하는 섹스와 죽음과 다르지 않다. 일상 속의 섹스와 죽음은 생명체의 자연스런 퍼포먼스와 순환현상의 한 단면인 반면에 예술에 나타난 그것은 깨어 있는 의식의 톡톡 튀는 표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