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IMF가 소방수로 출동한다. 평소에는 경제의 자유화, 특히 금융의 자유화, 국제 자본거래의 자유화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어느 국가가 외환위기를 맞으면 긴급 구제자금(물론 달러차관이다)과 위기극복 처방을 들고 출동한다.
그런데 필자가 대외 지급불능 사건을 굳이 ‘IMF사태’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복합적 요인에 의해 이런 일이 터졌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사태가 발생했을까.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금융감독 기능 실종
첫째는 금융권이 자율적으로 영업할 수 있는 환경이 정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고도성장을 추구해온 정부 주도 개발정책은 정경유착의 관행을 뿌리내리고 관치금융체제를 구축했다. 금융권은 국가의 개발정책과 산업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적인 금융지원을 수행했다. 기업의 사업성, 채산성을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돈을 빌려줬다. 그러다보니 이런 기업이 부도가 나면 은행이 그 빚을 몽땅 뒤집어쓰는 구조였다.
둘째 원인은 기업의 과잉 차입과 문어발식 팽창주의다.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고속 성장해온 국내 기업은 ‘크게 벌여놓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위험을 고려하지 않은 채 왕성한 투자의욕을 보였다. 부채비율이 몇백, 몇천%씩 되는데도 채산성을 감안하지 않고 차입을 통한 팽창을 서슴지 않아 여차하면 대형 부실사고가 불거질 위험을 안고 있었다.
셋째로는 국제 금융자본의 단기 유출사태를 들 수 있다. 한국은 외자도입 정책으로 경제개발에 성공했다. 때문에 기업들도 외자 차입에 익숙했고, 정부의 자본자유화 정책이 진전됨에 따라 종금사 등에서 거액의 단기 외채를 차입, 대기업 회사채를 대량 인수해줌으로써 장기 자금을 원활히 공급했다. 이런 상황에 외채가 급속히 회수되거나 만기연장을 거절당하면 외환지급 위기가 오는 것이다.
넷째로 우리 정부의 부실한 금융감독 기능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당국은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항시 점검하면서 금융기관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감독해야 하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적절한 시정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감독기능은 미흡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었다고 해야 옳을 지경이다. 금융감독 당국은 금융부실의 증가, 단기 외자 차입에 대한 과도한 의존, 채산성을 무시한 무모한 대출관행 등을 전연 통제하지 못했다. 필자는 외환위기 징후가 드러나던 1997년 10월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 국정감사에서 “금융기관의 건전성 감독을 위해 경영정상화 시정조치를 수행하고 있는가” 라고 질의한 바 있는데, 단 한 가지도 하고 있는 게 없다는 답변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여섯째로 정책당국의 정책대응 미숙 또는 외환지불 준비부족 등이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사실 1997년 봄부터 우리 금융기관이 접촉하던 국제금융 시장에선 금리상승과 자금조달의 어려움 등 이상징후가 감지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여러가지 금융여건이 오래 누적된데다, 이러한 원인을 단기간에 제거하기엔 관치금융 관행에 젖은 각계각층의 저항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