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3학년 기록은 조금 차이가 있다. ‘반장으로 활약이 많았음’. 정의원은 학급의 리더가 되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임환(74)씨는 정의원을 이렇게 기억한다.
“통솔력이 있었지만, 장난이 심한 학생이었다. 아이들을 이끌고 놀러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종아리를 때린 적도 있다.”
정의원의 성적은 중상위권. 전교 490여 명 가운데 100등 안팎을 유지했다. 2학년 때가 63등으로 가장 좋았으며, 1학년(104등) 때와 3학년(106등) 때는 조금 떨어졌다. “몽준이는 머리가 좋은 데다(지능지수 131), 과외수업까지 받아서 성적이 우수했다.” 임환씨의 회고다.
고 정주영 회장은 당시에도 정의원을 아꼈던 모양이다. 한번은 담임을 찾아와서 “자동차로 등하교를 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담임이 “그렇게 하면 다른 학생들의 미움을 받는다”고 권하자, 그냥 걸어다니게 했다고 한다.
1960년대 후반 전국의 수재들은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앙중학교에서는 전교 150등 안에 들면 경기고 합격권으로 간주됐다. 따라서 정의원은 경기고에 도전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고등학교는 중앙중학교의 우수한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모교를 살리고, 민족사학의 자존심을 되찾자’는 게 주된 명분이었다. 정의원은 이런 케이스로 1967년 3월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정의원은 고교 시절 결석이 많았다. 고1 때는 11일, 고2 때는 6일을 빠졌다. 생활기록부 상에는 모두 ‘질병’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정의원은 이 무렵 ‘예사롭지 않은’ 사건에 휘말렸다. 정의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제가 권투 도장에 다녔어요. 권투를 배우니까 상대방의 주먹이 날아오는 게 훤하게 보이더라구요. 언젠가 한번 싸움이 붙었는데, 나한테 맞은 녀석이 애들을 잔뜩 불러온 거예요. 여름인데 완전히 피가 묻고…. 그 일로 1주일 정도 학교에 가지 못했어요. 그 친구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요.”
정의원은 고교 시절 운동을 좋아했다. 특별활동으로 농구반을 택했고, 축구부 선수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그는 저녁 무렵이면 먹을 것을 사들고 축구부 숙소를 찾곤 했다. 하지만 정의원의 축구실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정의원이 중앙고에 다니던 시절, 중앙고 축구부는 강호였다. 학교측이 고아 선수들을 받아들이면서, 전국대회를 잇따라 제패했던 것. 정의원은 2002년 2월24일 KBS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이때 만난 사람도 중앙고 축구부를 지도했던 정신택 선생님이다. 정의원은 지금도 정선생님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다. 정선생님은 운동장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두 하늘을 한번 봐라. 눈물겹도록 아름답지 않으냐. 저 하늘보다 더 푸른 꿈을 키워라.’
정의원은 체육과 영어 독일어 성적이 좋았다. 체육은 워낙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이고, 외국어는 일찍부터 열심히 공부한 덕분이었다. 반면 의외로 성적이 나쁜 과목도 있었다. 1학년 때는 수학, 2학년 때는 생물 음악 정치경제, 3학년 때는 교련에서 ‘양’을 받았다.
정의원은 고교 시절 남다른 리더십을 보였다.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박중석(현 중앙고 영어교사)씨의 말이다. “몽준이는 공부를 잘했어요. 멋있게 생긴 데다 인심까지 후해서, 거의 모든 아이들이 좋아했어요.”
행동발달사항도 중학교 때와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2학년 때는 ‘노력형’, 3학년 때는 ‘온순하고 성적 우수함’으로 나와 있다. 석차는 문과생 160명 가운데 5∼9등으로 매우 우수했다. 정의원은 2학년 때 희망대학에 ‘서울대 상대’라고 썼는데, 실제로 꿈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