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보조금을 지급할 수 없는 제3 세계 국가들의 농업, 그리고 농촌은 선진국의 농산물에 밀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같은 제3세계 농산물 수입국의 농업 피폐화는 농촌과 농민의 피폐화로 직결되고 있으며 이는 농촌 지역사회의 공동화현상을 초래하여 결국 국토의 황폐화로 연결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와 같이 WTO 체제는 제3세계 국가의 ‘농업’이라는 산업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이라는 공간과 농사짓는 사람인 ‘농민’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우리를 전율케 한다.
세계 식량사정을 어렵게 하는 요인에는 이처럼 WTO 체제와 곡물메이저로 대표되는 구조적 요인 외에 지구환경의 변화나 중국, 인도 등 인구대국의 경제성장에 따른 국제 곡물수급의 불안정 요인도 있다.
1900년대 중반 이후 화석연료 등 각종 에너지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지구환경이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 엘니뇨, 오존층 파괴 등의 현상이 그것이다. 특히 엘니뇨는 1980년대 이후 5차례 정도 발생한 것으로 관측됐는데, 태평양 연안국가에 심각한 식량수급 불안을 야기하고 있다. 가뭄, 홍수, 폭풍, 저온 등을 동반하여 농작물에 한해나 냉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속출하는 기상이변
지난해 12월26일 동아시아의 쓰나미가 수십만 명의 인명피해와 자연파괴를 초래한 것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또한 지난 1월8일부터 유럽 북부를 휩쓴 폭풍우는 1월10일까지 적어도 16명의 희생자를 냈다. 폭풍은 아일랜드를 강타한 뒤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등을 거쳐 러시아 서부지역까지 휩쓸었다. 노르웨이에서는 원유 생산이 중단되고 독일에서는 열차와 여객선 운항이 금지됐다. 아일랜드에서는 15만 가구에 전기 공급이 끊겼고 영국에서는 3명이 숨지고 수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브라질에는 가뭄과 폭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브라질 남부 리우그란데두술 주 당국은 금년 1월10일 가뭄 비상사태를 26개 시에서 87개 시로 확대했다. 또 알라구이나스, 바이아, 세르지페 등 북동부지역도 식수 부족과 수확 위기를 맞고 있다. 연일 40℃의 살인적인 더위가 이어지는 이들 지역에는 지난해 12월 초부터 비가 오지 않고 있다. 반면 이날 중부 4개 주에는 폭우주의보가 내려졌다. 이러한 기상이변은 식량재고를 수년 내 최저치로 떨어뜨려 5년여 전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으며 반대로 곡물 가격은 거의 두 배나 급등했다.
그런가 하면 최근 중국의 곡물생산량이 크게 줄어 세계 곡물수급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2003년 중국의 곡물생산량(3억1500만t)은 1998년 대비 7000만t이나 감소했다. 밀 생산량은 1998년 1억973만t에서 2003년 8600만t으로, 옥수수 생산량 역시 1998년 1억3295만t에서 2003년 1억1400만t으로 줄었다.
중국의 곡물생산량이 감소한 것은 주로 물 부족과 사막화, 경지 전용, 고소득 작목으로의 전환, 농업노동력의 부족 등으로 수확면적이 감소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체 인구에서 농촌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도 1978년 83.4%에서 2001년 66.0%로 줄어들었다.
결국 중국은 부족한 곡물을 국제시장에서 대량 수입하게 되고 국제 곡물가격은 급등하게 된다. 인구 13억의 중국 경제가 성장할수록 국제 곡물시장의 수급불균형은 심화될 것이고 이는 국제 곡물가격의 폭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인구 10억명의 인도 경제가 국제 곡물시장에 미칠 파급효과까지 감안하면 곡물가격 급등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식량위기 가능성을 더욱 현실화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WTO 체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국적 곡물메이저의 존재다. 곡물메이저는 곡물을 저장·수송·가공하는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으로서 국제 곡물시장은 실질적으로 이 곡물메이저들의 손아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공위성으로 작황 파악
세계 5대 곡물메이저로는 미국계의 카길, 아처다니엘스 미드랜드(ADM), 콘 아그라(Peavey), 그리고 유럽계의 루이 드레퓌스(LDC), 분게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전체 곡물 교역량의 약 80%에 달하고 있으며, 유통 분야 시장점유율도 총 저장능력에서 75%, 수출취급 능력에서 56%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들은 ‘곡물 마피아’라 불릴 만큼 그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다. 특정국가에 요란하게 진입하지 않으며 진입해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조금씩 서서히 스며드는 전략을 취할 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국 정부의 고차원적 곡물수출정책에 기생하거나 편승해서 독점적 폭리를 취하고, 국내외에 거미줄 같은 정보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공위성을 통해 밀, 옥수수, 쌀 등 세계 주요 농작물의 국가별 작황까지 수시로 파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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