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가 실패해도 아들은 성공한다
- 네거티브 공격? 그건 유치한 정치
- 이인제 의원과는 나눌 이야기 많다
- 노풍이 왜 꺼졌나? 그걸 왜 내게 묻죠?
- 초원복집 사건은 오히려 표창 받을 일
- 하프타임 때 감독에게 얻어맞은 홍명보
정의원이 10년 동안 공들여온 2002한일월드컵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한국축구는 당초 목표였던 1승과 16강을 넘어 4강신화를 달성했고, 우려했던 테러사태도 없었다. ‘한국이 일본을 6대0으로 눌렀다’는 외신보도에서 알 수 있듯이, 공동개최국 일본과의 간접대결에서도 절대 우위를 보였다. 정의원 자신도 월드컵 특수를 타고 유력한 대선주자로 부상했다.
월드컵은 끝났지만, 그는 여전히 바쁜 사람이다. 인터뷰 예정시간은 7월13일 오후 2시였다. 그러나 기자는 정의원의 빡빡한 스케줄 표를 보고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정의원은 정오를 넘겨가며 오전 일정을 끝내고 2시가 넘어서야 점심을 먹었다. 이 때문에 ‘신동아’ 인터뷰는 3시30분으로 늦춰졌다. 정의원의 측근들은 몹시 미안한 표정이었다. 기자는 그들과의 짤막한 대화에서 정의원의 정치적 고민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후보들처럼 특별히 준비하는 게 없어요. 정치판이 워낙 급변하니까 생각이 더 복잡한 것 같습니다. 아마 8·8 재보선이 끝나야 결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정종문 자문위원)
“결정하기까지가 어렵지, 일단 결정하면 무리없이 준비할 수 있다고 봐요. 정의원으로서는 시간을 두고 ‘이런 난장판에 들어가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따져보겠죠.”(임삼 홍보위원장)
오후 3시40분. 정회장이 축구협회 집무실에 도착했다. 기자가 “월드컵 성공을 축하드립니다”라고 인사하자, “고맙습니다”라고 답했다. 월드컵대회의 뒤처리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중국까지 다녀온 그이지만,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아니다. 일단 월드컵 얘기부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정의원은 이번에 한국축구가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둘 것으로 예상했습니까.
“대회 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16강진출의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얘기했어요. 16강에만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탄력을 받아서 욕심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요. 조별 예선은 리그지만 16강 이후는 토너먼트라서 홈 관중들의 열기가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첫 경기인 폴란드전에서 이겼을 때죠. 첫 경기에서 월드컵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결정되거든요. 스페인전에서 페널티킥으로 이긴 것도 정말 감격적이었어요. 그날 따라 페널티킥이 다 들어갔잖아요. 홍명보 선수의 마지막 킥도 잊을 수 없고….”
홍명보. 정의원은 대표선수 가운데 그를 특히 좋아한다. 정의원은 월드컵을 앞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홍명보 선수를 만났는데, ‘이번에는 왠지 좋은 성적이 나올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예감이 좋습니다.” 또 한번은 사석에서 “홍명보 선수는 이 다음에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정몽준 신화의 시작이 94미국월드컵이었다면, 마무리는 2002한일월드컵이었다. 공교롭게도 홍명보 선수는 1994년에 두 골을 넣었고, 2002년에 MVP 후보로 뽑혀 브론즈볼(3위)을 수상했다.
―홍명보 선수와는 여러가지로 인연이 많으시죠.
“제가 홍명보 선수를 FIFA(국제축구연맹) 선수위원회에 추천했지요. 홍명보 선수는 훌륭한 축구선수이고 인품도 좋아요. 제가 한가지 에피소드를 들려드릴게요. 1993년에 미국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전에서 한국이 탈락할 뻔했잖아요. 마지막 경기에서 우리가 북한과 붙었는데 두 골 이상으로 이기고, 이라크가 일본과 비겨줘야 월드컵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전반전이 끝났는데 우리는 0대0이고, 일본은 이라크한테 1대0으로 이겼어요. 매우 절망적이었는데 후반에 우리가 세 골을 넣고 이라크가 극적으로 일본과 비겼어요. 그런데 전반전 하프타임 때 감독이 홍명보 선수를 때려서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겁니다. 후반전이 시작됐는데 홍명보를 잘 아는 북한 공격수가 ‘얼굴이 왜 그러냐’고 묻더랍니다. 그런데 홍명보 선수가 ‘그냥 부딪혔다’면서 둘러댄 모양이에요. 만일 홍선수가 그때 성질대로 감독하고 충돌했다면 어떻게 됐겠어요. 대형사고가 터질 수도 있었는데, 끝까지 잘 참아줬어요.”
―홍명보 선수의 자서전 ‘마지막 리베로’를 읽으셨나요.
“조금 봤는데 잘 썼더라고요. 홍선수는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올 때 부상을 당해서 대표팀에서 탈락했잖아요. 그 사이에 송종국 선수가 열심히 뛰니까 언론에서 ‘홍명보는 갔다. 길이 없다. 홍명보 때문에 게임이 느려진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때 홍선수는 은퇴선언까지 고려했답니다. 그러다가 박항서 코치를 만났는데 박코치가 그러더래요. ‘너는 이제 뛰기 어렵다. 그러니 대표팀에 와서 군기 반장을 해라.’ 홍선수는 그 말에 충격을 받고 더 열심히 운동을 했답니다. 그것만 봐도 정말 좋은 선수라고 생각해요.”
정의원은 여기까지 말하고 갑자기 조중연 축구협회 전무를 불렀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홍명보 선수 자서전을 1000권쯤 구입해서 축구협회 1층에 전시하세요.” 즉석에서 1000권이라. 정의원은 역시 아버지를 빼닮았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순간 그대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 고 정주영 회장의 모습 그대로다. 기자는 순간 서해 간척지 공사가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에 벽에 부딪히자, 유조선을 끌어다가 막았다는 ‘정주영식 공법’이 떠올랐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월드컵 4강신화는 한국축구의 짐이 될 수도 있다. 국민들의 기대치가 ‘월드컵 4강 이상’으로 올라가 있는 상황에서, 차기 대표팀의 감독과 선수들은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냉정하게 볼 때 월드컵 4강은 한국대표팀의 실력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었다. 일부 축구인들은 그런 이유로 한국축구의 앞날을 걱정하기도 한다. 한 발짝씩 올라서야 할 것을 너무 쉽게 돌파했기 때문에 미래가 불안하다는 것이다. 한국축구의 장기 비전에 대한 정회장의 생각이 궁금했다.
―홍명보, 황선홍 이후의 한국축구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대교체에 대한 의견을 밝혀주십시오.
“이번 월드컵에서 노장 선수들의 역할이 컸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대표팀에는 송종국 박지성 이천수 최태욱 차두리 같은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주축을 이루는 2006독일월드컵 대표팀은 더욱 강해질 것으로 봐요. 2∼3년 뒤 이들이 대표팀에 들어오고, 좋은 지도자가 조련한다면, 2006년에도 희망을 걸 수 있어요.”
―축구계에서는 정회장이 좀더 일찍 결단을 내렸다면, 히딩크 감독을 붙잡을 수도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럴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큰 그릇인데, 월드컵 이후엔 큰 경기가 없잖아요. 이런 얘기를 하면 안 되겠지만, 한국에 계속 있다가, 다른 경기에서 지면 여러가지로 어려워지니까….”
―히딩크 감독이 2004년에 한국으로 컴백할 수도 있나요.
“충분히 가능하죠. 여건이 되고 우리가 그 사람을 필요로 한다면.”
―히딩크 감독은 ‘가능성 있는 젊은 선수들을 유럽으로 데려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가능합니까.
“히딩크 감독은 ‘아인트호벤 팀에 한국의 우수한 유망주가 입단하거나, 훈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어요. 굳이 아인트호벤이 아니더라도 적당한 유럽 클럽팀으로 신인 선수를 이적시킬 수도 있고, 대표팀이나 청소년팀이 유럽 전지훈련을 떠날 때 합동훈련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번 월드컵의 최대 수혜자는 정의원이다. 월드컵 이전에는 16강진출 여부에 노심초사하던 그였지만, 월드컵이 끝난 뒤엔 드러내놓고 국가지도자의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월드컵을 유치해서 준비하고 성공적으로 치러낸 주역이다. 이것은 하나의 프로그램을 시작부터 끝까지 책임졌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월드컵 기간 중 한국의 국제신인도와 브랜드 파워가 상승하고, 한국전이 열릴 때마다 국민들이 하나로 뭉쳤다는 점도 두고두고 평가받을 만하다.
―많은 국민들은 오랫동안 월드컵 하면 ‘정몽준’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정회장은 월드컵 하면 딱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좋은 의미로는 두 사람이 생각나요. 바로 4강신화를 만든 히딩크 감독과 이홍구 월드컵유치위원장입니다. 나는 축구협회 회장이 되고 나서야 월드컵 유치와 FIFA 부회장 선거를 알았어요. 그 전에는 FIFA라는 기구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제가 그때 아버님 선거운동하다가 초원복집 사건이 터져서 재판을 받았잖아요. 저는 지금도 그때 일을 억울하게 생각합니다. 부정선거의 증거를 수집해서 신고했으면, 훈장은 못 줘도 표창장은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거꾸로 저를 잡아가겠다고 난리를 쳤어요. 범인 도피를 방조했다는 거죠. 그 일을 자세히 얘기하려면 지금도 혈압 올라가니까 그만둘래요. 아무튼 제가 그런 일로 FIFA에 가기도 힘든 시절에 이홍구 유치위원장이 월드컵이라는 이름을 내밀었고, 히딩크 감독이 화룡점정을 한 겁니다. 그리고 좋지 않은 의미로도 두 사람이 기억나는데 그건 한번 짐작해보세요. 유치할 때하고 나중에….”
―축구인들은 정회장이 언제까지 축구계에 몸담을 것이냐에도 관심이 높습니다. 앞으로 대선에 출마하더라도 축구협회장직을 계속 유지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제가 대통령 후보로 나설 것인지를 결정한 다음에 생각할 문제예요. 지금 얘기하는 건 불필요하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축구협회장과 대통령후보를 겸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없고, 두 자리의 이해가 서로 충돌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회장은 월드컵이라는 최대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만약 축구계에 계속 남는다면, 한국축구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동안 대한축구협회를 잘 이끌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제가 FIFA 부회장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FIFA에 있었기 때문에 세계축구의 흐름을 알고, 그걸 토대로 한국축구를 경영할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FIFA 부회장이라는 자리를 존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앞으로도 FIFA 부회장으로서 아시아 선수들과 한국 선수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할 생각입니다. 만일 제가 여러 사정 때문에 다른 사람을 추천해야 한다면, 그 사람이 선거에 나가서 당선돼야 합니다.”
2002한일월드컵에서도 ‘옥의 티’는 있었다. 월드컵 개막 직전에는 FIFA총회가 파행 속에서 치러졌다. 블래터 회장이 연루된 스캔들이 잇따라 터져나왔고, 정의원을 비롯한 개혁파는 연일 블래터를 공격했다. 98프랑스월드컵보다 경기일정을 10일이나 앞당긴 후유증으로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들은 자기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일부 경기에서는 심판의 어이없는 판정이 축구팬들을 실망시켰고, 한국대표팀의 선전은 국제적으로 시기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에서는 한국이 심판 판정의 도움을 받았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히딩크 감독이 적절하게 답변했다고 생각합니다. 히딩크 감독이 ‘패배의 이유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했어요. 심판도 사람인 이상 오심을 할 수가 있죠. 역대 월드컵에서도 오심이 숱하게 있었고, 때로는 그것이 승부를 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심이 특정팀을 돕기 위한 음모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중국 북경대학에서 특강을 했는데, 중국 사람들 반응이 어떻습니까. 그쪽도 한국팀의 기적을 달갑지 않게 보도했는데.
“당의 최고 책임자들이 저한테 ‘심판 판정에 대한 중국관영 CCTV의 여러가지 코멘트는 중국 정부와 당과 인민의 공식적인 입장과 감정이 아닙니다. 한국 언론이 너무 과민한 것 같습니다’라고 얘기했어요. 제가 말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들이 먼저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대표선수들에 대한 포상금 차등지급 문제도 옥의 티였던 것 같습니다.
“그건 옥의 티라고 할 수 없어요. 선수단을 잘 운영하자는 쪽과 축제의 의미를 강조하는 쪽이 모두 맞는 말입니다. 저는 월드컵대회 도중에 차등지급 얘기가 나온 것이 바람직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차등지급에 대해 PK 실축한 선수의 포상금을 깎는 것으로 오해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원래 취지는 풀타임을 뛴 선수와 한번도 안 뛴 선수를 구별하자는 거였어요.”
월드컵이 열리기 전이었다. 정치권에서는 정의원이 한국대표팀의 16강진출 여부에 따라 대권도전을 결정할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정치권의 관측대로라면 지금쯤 정의원이 출사표를 던져야 한다. 하지만 정의원은 아직까지 시원하게 속내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월드컵 이전보다 더 복잡해진 정치구도 때문이다. 정치권은 현재 8·8재보선이라는 혈투를 앞두고 있다. 대선구도에서 종속변수가 불가피한 정의원으로서는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신동아’ 5월호 인터뷰에서 “월드컵이 끝난 뒤에 큰 꿈을 꾸겠다”고 말하셨는데, 월드컵 결과가 큰 꿈을 꾸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십니까.
“월드컵 대회가 순조롭게 마무리되고, 또 성공적으로 평가받고 있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리며, 이번 대회의 성공을 위해 노력해주신 분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월드컵대회의 성적과 국내 정치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은 우리 정치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월드컵이 열리기 전에 대선출마 시기에 관해 질문했더니, “요코하마에서 결승전을 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결정하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승전이 끝난 지 벌써 2주가 지났습니다.
“상징적으로 그렇게 얘기한 겁니다. 결승전이 끝나고 신중하게 판단하겠다는 뜻이었죠. 저는 예나 지금이나 월드컵과 정치를 구별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대통령 선거를 하려면 마음부터 구별해야겠고, 그러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대선출마 여부를 결정하게 될 최대의 변수는 무엇입니까. 여론조사 결과입니까. 아니면 본인의 결단입니까.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서 제가 결정할 겁니다. 여론의 추이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이냐, 여론조사가 얼마나 정확하냐와 더불어 제 느낌을 비교할 생각입니다. 지금 정치권에는 대통령후보가 정해져 있습니다. 만일 그 분들 중에 어떤 분이 가장 이상적이고, 또 ‘정치적 과잉 상황’이라고 한다면, 제가 꼭 나갈 것도 없는 거죠. 다만 지금 나온 분들만 가지고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상당수라면, 제가 나설 생각도 있습니다. 저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안하던 트릭을 쓴다든지 뭘 조작하든지 그럴 생각이 없어요.”
―만일 정의원과 뜻을 함께하는 정치인들이 힘을 합쳐 12월 대선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정의원의 역할이 대선후보가 아닐 수도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다른 정치인을 지지할 수도 있는 겁니까.
“질문 자체가 구구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꼭 대통령이 되겠다는 인생의 목표를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저에게 중요한 가치는 자유롭게 사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속세에 태어났으니까 다같이 사는 거죠. 살아가면서 조금이라도 남한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뭘 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뭘 하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대통령을 못하면 다른 걸 하겠다?’ 제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건 더 유치하거나 맞지 않은 거예요. 대통령을 못하면 어떡할까 안절부절못하고, 그걸 못하면 이거라도 할까 궁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정의원은 줄타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내용적으로 대선출마나 다름없는 말들을 토해내면서도, 공식적인 출마선언은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하나는 내딛는 순간 돌아오기 어렵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먼저 깃발을 올릴 경우 정치세력화에 대한 부담이 커진다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정의원이 대선에서 성공하는 거의 유일한 길은 ‘반이회창 단일후보’로 나서는 것이다. 정의원은 그런 상황을 고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몽준 쏠림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당분간 그를 만나는 기자들은 ‘말장난’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월드컵이 정치인 정몽준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제가 월드컵 유치한다고 돌아다닐 때 제 친구가 ‘월드컵 유치 실패하면 이민 가라’고 농담을 했어요. 그런데 실패하지 않았으니까 이민 안 가도 됐죠. 이번에도 ‘16강 진출 실패하면 이민 가라’고 하던데, 4강까지 갔으니까 이민 갈 필요가 없고요. 그렇게 보면 월드컵이 저를 크게 도와주었네요. 하하하.”
―월드컵 이후 정의원의 여론조사 지지도가 급격하게 올랐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인구의 절반인 여성을 축구팬으로 만들었으니까 최소한 두 배는 올라야 되는 거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은 지지율 상승이 월드컵의 영향이라고 말합니다.
“지지율은 앞으로도 더 많이 더 올라갈 텐데(웃음). 지금 서둘러서 분석할 게 뭐 있나요?”
―그냥 정의원 자신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대부분 다정다감하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어하잖아요. 자기 부인을 좋아하든 애인을 좋아하든 누구를 좋아하고 싶은데, 그동안 우리나라에 신나는 일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월드컵 때문에 다들 신이 나서 저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거죠. 중국에 다녀온 뒤 여의도의 한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지난 한 달 동안 너무 행복했어요’ 그러더라고요. 요즘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신동아’ 5월호 인터뷰에서 ‘노풍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평가하셨는데, 그것이 짧은 시간에 가라앉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한테 별걸 다 물어보는군요.”
―노풍의 변화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새로운 인물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 심리가 순식간에 빠졌거든요.
“그건 지금의 해석이고요, 또 다른 해석이 있겠죠. 물론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많으냐는 건 별도의 얘기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누구를 좋아하고 싶어한단 점이에요. 어떤 사람을 좋아하려는 열정은 강한데 마땅한 대상이 없었던 거죠.”
―노풍과 최근 정의원의 폭발적인 인기상승은 성격이 다르면서도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폭발이라는 건 한순간에 팡 터지고 나서 꺼지는 것 아닙니까? 그건 바람직하지 않죠. 저는 앞으로도 꾸준히 올라갈 거고….”
―일부에서는 월드컵 열기가 식고 나면, 정의원의 지지도도 함께 빠질 것으로 전망합니다.
“그럴 수도 있어요. 모든 건 다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월드컵을 제 인기하고 너무 결부시키는 건 듣기에 좀 거북합니다. 이번 월드컵은 우리나라의 큰 감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때문에 월드컵의 전체적인 의미가 격하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국민들이 월드컵의 감동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아주 구체적인 얘기를 해보자. 현재 정치구도에서 정의원과 합세할 수 있는 세력은 민주당과 제3세력이다. 민주당에서는 이인제 의원을 지지하는 그룹과 동교동 구파가 우호적이다. 또한 제3세력에서는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자민련, 박근혜 의원의 한국미래연합, 김윤환 민국당 대표 등을 꼽을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정의원을 단일후보로 추대할 수 있느냐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이들의 결합은 시나리오 수준으로 끝날 수도 있다.
―이번 주 ‘주간조선’ 커버스토리 제목이 ‘박·정·이 신당이 뜬다’이더군요. 세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정치적 힘을 형성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오늘 아침에 이발소에서 나오다가 봤는데, 새로운 내용은 별로 없고 그냥 큰 제목으로 썼더라고요. 저는 모든 가능성이 다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다 참정권을 갖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국민들과 함께 참여하고 토론해서 결정해야죠. 저는 ‘누구하고는 하고, 또 누구하고는 안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며칠 전 이인제 의원이 ‘신동아’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의원이 정의원에게 호감을 표했습니다. 화답 한마디 하시죠.
“글쎄요. 저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에게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인제 의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인제 의원은 김영삼 정부에서 장관을 지내시고, 또 제가 못해본 경험을 많이 하셨잖아요. 그런 면에서 서로 나눌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해요.”
―이인제 의원이 조만간 연락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의원을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조만간이라면 언제죠? 오늘 저녁부터 내일 아침까지인가요?(웃음) 저는 이의원이 도지사할 때가 기억나요. 수원에서 축구경기를 보고, 저녁 먹으러 오라고 해서 도지사 공관에 갔었어요. 그때 이지사가 수도권 인구억제 정책 때문에 공장 허가가 나오지 않는다고 건설부 장관에게 화를 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런 건 대화로 풀지, 왜 화를 내냐’고 했더니, ‘대화가 안된다’며 격한 반응을 보였던 것 같아요. 저는 그때 그분이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일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의원은 ‘월드컵 이후 정계개편이 이루어지면, 신당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는데, 지금도 그렇습니까.
“그냥 월드컵 이후에 어떻게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어요. 저는 월드컵이 끝나면 대통령선거가 다가오기 때문에, 그때 가서 ‘바람직한 우리나라의 경제지평은 무엇이냐, 어떤 정치세력에게 나라를 맡길 것이냐’ 하는 점을 고민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새로운 정치세력이 출현한다면 참여할 용의가 있다는 말씀이죠.
“새로운 정치세력이 좋다면 그거야 뭐 당연히….”
정치인의 인기는 때로 허망할 수도 있다. 정의원은 자신의 지지율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역대 선거에서는 잘 나가던 후보가 순식간에 몰락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은 대부분 정치경험이 미숙했거나, 철저한 검증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최근 정의원의 지지율이 상승하자 여야 대선후보 캠프는 그의 약점을 찾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정의원이 이들의 공격을 이겨낸다면 기회를 잡을 수도 있겠지만, 뜻밖의 암초에 부딪혀 거품처럼 사그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치권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MJ의 아킬레스건’에 대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정몽준 의원은 너무 카리스마가 강하고, 고집이 세다. 그래서 권력분산형 리더십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두세 달 전에 어떤 기자로부터 그와 정반대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국회의원들한테 ‘정몽준이란 친구는 카리스마가 없고 물탕이다’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겁니다. 어느날 갑자기 카리스마가 없다고 하다가 이제 또 있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잘 이해가 안되는군요. 또 카리스마가 좋은 단어 같지도 않고요. 카리스마는 우리 시대의 적절한 리더십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역대 정권이 했던 것처럼 주변 사람들을 출세시키고 상대편 국회의원을 탄압해선 안됩니다. 이제 그렇게 하면 큰 사건이 벌어져요. 대통령이 정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본인을 위해서 불행하고 나라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일찍부터 국회의장은 후보를 선언한 순간부터 당적을 이탈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통령은 국회의장보다 더 철저해야 합니다. 초당적인 위치에서 일하면서 반대파 사람들과도 자유롭게 만나야죠. 그렇게 하려면 카리스마보다 포용력이 더 필요할 겁니다.”
―‘정몽준 의원은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치열한 싸움을 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상대 후보가 적극적으로 네거티브 전략을 펴면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겠죠. 남의 얘기를 할 때는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저는 누가 그런 얘기를 하는지 짐작이 됩니다. 벌써부터 ‘누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루머까지 들려오더군요.”
―만일 대선이 난타전으로 간다면, 경험이 없는 정치인이 불리하지 않겠습니까.
“네거티브나 난타전에 미숙하다는 점이 단점이나 장점이 되진 않을 겁니다.”
―예를 들어 대선후보는 가족문제부터 재산, 살아온 과정 등을 모두 공개해야 합니다.
“공식적인 검증이라면 당연히 받아야겠죠.”
―그렇게 간다면 정의원은 고전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 분들 희망이죠. 저는 그걸 유치하다고 생각해요. 자기들 속셈을 보이는 얘기가 아닙니까.”
―‘정몽준 의원은 가진 것이 많다. 그래서 모험을 걸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정치인들이 국민들한테 인기가 없다면, 그건 ‘그들만의 리그’이기 때문이에요. 지금 한국정치는 ‘우리들의 리그’가 아니라 ‘그들만의 리그’를 향하고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주먹클럽이 20∼30개가 있더라고요. 주먹클럽에 들어가야만 보호를 받는 겁니다. 지금 우리 정치가 그런 수준이에요. 자기들과 뜻이 다른 사람을 위협하잖아요.”
―정의원이 과연 모험을 걸 수 있느냐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월드컵 강연 다닐 때 마지막에 꼭 헤밍웨이의 얘기를 합니다. ‘탐험심과 모험심을 항상 간직해야 한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타락한다.’”
―‘1992년에 아버지가 대통령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는데, 10년 뒤 아들이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건 무슨 얘기입니까. 아버지가 실패하면 아들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불문율이라도 있나요? 그건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러니까 못할 거다. 차라리 하지 말아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겠죠.”
―대권도전의 조건이라는 측면에서 1992년보다 2002년이 나아졌다고 생각합니까.
“제가 아직까지 후보를 한다 안한다, 이런 걸 결정한 바가 없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쓰셨지만, 저는 현재 특별히 준비해놓은 게 없어요. 월드컵은 끝났지만, 요즘도 처리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저는 지금 진지하게 생각하는 중입니다. 다 결정한 상태에서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1시간 20분 동안 계속된 숨바꼭질이 끝났다. 3개월 전에 비해 그는 한결 여유가 넘쳤다. 월드컵의 성공과 지지율 상승에서 큰 힘을 얻은 모습이 역력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정치적 야망을 숨기면서도, 자신의 상품가치를 부각시키려 노력했다. 그것이 기자에게는 “어디, 나 만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가 2002년 대통령선거를 승부처로 잡을지, 아니면 징검다리로 활용할지는 아직까지 확실치 않다. 하지만 출마여부와 관계없이 그는 정치적 도전을 계속할 가능성이 높다. 만 30세였던 1981년부터 국회의원을 노렸던 사람, 1992년 정주영 회장의 대선출마를 ‘사회통념에 대한 도전’이라고 평가한 사람, 국왕으로서 축구협회장을 겸하고 있는 요르단의 압둘라2세에 반한 사람. 그가 바로 ‘축구정치인’ 정몽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