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권형 대통령제 의원 대부분이 동의해
- 정치권, 자연스러운 변화 있을 것
- 박근혜와 입장 같아, 정몽준도 만날 계획
- 노풍은 조작된 주가 “그 많던 지지 다 어디로 갔나”
- 8·8재보선 뒤 재경선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하지만 경선이 끝나고 다시 만난 이의원에게 과거 같은 여유는 없었다. 독기라고 할까, 공격적인 기운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1997년 겨울, 점퍼차림으로 혈혈단신 대선 현장을 누비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뭔가 중요한 행동을 앞두고 잔뜩 몸을 도사린 듯한 느낌, 이인제 의원에게서 그런 기(氣)가 느껴졌다.
7월11일 오전 국회의원회관에서 이인제 의원을 만났다. 이의원은 직접적인 표현을 자제했지만 정치권에 중대한 변화가 임박했고 그 변화를 주도해보겠다는 뜻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이의원은 지난 5일 기자회견을 통해 분권형 대통령제라는 다소 생소한 권력구조를 제안하며 이를 위한 개헌운동을 벌일 것을 천명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개헌론에 “대다수 국회의원들이 마음속으로 동의하고 있다”며 “이제 자연스러운 변화들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또 노무현 후보의 8·8재보선 뒤 100% 재경선실시 주장에 대해 “참여할 생각도 관심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대권도전의 꿈을 접었느냐는 질문에는 “새천년민주당의 후보가 되고자 하는 꿈은 접었다”는 대답으로 여운을 남겼다.
직접화법으로 정계개편을 주도하겠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노무현 후보체제의 민주당에 대한 불신감을 숨기지 않았으며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를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는 말로 자신의 각오를 대신하기도 했다. 이의원과의 인터뷰는 그가 최근 정가의 화두로 던진 개헌론에서 시작했다.
-프랑스식 이원정부제를 주장했습니다. 국민 입장에서는 이원정부제가 느닷없다는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왜 갑자기 개헌론을 제기했는지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올 12월에 대통령선거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 개헌을 추진해 새 틀을 만들고, 이 새 틀 위에서 21세기 첫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출발해야만 국가경영이 원만하게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경험에 비춰볼 때 설령 개헌의지가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일단 대통령이 되고나면 제왕적 지위를 향유하려 하지 권력구조를 바꿔 권력을 분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선 전에 개헌을 하지 않으면 대선 후에도 개헌을 못하게 된다, 그러면 새로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5년 후의 모습은 지금보다 더 나쁘면 나쁘지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개헌을 늦출 수가 없다싶어 문제를 제기한 겁니다.”
-정권의 부패를 방지하는 방법이 꼭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개편밖에 없습니까.
“현재의 권력구조를 보면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자 행정부의 수반입니다. 그리고 당을 통해 국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법원이야 그렇다 치고, 준사법기관인 검찰이나 국세청이나 공정거래위원회나 금융통화위원회 등을 권력에 예속시켜 제왕적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구조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분권형 권력구조로 개편해야만 구조적으로 대통령이 부패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감옥을 많이 짓고 잡아넣어도 결국은 권력이 독점돼 있기 때문에 부패는 자꾸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1년 전만 해도 이의원은 4년 중임 정·부통령제를 주장했고, 만약 이의원이 대통령이 되면 1년 이내에 개헌을 해서 중임제로 바꾸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분권형 대통령제를 들고 나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중임제 정·부통령제에 대한 소신이 바뀐 겁니까.
“나는 원래 미국식 순수 대통령제를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나라입니다. 빠른 속도로 선진국으로 가야 하고 빠른 속도로 분단상황을 극복하고 통일로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한 국가 리더십의 요체는 속도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미국식 순수 대통령제가 맞아요. 일단 대통령에 당선되면 임기동안 전적인 책임과 권한을 갖고 의사결정을 해나가니까요. 하지만 순수 대통령제를 하기 위해서는 전체 의원의 3분의 2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선 과도적 단계로 프랑스식 분권형 대통령제, 즉 이원정부제를 도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겁니다. 프랑스의 분권형 대통령제, 이원정부제는 강력한 정부를 선호하는 드골과 의원내각제를 선호하는 의회와의 타협의 산물인데 탄생 배경도 우리 정치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프랑스식 분권형 대통령제에 우리 국회의원 대부분이 마음속으로는 동의하고 있다고 믿고 있어요. 국민들 입장에서도 대통령의 실패는 세 번으로 족합니다. 또 한번 대통령의 실패를 기다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현행 대통령제에서는 다음에 누가 집권하든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까.
“다음 대통령은 앞선 세 대통령보다 더 비극적인 상황을 맞을 겁니다. 부패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한쪽이 권력의 전부를 독점하기 때문에 정파간의 극한 대결로 국정이 마비되는 비극적 상황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실패한 권력구조를 개편하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살리는 진정한 정치개혁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많은 의원들이 분권형 대통령제에 마음속으로는 동의할 것이라고 했는데….
“예. 절대다수의 의원들이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만나서 의견을 물어보았습니까.
“의원 개개인은 다 동의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의회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서 정치적 불신은 의회가 다 뒤집어쓰지 않습니까? 여당이 대통령을 만들어서 청와대에 보내면 그 다음날부터 대통령은 관료의 대통령이지 정당이나 국회의 대통령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권에) 참여도 못 하면서 모든 책임은 (여당이) 다 뒤집어써야 하지 않습니까? 야당 의원들도 그저 비판과 투쟁만 할 뿐이지 국정의 파트너로서 책임을 공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당의원이든 야당의원이든 또 앞으로 여당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의원이든 야당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의원이든 입지나 이해관계를 초월해 권력을 분점하는 권력구조 개편에 동의한다고 저는 믿고 있어요.”
-머릿속에서 구상한 것이 아니라 국회의원들을 만나 의견을 수렴한 결과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이원정부제, 분권형 대통령제에는 이미 보이지 않게 상당한 공감대가 이뤄져 있습니다.”
-주로 어떤 의원들이 동의하던가요. 소속 정당이라던가 그런 것을 공개할 수 있나요.
“정파를 떠나 다 동의하고 있습니다.”
-7월5일 기자회견에서 국회에 헌법개정기구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개헌을 해나가자고 주장했습니다. 여야 정당이 당론으로 동의하지 않는 한 개헌이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의원들은 마음속으로 동의하고 있다면 실제로 국회내 헌법개정기구를 만들 수도 있겠네요.
“앞으로 만들어야지요. 여야가 합의해서 만들어야지요. 현재 여야의 지도부가 결정하지 않고 있지만 국민 여론이 형성되고 공감대가 커지면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의원이 주도해 의원들의 모임을 만들 생각은 없습니까.
“그건 좀더 두고 봅시다.”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하하하…. 이제 자연스러운 변화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의원의 개헌론에는 여러가지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모든 선출직 공직자의 임기를 4년으로 통일한 뒤 동시에 선거를 치르자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 이에 대해 이의원은 “아주 절박한 과제”라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선 미국의 경우 하원의원 임기가 2년이고 상원의원은 2년마다 3분의 1씩 뽑기 때문에 중간선거를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선거가 있는 날 대통령, 하원의원 전체, 상원의원 3분의1, 지방선거 전체를 동시에 하지 않습니까? 프랑스도 과거에는 대통령 7년, 국회의원 5년으로 임기가 달랐습니다. 그러나 2000년에 개헌을 해서 임기를 일치시켰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몇 주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같은 해에 선거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거의 매년 선거를 합니다. 자연 여당이고 야당이고 인기위주의 정책을 내세우게 됩니다. 표를 얻어야 되니까요. 그래서 경제논리나 개혁논리는 실종되고 마는 겁니다. 또 임기를 일치시키면 직접적인 선거비용도 4년에 한 번만 지불하면 됩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7900억원의 비용이 들어갔다고 그래요. 4년에 한 번만 치르면 될 것을 매년 비용이 중복돼 나가지 않습니까? 4년에 한 번만 놀면 되는 것을 선거하는 날마다 놀지 않습니까? 그러면 국가경제의 손실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리고 선거가 빈번하면 선거분위기는 더 혼탁해집니다. 그로 인한 간접적인 손실은 계산하기 어렵죠. 선거망국입니다. 반드시 고쳐야 됩니다.”
-4년에 한 번 선거를 할 경우 대통령의 소속정당이 원내 과반수가 되는 상황이 일반화된다, 그래서 여소야대 상황은 사라진다고 주장했는데요.
“그렇습니다. 프랑스에서 선거시기가 달라서 견제심리가 발동해 대통령이 속하지 않은 정당을 의회의 다수당으로 만들어줬습니다. 우리나라도 현행 헌법 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 대통령을 선출한 뒤에 국회의원 선거를 하다보니까 여소야대가 일상화되지 않았습니까? 여소야대가 되니까 무리하게 정계개편을 시도해 정치가 파행으로 가게 되는 거죠. 프랑스가 대통령과 의회의 임기를 맞춘 이유가 그런 현상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일시에 하니까 대통령과 의회 다수파가 일치하지 않았습니까.”
-대통령과 의회다수파가 일치할 경우 권력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분권의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구조적으로 정부와 의회를 상호의존하게 함으로써 권력의 분점구조는 그대로 살아 움직이게 되고, 따라서 권력의 부패를 막을 수 있고 또 극한 대결을 완화할 수가 있죠. 사회의 다원성과 지역적·계층적 갈등이 분점의 틀 안에서 융합될 수 있는 거죠.”
-한국적 정치현실에서 대통령이 나온 당이 다수당이 안 돼 총리가 야당에서 나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동거정부가 한국적 정치현실에서 가능할까요.
“설령 동거정부가 되더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요. 프랑스에서도 동거정부가 세 번 나타났는데 헌정을 중단하지 않고 그런대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정부를 끌고 왔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연 대통령이 있고 대통령과 반대편에 있는 정당에서 총리를 맡을 때 공존이 가능하겠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대통령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가운데 의회는 야당이 다수파일 때보다는 동거정부가 오히려 책임과 권한이 잘 규정돼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안정적으로 타협하며 정국을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야당이 국정에 참여함으로써 파행이 줄어든다는 말씀이군요.
“책임과 권한을 분명히 함으로써 가능하죠.”
-이의원은 5년 단임제가 레임덕의 원천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정권이 막판에 부패하는 것도 5년 단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는데 4년 중임을 하더라도 8년 뒤에는 레임덕을 피할 수 없습니다. 레임덕은 임기가 있는 대통령제에서 필연적인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4년 중임을 하면 처음 임기 4년 동안 성공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대통령은 물론 각료들도요. 일단 성공의 틀을 잡게 되면 재선이 되겠죠. 그러면 성공의 틀이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재선이 안 되겠죠. 그래서 레임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임제는 성공한 정부가 되더라도 그 이상의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부에서부터 이탈현상이 발생해서 레임덕이 오는 것입니다. 레임덕이라는 것은 내부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의원이 애써 권력분점을 주장하지 않더라도 우리 정치권은 권력분점의 시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지난 봄 국민적 관심 속에 실시한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국민참여경선을 비롯해 상향식 공천과 국회의장의 당적 이탈 등 긍정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의원은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큰 틀의 개혁이 있어야만 작은 개혁들도 빛을 볼 수가 있습니다. 대통령한테 국가원수로서의 권한과 일반 행정권 전체를 귀속시켜 놓으면, 의회주의와 법의 지배가 확립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는 그 불균형이 바로 부작용을 가져올 뿐이죠. 그렇게 되면 작은 개혁들도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국가원수의 지위와 행정권 가운데 외교·안보·국방·통일 이 부분에 대한 권력만 귀속시키고, 나머지 행정 권력은 의회 다수파의 대표가 총리가 돼 정부를 구성하고 거기에 귀속시키면 더 이상 일인이 권력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하게 됩니다. 큰 틀의 개혁을 할 때가 됐다, 더 이상 기다릴 사항이 아니다, 이것이 제 판단입니다.”
-현실적으로 여야 정당간 합의가 이뤄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나라당도 공식적으로 반대했고 민주당 노무현 후보도 헌법개정은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해 개헌을 하려면 국회의원을 설득해야 하고 국민여론을 모아야 합니다. 당장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이의원의 제안을 ‘정치공세’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민주당 탈당과 신당창당의 명분 축적 과정이 아니냐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축구대표팀이 폴란드나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이기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러나 해내지 않았습니까?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패배주의예요. 헌법을 개정하면 누구는 이익을 보고 누구는 손해를 보나요? 어느 당은 손해를 보고 어느 당은 이익을 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새로운 권력구조의 틀을 만드는 것은 우리시대의 요구이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정치인들이 해야 할 절박한 과제입니다. 지금의 헌법에서 세 번의 대통령이 연달아 실패하고 있는데 헌법을 고치지 않고 그냥 가겠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도 문제점을 잘 알고 있고, 또 국회의원들도 권력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금만 여건이 성숙되면 바로 불이 붙고 권력구조의 새로운 틀이 만들어질 것으로 봅니다. 다른 의도를 갖고 주장하는 것 아니냐고 의문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데 헌법개정이 주장하는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국회의원 3분의 2가 동의해야 하고 국민투표에 부쳐 국민들이 동의해야만 개정되는 것인데 문제를 주장한 사람의 주관적인 의도가 뭐 그리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설령 주관적인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분권형 대통령제는 대통령 중심제의 장점과 내각제의 장점을 융합시킨 제도라는 평가입니다. 그래서 내각제론자들도 충족시키고 대통령제를 고수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충족시킨 제도인 것 같습니다. 내각제가 당론인 자민련 의원들과는 교감이 됐습니까.
“나는 자민련 의원들도 대단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박근혜(朴槿惠) 의원은 이 제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가요.
“박근혜 의원에게도 권력구조 개편의 필요성을 말씀드렸죠. 명쾌한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언론보도 등을 통해 보니까 긍정적인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몽준(鄭夢準) 의원과도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해 보셨습니까.
“정몽준 의원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조만간 만날 겁니다.”
-박근혜 의원과 자민련 의원들은 대체로 이의원이 제기한 분권형 대통령제에 동의하고 있다는 거군요.
“그들뿐만이 아닙니다. 의원들은 다 마음속으로는 동의합니다. 우리 당에서는 당 공식기구에서 공론화하지 않았습니까?”
-민주당에서는 박상천(朴相千) 의원이나 정균환(鄭均桓) 의원도 분권형 대통령제를 제안했는데 이분들이 제기한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프랑스제도를 모델로 해서 우리 실정에 맞게 만든 것뿐입니다.”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박상천·정균환 의원과 의견을 교환했습니까.
“그분들하고는 권력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만나서 구체적 상의를 한 것은 아닙니다. 대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는 것은 알고 있죠.”
-최근 6월 지방선거를 전후해서 자민련 의원들과 많이 만나셨죠.
“충청권에서 선거 공조를 했기 때문에 자주 만나게 됐죠.”
-자민련 의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이던가요.
“권력구조 개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당론으로 내각제를 주장해왔던 분들이니까요.”
-항간에는 이런 소문도 있습니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여러 차례 공·사석에서 자민련 의원들에게 권력구조 개편에 관해 이인제 의원의 생각과 견해에 도움을 주라고 했다는 얘기 말입니다.
“그 얘기는 처음 듣네요.”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의원과 다른 정치인들 간에는 적지 않은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월에도 이의원은 김종필 총재와 만났고, 자민련 의원들과는 매주 골프를 치며 어울렸다. 5월에 박근혜 의원과 만난 뒤로 두 사람 사이에는 끊임없이 교류가 이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쯤에서 정치인 이인제의 야망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졌다. 한때 여당의 유력한 대권주자였다가 돌연 그 자리에서 밀려난 뒤 이의원은 절치부심(切齒腐心)의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1997년 대선 이후 단 하루도 차기 대권도전의 꿈을 놓아본 적이 없는 그였기에 아쉬움은 더했을 것이다. 과연 올 연말 대선에서 ‘이인제 후보’를 볼 수 없을 것인가?
-대통령의 꿈은 접으셨습니까.
“우리 당의 후보가 되고자 하는 꿈은 접었습니다. 지난번에 경선포기하면서 국민들에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다른 방식으로 대권에 나서겠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니고요.
“그러니까 새천년민주당의 후보가 되고자 하는 꿈은 접었다는 겁니다. 다시 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새천년민주당이 아닌 다른 당의 후보로 선거에 나설 수는 있다는 말씀입니까.
“미래의 일에 관해서 지금 이런 경우는 이렇고, 저런 경우는 저렇다고 얘기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죠.”
이의원은 끝내 직접적인 대답은 피했다. 다만 미래는 모른다는 말로 꿈마저 접은 것은 아니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지방선거 직후, 한때 이의원을 지지했던 민주당의 동교동계 한 의원은 사석에서 이의원에 대해 세 가지 불만을 제기했다. 첫째는 경선 도중 음모론을 제기한 것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것, 둘째 경선을 완주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것, 셋째 경선 이후 지방선거 때 자민련과 연대하는 등 민주당의 선거에 전념하지 않음으로써 민주당내 이인제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주위의 반응에 대해 이의원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도 경선과정에 외부의 음모가 있었다고 믿습니까.
“노무현씨가 이회창씨하고 가상대결을 하면 20% 이상 차이로 노무현씨가 이긴다고 조사됐는데 그 지지가 지금은 다 어디 갔습니까? 결과가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닙니까? 현 대통령은 자기 임기동안 국가와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는 당원과 국민들의 몫이지 현 대통령이 이를 왜곡시킬 권리가 없어요. 현 대통령도 국민의 한 사람이고 당원의 한 사람이니까 필요하다면 떳떳하게 자기 견해를 이야기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 유형무형의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도발입니다. 앞으로 많은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믿고 있어요.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글쎄요. 누가 구체적으로 어떤 음모를 꾸몄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오히려 상대들은 음모론을 제기했다고 펄펄 뜁니다.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하하.”
-이왕이면 경선에서 완주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지적이 있었는데….
“그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순회경선제도란 미국의 예비선거 제도를 본뜬 것 아닙니까? 미국에서도 처음 출발한 후보가 끝까지 완주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모두 초반이나 중반에 여러가지 이유로 포기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경선에 참여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을 때 그만두는 것이 정상입니다. 무슨 쇼하는 겁니까?”
-지방선거 때 민주당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고 자민련과 공조를 선언하고 자민련 후보들을 지원한 것에 대해서는요.
“내가 자민련 누구를 지원했다는 말입니까? 충북의 자민련 도지사후보 몇 차례 지원한 것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충북에서 한나라당 도지사가 당선되면 우리 당에 좋은가요. 그리고 나는 평의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서울 경기 인천 충청권 강원도 등을 돌며 우리당 후보들을 지원했습니다. 내가 잘했다고 얘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제기한) 그분은 내가 뭘 했는지 바로 보지 않고 비난을 하기 위해 비난을 한 것입니다.”
-노풍(盧風)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어느 회사의 주식을 조작하면 폭등하지 않습니까? 거짓정보를 광범위하게 퍼뜨리고 어떤 조직의 영향력을 통해 일반 대중들이 믿도록 만들면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죠. 그러나 거짓은 오래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실이 드러나면 바로 무너져버리고 말죠.”
-반대로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노풍의 영향으로 민심이 한때 움직인 것은 사실입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다수 사람들이 노풍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은 곧 국민들 마음속에 변화를 향한 욕구가 잠재해 있었고, 그 변화의 욕구와 노풍과 맞아 떨어져 바람이 일어났다는 것으로.
“바람이 일어났다는데 그 바람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봄에는 산이 말라 있어요. 성냥불 하나로 산을 다 태울 수 있습니다. 여름에는 산이 젖어 있어요. 장작불로도 산을 태우지 못합니다. 봄 산에 불이 났는데 산이 말라 있으니까 불이 난 것이다, 그러니 불을 붙인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 이렇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정치란 국민들을 감동시키고 누가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느냐에 따라 지지를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이인제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단기필마로 나서 용기와 도전의식으로 500만표를 얻었습니다. 정치인 이인제 하면 용기와 저돌성, 과단성 이런 것이 국민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런 용기와 저돌성을 기대하는 국민들도 있습니다.
“국가의 장래와 관련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저의 입장을 밝혀 나가겠습니다. 북한의 서해 도발에 관한 나의 입장이나, 근래 들어 권력구조 개편에 대한 나의 견해 등 구체적인 사안에 관해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나의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 국회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나라의 장래와 국민의 행복에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몸을 던져 행동해나갈 생각입니다.”
지난 경선 때도 드러났지만, 노후보를 향한 이의원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비록 같은 정당 소속이지만 두 사람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사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두 사람이 과연 언제까지 같은 배를 타고 항해할 수 있을까. 파국이 임박했다는 느낌은 확신처럼 다가왔다.
-7월10일 노무현 후보가 8·8재보선 승패와 상관없이 100% 개방형 예비선거로 재경선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구체적 시한을 8월 말로 못박고서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관심도 없거니와 무슨 주장인지 알 수가 없어요. 쉽게 ‘나는 어떤 경우에도 후보를 사퇴하지 않겠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데 그 말을 이상하게 비틀어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어요. 재경선이란 현 후보가 사퇴해야만 가능한 절차 아닙니까? 사퇴란 뭡니까? 후보를 그만둔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왜 또 자기가 출마합니까? 그러려면 사퇴를 안 해야지요. 그의 말은 어떤 경우에도 후보를 사퇴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정직하게 얘기하면 될 것을 무슨 소린지 모를 알 수 없는 복잡한 논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어요. 나는 관심이 없어요.”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될 꿈은 접었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재경선이 실시되더라도 참여할 의지가 없다고 봐야겠군요.
“그 말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라니까요, 그 이상은 나한테 물으면 안 됩니다. (노후보에게) 한번 가서 물어보시죠. 그게 무슨 말인가. 하하하….”
-노후보의 10일 발언을 당내 비주류에게 탈당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선수를 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6·13지방선거는 민주당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선거결과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6·13선거 결과를 당에서 어떻게 분석하고 평가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관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6·13선거 결과는 패배라는 평가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지역에서 우리 당은 존재 의미를 부정당했습니다. 영남 강원 서울 경기 인천에서 한나라당 1당지배체제가 확립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당은 견제세력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됐죠. 패배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평가 위에서 새로운 모색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새로운 모색’이라는 이의원의 표현이 예사롭지 않다. 드디어 그의 속내가 드러나는 순간이라는 느낌에 내처 새로운 모색의 내용에 대해 따지고 들었다.
-새로운 모색이라는 게 뭡니까. 새로운 정치질서, 새로운 정치판 변화를 의미합니까.
“우리 당의 많은 분들이 절치부심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흐름이 형성되지 않겠습니까?”
-이의원께서 생각하는 바람직한 한국적 정치구도는 어떤 것입니까.
“지역구도 극복은 물론이고 보혁구도도 적절치 못합니다. 보수와 진보, 좌와 우로 정계를 운영해온 유럽에서조차도 그런 패러다임이 변질되고 있지 않습니까? 보수와 혁신으로 사회경제 구도를 가른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나도 명쾌한 해답을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다만 관치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 또 산업경제에서 지식경제로의 발전, 한반도의 냉전구도를 어떻게 해체하고 화해와 협력을 통해 통일을 어떻게 성취해 나가느냐 하는 구체적이지만 큰 과제에 대한 접근방법의 차이, 이런 것들을 근거로 정계가 짜여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대북정책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고 사회경제정책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이런 논쟁들이 정치구도로 모양을 갖춰나갈 것으로 보고 있어요.”
-현재 정치구도가 이상적인 상태는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지금 정치질서는 3김시대의 구도입니다. 내용을 보면, 지역패권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고,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 대결을 펼치고 있으며 냉전논리와 탈냉전논리 충돌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퇴임으로 3김시대는 막을 내리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3김시대의 정치구도와 정치문화도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개헌주장을 통해 제기하고 있는 권력구조 개편도 바로 그 핵심적인 과제죠. 3김시대의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권력질서가 아니고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고 분점하고 공유하는 정치문화로 가기 위한 새로운 계기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3김시대의 낡은 정치질서에서 벗어나 변화로 가는 모티브로 권력구조의 개편이 이뤄져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그렇습니다. 하나의 기폭제가 될 겁니다.”
이의원은 “지금부터 이의원을 중심으로 변화의 바람이 일어난다, 이렇게 해석해도 되겠느냐”고 하자 “나는 교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건 내 뜻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개헌론을 제기하며 정치권 전면에 나서면서 이의원은 단단히 작심한 듯하다. 인터뷰 말미,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여튼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를 위해 헌신할 생각입니다. 나는 또 다른 3김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