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전남 담양

원림 정자에 스민 풍류가객의 혼

  • 글: 민병욱 사진: 박수룡

    입력2003-02-04 18: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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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자는 나와 달과 청풍과 강산이 하나 되는 매개체요 접점이다. 내가 곧 달이고 청풍이며 강산이니 도대체 한 점 꾸밈이 있을 리 없다. 사방에 보이는 것은 오직 강산의 형형색색, 마음이야 한껏 여유롭지 않겠는가.
    전남  담양

    ‘그림자도 쉬어 가는 곳’, 식영정의 멀고 가까운 모습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소쇄원(瀟灑園)에 가본 적이 있는가. 청죽의 기품에 놀란 백설이 내리다 말고 댓잎 위에 머물다, 제풀에 겨워 은빛 가루로 바스러져 날리며 객의 뺨을 애무한다. 이름마냥 ‘비 그친 뒤의 맑고 서늘함’을 자랑하는 소쇄원이 그런 백설과 청죽의 희롱에 몸이 다는지 계곡 물소리만 가쁘게 토해낸다.

    강산을 품에 끼고 부르는 노래

    원림(園林)과 정자의 고향. 한잔 술에 겨워 바람과 달과 강을 노래하는 땅. 대나무 소나무 배롱나무에 메타세쿼이아까지, 온갖 나무들이 세상의 번잡을 싱긋 웃으며 둘러쳐 앉히는 곳. 전남 담양의 겨울은 뭘로 감싸지 않더라도 그냥 푸근한 느낌을 준다. 그런 판에 함박눈까지 길손을 맞으니 뺨에 홍조가 도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실 소쇄원을 찾기 전 식영정(息影亭)에서 우리는 이미 주눅들었다. ‘그림자도 쉬는 정자’라니, 그 멋들어진 이름에 기가 죽고 광주호를 내려보며 무등산을 건너 보는 절경에 넋을 잃었다. 한사코 자기를 쫓아다니는 그림자마저 예선 쉰다니…. 아, 옛 선비들은 몸을 쉰다 함은 명리까지 철저히 쉬는 것임을 어쩌면 이처럼 명쾌하게 밝혀놓았더란 말인가.

    조선 명종 15년(1560년), 서하당 김성원은 장인이자 스승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무등산이 건너 보이는 별뫼(성산·星山)마을 산자락에 식영정을 지었다. 그 석천에게 시문을 배우던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도 여기서 함께 교유하며 이른바 ‘식영정 사선(四仙)’ ‘식영정 가단’을 형성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절정의 가사문학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다마는어찌 한 강산을 그처럼 낮게 여겨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



    송강의 성산별곡은 “그림자도 쉬게 하며 시원하게 바람 타고 자연조화와 어울려 거친 들에서 노니는” 서하당의 산중 생활을 찬미한 전원가사다. 자신을 포함한 사선들이 각 20수씩 지은 ‘식영정 이십영(詠)’을 바탕으로 쓰여져 가사문학의 한 경지를 이루었다. 당대의 명문장가들이 무려 80수의 찬탄을 뽑아낼 만큼 식영정 주변 경치는 참말로 끝내줬던 것이다.

    지금 식영정 밑으로는 887번 지방도로가 달리고 그 아래 광주호가 출렁인다. 하지만 400여 년 전에는 석병풍이 둘러쳐지고 화사하게 붉은 목백일홍(자미·紫薇) 사이로 개울이 흘렀던 모양이다. 백일홍 꽃잎이 여울을 발갛게 물들인다 하여 자미탄이라 했는데 석병풍과 자미탄은 1976년 광주호 축조공사 때 매몰됐다.

    ‘매몰’이란 용어를 써버리니 일대 경관이 완전히 망가진 것처럼 들릴지 모르나 석병풍 자미탄이 없음에도 이곳 경치는 일품이다. 게다가 이젠 문화생활에도 눈떠서인지 군청이 광주호변에 목백일홍을 옮겨 심어 운치를 되살렸다. 벌거벗은 채 몸을 꼬는 듯한 백일홍 가지 사이로 호수가 보이고 거기서 유영하며 멍청한 물고기를 물어 올리는 오리들이 한가롭다.

    영남지방 사람들은 호남에 와서 정자를 보면 “방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고 입을 모은다. 영남의 정자는 대개 생활공간인 당 옆에 지어져 방이 없고 오로지 문화공간의 역할만 하지만, 호남의 정자엔 방이 있어 당과 정의 기능을 함께 수행한다. 사시사철 절경에 묻혀 문학을 꽃 피우고 정치를 논하기에 딱 좋은 장소인 것이다.

    나 한칸 달 한칸 청풍 한칸

    식영정보다 30여 년 앞서 지어진 면앙정(免仰亭)에 오르면 이런 선비들의 유유자적이 고스란히 안겨온다. 송순이 자신의 아호를 따 ‘땅을 내려다봐도 또 하늘을 올려다봐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꿈꾸며 중종 28년에 지은 정자다. 송순이 지은 저 유명한 시조.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삼간 지어내어나 한칸 달 한칸 청풍 한칸 맡겨두고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이쯤 되면 정자는 나와 달과 청풍과 강산이 하나 되는 매개체요 접점이다. 내가 곧 달이고 청풍이며 강산이니 도대체 한 점 꾸밈이 있을 리 없다. 정자 뒤로 장송이 버텨 지켜주고 사방에 보이는 것은 좁은 정자에 들일 수 없는 강산의 형형색색이니 마음은 한껏 여유롭게 붕붕 떠다니지 않겠는가.

    먼 데서, 또 가까운 데서 벗들이 찾아와 술을 권하고 흥이 도도해지면 싯귀로 농하니 그야말로 땅을 보나 하늘을 보나 부러움이 없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퇴계 이황, 백호 임제, 하서 김인후, 그리고 앞서 든 식영정 사선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이곳에 들러 백일장을 벌이니 그들의 가사문학이 일취월장 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송강이 “한잔 먹세 그려 또 한잔 먹세 그려 /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라며 장진주사를 읊었던 것도, 걸어서 한두 시간 거리에 30여 개의 정자와 원림이 있고 어디든 시와 술과 벗이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요즘 세상이라면 민중은 들판에서 등골이 휘도록 일하는데 저들은 허구헌날 술독에 빠져 타령이나 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웠을 테지만….

    면앙정 식영정을 거쳐 조선조 정자문화에 대한 예비지식을 갖춘 다음 소쇄원을 찾았음에도 거기가 주는 충격은 몸이 떨릴 정도로 시리다. 20~30m 높이의 왕대 숲을 지날 때부터 물씬 남도의 정취에 젖는가 싶더니 그 푸르름이 언제 있었냐는 듯 연한 황토색 흙담장과 마주치게 된다. 바로 소쇄원 입구다.

    소쇄원에서 마음을 씻고

    담이라면 남의 범접을 막기 위한 차단 작용을 해야 옳은데 소쇄원의 그것은 아늑한 낙원으로 인도하는 방향지시 기능이 주임무다. 어쩌면 자연 그대로의 정원에 놀라지 말라고 인위적 담을 세웠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흙담을 끼고 들면 이내 대봉대, 즉 봉황을 맞기 위한 초가정자와 만난다. 손님을 봉황처럼 모시겠다는 주인의 심성이 초가지붕에 그대로 얹혀 있는 듯하다.

    애초 여기에는 봉황이 깃들이는 곳이라 하여 오동나무가 심어져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죽어버려 최근 새 나무를 이식했다. 대봉대에 앉아 ㄱ자로 꺾어져 들어가는 내원을 일별하면 여기가 바로 지상낙원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담장 밑동으로 너럭바위를 타고 계곡물이 돌아 흘러들어오며 그 계곡 위로는 오래된 외나무 다리가 있다.

    다리 옆에는 살구나무가 있는데 술을 들고 드나들다 혹시라도 낙상하면 살구씨로 치료하라는 뜻에서 심은 것이라나. 원림내 구조물의 기능은 이렇게 나무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은데 가령 항상 볕이 들어 훈훈한 사랑이 감돈다는 ‘애양단’에는 동백을 심었고 주인의 거처 주변에는 다복과 성취의 의미로 산수유와 석류를 심어놓았다.

    소쇄원은 1530년 무렵에 조성하기 시작해 3대 70여 년 동안 갈고 다듬어 호남을 대표하는 원림으로 우뚝 섰다. 이곳을 꾸민 소쇄처사 양산보는 열다섯에 상경해 조광조의 문하에 들었다가 2년 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화순 능주에 유배되자 낙향해 창암촌 산기슭에 소쇄원을 만들며 세상과 거리를 두었다.

    청운의 꿈을 접고 우주와 자연과 벗하며 사계절 그 속에서 생활하고 쉬고 놀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했기에 소쇄원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다섯 굽이를 돌고돌아 들어오는 계곡 물과 그것이 고이는 크고 작은 연못, 물레방아와 물을 끌어들이는 홈대 등이 설치됐고 못에는 물고기를 넣고 연꽃을 키웠다.

    매화 측백 자미 노송 은행 오동 등 온갖 나무를 배치했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최소한의 인공을 가미했다. 제월당 광풍각 등 당과 각, 정자를 여러 채 지어놓고 한결같이 비 그친 후 뜨는 달이랄까 별과 바람의 상쾌함을 집 이름으로 붙였다. 원림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앞서 든 호남의 가단들이 앞다퉈 칭송하는 글을 내놓았다.

    원림 정자 순례를 마치고 담양읍내로 들어오는 길에 관방제림의 울울한 나무군과 맞닥뜨렸다. 300~400년씩 된 팽나무 느티나무 군락이 1.5km나 늘어섰는데 천변의 희디흰 눈밭과 조화를 이뤄 장관을 이루었다. 소쇄원 계곡 맑은 물에 씻은 마음인데도 아련한 그리움에 움칫 떨리는 것을 나는 어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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