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상태는 심각해졌다. 망치를 들어 제 언니를 때리고,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와 휘둘렀다. 산부인과와 성폭력상담소를 찾았다. 의사는 “아이는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 믿으시는 게 좋겠다”고 진단했다.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은 그날 이후 막을 내렸다.
그날 저녁 42도의 신열이 아이를 덮쳤다. 맨발로 정신없이 뛰어간 병원 응급실에서 아이는 침대 밑에 숨어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아이를 진찰한 소아정신과 의사는 폐쇄병동 입원을 권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 집에 왔지만 엄마도 제 정신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한 말을 갖고 뭘 그러느냐, 과민반응하지 말라”는 시댁 식구들의 만류를 뒤로한 채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들어섰다. 이미 아이뿐 아니라 엄마도 환자였다.
병원에서 아이의 행동은 끔찍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어린 딸은 시도 때도 없이 자위를 해 댔다. “엄마는 왜 선생님처럼 못 만져줘?” 동물처럼 먹고 자기만을 반복하는 아이 앞에서 엄마는 무너져내렸다. 가족을 돌보는 일도, 큰아이를 살피는 일도 모두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3년의 세월이 지난 2001년 5월, 엄마는 법정에 서있었다. 검찰에서는 유치원 원장 부부를 불기소처분했지만 민사소송에서는 다를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지루한 싸움 끝에 얻어낸 승소판결. 법원은 “아동 성추행에 대한 사회적 경종을 울리기 위해”라는 이유로 6000만원의 적지않은 배상판결을 내렸다. 돈이 아이를 예전대로 돌려놓을 수는 없었지만, 이겼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사는 수많은 아이들과 그 부모들을 위한 첫걸음은 될 수 있었다.
사업체를 운영하던 평범한 여성 송영옥(43)씨가 ‘아동학대 근절을 위한 가족모임’(이하 가족모임)의 대표 ‘싸움꾼’이 된 것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였다.
美, 피해 부모 80% 이혼
“XX이 엄마, XX이 사건 이겨야 되는 거 맞는데, 나는 오는 사람한테마다 진다고 말해요. 현실이 그러니까. 정말 길고 힘든 싸움이에요.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엄마가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정신 놓지 말고, 밥 세끼 꼬박꼬박 챙겨먹고. 쉽지 않겠지만 가능한 한 정상생활을 유지하고요.”
2002년 6월 말 기자가 방문한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족모임 사무실. 송영옥 대표는 찾아온 피해자 가족과 상담 중이었다. 역시 형사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기각결정이 내려진 사건이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법원의 결정에 피해자 가족은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가족모임은 지난해 10월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그전부터 자신의 사건이 진행되던 와중에도 송대표는 많은 피해 어린이 가족들을 만나 대응방법이나 후유증 방지를 위한 병원치료를 안내해 왔지만,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체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말 그대로 ‘모임’이었던 가족모임은 7월 하순 사무국 체계를 갖추고 좀더 조직적인 활동을 벌일 예정. 송대표가 그동안 만난 이들만 어느새 100여 가족을 넘어섰다.
“아이가 겪는 후유증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가족들의 삶도 완전히 붕괴됩니다. 이 일을 하다보니 술값이 가장 많이 드는 거예요. 힘들어하는 부모들이 한밤중에라도 전화를 걸어오면 같이 울어주고 위로해줘야 하니까. 상처를 모두 극복하고 나면 다른 피해 가족들을 받은 만큼 도와주라고 얘기하곤 하죠.”
가족모임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성폭력 피해 어린이 부모의 80%가 이혼에 이른다. 아이에게 닥친 사건의 충격이 가족 전체로 번져나가는 것이다. 가족모임이 올해 가장 큰 사업목표로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성폭력 피해 어린이 치료센터’에 가족에 대한 치료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송대표는 “성폭력 피해를 당한 아이들에게는 반드시 징후가 있다”고 말한다. 부모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할 뿐이지, 분명히 평소와는 다른 행동양식을 보이기 마련이라는 것. 특히 유치원이나 놀이방 등에서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한 아이들의 경우, 이를 바로 간파하지 못한 부모는 두고두고 씻을 수 없는 자책감에 시달린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돼요. 저만해도 아이와 함께 병원에서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어요. ‘성폭행 당했다, 안 당했다’를 두고 계속 입씨름만 했으니까요. 열 살도 안된 어린 딸이 남자를 밝혀 남자화장실에 숨어 들어가거나, 아니면 아예 아빠를 거부하는 걸 보면서도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가정은 흔치 않죠. 부부 사이도 마찬가집니다. 우선 부부관계를 갖기 힘들어지고, 특히 엄마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많아 시댁 식구들과 사이가 벌어지기 쉽죠.”
송대표 역시 사건 진행과정에서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이전부터 사업체를 운영하며 ‘여장부’ 소리를 듣던 그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삶의 모습은 완전히 변했다. 농담 삼아 한마디를 던지며 껄껄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 뒤로 언뜻 그늘이 엇갈린다.
“남들이 그래요, 내가 전형적인 미국식 케이스라고. 내가 빨리 재혼에 성공해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야 흘륭한 극복 사례가 되는 건데 말이에요.”
사건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대개 폐쇄병동에 격리 수용된다. 그러나 성인 정신질환자나 알코올·약물 중독자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병동은 아이들에게 오히려 더 큰 스트레스를 준다. 상태가 비교적 나쁘지 않은 경우라 해도 엄청난 돈이 치료비로 들어간다. 정신질환 상담의 경우 단기간에 치료효과가 나타나기 어려워 비용이 만만치 않다.
“피해자 가족들이 치료를 꺼리게 될까 걱정이 되지만, 현실이 그래요. 제가 처음에 받은 6000만원 배상 판결은 아이 치료하는 데 드는 3000만~5000만원의 비용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간혹 재판에 나가보면 가해자 변호인들이 피해 어린이 부모들을 ‘이 기회에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 취급하는 경우가 있어요. 한마디로 기가 막히죠.
법원도 이런 현실을 몰라요. 그러니 배상 액수가 터무니없이 적은 거예요. 이 역시 저희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충분히 조사해서 객관적인 데이터를 만들었다가 판사에게 제시할 계획이에요. 할 일이 많아요. 바쁠 수밖에 없죠.”
강간사건이 발생한 경우 초기에 대응하는 시스템은 예전에 비하면 상당부분 개선됐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지난해에는 성폭력피해상담과 의료지원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성폭력위기센터’가 문을 열었고, 경찰병원 등에 ‘성폭력 의료 지원센터’가 설치됐다. 한편 지난 5월 여성부는 성폭력 피해에 대한 증거 수집을 도와줄 ‘성폭력 응급키트’를 개발해 전국의 성폭력 피해자 전담의료기관, 보건소 등에 보급했다.
그러나 상당수 병원들은 아직도 성폭력피해자에 대한 진료를 반기지 않는다. 지난해만 해도 서울의 대학병원 2곳과 경기도의 종합병원 2곳이 진료를 거부해 가족들이 고소하는 일까지 있었다. ‘의사들의 책임 방기’라는 송대표의 질타가 매섭다.
“귀찮다는 겁니다. 경찰이나 검찰에 참고인으로 불려다녀야 하니까요. 그 사람들 입장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대여섯 시간 왔다 가봐야 지급되는 건 교통비 1만원이 전부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전문인력이 필요한 겁니다. 최소한 대형 종합병원에는 이 일을 맡아줄 의사가 있어야 해요.”
“엄마는 아동 성폭력 하러 다녀요”
더 큰 문제는 단순한 긴급대응이 아닌 장기 심리치료. 특히 아동 성폭력의 경우에는 전문적으로 아이들을 돌봐줄 의료인력이 많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대한민국의 소아과 전문의 3400여 명 가운데 소아정신과 담당은 100명을 넘지 않는다고 송대표는 말한다. 그나마 성폭력 피해 어린이들을 전문적으로 보살필 만한 역량을 갖춘 곳은 극히 드물다.
지방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서울 안에서도 거리가 먼 곳에 있는 가족들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 생계를 포기하며 병원을 찾아야 한다. 성폭력 피해 어린이의 상당수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중하층 가정 자녀들임을 감안하면 가족들이 부담하는 경제적 비용은 치료비에 그치지 않는다.
피해 어린이에 대한 심리치료는 단순히 권장사항으로 그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질 손상이나 성기 이상 등의 신체적 피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심리적 후유증이나 성적 후유증이라는 것이다. 내일청소년상담소가 올해 4월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성적 후유증을 앓는 피해 어린이의 33%가 자위행위를 하고, 40% 가까운 어린이들이 성에 대한 공포나 불안증세를 보인다. 죄의식이나 악몽, 우울증 등의 심리적 후유증은 물론 자살을 시도하거나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극단적인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던 송대표의 딸 꽃님이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는 꼬박 7개월이 걸렸다. 아빠와 북한산에 오른 딸아이는 문득 말을 꺼냈다.
“죄송해요. 엄마가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는데, 이제 다 나은 것 같아요.”
며칠이 지나 병원에 가는 길에 아이는 꽃집에 들러 꽃 한 송이를 샀다. 공작실에 앉아 혼자 조물락거리던 아이는 초콜릿과 꽃을 포장해 들고 나타났다. 비뚤비뚤한 글씨로 써내려간 카드 위에는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제 저 안 와도 될 것 같아요”라고 쓰여 있었다. 그날 송대표는 담당의사를 부여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요즘에는 어떻게 지내냐고요? 아주 잘 있어요. 벌써 초등학교 3학년인 걸요. 공부도 전교 1등 해요. 하루는 아이가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그랬대요. ‘우리 엄마는요 사업해서 돈 벌어 갖고 아동 성폭력하러 다 쓰고 돌아다녀요.’ 그 얘길 전해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가족모임은 피해 가족들의 경찰조사나 재판과정을 돕는 일도 벌이고 있다. 사건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송대표의 말. 아직 미비한 부분이 많은 한국의 법체계에 대해 분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성폭력 피해자가 생기면 우선 진술능력이 있는지 검사부터 합니다. 우리나라는 그게 안돼 있어요. 아이들에게도 어른과 똑같이 6하원칙에 따른 진술을 하도록 요구하죠. 이럴 때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신이 대신 나서서 진술하곤 합니다. 상황이 명확지 않아도 경찰이 원하는 형식에 끼워 맞추고요. 나중에 재판정에 서면 항상 이게 문제가 돼요. 당사자가 아니니까 허점이 생기기 마련이고, 가해자측 변호사는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진술의 증거 능력을 무너뜨리는 거죠.”
꽃님이 사건이 진행되던 당시 송대표는 검사 앞에서 “나는 모른다. 단 우리아이 말은 믿어달라”고 반복했다고 말한다. 사건이 끝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것이 가장 정확한 대응이었다는 것. 가족모임을 돕고 있는 법조인들 역시 마찬가지 견해였다. 이후로 가족모임을 찾는 피해 어린이 엄마들에게는 “절대로 모르는 일을 대신 진술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몇월 몇일 몇시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이들의 증언에도 명백히 신뢰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예를 들어 장소에 대한 기억은 아주 구체적이다. 단순히 놀이방이 아니라 어느 탁자 옆에 있는 어느 의자에서였다는 것까지 기억할 정도라는 것. 또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내는 일관된 표정이나 제스처들도 신뢰할 만한 단서들이다. 그러나 사법부가 이러한 ‘맥락’을 증거로 인정해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아직 많지 않다는 것이 관련단체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아동 학대사건에서 자주 문제가 되는 것은 아이들이 간혹 실제로 일어난 일과 자신의 상상을 섞어 말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본능적인 기제다.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었다던가, 당시 주위에 맥락 없이 흩어져 있던 사물들을 의인화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어른들이 듣기에는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유치원 교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한 어린이는 “묶여있는 자신을 다른 선생님이 구해주었다”고 진술했다. 법정에서 아이가 지목한 선생님이 “풀어준 적이 없다”고 진술하자 법원은 아이의 말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사법부의 이해의 폭이 너무 좁아요. 아이들의 심리상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아이들이 당시 상황을 묘사해 그린 그림을 나중에 확인해 보면 사진처럼 정확해요. 아이들은 초콜릿 두 개 먹고 하나 먹었다고 거짓말은 합니다. 옆 아이 때려놓고 안 때렸다고 발뺌하기는 하죠. 그러나 없는 일을 ‘성폭행당했다’고 꾸며내는 경우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어린이 성폭력 문제를 둘러싼 사법부에 대한 불만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경찰, 검찰, 판사 등 피해 어린이는 사건 조사과정에서 대여섯 차례에 걸쳐 폭행 당시의 상황을 진술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가 겪는 심리적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부모 역시 아이를 법정에 세워가면서까지 소송을 진행하는 일을 포기하는 원인이 된다.
관련 시민단체들이 형사소송법 상의 증거보전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행 형사소송법은 “검사, 피고인, 피의자 또는 변호인은 미리 증거를 보전하지 아니하면 그 증거를 사용하기 곤란한 사정이 있는 때에는 제1회 공판기일 전이라도 판사에게 압수 수색, 검증, 증인신문 또는 감정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의 주장은 피해자나 그 법정 대리인도 증거보전을 신청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는 것.
“아이를 염려하는 검사가 나서서 증거보전을 신청해주면 다행이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요. 대신 산부인과 의사나 소아정신과 의사 같은 전문가가 입회한 상태에서 아이의 상태와 진술을 확보하자는 겁니다. 녹취도 좋고 비디오 촬영도 좋지요. 그 증거능력을 인정하면 두번 세번 아이가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막을 수 있으니까요.”
가해자 성기 길이 묻는 경찰
재작년 경기도 일산에서 일어난 사건을 송대표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파트 베란다를 넘어 들어온 강도가 자고있던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 선희(가명)를 성폭행한 사건이었다.
사건 발생 며칠 뒤에 만난 아이는 송대표에게 “범인을 잡아달라”고 말했다. 마음 고생이 심했던 선희의 엄마는 얼굴 가득 새까맣게 기미가 껴서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송대표는 아이에게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소설을 읽어보라고 당부했다.
“‘네가 당한 일은 네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화산폭발이나 장마처럼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해서요. 책임이 있다면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나라와 사회와 어른들의 몫이겠죠. 선희에게 ‘너는 이제 가만히 있으면 된다. 어른들이 낫게 해주겠다’고 말해줬죠.”
송대표는 피해 어린이들을 만날 때면 자신의 딸 꽃님이를 데리고 나간다. 힘든 일을 겪었지만 이제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꽃님이를 보면서 아이들도 마음을 연다는 것. 선희의 얼굴에서 처음 희망을 본 것도 꽃님이와 함께였다.
선희의 경찰 조사과정에 송대표는 ‘이모라고 연막을 치고’ 입회했다. 지금은 많은 부분이 개선됐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경찰의 수사방식은 엉망이었다. 담당 형사는 아이 앞에 30cm자를 꺼내놓고 가해자 성기가 몇 cm였는지, 몇 분이나 폭행을 당했는지 물었다. 기가 막혀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송대표의 회고다.
“경찰서를 폭파시켜 버리고 싶더라고요. 소리를 질렀죠. ‘당신은 딸이 강간당할 때 길이가 얼마고 몇 분이나 당했나 생각하겠느냐’고요. 그랬더니 담당 형사가 바뀌더군요.”
수사가 진행되면서 아파트 앞뒤 동이 똑같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몇몇 피해 가족들은 조용히 이사 가버렸다. 범인은 현장에 거의 단서를 남기지 않을 만큼 지능범이었다. 경찰은 계속되는 추적 끝에 베란다 난간 안쪽에서 어렵사리 찾아낸 지문을 갖고 인근 주민들의 지문과 일일이 대조해 나갔다. 범인은 예상했던 대로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던 20대 남자였다. 범인을 지목하러 가는 선희와 함께 경찰서를 찾았다. 아이는 포승에 묶여있는 범인을 보고 박수를 쳤다. 아이의 원한과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원칙적으로 피해 어린이는 가급적 가해자와 대면하면 안됩니다. 법정에서 마주쳐도 쇼크를 받는 일이 허다하니까요. 그렇지만 결박당한 채 고개를 숙인 가해자를 보면 오히려 기뻐하죠.”
이 사건을 계기로 송대표는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경찰에 성폭력 전담팀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다른 여성단체, 시민단체 운동가들과 함께 국회의원들, 경찰 간부들을 설득해 나가기를 수개월, 마침내 지난해 경찰청 방범국에 여성실이 신설됐다. 여경들로 구성된 전담요원은 경찰청에 5명, 14개 지방경찰청에 각 2명, 전국 경찰서에 1명씩 263명이 배치돼 여성범죄 수사를 전담하게 됐다. 작지 않은 진전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직후의 대처방법은 상당히 나아진 셈이에요. 일단 산부인과에 가서 증거를 확보하고 아이를 치료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하고요. 그러나 법적인 체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많은 사건이 묻히게 됩니다. 상담을 진행하다가도 포기하고 연락을 끊은 부모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아이를 보내고 나면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몰라요.”
그는 할 말이 많다. 평소에는 아동 성폭력 문제에 무관심하다가 사건이 터져야만 덤벼드는 언론도 불만이고, 여성 성폭력에 관한 사업을 벌이면서도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은 듯한 여성부나 관련 단체들에도 퍼붓고 싶은 이야기가 한 보따리다. 그런가하면 성추행이 벌어진 어린이시설 운영자가 버젓이 계속 영업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주는 교육부나 지방자치단체도 밉기는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흔히 물어요. 도대체 무슨 에너지로 그렇게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냐고요. 다른 거 없어요. 제가 당사자였으니까 그 마음을 잘 아는 거죠. 피해자 엄마는 무엇이 절실한지, 어디가 문제인지 모두 알거든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해요. 그 일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은 거의 정리하다시피 한 사업도 더 잘 나갔을 테고, 이혼도 안 했을 테고. 혹시 사업이 잘 돼서 떼돈이라도 벌 수 있지 않았을까.”
송대표는 계속 기자에게 “자신은 ‘인권운동가’라는 제목에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권이 무엇인지, 운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 다른 피해자 사건을 쫓아다니다 보니 정작 자신의 사건에는 신경도 못썼다. 1심에서 6000만원 배상판결을 받았던 것이 올해 2심에서 2000만원으로 줄어들었다.
“그 정도로 정신없이 뛰어다닌 거죠. 그냥 내가 견딜 수가 없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가만히 앉아있으면 참을 수가 없어서. 고등학교밖에 못 나온 무식한 여편네가 뭐 거창한 목표가 있었겠어요. 그저 내 딸아이 지키지 못한 자책감을 털어버리고 싶었던 욕심이었겠죠.
그렇지만 후회하진 않아요. 6000만원이 아니라 6억, 60억원을 배상받는다 해도 모든 것이 깨끗하게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군가 일을 당하면 처음 제가 느꼈던 그런 막막함, 그런 분노 대신 아픔을 나누고 힘을 함께할 곳이 늘어났다는 거예요. 일단은 그 정도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난 7월11일 오후 가족모임의 사무실은 축제 분위기였다. 검찰이 꽃님이 사건에 대해 내린 불기소처분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수사가 미진했다”며 취소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 송대표가 서울지검 서부지청 담당검사를 상대로 낸 헌법소원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송대표를 찾는 언론사들의 문의전화가 쉬지않고 사무실을 울렸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을 통해 “검찰은 ‘피해 어린이가 추행 일시, 횟수, 정황 등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증명력이 부족하다’며 불기소처분을 내렸지만,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엄마와 의사에게 말하게 된 경위가 자연스럽고, 일부러 꾸민 것으로 보기에는 내용이 너무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므로 이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건발생 4년 만에 이뤄진 이날 사법부의 결정은 아이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증거불충분’을 들어 무죄나 불기소처분을 내려온 관행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만한 판결이었다.
가족모임 식구들은 이날 하루 맘껏 기쁨을 누렸다. 또 다른, 그것도 아주 의미 있는 일보전진이었기 때문이다. 아동 성폭행 관련 운동가들에게 7월11일은 두고두고 기억하게 될 기념일이 된 셈이다. 송대표 역시 감격을 누르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아지고 있는 겁니다.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거고요. 곧 있으면 상처 입은 아이들이 좀더 따뜻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오겠지요.”
흥분한 ‘싸움꾼’의 괄괄한 목소리에 언뜻 어울리지 않는 물기가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