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평양에 서점 내는 게 내 꿈”

대훈서적 김주팔 대표의 북한 책 이야기

  • 글: 정영 시인·자유기고가 jeffbeck0@hanmail.net

    입력2002-11-05 14: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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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일곱 살에 헌책방 주인이 된 이래 책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건 사람. 현재 대전에서 가장 큰 서점인 대훈서적을 운영하며 북한 책 12만권을 소장한 사람. 화려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은, 그러나 다 읽고 나면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오래된 책 같은 김주팔(61)씨. 그가 들려주는 ‘책과 내 인생.’
    “평양에 서점 내는 게 내 꿈”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건물엔 ‘서울·평양문화교류협회’와 북한도서 전문서점이 있다. 대훈서적 대표 김주팔씨가 열어놓은 곳으로 대전에 있는 그의 집 건물에 자리한 북한전문서점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종종 실향민들이 찾아와 향수를 달래기도 하고, 북한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자주 찾는다. 책을 구해줄 수 있느냐는 문의도 많다. 그는 그때마다 반갑게 맞아준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책을 읽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게 그는 무엇보다 기쁘다. 그가 책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처럼, 어떤 책이든 구해줄 수 있는 서점을 경영하는 게 책장수로서 그의 지론이다.

    “1988년에 북한 책을 찾는 교수가 있어 도쿄와 홍콩까지 가봤는데도 찾는 책이 없더군요.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책도 못 구하는 내가 무슨 책장수인가. 책장수도 그야말로 꾼이나 쟁이가 돼야 한다고 봅니다.”

    국내엔 전문서점이 많지 않아 쉽게 구하지 못하는 전문서적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김씨로선 그 점이 무척 아쉽다. 그래서 그는 필요한 책을 찾을 수 있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북한서적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나는 책 장사꾼이지 학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북한연구 학자들에게 자료를 제공해주는 게 그렇게 보람될 수 없어요.”

    통일을 앞당기려는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들이 원하는 책을 구해다주는 것뿐이라는 그는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이 결코 거창하진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이야말로 통일을 앞당기는 데 한몫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동독의 책이 사라지더군요. 그건 역사가 사라지는 겁니다.”

    김씨가 북한 책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다. 이전에도 몇 권씩 구해보려고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북한 책을 사 모은 건 그때부터다. 북한 책은 배급제여서 초판만 찍어 부수가 많지 않고, 판매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가격이 매겨지지 않은데다 취급하는 서점도 없다. 그래서 없어지기 일쑤고, 책 구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 해야할 일이란 생각에 그가 나섰다. 조국의 역사가 사라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책으로 앞당기는 통일

    김씨는 1990년 중국 옌볜에 처음 갔을 때 우리말글을 지키고 사는 조선족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그들은 평양과 자매결연을 하고 북한작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조선문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 초판을 산 게 북한책 모으기의 시작이다. 김씨는 1947년에 나온 ‘조선문학’ 창간호부터 최근호까지 모두 소장하고 있다. 그 책들을 보면 언제부터 가로쓰기를 했는지도 알 수 있고, 어떤 문화적 변화들이 있었는지도 한눈에 보인다. 1989년부터 지금까지 그가 모은 북한 책은 모두 4200여 종 12만여 권. 책 구입 비용만도 20억원에 달한다.

    “1989년에 처음 옌볜에서 북한 책을 사들여오는데, 공항에서 다 뺏겼어요.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구속 안하고 보내주는 것만도 고맙게 여기라더군요.”

    그렇다고 사라지는 책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옌볜에 창고를 마련해 보관하기 시작했다. 간간이 교수들을 위해 몇 권은 숨겨서 들여오기도 했다. 쉽잖은 일이었다. 그래서 북한 책 수입을 허가받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계속 미뤄졌고, 생각다 못한 그는 1999년 어느날 문화부장관이 행사차 온 곳을 찾아 직접 말할 기회를 만들었다.

    “정치도 경제도 아닙니다. 책이 통일을 앞당길 수 있습니다. 북한을 연구하고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학자들에게 북한 책을 가져다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어렵던 것이 20일 만에 허가가 났다. 북한 책을 수집한 지 10년 만에 특수서적취급허가증을 받은 것이다. 기뻤다. 그해 8월 옌볜에 있던 책을 다 들여왔다. ‘두드리면 열린다.’ 그의 인생관은 변함이 없다. 지금은 웬만한 책은 다 구입할 수 있다. 북한 책의 70% 가량만 북한에서 가져오고 나머지는 중국·러시아 등지에서 사온다. 남들이 가당치 않다고 말해도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런 날이 왔듯, 통일도 금세 이뤄질 것이라 김씨는 믿고 있다.

    “북한교과서가 특수물이라뇨? 참 우스운 일이지요.”

    김씨의 사무실 한켠엔 북한 책 중에서도 특수물만 보관해둔 공간이 따로 있다. 자물쇠를 채워야 하는 곳이다. 그가 가진 북한 책 가운데 공개·판매할 수 있는 건 150여 종뿐. 들여오긴 했으나 공개하지 못하는 책이 대다수다. ‘김일성 자서전’ ‘김정일 선집’ ‘만고의 위인 김정일’ 등과 같은 책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교과서 역시 특수물이어서 그 내용을 공개할 수 없다. 공개할 수 있는 종류는 순수문학, 의학, 예술, 조선말사전 정도다. 그는 교과서마저 특수물로 지정된 게 우습지 않으냐며 반공교육을 하려면 이걸 보여주는 게 오히려 낫겠다고 한숨을 내쉰다. 그는 북한 책을 다 공개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그 책들을 보고 부화뇌동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평양에 서점 내는 게 내 꿈”

    김주팔씨가 모은 북한 책들 중 ‘조선문학’의 일부

    지난해부터 그가 북한 책을 가지고 국제도서전이나 박람회, 전시회 등에 참가할 때도 조건부로 승인받을 수 있었다. 책 서문에 나온 김일성·김정일 숭배·찬양 문구를 삭제하고 전시하라는 것이다. 이번 월드컵 관련 문화행사로 지하철에 책을 전시하고 읽을 수 있도록 했던 ‘메트로북메세’에선 진짜 북한 책을 전시하지 못해 모형과 팸플릿으로 대신해야 했다. 그는 이런 일들이 두고두고 마음 아프다. 그래도 그나마 북한 책을 들여올 수 있고, 어느 정도라도 볼 수 있으니 다행이라며 애써 마음을 달랜다. 그가 아니면 언제 우리가 북한 책을 구경해볼 수 있겠는가.

    조선료리책, 어린이피아노교측본, 만화책 같은 것들은 어쩐지 신기하고 흥미롭다. 질이 떨어지는 종이를 사용한 것들이 대다수지만 요리책 같은 화보 위주의 책들은 지질이 좀 낫다. 김일성·김정일에 관련된 책들엔 고급 종이를 쓰고 대개 양장본으로 만든다. 그러나 현재 북한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는 글자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질 나쁜 종이에 인쇄술마저 형편없다. 그 책을 보고 공부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그의 말대로 책을 구경하기만 했는데도 북한의 현실을 비교적 쉽게 엿볼 수 있었다.

    김씨는 현재 북한에도 없는 책을 몇 가지 소장하고 있다며, 사라지지 않게 돼 다행이라고 말한다. ‘조선대백과’와 ‘조선문학’ 대부분은 북한에도 없다. ‘조선대백과’는 올해 초까지 일반물이었는데 현재 특수물로 묶여 있다. 그는 ‘조선대백과’야말로 북한을 이모저모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인데 공개하지 못하게 됐다며 아쉬워한다.

    “문화 자체를 너무 편협한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아 화도 나고 속도 상합니다.”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책에 ‘이조실록’도 있는데 한 질이 400권이다. 그 책을 평양에서 103질이나 들여왔다. 북한 ‘이조실록’은 우리 번역본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한자 숙어가 없다는 것. 전부 순우리말로 풀어놨다. 북한에서 30년간 번역한 것이라 하니 예술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 책들에 어떻게 값을 매기겠어요? 책은 역사의 산물입니다.”

    짐자전거로 시작한 인생

    “지게 지기 싫어서 짐자전거로 책 나르기 시작했어요.”

    김씨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8남매 중 일곱째. 대전에서 태어났지만 바로 논산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가 이동식 정미소를 했고, 한때는 모시도 경작했지만, 그 시절 모두가 그랬듯 생활은 어렵기만 했다.

    전쟁 중 3학년에 편입해 초등학교는 용케 마쳤다. 그러자마자 혼자 대전으로 뛰쳐나왔다. 농사짓기가 죽기보다 싫어서였다. 대전에선 대장간에 들어갔다. 깡통을 주워다 함석을 만들었는데 그러려면 톱밥이 필요했다. 톱밥을 가지러 다니는 게 농사만큼 싫었다. 그래서 간 곳이 양색시 집. “담배 심부름을 하며 살았어요. 거기서 영어를 배웠지요.”

    양색시들 중엔 미군들과 대화하려고 야간학교에 다니는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도 같이 다니며 영어·수학을 배웠다. 그게 힘이 돼서 다시 시골로 돌아가 중학교를 마쳤다. 그러자 부모님은 또 농사를 지으라고 했다. 1년간 농사를 짓다가 다시 대전으로 도망쳐 나왔다. 갈 곳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 은사가 운영하는 백묵공장을 찾아 취직을 부탁했다. 그게 김씨와 책의 첫 만남. 짐자전거로 책 나르는 일이 그의 첫 일이었고,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 1956년, 그 시절 대전엔 서점이 7개였는데, 말이 서점이지 대개 한두 평 남짓한 도·소매를 겸한 책방에 불과했다. 오전 7시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하면 형의 자취방까지 두 시간을 걸어 새벽 1시에야 도착했다. “그땐 물에 갠 미숫가루와 책이 삶을 지탱해주는 전부였어요.”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 명세표에 쓰인 한자를 몰라 무시당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그는 서점에서 먹고 자며 한자를 익혔다. 한달 후엔 모르는 한자가 없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점은 1년도 안돼 문을 닫았다.

    “빈손으로 집에 가긴 싫었어요. 무엇이든 꼭 이뤄서 돌아가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어쨌든 책에 승부를 걸어야 했죠.”

    그래서 그는 옆 서점으로 출근했다. 돈도 받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는 주변 서점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 머릿속에 다 넣어두고 있었다. 덕분에 손님이 찾는 책을 구해주고 수고비를 조금씩 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서점 주인이 서점 앞에 좌판을 펴고 헌책을 팔 수 있도록 해줬다. 그런 자리마저 서로 차지하려던 때여서 고맙기 그지없었다. 당시엔 교과서가 귀해 헌 교과서 장사가 잘됐다. 그렇게 해서 1년 후 그는 ‘태양서림’이란 간판을 단 서점을 냈다. “2평 남짓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했어요. 그래도 행복했죠. 내 첫 서점이었으니.” 그의 나이 17세 때였다.

    군대에 가느라 서점을 팔아야 했다. 해병대에서 제대해 집으로 돌아오니 다시 농사를 지으라고 했다. 그래서 헌 자전거 하나만 사달라고 조르고 졸라 다시 집을 나왔다. 책 몇 권만 달랑 들고 시골 장으로 돌아다니며 장돌뱅이를 했다. 논어·맹자·천자문이나 춘향전·홍길동전 같은 고전소설들을 팔았다. 장마다 돌았다. “30km 되는 길을 자전거로 아침 일찍 나서도 오후 3시쯤 도착했어요. 장이 파해버린 경우도 많았습니다.”

    겨울엔 비교적 장사가 잘 됐지만 여름 농번기엔 책 읽는 사람이 없어 한철 장사만으로 끝내야 했다. 한해 겨울 번 돈으로 대전 중동 뒷골목을 다시 찾아갔다. 김씨가 돌아간 곳은 늘 서점이었다. 계속 한 가지만 붙잡으면 끝내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다시 책 노점을 시작했다. 그렇게 벌어 ‘동본서점’이란 간판을 달고 두번째 서점을 운영했다. 장사가 꽤 잘됐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가 찾아와 사업을 해보자고 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책을 내던지고 한눈 판 일이었다. 경주의 조개탄 공장을 인수했다. 그러나 곧 주연료가 석유로 바뀌고 얼마 가지 않아 빚더미에 앉았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며 그는 절망감에 휩싸여 방황했다. 사람을 만나기 싫어 매일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종점까지 왔다갔다 했다.

    “가을달 밝은 밤, 빚쟁이가 달려드는데 한없이 서글펐어요. 죽으려고 약을 사기도 했죠. 스물두 살 때였습니다.”

    다행히 마음을 고쳐먹고 아는 사람을 찾아가 3년만 시간을 주면 반드시 갚겠다고 맹세하고 돈을 빌려 시련을 벗어났다. 그런 뒤 형에게 20만원을 빌려 서울로 갔다. 서울 동대문 대학천 도매상에서 동업을 했다. 그러나 서울은 힘든 곳이었다. “기술도 돈도 인맥도 없는 내가 무얼 믿겠어요? 부지런함밖에 없었죠.” 얼마 안가 동업자가 노름에 빠졌다. 김씨는 20만원을 들고 다시 대전 중동으로 돌아와 노점을 시작했다. 다시 길에서 헌책을 팔아야 했다.

    종이쪼가리가 대형서점으로

    “평양에 서점 내는 게 내 꿈”

    자신이 일으켜세운 대훈서적 내부를 둘러보는 김주팔씨

    동아출판사 창고를 관리하던 사람이 교과서 개편 때문에 쓸모 없어진 참고서를 가져다 종이 장사나 해보라고 했다. 당시 주변에 과수원이 많아 포도나 사과를 싸는 봉지로 팔아야겠다 싶어 인수했는데, 운임도 안 나와 절반 넘게 팔다 쌓아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화장실에서 찢어진 신문을 봤는데 교과서 개편이 늦춰졌다는 거예요. 일생일대의 행운이었습니다.”

    종이 쪼가리가 단박에 참고서가 된 것이다. 견본 하나를 들고 서울에 가니 전과와 수련장을 모두 인수하겠다고 해서 제값에 다 팔았다. 당시 돈으로 500만원을 받았다. 그 돈이 김씨의 인생을 다시 일으켰다. 빚 갚고 처음으로 집을 샀다. 그리고 ‘대훈서적’을 차렸다. 그 날 이후 대훈서적은 승승장구했다. 끈질긴 노력의 결과가 지금의 대훈서적을 있게 한 것이다. 대전에서 대훈서적을 물어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평생을 책과 함께 산 셈입니다. 책 파는 것만이 유일한 일이었죠. 책도 많이 읽었어요. 대훈(大訓)이란 명칭도, 대전에서 큰 대(大)자를 따고 배울 훈(訓)자를 쓴 겁니다. 대전에서 인생을 보냈고, 그 인생을 책에서 배웠으니까.”

    대전역 앞에 조금 오래된 건물이 하나 있다. 지금이야 낡아 보이지만 대훈서적은 그때 외양을 그대로 간직해 정감 있는 서점이다. 지하1층, 지상1·2층 모두 서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구시가지여서 장사가 예전만큼은 안되지만 그는 이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말한다. 대전 신시가지 갤러리아백화점 2층 역시 전부 대훈서적이다. 그리고 대전 한밭대학 구내서점과 KAIST 구내서점에도 대훈서적이란 이름을 붙였다. 처음 KAIST 구내서점은 20평 남짓한 크기였는데, 그가 총장을 찾아가 건의했다. “대학을 제대로 알려면 그 학교의 서점을 보면 됩니다.” 그러자 서점은 100평 규모로 바뀌었다.

    김씨는 지난해부터 북한 책들을 전시하고 있다. ‘2001서울국제도서전’ ‘2002서울문화체험박람회’ 등 도서전시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간다. ‘책으로 가는 북한’ ‘책으로 가는 평양’ 등 몇몇 전시회를 직접 열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주고 싶어요. 아이들에게도 북한이 결코 먼 나라가 아님을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북한 책을 직접 보면 정말 같은 말을 쓰는 한 민족이란 생각이 들 것이라며, 자주 전시하려 노력한다고 그는 말한다. 책에 대한 애정도 그렇지만, 북한 책을 보여주고자 하는 사명감은 크다.

    그는 북한 책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북한과 통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얼마 전 ‘서울·평양문화교류협회’를 결성했다. 또 ‘통일문학사’를 만들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생각하는 문학지란 타이틀을 걸고 ‘통일문학’이란 계간 문학잡지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은 비록 우리 작가들과 학자들 글이 대부분이고 허가받은 북한 시 몇 편을 재수록하는 정도지만, 그에겐 목표가 있다. “통일문학은 북한작가와 우리 작가가 함께 만드는 잡지가 되기를 꿈꿉니다.”

    그는 북한문학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고 말한다. 전쟁 때 많은 작가가 월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 수준도 우리보다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란다. 그 말을 들으니 그들의 문학세계가 더 궁금해진다. “문화를 아는 것만큼 그들을 잘 알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겠어요? 특히 문학작품에선 행간을 읽을 수 있잖아요. 그건 말로 할 수 없는 눈빛의 교환, 따뜻하게 손을 맞잡는 것과 같습니다. 책 속에서 정감을 느끼고 소통을 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그는 꿈꾼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평양에서 서점을 운영하고 싶습니다. 북한 사람들에게도 우리 책을 보여줘야지요.” 우리만 북한을 알아서 될 일이 아니라 북한도 우리를 알아야 상호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이 통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책이야말로 상대를 이해하게 하는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큰 수단이란 것이다. 특히 양측이 이렇게 만날 수도, 얘기를 나눌 수도 없는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다. 그는 우리보다 뒤처진 북한을 못난 동생이라 생각한다며 그 동생을 버리고 갈 수는 없다고, 감싸안고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한다.

    김씨는 올해 ‘북경도서전시회’에서 우리 책을 전시했다. 그때 북한측 전시장에 가서 그들과 몇 마디를 나눴다. 그들에게 우리 책을 소개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북한측 사람이 상부에 보고해 보겠다고 했다.

    김씨는 각종 도서전시회에서 우리 책과 북한도서를 전시하는 게 너무도 행복하단다. 동양학을 전공하는 서양인들에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며 기쁨부터 말한다. 북한 책은 서양인들에게도 거의 공개되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말이다.

    “아내를 잃고 남겨진 아이를 보면서 다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그저 흘러간 노랫가락을 읊듯, 바랜 사진을 들여다보듯 말할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김씨는 아내를 가슴에 묻었다. 22세 때 좋아하던 동네 여자와 결혼했다. 임신 6개월 만에 대전으로 데려와 함께 살았다. 아이를 낳던 날 새벽, 어머니가 아이를 받는데 아내가 이상했다. 급해서 인근의 형 집에 다녀왔는데 돌아와보니 죽은 아내가 방바닥에 남겨져 있었다.

    방황뿐이었다. 장사도 안하고 좌절감 속에서 지냈다. 그러는 사이 딸아이는 대전의 영아원에 맡겨졌다. 아내를 잃었다는 사실보다도 아이가 계속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래서 장사도 안하고 영아원에만 갔다. 그러다 그 아이를 위해 장사를 다시 시작했다.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가 조금씩 아프더니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모든 것을 잃는 것만 같아 힘들었다. 그때 그에게 힘이 돼준 사람이 있었다. 영아원 원장이 병원에서 지내며 지극정성으로 아이를 돌봤다. 딸에게 그렇게 잘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와 결혼했다. 결혼 2주 만에 영아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왔다. 좌판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새 삶을 얻은 것처럼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 딸아이는 중2 때 그런 사실을 알게 됐다. 많이 방황했지만 다행히 잘 견뎌주었다. 지금은 키워준 엄마에게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며 김씨는 흐뭇해한다. 그는 아내와 늘 함께 다닌다. 평상시엔 일 때문에 많은 시간을 같이하지 못하지만 집에 안 들어가는 날은 없다. 요즘은 서로 책도 권하고 산책도 자주 한다.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내는 늘 그에게 힘이 돼주는 동반자다.

    “지금은 두 아들이 각각 대훈서적을 맡아 운영하고 있어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서점 일에서 손을 뗀 것은 아니다. 북한 책에 더 많은 신경을 쓸 뿐이다. 북한 책 구입에 드는 비용이 많아 아들들이 걱정도 하지만 함께 해나가고 있다. 각종 도서전에 전시하는 북한 책과 자료들도 아들들이 다 준비해준다.

    “일본에 갔다가 대대로 내려오는 오래된 서점을 봤어요. 아, 나도 이런 서점을 만들어야겠구나 했죠.” 그때가 1982년 대전서점조합장 시절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 거리엔 다방과 약국, 술집이 전부였다. 그러나 일본엔 다방이 하나도 없고 서점이 가장 많았다. 그중 4대째로 70대 노인이 운영하는 서점이 있었는데, 그 서점 건물 옥상에 400년 전 그 서점을 본뜬 모형을 진열해놓은 것을 보고 깨달았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그들과 함께 가는 서점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아마도 그가 꿈꾸는 대훈서적은 그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책 장사 환갑을 맞고 싶습니다.”

    올해로 책 장사에 뛰어든 지 47년. 10대부터 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건강하게 지내면서 인생의 환갑을 맞듯 책 장사 환갑을 맞고 싶은 게 지금 그의 가장 큰 바람이다. 인터넷으로 인해 서점을 직접 찾는 사람들이 크게 줄어든 요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 또한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서점 운영에도 문제가 있지만, 우선 그가 가장 아쉬워하는 건 책을 만지고 고르고 닦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모든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고 집에서 책을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도 있다지만, 그게 한 장 한 장 침 묻혀가며 넘겨보는 책과 같을 리 없고, 서점에 가서 직접 골라들고 나오는 기쁨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지금은 구시가지가 돼버린 대전역 앞 대훈서적은 요즘의 잘 꾸며놓은 서점들에 비하면 좁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꽤 낡은 서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찾는 사람이 많고, 늘 오는 단골들이 있다. 대훈서적 간판을 달고 반평생을 같이해온 이곳을 김씨는 뿌듯하게 지켜본다. 장사가 안된다고 접어버리고 다른 걸 시작하는 그런 장삿속이 그에겐 없다. 그런 게 있었다면 지금 이 일을 하고 있지도 못할 것이다. ‘since 1957 대훈서적.’ 이곳은 간판도 그대로, 사람도 그대로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김씨와 반나절을 보내고 헤어지려는데 문득 그의 첫 마디가 떠올랐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듭니다.” 만나자마자 그가 꺼냈던 얘기다.

    배우지 못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 우리는 그렇게 사람을 평가하진 않는다. 참 좋은 사람, 됨됨이가 된 사람, 존경할 만한 사람…. 이런 것이 어떤 사람을 만난 후의 느낌 아닐까. 김주팔씨는 잔잔한 책 같은 사람이었다. 말이 많지도 않고, 과장도 없고, 날 알아달라는 제스처도 없었다. 대형서점의 회장님이란 직함보다 서점주인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책이 만든 그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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