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절 때마다 자녀에 한복 입히는 김남주, 김희선
- 우리옷 입기 앞장선 육영수 여사 존경스러워
- A 전 장관, B 전 의원, C 전 검찰총장의 뭉클한 한복 사랑
- 한복 맵시 으뜸 정치인은 조윤선, 정두언
박 대통령은 지난 5월 미국 뉴욕 동포 간담회와 한미동맹 60주년 기념만찬에 이어 9월 6일 러시아에서 열린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재외동포 만찬 간담회에도 한복 차림으로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한가위를 앞두고 만난 한복 연구가 박술녀(56) 씨는 “박 대통령이 한복을 입고 나올 때마다 국내외에서 우리옷에 큰 관심을 보여 기쁘다”고 흐뭇해했다. 하지만 “한복이 구시대 유물 취급을 받으면서 명절과 경조사 때나 입던 풍습마저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내년이면 한복 짓는 일을 한 지 30주년이 됩니다. 우리옷이 사람들에게 잊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국내외 스타들에게 한복을 입히며 한복 전도사를 자처해왔지요. 그래선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복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예뻐 보이더라고요(웃음).”
스타가 ‘어른’ 되는 날
연예계 스타들에게 박 씨가 한복을 협찬하기 시작한 건 1980년대 말부터다. 이리자 선생 밑에서 한복 짓는 법을 배우고 나서 처음 연 한복집이 옷 잘 만드는 집으로 소문나 일손이 한창 달릴 때였다. 그럼에도 풍문을 듣고 몰려온 KBS 아나운서들에게 기꺼이 한복을 빌려줬다.
이후 방송국에서는 물론 스타 연예인들도 한복이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청했고 그도 흔쾌히 응했다. 그러는 사이 서울 군자동의 33㎡ 남짓하던 한복집은 개업 11년 만에 규모를 10배 넘게 늘려 강남구 청담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5년엔 그의 한복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청담동 사옥’이 문을 열었다. 김남주 김희선 이승연 이휘재 김재원 등 많은 스타가 결혼할 때 그의 한복을 입고 싶다며 찾아왔다. 지금도 이곳엔 스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한복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스타는 누군가요.
“명절 때마다 아이들에게 한복을 챙겨 입히는 김남주 씨와 김희선 씨가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두 사람 다 명절을 앞두고 꼭 오거든요. 특히 김남주 씨는 설에 아이들이 한복을 입고 세배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다 보여줄 정도로 한복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요. 명절뿐 아니라 시상식 때도 아이들에게 한복을 입히죠. ‘완판녀’ ‘패셔니스타’ 같은 닉네임을 갖고 있는데 우리옷도 무척 사랑해요.”
한복을 좋아하는 남자 스타로는 최근 결혼한 배우 김재원과 고수, 결혼을 앞둔 가수 허각 등을 꼽았다. 박 씨는 이들처럼 한복을 필요로 하는 스타의 손을 뿌리친 적이 없다. 그러다보니 내로라하는 스타 중 그의 한복을 입어보지 않은 이가 드물 정도다.
▼ 결혼하는 스타에게 한복을 그냥 줍니까.
“두루마기에 당의, 조끼, 마고자까지 다 해주는 건 아니에요. 폐백 때 입는 남녀 대례복은 따로 가져가서 입혀주고, 기본 한복만 한 벌씩 상징적으로 해줍니다. 여자에겐 빨간 치마에 녹색 저고리, 남자에겐 바지와 저고리요. 인륜지대사를 통해 어른이 되는 걸 축하하는 의미로요. 그 한복 한 벌이 고마워서 선물을 들고 인사하러 오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게 따뜻한 정을 나눈 친구들이 기억에 오래 남아요. ‘진짜 인생’을 시작하면서 한복을 입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10월 초에 결혼하는 허각 씨도 결혼 준비를 좀 도와줬더니 고마움을 평생 안 잊겠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어요. 그런 애틋함이 있어서 이 일을 하는 것 같아요.”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편지
박 씨는 한국을 찾은 해외 스타에게도 한복을 많이 선물했다. 미국 팝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 할리우드 배우 안젤리나 졸리, 피아니스트 조지 윈스턴, 영국 싱어송라이터 미카,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 ‘브리튼즈 갓 탤런트’가 낳은 오페라 가수 폴 포츠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한복의 아름다움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박 씨는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미카와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잊을 수 없다”며 기억을 떠올렸다.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핑크색을 유난히 좋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홍색으로 꾸며줬죠. 메리어트 호텔에서 한복을 입혔는데, 거기에서 우리집까지 따라와 다 둘러볼 정도로 한복에 큰 관심을 보였어요. 미국에 돌아가서도 친필 감사편지를 보내왔고요. ‘정말 고맙고, 한복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이런 내용이었어요. 외국에서 옷 한 벌 얻어 입었다고 그런 정성을 보인다는 게, 진심이 없이는 쉽지 않을 거예요. 국내 스타들에게 결혼한다고 한복을 해줘도 고마움을 잊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스타니까 해주는 거겠지’ 하고 당연시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타국에서 진심을 담은 친필 편지를 보내준 성의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박 씨는 매년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한 패션쇼를 자비를 들여 열어왔다. 한복 문화 전도사로 명성이 높아지면서 정부 행사에 참석하는 외국인을 위해 한복을 짓는 일도 늘었다. 2010년에는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염원하는 국궁페스티벌에서 주한 외국대사 부인들에게 한복을 만들어 입혔고, 서울국제경제자문단총회(SIBAC)에 참석한 외국인 최고경영자들에게도 한복을 협찬했다. 한국과 아랍에미리트(UAE)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두바이와 아부다비에서 열린 ‘한국문화의 밤, 한복쇼’에도 참가했다.
박 씨는 올해도 세계주문양복연맹에서 주최하는 행사에서 한복쇼를 하고, 9월 10일 세계여행관광협회에서 주최하는 행사에서 한국 대표로 한복쇼를 열었다. 8월에는 해외 젊은이들에게 한복 문화를 알리는 행사를 치렀다. 이날 함께한 외국인은 한국관광공사가 기획한 프로그램인 ‘위키 코리아 투어’에서 선정했다.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베트남 등 각 나라에서 한복을 체험해보고 싶다고 희망한 젊은이 13명을 뽑았더라고요. 그들과 만찬을 함께하면서 한복의 전통과 아름다움에 대해 들려줬어요. 한복을 입고 싶다고 해서 한복도 한 벌씩 지어줬고요. 전액 무료는 아니고…두 벌 값 정도를 받고 열세 벌을 지었죠(웃음).”
협찬의 비애
한복집 운영도 엄연히 이윤을 남기기 위한 비즈니스이고, 몇 해 전 갑상선암 수술을 받아 건강이 썩 좋은 편도 아닌데 경제적, 시간적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한복 협찬과 패션쇼를 하는 까닭을 헤아리기 힘들었다.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9월 25일에는 실수요자에게 한복을 보여주는 쇼를 열어요. 그런 쇼는 제가 무대장치 비용을 보조하면서 하는 건데, 나라에서 해줘야 할 일을 우리 힘으로 한다는 자부심이 있죠. 그걸 오지랖 넓다고 해야 할까요?
한복인으로 산 지 올해 29년째인데, 이제 방송국 협찬을 잘 못해요. 제가 한복 협찬을 안 하면 방송에서도 한복이 사라질 것 같은 위기감이 있어요. 갈수록 그런 현상이 심해질 거예요. 그래서 조건 없이 연기자들에게 한복을 입혀왔는데, 요즘은 드라이클리닝 비용 10만 원을 요구한다고 방송 프로그램에서 협찬 요청이 안 들어올 정도죠. 명절에 옷을 많이 협찬해 주면 드라이클리닝 비용만 수백만 원이 들어요. 그런데도 한복 알리기를 계속하는 건 한복 문화 전도사라는 자부심 하나로 버티는 겁니다.”
▼ 세탁비 때문에 한복 협찬 요청을 안 한다?
“10만 원 달라는데도 그것 때문에 협찬 요청이 안 들어온다니까요. 방송국에서 우리처럼 한복을 관리하진 못하잖아요. 옷에 일일이 동정을 달아서 다림질하고 그러는 게 다 수작업이에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 답답한 상황이네요.
“허탈하죠. 한복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기에 벌어지는 일이죠. 한복은 그야말로 장인이 한 땀, 한 땀 공들여 만드는 명품이에요. 그런데 말로는 한복이 참 아름다운 옷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한복을 위한 투자는 아깝게 여기거든요. 해외 명품은 대단하게 보니까 수백만, 수천만 원을 써도 아깝지 않은 거고. 정치인, 경제인 등 우리 사회 지도층에서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한복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한복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준 지도층 인사로 육영수 여사를 첫손에 꼽았다.
“그분은 한복의 대명사잖아요. 저도 어릴 때부터 그분이 한복을 입은 모습을 보며 자랐어요. 그분을 싫어하는 한복인은 없을 거예요. 다들 우리 것이 좋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분처럼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하거나 귀빈을 맞을 때마다 늘 한복을 입는 명사를 본 적이 없어요. 따님인 박근령 씨가 전통 한복을 입고 결혼식을 한다고 했을 때 흔쾌히 응한 것도 육 여사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죠. 정치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지만 한복을 입는다고 하니까 반가웠어요.”
‘여사님’들의 한복 사랑
7월 2일 한국해비타트 주최로 열린 박술녀 한복패션쇼에서 배우 박정수(왼쪽)와 산악인 엄홍길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 씨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 부인의 한복 맵시를 비교하는 여성지의 화보특집에 의상을 협찬한 적이 있다. 그 일로 한복 치수를 재려고 노무현 민주당 후보 부인 권양숙 여사,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부인 한인옥 여사를 만났다.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 부인 김영명 여사는 “그냥 집에 있는 한복을 입고 촬영하겠다”고 해서 만나지 못했다.
“권양숙 여사는 살림살이만큼이나 소박한 분이었어요. 가락지도 하나 없고 한복도 다 낡았더라고요. 두루마기도 하도 옛날 것이라 소매를 줄여드린 기억이 나요. 무엇보다 잊히지 않는 건 그날 먹은 칼국수 맛이에요. 한복 치수를 재러 아침 일찍 그댁엘 갔는데 마침 자녀들에게 먹이려고 칼국수를 끓이고 계셨어요. 칼국수 냄새가 하도 구수해서 ‘맛있겠다’고 했더니 권 여사가 아드님에게 ‘넌 나가서 먹어라, 이건 박 선생 드리게’ 하셨어요. 참 인간적인 모습이었어요.”
▼ 한인옥 여사는 어땠습니까.
“대통령후보 부인이니 얼마나 바빴겠어요. 그런 와중에도 저희 숍을 방문해 한복 색상을 직접 고르셨어요. 아마 상아색이었을 거예요. 한복에 굉장한 관심과 애정이 있는 분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가 지은 한복을 좋아하는 단골 고객 중에는 정·재계 인사도 많다. 제 발로 찾아온 이도 있지만 정부 행사나 패션쇼가 인연을 맺어준 이도 있다. 박 씨는 그 가운데 한복 사랑을 제대로 실천한 인사로 A 전 장관, B 전 국회의원, C 전 검찰총장을 꼽았다.
정치인의 두 얼굴
“A 전 장관이 장관 재임 중 국경일 행사 때 입을 한복을 다급하게 빌리러 왔어요. 대통령이 그날 한복을 입으니까 참석하는 사람도 한복을 입어야 한다면서. 제가 짜증을 팍 냈죠. ‘연예인은 배역 때문에 한복 입을 일이 많아서 빌려준다. 안 빌려주면 한복이 잊힐까봐 빌려주는 건데, 장관님께서 이러시면 어떡하느냐’고. 그랬더니 ‘박 선생, 나 무서운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은 나한테 말도 못 붙이는데 박 선생은 할 말 다 하네’ 그러시더라고요. 좀 심하게 군 게 미안해서 나중에 한복을 지어 보내드렸더니 봉투에 옷값을 넣어 보내왔어요. 깜짝 놀랐죠.
C 전 검찰총장은 한복을 정말 사랑하세요. 한복엔 두루마기를 꼭 챙겨 입어야 한다고 하시는 분이죠. 또 B 전 의원은 활동이 한창 왕성할 때 부인과 한복 입고 찍은 사진을 연하장에 붙여서 지인들에게 보내시더라고요.
그런가 하면 얼마 안 되는 한복 대여료나 세탁비를 요구한다고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자기 정도의 지위와 명성을 가진 사람은 한복을 거저 입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고.”
▼ 그런 사람이 많나요.
“한복을 만날 거저 입고도 고마워하기는커녕 나중에 장관이 되니까 안면 몰수하는 사람도 봤거든요. 장관이 되기 전에는 우리 한복을 자주 입었어요. 절대 사가진 않고 빌려갔죠. 전화로 한복을 갖다달라면 직접 들고 가서 입혀주고 그랬어요. 패션쇼를 하면 우리 한복을 입고 축사를 해주기로 했는데, 행사를 이틀 앞두고 손바닥 뒤집듯이 약속을 깨더라고요. ‘그런 데서 축사할 상황이 아니다’라면서. 그러더니 장관이 되고 나서는 안면을 싹 바꿨어요. 언제 봤냐는 식으로. 권력을 쥐면 사람이 변한다는 걸 실감했죠. 근데 변해도 너무 변하더라고요. 축사는 결국 B 전 국회의원이 대신 해줬어요.”
그는 B 전 의원과 C 전 검찰총장을 “따뜻하고 의리 있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평가 기준을 묻자 그럴 만한 답이 돌아온다.
“C 검찰총장 부인이 딸을 시집보내면서 딸 한복은 우리 집에서 하고, 부부 한복은 다른 데서 하려 했더니 총장께서 이렇게 말했대요. ‘우리 집에 혼사 있는 것을 뻔히 아는데 당신이 다른 집 한복을 입으면 박 선생이 얼마나 서운하겠어. 우리가 앞으로 살면서 한복 입을 일이 몇 번이나 있다고!’ 그분들이 정말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에요. 협찬은 절대 안 받으시죠.”
▼ 한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정치인은 누구인 것 같습니까.
“여성 중에는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이 한복 맵시가 좋아요. 얼마 전 잡지 화보를 찍을 때 검은 치마에 하얀 모시저고리를 입혔는데 참 예쁘더라고요. 남성 중에는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이 한복 입었을 때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습니다.”
1980년대만 해도 추석이나 설을 쇠기에 앞서 한복을 손질하는 집이 많았다. 차례를 지낼 땐 한복을 입는 것이 관례였다. 여학교에서는 가정 시간에 한복 짓는 법과 동정 다는 법, 고름 매는 법을 가르쳤다. 지금은 보기 드문 풍경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복은 점점 입기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옷으로 우리 삶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박 씨의 우려처럼. 한복을 직접 짓진 못해도 멋스럽게 입는 법쯤은 배워두는 게 한복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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