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양해군’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한국 해군의 핵심무기 KDX-3. 날아오는 항공기와 미사일 등 수백 단위의 공중공격을 한꺼번에 방어한다는 이 ‘마법의 방패’ 구축함에 장착될 전투체계를 수주하기 위해 전통의 강호 미국의 이지스 체계와 떠오르는 신예 네덜란드의 에이파가 맞붙었다. 그러나 ‘심사과정이 불공정하다’고 반발하는 네덜란드의 분노 위로 미국 미사일방어체제(MD)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데….
곧 후방에 있던 또 다른 녹색 점 두 개가 북상하기 시작했다. 우리 해군의 1200t급 초계함인 진해함과 제천함이다. 초계함이 붉은 점을 향해 포격을 가하자 황해도 사곶 해군기지에 정박한 북한 유도탄정의 스틱스(STYX) 미사일 레이더가 추적 빔을 쐈다. 그 순간 스틱스 미사일 유도 레이더파를 감지한 제천함의 레이더가 비명을 질러댔다. 긴박한 순간. 사정거리 안에 있는 함대함 스틱스 미사일에 맞을 경우 상황은 돌이킬 수 없다. 오전 10시56분 2함대사령부는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해군이 이지스, 이지스 노래를 부르는 게 이 때문입니다. 지금은 북한에서 쏘면 맞을 수밖에 없어요. 차세대 구축함인 KDX-3가 도입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스틱스 미사일을 발사하려는 전자파가 감지되면 이 구축함은 스탠바이 상태에 들어갑니다. 미사일이 발사되면 즉시 요격미사일을 대응 발사합니다. 이 요격미사일에 걸려 스틱스는 바다 위에서 소멸하고 맙니다. 우리 함대는 완벽한 미사일 방어망을 갖추게 되는 겁니다.”
해군에서 전자전 관련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한 중령은 “이것이 KDX-3의 위력”이라고 말했다. KDX-3가 취역하는 2008년을 기점으로 한국과 북한의 해군력은 ‘국가대표 대 조기축구팀’ 수준의 격차를 갖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도대체 KDX-3가 무엇이길래 이런 위력을 갖는다는 것일까.
‘물밑부터 하늘까지.’ KDX-3는 함정에 대한 모든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7000t급 구축함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잠수함·적 함정·항공기·미사일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들어오는 공격을 탐지, 대응하는 함정이다.
우리말로는 ‘차세대 한국형 구축함 사업’으로 불리는 KDX 사업은, 1996년부터 실전배치된 3000t급 KDX-1(광개토대왕급)과 지난 5월 1번함 진수를 마친 4000t급 KDX-2(충무공 이순신급)를 거쳐 3단계 사업에 돌입한다. 국방부는 총 2조9680억원을 투자해 KDX-3 구축함 세 척을 확보할 계획이다. 오는 2008년 KDX-3 제1번함이 취역한다.
한 척당 1조원 내외의 예산이 배정되는 셈인데, 일각에서는 이 예산안에 대해 의구심을 표시한다.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공고(金剛)급 이지스함(7250t)의 건조 당시 가격이 10억달러, 지금 건조중인 이지스함의 가격이 대략 14~15억달러인 것을 고려하면 현재 예산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는 견해다.
해군에게 KDX사업은 새 구축함을 하나 더 사는 단순한 사업이 아니다. 연안을 벗어나 동남아까지의 먼 바다로 나가 한국의 해상교통로를 안전하게 확보할 ‘대양해군’을 만들 ‘전략기동함대’의 주축 세력을 마련하는 야심찬 사업이다.
현재는 세 척의 KDX-3만 건조한다는 계획이 짜져 있지만, 전문가들은 최소한 다섯 척은 있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동·서·남해에 한 척씩 배치한 상태에서 훈련과 정비를 원활하게 하자면 그 정도는 필요하다는 것. 해군은 이를 바탕으로 동·서·남해에 KDX-3를 주축으로 하는 세 개의 해역함대와 한 개 전략기동함대를 보유한다는 계획이다(합참에는 동해와 남해일부, 서해와 남해일부를 각각 관할하는 두 개의 해역함대와, 한 개의 전략기동함대를 갖자는 안을 제시하는 세력도 있다고 한다).
KDX-3의 방어능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공전(Anti-Air Warfare) 능력이다. 대공전 능력이란 새까맣게 몰려오는 전투기와 미사일을 요격해 자신과 함대를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탐지해 격추하려면 고성능 레이더와 슈퍼컴퓨터가 있어야 한다. 왜 고성능 레이더가 필요한가.
사람 눈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고개를 돌려 휙 둘러보면 어디에 무엇이 있고 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을 ‘탐색’이라고 한다. 이렇게 둘러본 다음 어느 한 사람을 골라 덤벼들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이것이 ‘추적’이다. 사람 눈은 매우 정교하기 때문에 탐색과 추적을 번갈아 할 수 있다. 탐색을 하다 추적을 하고 추적을 하다 탐색을 한다. 그러나 자주 바꾸다보면 아무래도 추적기능이 약화된다.
레이더는 사람 눈만 못해서 탐지용과 추적용이 따로 있다. 탐지용 레이더가 위협 표적을 잡아 알려주면, 조작하는 사람이 그중에 어느 것부터 공격해야겠다고 판단해 그 표적을 향해 추적 레이더를 발사하는 것이다. 추적 레이더 파는 발사된 미사일을 표적까지 정확히 유도하는 역할도 한다. 6월29일 서해교전 때 제천함이 맞은 스틱스 미사일의 추적(또는 유도) 레이더파다.
탐지 따로 추적 따로 돌아가던 레이더를 사람의 눈처럼 하나로 합쳐놓은 것이 고성능 레이더다. 추적과 탐색을 동시에 하는데도 헷갈리지 않고 집중력도 떨어지지 않는다. 추적과 탐색 외에도 레이더에게는 탐지한 표적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아니면 적군도 아군도 아닌 제3의 중립 표적인지 분별하는 식별 능력도 갖춰야 한다.
슈퍼컴퓨터는 왜 필요한가. 고성능레이더가 잡아준 많은 정보를 순식간에 처리하기 위해서다. 비행기나 미사일은 최하 속도가 시속 1000㎞다. 탄도미사일이라면 ‘마하’ 단위로 바뀌어 버린다. 탄도미사일의 속도는 마하 7에서 12(시속 약 8400㎞에서 1만2000㎞)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슈퍼컴퓨터는 이렇게 빠른 물체가 가는 방향과 속도 등을 계산해, 어느 쪽으로 대응무기를 발사하면 정확히 격파할 수 있겠다를 계산한다. 물론 슈퍼컴퓨터는 구축함에 가장 가까이 온 무기부터 격파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뒤에 있더라도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그것부터 잡아내 요격시켜야 한다. 슈퍼컴퓨터가 아니면 이런 상황을 꾸려나갈 수 없다.
슈퍼컴퓨터는 함정에서 무기를 조작하고 발사하는 모든 사격통제장치도 관장한다. 슈퍼컴퓨터가 없는 구축함에는 함포를 조작하는 세력과 미사일을 통제하는 사격통제장치가 따로 있다. 때문에 함포와 미사일은 동일한 표적을 향해 동시에 사격할 수도 있다. 반대로 어떤 표적은 ‘옆에서 쏘겠지’ 하고 서로 미루다 모두가 몰살하기도 한다. 이를 피하려면 누군가가 전체를 장악하고 일사분란하게 지휘해주어야 한다.
이 역할을 슈퍼컴퓨터가 맡는다. 슈퍼컴퓨터는 모든 사격통제장치를 장악한다. 따라서 한 개의 표적에 대해서는 반드시 한 개의 무기로만 대응한다.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경제적인 사격’이다. 이것이 바로 KDX-3 구축함의 대공전 능력이다.
시속 1000㎞ 이상으로 동시에 달려드는 표적을 붙잡아 거의 동시에 요격하는 실력이면 그 외 표적은 더욱 쉽게 공격할 수 있다. 함정이나 잠수함의 속도는 초고속이라 해도 100㎞를 넘기 힘들다. 이러한 속도라면 대공전 능력을 가진 구축함은 얼마든지 탐색하고 추적해 격파할 수 있다. 물속을 다니는 잠수함을 추적하기 위해 소나(음파탐지기)만 별도로 부착하면 대공·대함·대잠의 모든 해상전투를 치를 수 있다. 가히 ‘바다의 신’인 것이다.
국방부의 무기획득사업은 크게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거친다. 우선 그 무기가 꼭 갖추어야 할 성능을 규정한 작전요구성능(ROC : Requirement for Operational Capabilities)을 정하고 이에 맞춰 각 업체로부터 사업제안서를 제출받는다. 요구조건을 충족시킨 후보업체에 대해 시험평가와 협상을 벌인 다음, 최종사업자를 선정하고 계약서를 작성하게 된다.
KDX-3사업은 크게 선체를 건조하는 작업과 대공·대함·대잠전 무기를 통합하는 작업으로 나눠진다. 현재 현대중공업에서 실시하고 있는 선체 설계는 2004년 완료된다. 국내에서 이 정도 함정을 건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업체는 현대와 대우·한진 정도라는 것이 중론. 2008년 취역을 목표로 하고 있는 제1번함의 선체는 관례에 따라 기본설계를 담당하는 현대중공업이 건조한다. 제2번함부터는 공개경쟁을 통해 건조업체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무기체계 통합작업과 핵심 레이더가 포함돼 있는 전투체계 선정은 그 시험평가와 기종결정 권한이 해군에 위임돼 있다. 해군이 ROC를 확정한 것은 지난 2000년 6월. 지난해 7월 영국 BAE 시스템의 샘턴(SAMPTON) 체계, 미국 록히드마틴의 이지스(AEGIS) 체계, 네덜란드 탈레스의 에이파(APAR) 체계가 제안서를 제출했다. 이 중 아직 ‘설계도로만 존재하는’ 샘턴은 탈락하고 이지스와 에이파가 지난해 10월 대상장비로 선정됐다.
록히드마틴의 이지스 체계는 ‘해상 대공방어체계의 대명사’로 불리는 역전의 용사다. 1960년대 미 해군이 세계최초의 해상 대공방어체계로 개발해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에 탑재됐던 이지스는 1991년부터 그 크기를 줄여 알레이버크급 구축함에도 장착되기 시작했다. 현재 미 해군은 37척의 이지스 구축함과 27척의 이지스 순양함 등 총 64척의 이지스함을 갖고 있다. 향후 모두 84척의 이지스함을 보유할 예정이다.
이지스 체계는 레이더·지휘통제체계, 사격통제체계 등 총 여덟 가지의 기본체계로 이뤄져 있다. 이 가운데 핵심이 되는 것은 다기능 위상배열 레이더인 SPY-1D(V)다. 고성능레이더와 슈퍼컴퓨터의 결합체인 SPY-1D(V)는 900개의 대공목표를 탐지·식별·추적한다. 이 체계는 두 개의 MK41 발사대에게 스탠더드 미사일을 1초에 한 발씩 발사하라고 명령해 최대 122개의 표적을 1분 사이에 동시 요격해 버린다. 비유해서 말하면 미사일을 기관총처럼 쏘아대는 것이다.
탈레스의 에이파는 총 네 개의 체계로 구성돼 있다. 반경 400㎞ 내에 있는 1000개의 표적을 찾아낼 수 있는 회전형 장거리 탐색 레이더 SMART-L, 4면 고정형 단거리 다기능 위상배열 레이더인 에이파, 지휘통제체계, 대공전체계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핵심은 300개의 표적을 동시에 추적할 수 있는 에이파 레이더 체계다. 이 레이더의 유도에 따라 이지스 체계와 마찬가지로 스탠더드 미사일을 발사해 표적을 격파한다.
국방부에 제안된 에이파 체계는 현재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시제함에 탑재해 해상시험(Sea Trial)중이다. 이 시험 체계에 한국 해군의 요구에 맞춰 장비와 성능을 일부 개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탈레스측은 ‘능동형’ 위상배열 형인 에이파 레이더는 ‘수동형’인 이지스 체계의 SPY-1 시리즈보다 진보한 형태라고 주장하고 있다.
각각 미국 해군과 유럽 해군을 대표하는 두 후보를 두고 우리 해군과 국방과학연구소 요원들은 2001년 11월부터 6개월에 걸쳐 자료평가와 해외 현지 시험평가를 진행했다. 시험평가가 진행중이던 지난 3월, 국방부는 도입가격을 낮추기 위해 계획중인 세 척분의 전투체계를 일괄계약하겠다고 밝혔다. 단판에 세 척분의 기종이 모두 결정되니 평가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지난 3월25일, 최종 평가작업에 들어간 평가위원들은 일체의 연락을 끊고 합숙에 들어갔다가 5월30일 평가절차가 완료된 후에야 풀려나왔다. 자세한 시험평가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지스 체계는 시스템의 신뢰성과 탐지거리 등에서 우세한 평가를 받았고, 에이파 체계는 가격과 근접방어 부분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다는 전언이다. 한마디로 가까이 있는 적을 격파하는 데는 에이파가 낫지만, 멀리 있는 적은 이지스가 잘 잡는다는 것. 종합점수는 이지스가 높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당초 국방부는 시험평가가 끝나면 평가결과를 공개하고 바로 장비를 최종 선정하겠다고 얘기해왔지만 이날 갑자기 발표를 연기했다. 일각에서는 “이지스 체계가 유리한 점수를 얻자 F-X에 ‘데인’ 국방부가 발표를 겁내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밝힌 연기 사유는 전혀 달랐지만, 충분히 ‘겁낼 만한 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앞서 KDX-3의 대공전 능력은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표적을 격파하기 위해 발사되는 요격용 유도탄에서 불거졌다. 이지스와 에이파 체계는 모두 미국 레이시온이 만드는 ‘스탠더드 미사일-2 블록 4A’를 유도탄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시험평가가 진행중이던 지난해 12월 미국 국방부가 이 스탠더드 미사일-2 블록 4A를 해상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하는 계획을 취소한 것. 국방부로서는 그 대책을 마련해 업체들과 협상해야 했고, 이에 따라 협상과 사업자 선정은 미 국방부가 대안을 제시할 것으로 예상되는 6월로 미뤄졌다. 그러나 7월 중순을 넘긴 현재까지 선정결과 발표는 계속 미뤄지고 있다.
그 무렵 에이파 체계를 공급하는 탈레스가 해군의 사업진행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지스와 에이파가 모두 사용하는 스탠더드 미사일-2 블록 4A의 개발 일정이 불투명해졌으므로, KDX-3에는 탄도미사일요격능력이 장착될 수 없다”는 게 이들이 주장하는 핵심 요지였다. 따라서 ROC와 그에 근거해 국방부가 배포한 제안요구서(RFP : Request for Proposal)에 포함돼 있는 ‘탄도요격능력’ 부분은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지난 6월5일에는 주한 네덜란드 대사까지 나서서 “네덜란드 제품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일부에서는 KDX-3사업이 상반기 내내 국방부를 괴롭혔던 F-X사업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닌가 하는 관측이 흘러나왔다.
탈레스는 “국방부가 애초부터 이지스를 도입하기로 마음먹고 고의로 탈레스를 소외시켰다”고 주장했다. KDX-3 관련설명은 언제나 이지스를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시험평가가 완료된 지난 5월30일 국방부 관계자들이 “이지스가 KDX-3 계약을 따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흘린 것도 납득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제품성능에 관해서도 탈레스는 국방부의 평가에 불만을 감추지 않고 있다. 탈레스의 전신인 시그널(Signal) 시절부터 레이더기술 부문에서 미국을 10년 이상 앞서왔다고 주장하고 있는 탈레스측은 “에이파는 1990년대 개발된 최신형이기 때문에 70년대 개발된 이지스에 비해 진보한 형태”라고 말한다.
록히드마틴측은 “이지스가 고물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한다. 이번에 도입되는 베이스라인 7.1버전은 그동안 수 차례 업그레이드돼 초기시스템과는 완전히 다른 모델이라는 주장이다. 오히려 록히드마틴측은 에이파가 해상시험중인 모델임을 들어 에이파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록히드마틴은 F-15와 이지스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는 향후 생산량만 봐도 자명하다는 것. F-15가 시민단체들의 항의를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끝나가는 고물 비행기’라는 오명 때문이었다. ‘생산라인이 폐쇄되는 고물비행기를 만만한 한국에게 강매해 공장을 유지하려는 것 아니냐’는 것이 의심의 근거였다.
반면, 이지스는 앞으로도 30년간 사용할 예정이다. 미국·노르웨이·스페인 등에서 주문한 26척이 현재 건조중에 있고, 일본이 추가로 2척, 미국이 다시 5척을 주문할 예정이라 향후 10년 내에 최소 30척이 추가로 생산된다는 것이 록히드마틴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해군 일각에서는 ‘탈레스가 F-X사업 때의 반미감정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협상을 끌고 가려 한다’는 의구심을 보이고 있다. 해군본부의 한 영관 장교는 “자신들의 점수가 낮다는 정보를 입수한 탈레스가 ROC 자체를 걸고 넘어져 평가결과를 무용지물화하려는 게 아닌가”라며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탈레스가 제기한 ‘불공정성’ 문제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해군은 그동안 “KDX-3 = 이지스”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한 국방관련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군에서 만든 KDX-3 관련 보고서는 대부분 이지스 도입을 아예 전제로 깔고 작성됐다. 80년대 해군의 의식 높은 무기체계 전문가들이 처음 KDX-3를 고민하던 무렵에는 에이파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이 지금 제독이 되어 결정권자가 됐다. 90년대 이후 젊은 장교들도 에이파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지스 도입을 당연하게 여기는 상황에서 누가 에이파에 애정을 갖겠는가. 해군 내에 에이파를 지지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번 도입사업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이 때문에 F-X에 비해 KDX-3가 조용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미국계가 아닌 다른 업체가 ‘우리는 들러리였느냐’며 분노하는 상황 자체는 F-X사업 당시와 비슷하지만, 수요군인 해군이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F-X사업에서 공군은 ‘라팔파’와 ‘F-15K파’로 갈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KDX-3에는 그럴 만한 사람들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이유로 F-X사업에서의 보잉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 있었던 록히드마틴은, 이번 경쟁에서 ‘조용한 행보’를 견지했다. F-X 기종결정 당시 미국 고위관리들이 한국을 방문해 F-15 구매를 종용하거나, 한미간 무기체계의 상호운용성을 강조한 보잉의 마케팅 전략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다는 것이 록히드마틴의 판단이었다.
스탠더드 미사일 개발중단으로 인해 KDX-3의 탄도미사일 요격능력이 불투명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국방부의 입장이 난처해졌던 것은 사실이다. 탈레스의 주장에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었기 때문.
미 국방부가 이지스함에 스탠더드-2 블록 4A를 장착하는 방안을 취소한 이유는 “비용은 증가한 반면, 유도장치의 하드웨어(미사일)와 소프트웨어(전투체계)의 연동성이 검증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이에 대해 “5월까지 대안을 제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미국이 새 유도탄을 개발하는 데는 수억 달러의 비용과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한국도 새로운 유도탄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추가 개발비용의 일부를 부담해야 할 것이라는 설이 떠돌았다. 국방부와 해군은 “개량형 유도탄 개발을 위한 비용은 단 한푼도 부담할 수 없다”며 “최악의 경우 탄도탄 방어능력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비용부담은 없을 것”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당초 해군은 취소된 유도탄을 사용하는 이지스 체계는 베이스라인 6.3이었으나, 한국이 도입하려는 것은 그보다 향상된 베이스라인 7.1이므로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국방부에서 제동이 걸려 ‘선 검증 후 결정’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김종천 국방부 획득정책관은 6월5일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이 개발 중단된 스탠더드-2 블록 4A 대신 한 단계 낮은 스탠더드-2 블록 4 개량형을 개발하겠다고 밝혔다”며 “개발이 불확실할 경우 ROC의 수정을 검토할 것”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국방부가 이렇게 나오자 몸이 달아오른 쪽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던 록히드마틴과 미 국방부. 미 국방부는 6월 초 스탠더드-2 블록 4를 개량해 요격용 미사일로 개발한다는 새로운 계획을 만들어 장관에게 보고했다. 미 국방부 차관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요격미사일 개발에 문제가 없음을 보장하는 서한을 보내오는 등 미국의 노력은 계속됐다.
이와 함께 미국측은 이에 대한 보장을 계약 본문에 반영하기로 국방부와 협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KDX-3가 완성되기 전까지 요격미사일을 반드시 개발한다는 것과 향후 개선된 유도탄이 나오면 새 것으로 공급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탈레스의 입장은 다소 불리하다. 탈레스 역시 스탠더드 미사일을 개량해 ROC를 충족시키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문제에 있어선 미 국방부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탈레스는 미 국방부가 록히드마틴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들에게만 정보를 숨기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또한 이 상황을 좌시하며 ROC를 변경하지 않는 것은 한국 국방부의 불공정성을 입증하는 증거라는 주장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두 전투체계의 재원과 능력에 정통한 일부 군사 전문가들은 탈레스가 스탠더드 미사일과 관련해 이의제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는다. 핵심은 KDX-3의 ROC에 포함돼 있는 탄도미사일 방어능력의 수위. 쉽게 설명하자면 이번에 도입되는 KDX-3에 장착될 탄도미사일 방어능력이 어느 정도 영역까지 커버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다.
KDX-3에 탄도미사일 요격능력이 부가되리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지난해 2월. 이 무렵부터 주변국들은 한국의 MD참여 여부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는 KDX-3의 요격능력이 공군이 추진하는 차세대유도무기사업(SAM-X)과 함께 미국이 주도하는 전구미사일방어체제(TMD·이는 현재 MD로 통합됐다)의 무기체계이기 때문. 1999년 5월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 가진 인터뷰, 2001년 5월20일 조성태 당시 국방장관의 국회 국방위 발언 등을 통해 우리 정부는 “TMD에 참여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천명해왔지만, 중국과 러시아 등 MD 구축에 반대하는 국가들의 의심은 잦아들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방부와 해군은 KDX-3와 MD가 무관함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나섰다. 지난 5월10일 해군 정훈공보실은 “KDX-3의 대공 방어능력은 함정의 자체방호 및 인접한 전략목표를 방호하는 능력일 뿐”이라고 밝혔다. 동네를 커버하는 능력이지 권역을 커버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해명이었다.
과연 그럴까. 이지스 체계의 성능에 정통한 한 무기체계 전문가는 “그 정도는 아니다”고 단언한다. 이는 이번 입찰에서 한국 해군이 요구한 레이더의 성능재원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는 것. 탄도미사일 요격시스템이 어느 정도 영역을 커버하는가는 결국 레이더의 성능이 가장 중요한 변수다.
이지스 체계에 장착되는 SPY 레이더는 SPY-1K부터 SPY-1B/D까지 크게 다섯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이 중 국방부가 지목한 것은 SPY-1D(V). 정확한 감지거리는 군사기밀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MD체계의 구성원 역할을 할 수 있는 성능이라는 분석이다.
노르웨이가 건조중인 이지스함 레이더 SPY-1F는 SPY-1D(V)보다 낮은 등급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도 ‘함정의 자체방호 및 인접 전략목표 방호’는 충분하다는 것. MD용 무기개발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일본 해상자위대의 공고(金剛)급(7250t) 이지스함에 장착된 레이더가 SPY-1D라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이 이지스함은 1998년 8월 북한의 ‘대포동 로켓 발사’ 소동 때 로켓의 궤적을 정확히 추적해 주변국들을 놀라게 한 바 있다).
특히 SPY-1F는 SPY-1D(V)에 비해 25% 가량 저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군의 주장처럼 자함(自艦)을 위한 방어수준이라면 노르웨이가 주문한 예를 따르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탈레스측은 에이파가 이지스보다 20% 이상 저렴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에이파 레이더의 성능은 노르웨이가 도입한 SPY-1F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이 전자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따라서 애초부터 우리 해군은 에이파를 후보로 검토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지난해부터 해군 관계자들은 “에이파는 출력이 낮아 원거리 고속비행 탄도미사일 방어에 취약하기 때문에 경쟁력이 없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수의계약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 여론이 확산되자 공개입찰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 MD 참여수준의 KDX-3를 보유하겠다고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탈레스의 입찰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군사 전문가들의 추측이다.
승산 없는 경쟁에 참여해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던 탈레스에게 터져 나온 호재가 바로 지난해 12월 미국 국방부의 스탠더드 미사일 개발중단 선언이었다. 탈레스로서는 아예 탄도미사일 요격능력을 ROC에서 삭제시켜 레이더 감지범위에서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
남아 있는 문제는 ‘우리 해군이 MD 수준의 탄도미사일 요격능력을 보유할 필요가 있는가’에 관한 부분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SPY-1D(V) 장착 이지스 체계의 가격은 세 척분을 합쳐 9억5000만달러다. 이보다 25% 싸다는 SPY-1F를 구입하면 2억4000만달러(약 2700억원)에 육박하는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20% 이상 싸다는 에이파 체계를 구입하면 2280억원 이상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한다.
더욱이 SPY-1F(V)나 에이파를 구입하면 한국의 MD 참여 여부에 대해 눈에 불을 켜고 주목하고 있는 주변국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 있다. 미국 주도의 MD체제에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참여해 엄청난 비용을 분담해야 하는 시나리오도 막을 수 있다.
기자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 한 해군 관계자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안보상황상 좀더 업그레이드된 방어능력을 보유하는 것이 나쁜 일이라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향후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본의 이지스함이 SPY-1D(V) 레이더를 장착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MD 참여를 공식 선언한 일본과 우리 정부의 상황을 단순 비교할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우리 정부가 MD에 참여할 목적이 아니라면, 주변국의 눈치를 봐가며 2000억원 이상의 예산을 추가 사용할 이유는 없다. SPY-1F나 에이파를 장착한 구축함으로도 대(對) 북한 전력 우위나 대양함대의 꿈을 이루는 데는 지장이 없는 것.
우리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MD 참여 여부에 대한 동의를 구하거나 이를 공식 발표한 적이 없다. ‘ROC의 탄도미사일 요격능력을 재검토하자’는 탈레스의 주장이 비록 자사 이익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정부가 이를 심각하게 검토해봐야 할 필요는 여기에 있다. 2000억원은 작은 돈이 아니다. 올 한해 보건복지부의 유아보육관련 총예산이 2000억원 규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