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호

[르포] 무늬만 의대대비반, 선행학습 수준 못 넘어

2024 대치동 의대 열풍 大점검

  • 김건희 객원기자 kkh4792@donga.com

    입력2024-11-0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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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중 문제집 짜깁기한 허술한 자체 교재

    • 학교에 현장 체험학습 신청서 내고 학원 시험 대비

    • 의대 입시 성패 가름하는 건 ‘자기주도 학습’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인근 도로는 학원 수업이 끝난 학생들을 픽업하는 차량들로 혼잡하다. 
[김건희 객원기자]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인근 도로는 학원 수업이 끝난 학생들을 픽업하는 차량들로 혼잡하다. [김건희 객원기자]

    사교육 1번지인 ‘대치동 학군’ 중에서도 학구열이 치열하기로 손꼽히는 중학교에 다니는 이모 양은 올해 2학년 2학기 중간고사 국어와 수학 시험에서 처참한 점수를 받았다. 한창 사춘기 열병을 앓으면서 의과대학 진학의 꿈은 물론이고 학업 자체에 관심이 시들해진 것. 이 양은 중·고등학교 수학 선행학습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에 학교 수학 수업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과목도 마찬가지. 국어학원에서 자신의 수준보다 어려운 내용을 배우며 국어 과목에 대한 자신감과 흥미를 잃었다. 학원에서 내준 숙제를 과외 선생에게 의존해 겨우 해결하는 날이 허다하다. 이 양의 어머니 박모 씨는 “딸이 엇나갈까 봐 어떻게 공부하는지조차 직접 물어보지 못하고 있다”며 하소연했다.

    초등 의대반 개설된 학원 전국 89곳

    이 양은 5년 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사한 ‘대치동 키즈’다. 대치동 키즈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도곡동·역삼동을 아우르는 학원가 근처에 살면서 사교육을 받고 자란 청소년을 일컫는다. 박 씨 부부는 대치동의 한 학원에서 초등 의대 대비반(의대반) 설명회를 듣고 나서 대치동에 입성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학원에서는 “담당 강사가 학생의 출석과 동기부여, 학업 스트레스를 엄격하게 관리한다. 당일 학습 내용을 이해했는지 일일 시험을 치른다. 재시험에 통과할 때까지 학생들이 수업 후 각자 공부하다가 모르는 문제가 있을 때 보조 교사에게 1대 1로 질문하는 클리닉 수업을 운영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국어·수학·영어·과학 등 교과 선행과 심화학습 능력을 키운 학생들은 수학·과학 경시대회에 입상해 대학 입시에서 유리한 점수를 얻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씨는 이 말을 덥석 믿어버린 걸 요즘 후회한다. 학원은 자사가 운영하는 의대반 프로그램이 마치 의대 진학의 지름길인 것처럼 선전했지만, 실제 시스템은 주먹구구였기 때문이다. 의대반은 초등학생부터 의대 진학을 위해 교과과정을 미리 학습하는 학원가의 선행학습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이 양은 고난도 문제가 풀리지 않자 시중 수학 문제집 해설지를 모조리 구한 뒤 해설을 참고해 학원 숙제를 해결했다. 눈치 빠른 이 양이 이 학원에서 자체 제작한 교재가 사실은 시중 수학 문제집 몇 권에서 문제를 짜깁기하거나 변형해 제작한 것이란 걸 간파했기 때문이다.

    박 씨는 “조교 여럿을 둔 대형 학원 소속 인터넷강의 강사가 자체 제작한 교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원이 시중 교재 몇 개를 조잡하게 편집해 자체 교재를 만드는 실정이다. 유명 수학학원인 ㅎ학원에 보내는 것보다 실력 있는 과외 선생님을 붙여 출판사가 전문 필진을 엄선해 만든 시중 문제집으로 완벽하게 풀리는 게 더 낫다. 학원의 운영 실태를 미리 알았다면 아이가 상습적으로 문제 해설지를 베끼는 방식으로 숙제를 해결하게끔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학원의 허술한 교재 제작 및 방만한 관리 시스템을 꼬집었다.

    ‘의대 합격의 지름길’ ‘서울 의대·지방 의대의 관문’… 의대반을 홍보하며 학원들이 내세운 화려한 광고 문구다.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초등 의대반이 개설된 학원은 총 89곳, 개설된 프로그램은 136개에 달한다. 의대 정원 확대 방침에 따라 의대 진학 열풍이 거세지면서 대치동 학원가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 각종 의대반이 ‘초등 선행반’ ‘초등메티컬반’ ‘초등M클래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내세우며 학부모를 유혹하고 있다.

    고난도 선행학습으로 학업 흥미 잃어

    의과대학 정원 확대 방침에 따라 의대 진학 열풍이 거세지면서 대치동 학원가가 다양한 프로그램을 내세우며 학부모를 유혹하고 있다. [뉴시스]

    의과대학 정원 확대 방침에 따라 의대 진학 열풍이 거세지면서 대치동 학원가가 다양한 프로그램을 내세우며 학부모를 유혹하고 있다. [뉴시스]

    일례로 대치동 A학원이 개설한 의대반은 초등 5학년이 39개월 동안 중등 수학부터 수학 상·하, 수학1, 수학2, 미분과 적분, 확률과 통계 등 고등 수학까지 총 6년 과정을 끝낸다고 홍보한다. 대치동 B학원 의대반은 초등 6학년이 고등 1학년이 치르는 전국연합학력평가(모의고사)에서 수학 1등급 나오는 걸 목표로 심화수업을 실시한다. 대치동 C학원은 상위권 초등 의대반을 신설하면서 주로 초등학교 5~6학년생과 중학생에게 수학 경시대회 입상을 목표로 기출 문제 풀이를 하고 있다. C학원 관계자는 “늦어도 초등 3~4학년에는 중·고등 수학을 선행해야 초등 6학년 때 수학 올림피아드 수준의 심화 문제를 풀 수 있다”며 “초등 1~2학년 때 창의력 수학반을 거치면 의대반 레벨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계를 통해 의대 진학 열풍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0월 7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강경숙 국회의원(조국혁신당), 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가 9월 11일부터 25일까지 전국 935명 유·초·중·특수 교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의과대학 증원 정책이 사교육 열풍을 키웠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66.6%에 달했다. “사교육이 과거보다 더 확대됐냐?”는 질문에는 93.7%의 교원이 ‘그렇다’고 답했다.

    의대에 진학한 학생들의 입시 성공기는 의대반에 대한 기대치를 더욱 높였다. 의대에 입학한 학생들은 “학업 능력이 향상된 것은 물론 수능 킬러 문항을 해결하는 능력과 자제력까지 키웠다”고 입을 모은다.

    양지가 있으면 그늘도 존재하는 법. 과도한 선행학습에 치인 학생들에게 의대반은 오히려 독이 된다. 일부 대비반의 허술한 프로그램 운영과 상술에 피해를 본 학생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의대반의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이 어린 나이에 고난도 선행학습에 노출되면서 학업에 흥미를 잃는 데 있다. 학습 이해도가 떨어지면 학업에 흥미를 잃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등 장기적으로 학업 성취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그 시기에 배워야 할 필수 교과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역효과도 발생한다.

    학원 숙제하느라 새벽 2시에 잠들어

    대치동 학부모의 교육 목표는 자녀를 의과대학에 보내는 것이다. 부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학생들은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밤늦게까지 학원과 개인 과외 수업을 받는다. [뉴스1]

    대치동 학부모의 교육 목표는 자녀를 의과대학에 보내는 것이다. 부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학생들은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밤늦게까지 학원과 개인 과외 수업을 받는다. [뉴스1]

    강남의 한 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아들을 둔 이모 씨는 지난 2년간 유명 고등수학 학원이 운영하는 의대반에 아이를 보내며 마음고생을 했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잔뼈가 굵은 수학 강사 출신 원장이 의대생 배출 타이틀을 내걸고 초·중등 의대반을 운영했는데, 3년 과정인 중등 수학을 무려 18개월 만에 끝내는 선행 수업을 하고 있었다. 이 씨는 “말이 좋아 ‘상위권 의대반’이지, 중등 수학 진도를 빠르게 빼기 위해 어려운 개념이나 고난도 문제 일부를 빼고 수업한 뒤 예비 고등 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추가 수강을 유도하는 것 같았다”고 떠올렸다.

    해당 학원 원장은 새 학기가 되면 초등학교 재학생이나 중학교 입학생을 둔 학부모와 만나느라 바쁘다. 의대 진학에 관심 많은 학부모들을 모아놓고 입시설명회를 여는 것. “내가 부모라는 마음으로 학생에게 체계적인 수업을 제공하고, 학생에게 부족한 과목은 1대 1 맞춤형 수업을 제공하겠다”는 공언은 학부모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2022년 8월 의대반에 들어간 이 씨의 아들은 학원의 부실한 수업 운영에 혀를 내둘렀다. 또 맞춤형 수업비 명목으로 다른 학생에 비해 한 달에 30만 원 정도를 더 지불했지만, 실제 1대 1 수업에 나선 강사는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심지어 일부 1대 1 수업 강사는 물어보는 것조차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힘든 의대반 생활에 중학교 적응마저 힘에 부쳤다.

    “한창 성장해야 할 시기인 중학생들은 더 심각한 상황이에요. 의대반에서는 과제량이 많아 아이들이 새벽 1~2시가 돼서야 자거든요. 제때 자지도 못하는 아이가 대치동에는 수두룩해요.”

    일부 학생은 공교육과 사교육의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에 놓인다. 의대반 월말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학교 수업을 빼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대치동 소재의 한 학원 강사는 황당한 사례를 털어놨다.

    “지난해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한 아버지가 화난 얼굴로 학원에 찾아왔어요. 아내가 ‘학교에 현장 체험학습을 신청해야 아이를 의대반 월말시험에 대비하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는 거예요. 그 학생이 소위 ‘톱반’(상위권 학생들이 포진한 반)에 속해 있는데, 톱반을 유지하기 위해 학교 수업을 빼자는 거였죠. 월말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면 중하위권 학생들이 있는 반으로 이동하는데, 일부 학생과 학부모는 이걸 굉장히 굴욕적으로 여기죠. 현장 체험학습은 공식적 학교 일정 외에 따로 가족과 함께 다른 장소에서 학습하는 것이니, 신청서와 보고서를 내기만 하면 출석으로 인정된다는 허점을 이용한 거죠. 그러나 옳지 않은 방법으로 학교 수업을 제쳐두고 학원 시험을 대비한 학생의 학업 생활이 과연 평탄할 수 있을까요?”

    ‘고등수학 완전 마스터’는 거짓말

    최근 대치동에서 유행하는 초고속 선행 수학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초등학생이 수학2, 미분과 적분, 확률과 통계, 고등 심화수학까지 완전히 마스터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의 대치동 학원 강사는 “내가 부모라면, 절대 우리 아이를 의대반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치동에는 중·고등 수학을 선행학습하느라 다른 교과 공부에 소홀해 학습 균형이 깨진 학생이 적지 않아요. 요즘 수학능력시험은 국어가 점점 어려워지는 추세라 학생들이 문해력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적절한 도움조차 줄 수 없습니다.”

    자녀를 SKY 대학에 보낸 이력으로 대치동 학원에서 상담실장으로 근무하는 50대 김모 씨는 의대반이 제공하는 선행학습에 대해 환상을 갖는 것은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의대 입시의 성패를 가름하는 것이 학생의 의지와 자기주도학습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의대반의 제도적 관리보다 학생 개인의 역량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아요. 많은 의대반이 입시 결과와 학원 조직의 노하우를 내세워 ‘학생들을 의대에 보내도록 관리한다’고 선전하는데, 학원이 제시한 핑크빛 시나리오와 현실은 사뭇 다릅니다.”

    이러한 부작용에도 의대 열풍을 잠재우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의사라는 직업은 이미 한국 사회에서 안정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마지막 전문직이 됐고, 초고령사회 진입을 목전에 둔 지금, 의사 증원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대반에서 거두는 교육효과도 무시할 수는 없는 상황. 문제는 무분별한 ‘묻지마 의대반’에서 생겨난다. 의대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의 실패 사례를 수없이 지켜본 한 의대 입시 전문 컨설팅업체 대표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새겨볼 만하다.

    “대치동에서 공부 좀 한다는 초등학생들이 고등 수학을 선행학습하는데, 그중 절반 이상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제 나이보다 어려운 내용을 배우고 레벨 테스트에서 떨어져 자존감이 떨어지는 학생이 비일비재하거든요. 의대 입시에 성공한 학생들은 본인이 의지를 갖고 충실히 준비해 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합격의 과실은 준비된 사람만이 딸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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