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호

히틀러·무솔리니 독재가 꽃피운 미국 러스트벨트 오케스트라들

[음악으로 보는 세상]

  • 김원 KBS PD·KBS 클래식 FM ‘명연주 명음반’ 담당

    입력2024-11-0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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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북동부 5대호 주변의 러스트벨트가 11월 미국 대선에서 중요한 경합지로 꼽히고 있다. 이 지역은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적 오케스트라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른바 ‘BIG 5’라고 하는 미국 최고의 오케스트라 가운데 일리노이주의 시카고 심포니,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펜실베이니아주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대표적이다.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 심포니와 펜실베이니아주의 피츠버그 심포니 역시 세계적 수준의 연주력을 자랑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는 아마도 유진 오르먼디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조지 셀이 지휘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프리츠 라이너가 지휘한 시카고 심포니가 남긴 음반을 통해 베토벤과 브람스, 차이콥스키, 시벨리우스를 만난 이가 많을 것이다.
    1883년 미국 뉴욕에 문을 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Gettyimage]

    1883년 미국 뉴욕에 문을 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Gettyimage]

    클래식 음악은 항상 그 시대에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도시에서 번성했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오스트리아의 빈, 프랑스의 파리가 대표적이다.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의 시대에 이르러 영국 런던이 그런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고, 19세기 말엔 드디어 국가를 형성한 독일 베를린이 음악의 도시로 거듭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미국의 도시들이 이 찬란한 도시들의 목록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필라델피아와 클리블랜드, 시카고가 베네치아나 빈 같은 도시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전쟁이 키운 오케스트라

    짧은 역사를 가진 미국의 도시들이 세계적 오케스트라를 보유하기까지의 역사는 역동적이고 흥미롭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비교하면 조선 후기 고종 때부터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쳐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에 이르는 100년 정도의 기간에 일어난 일인 셈. 대한민국 국민이 이 역동적 근대사를 잘 모르는 것처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미국 오케스트라가 발전한 역사에 대해 잘 모른다.

    음악이 발전하기 위해선 몇 가지 중요한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음악이 연주되는 공간,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가,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중세 이후 고전 시대에 이르기까지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일에는 권력을 가진 교회와 궁정, 귀족들의 후원이 반드시 필요했다. 녹음이나 방송 기술이 없던 시대에는 음악을 듣기 위해선 음악이 연주되는 장소에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음악은 그 시대에 음악이 연주되는 공간의 한계 안에 갇혀 있었다. 권력이 성장하고 건축 기술이 발전하면서 연주 공간이 커지자 음악의 규모도 함께 커졌다.

    음악가를 교육하는 일도 교회와 궁정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이전의 작곡가들은 거의 모두 교회와 궁정 소속이었다. 프리랜서로 일했던 모차르트는 일평생 연주 여행을 다니며 마차 안에서도 작곡을 해야 했고, 베토벤도 빈 귀족들의 후원이 줄어든 말년에는 궁핍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모차르트가 빈에서 활동하던 즈음에 미국이 독립하는데, 이후 100년이 더 흐른 뒤인 1883년에야 뉴욕에 본격적인 오페라극장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가 문을 열 수 있었다. 조선에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시기의 일이다.

    이 시기 유럽은 바그너와 브람스의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전성기였다. 대규모의 콘서트홀과 야외 공연장에서 브람스의 교향곡과 바그너의 오페라가 연주됐고, 100명이 넘는 연주자와 합창단원, 뛰어난 독창자들을 연일 동원하기 위해선 탄탄한 음악교육 시스템이 뒷받침돼야 했다. 당시 유럽에서도 이 정도 음악 인프라를 갖춘 곳은 통일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제국의 수도를 포함한 몇몇 도시 정도에 불과했다.

    미국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되고 두 개의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이들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들을 영입할 기회를 얻었다. 전쟁 기간 중 발전한 라디오방송 기술과 녹음 기술이 없었다면 미국 오케스트라들이 보여준 전례 없는 빠른 발전은 아마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 형성된 미국 북동부 도시들의 유럽 이민자 커뮤니티도 이 오케스트라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유럽을 떠나야 했던 유럽의 이민자들이 러스트벨트에 정착하기까지의 고통과 아픔의 역사는, 대한제국 시절인 1902년 하와이로 떠나야 했던 한국인 이민사에서 또 반복됐다.

    살아남고자 이주한 희망의 땅

    미국 클래식 음악의 최전성기를 이끈 유진 오르먼디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조지 셀이 지휘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프리츠 라이너가 지휘한 시카고 심포니(위에서부터). [Gettyimage,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공식 홈페이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식 홈페이지]

    미국 클래식 음악의 최전성기를 이끈 유진 오르먼디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조지 셀이 지휘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프리츠 라이너가 지휘한 시카고 심포니(위에서부터). [Gettyimage,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공식 홈페이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식 홈페이지]

    앞서 언급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조지 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유진 오르먼디, 시카고 심포니의 프리츠 라이너는 모두 헝가리 출신 지휘자다. 이후 시카고 교향악단을 지휘한 게오르그 솔티 또한 헝가리 출신 유대인 지휘자다. 틀림없이 클리블랜드를 중심으로 한 헝가리 이민자 커뮤니티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이 지역의 헝가리 이민 역사는 1848년과 1849년 사이에 일어난 헝가리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트리아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치며 혁명을 주도했으나 실패한 혁명의 지도자 코슈트는 유럽을 떠돌다가 미국의 초청으로 클리블랜드를 방문했다. 이 인연으로 클리블랜드는 헝가리 이민자들의 중심지가 된다.

    가난과 전쟁을 피해 미국행을 택한 유럽 이민자들은 주로 뉴욕을 통해 미국에 들어가 가까운 펜실베이니아나 오대호 중심의 공업지대에 자리 잡았다. 당시 오대호 주변 공업지대는 제조업이 한창 발전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던 터였다. 18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민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대공황 이전까지 오대호 지역의 커뮤니티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서양 건너편의 독일에선 정반대 상황이 펼쳐졌다. 패전의 아픔과 대공황의 충격을 이용해 1933년에 히틀러가 집권한 것이다. 히틀러는 집권 후 곧바로 모든 공공기관에서 아리아인이 아닌 사람들을 해고했고, 본격적으로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했고, 이듬해인 1939년엔 뮌헨협정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 지역도 얻어낸다. 독일의 유대인들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등으로 피하지만 결국엔 영국이나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9)의 한 장면. [IMDB]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9)의 한 장면. [IMDB]

    ‌이때의 상황을 잘 그려낸 영화가 바로 ‘사운드 오브 뮤직’이다. 이 영화는 미국으로 이민 간 마리아 폰 트랩이 쓴 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폰 트랩 대령 가족이 오스트리아를 탈출하는 시기가 바로 오스트리아가 합병되던 1938년이다. 이후 이 가족은 이탈리아를 거쳐 미국에 도착한다. 미국에 도착한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1939년경일 것이다.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재산 대부분을 잃은 폰 트랩 가족은 미국에서 가족합창단 공연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 유럽을 떠난 많은 유대인의 운명도 이와 같았다. 이때 독일을 떠난 대표적 유대인 지휘자가 바로 뉴욕 필하모닉의 브루노 발터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이 미국에 이민 가기 이전에 미국에 자리 잡은 또 다른 유대인 집단이 있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내전 지역에서 심한 탄압과 차별을 당한 유대인들이다. 이때 많은 유대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대표적 인물이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다.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도 이 시기 미국으로 이주했다.

    유럽 최고의 지휘자로 평가받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무솔리니와 파시스트의 압제를 피해 1937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Gettyimage]

    유럽 최고의 지휘자로 평가받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무솔리니와 파시스트의 압제를 피해 1937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Gettyimage]

    ‌독일의 히틀러를 피해 음악가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처럼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음악가도 있다. 당시 유럽 최고의 지휘자이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그렇다. 그는 1937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토스카니니는 라 스칼라 오페라를 복원하고, 푸치니가 남긴 마지막 오페라인 ‘투란도트’를 초연하면서 유럽에서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토스카니니는 무솔리니와 파시스트의 압제를 피해 미국으로 온 후에 방송을 위해 설립된 NBC 심포니를 지휘했고, 라디오방송을 통해 미국의 음악 애호가들의 수준을 급격히 끌어올렸다.

    그 덕에 미국에서는 호로비츠, 하이페츠, 라흐마니노프, 토스카니니와 같은 음악가들의 연주를 라디오방송을 통해 집에서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음악의 황금시대가 펼쳐졌다. 이를 주도한 것은 뉴욕과 펜실베이니아, 클리블랜드를 중심으로 한 러스트벨트에 있는 방송국들이었다. 전쟁 시기에 발전한 녹음 기술은 방송국에서 녹음된 교향곡과 협주곡을 LP판과 릴 테이프로 하루 종일 방송했고 음악 감상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이 개국했다.



    귀족에서 시민으로 바뀐 청중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친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 클래식 음악의 최전성기가 시작됐다. 1945년 전쟁은 끝났으나 유럽은 폐허였다. 미국에 이주한 많은 우수한 음악가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남았고, 이미 상당한 수준에 다다른 미국 음악계의 가능성과 경제적 풍요로움에 이끌려 많은 음악가가 미국으로 새로 이주해 연주와 음악교육에 힘썼다. 우리가 알고 있는 러스트벨트 오케스트라의 음반이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6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때의 클리블랜드와 필라델피아, 뉴욕, 시카고는 십자군전쟁을 통해 지중해 최고의 음악 도시가 된 14세기 이후의 베네치아 같은 곳이었다.

    미국에서 클래식 음악이 번창할 수 있었던 데는, 혁명과 전쟁 같은 정치적 이유 외에 음악적 이유도 있었다. 베토벤 이후 바그너와 브람스에 이르면서 클래식 음악이 교회와 귀족이 듣는 음악에서 일반 시민이 듣는 음악으로 발전한 것이다. 베토벤 시기까지도 클래식 음악은 귀족의 저택에서 와인을 마시면서 듣는 음악이었고, 베토벤의 교향곡마저 귀족의 대저택에서 초연되곤 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산업혁명으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들이 등장했고, 음악의 후원자들이 교회와 궁정이 아닌 은행가이거나 무역과 제조업으로 돈을 번 자본가들로 변했다. 연주 장소도 개인 살롱에서 콘서트홀로 바뀌었고, 일반 시민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연주 홀인 세브란스 홀을 지어준 사람은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이던 록펠러와 함께 석유 회사를 차린 세브란스의 아들이었다. 우리나라에 세브란스 병원을 지어준 그 가문이다.

    시작부터 민주주의 국가이던 미국은 이런 음악 사조에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도시가 후원하는 오케스트라는 시민을 위한 연주를 해야 했고, 많은 시민을 만족시킴과 동시에 비싸지 않아야 했던 연주회에는 낭만주의 교향곡과 협주곡이 제격이었다. 유럽 중심의 고전적 전통에 얽매일 필요가 없던 미국은 러시아 작곡가들의 광활하고 웅장한 교향곡에 호의적이었는데, 미국 역시 광활한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러시아를 탈출한 천재 연주자들이 많았고, 미국은 이들에게 열광했다.

    조지 셀 악명만큼 완벽한 음악

    러스트벨트의 오케스트라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휘자와 연주자에 있다. 미국 북동부에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던 안정된 유럽 이민 사회를 배경으로 헝가리를 비롯해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이주한 유대인 지휘자들의 헌신적 노력이 러스트벨트의 오케스트라를 성장시켰다.

    이 지휘자들은 연주자들을 혹독하게 훈련한 것으로 유명한데,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조지 셀은 특히 악명이 높다. 그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에 부임하자마자 대부분의 연주자를 유럽 출신으로 바꾸었는데 아마도 헝가리와 러시아 연주자가 많았을 것이다. 이들은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아무리 혹독한 훈련이라도 참고 인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 결과 조지 셀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연주를 하는 악단이 됐고, 조지 셀이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녹음 음반은 최고의 명반으로 인정받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유럽으로 돌아간 지휘자들도 있다. 대표적 지휘자가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한 독일의 브루노 발터다. 1876년생인 발터는 유럽으로 돌아가 빈 필하모니를 지휘했다.

    이승만 박사는 1942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단파방송을 이용해 영어와 한국어로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는 연설 방송을 했다. [대통령기록관]

    이승만 박사는 1942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단파방송을 이용해 영어와 한국어로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는 연설 방송을 했다. [대통령기록관]

    ‌미국에서 오케스트라가 급속한 성장을 이루던 1942년, 1875년생인 이승만 박사는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단파방송을 이용해 영어와 한국어로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는 연설 방송을 했으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귀국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됐다. 러스트벨트 오케스트라의 발전사는 대한민국의 근대사와 시대를 공유하며, 눈부신 발전을 통해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최전성기를 맞았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김원
    ● 1970년생
    ● 서울대 심리학과 졸업
    ● 2023년 제1회 대한민국언론인대상 수상
    ● ‘당신의 밤과 음악’ ‘노래의 날개위에’ ‘명연주 명음반’ 등 KBS클래식 FM에서 다수의 프로그램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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