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가 제약업체 9곳에 과징금 29억6000만원을 부과했을 때, 한 제약업체 홍보담당자가 한 말이다. 공정위는 이들 제약사가 식사 및 골프 접대, 전자제품 무상 제공, 외상매출금 잔액 할인 등의 방식으로 병·의원에 리베이트(약품 판매 대금의 일부를 사례 명목으로 되돌려주는 것)를 줘왔다며 관련자를 형사처벌하고 추가로 해당 제약사들의 약가를 최대 20%까지 인하하도록 했다. 리베이트가 적발되면 약값을 깎도록 한 정부 방침이 현실화된 첫 사례다. 막대한 과징금에 형사처벌, 약값 인하 폭탄까지 맞은 제약업계는 바싹 엎드렸다. 이 관계자는 “다들 겁을 먹으니 영업이 위축되고 매출도 계속 떨어진다.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약가 적정화 방안에 따른 보험 약가의 지속적인 인하, 리베이트에 대한 철퇴, 다국적 기업의 신약 독점…. 최근 국내 제약업계를 둘러싼 경영 환경이다. 약을 싸게 구입한 병원에 정부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시장형 실거래가 제도와 리베이트를 제공한 제약사뿐 아니라 받은 의사까지 처벌하도록 한 쌍벌제 도입 등으로 제약사의 마케팅 여건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이 때문에 제약업계에서는 영업력을 바탕으로 복제약 판매에 주력했던 기존 방식으로는 생존 자체가 힘들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이런 상황에서 제약사들이 신약 개발과 세계 시장 진출로 눈을 돌리고 있어 눈길을 끈다.
첨단 설비 연구소
이런 변화는 제약사들이 최첨단 연구소를 증축하는 모습으로 증명된다. 1972년 국내 제약업계 최초로 자체 연구소를 만드는 등 신약 개발 분야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온 종근당은 지난 4월 경기도 용인에 사상 최대 규모의 효종연구소를 열었다. 기존에 있던 충남 천안의 종합연구소와 경기도 수원의 광교연구소를 통합한 이 연구소는 전용면적 1만4115㎡(4270평)에 대지면적 2만7933㎡(8450평) 규모다. 새 연구소 이름 효종(曉鐘)은 ‘새벽을 여는 종소리’라는 뜻. 종근당은 “신약 개발의 새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종근당의 도전의지를 담고 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연구 조직을 기술연구소(제제 연구), 신약연구소(신약 개발), 바이오연구소(바이오의약품 개발) 등으로 나눠 분야별 전문성을 높이기로 했다.
동아제약도 5월17일 경기도 용인에서 신축 연구소 준공식을 열었다. 동아제약은 제품개발연구소, 신약연구소, 바이오텍연구소로 구성된 이 연구단지를 글로벌 혁신 신약 개발을 위한 플랫폼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신약연구소에서는 소화기·비만·비뇨기 등의 질환 연구, 바이오텍연구소에서는 인간 유전자 지도를 활용한 환자맞춤형 유전자 치료제 개발에 집중할 계획이다.
2005년 역시 경기도 용인시에 2만3000여㎡ 규모의 첨단 연구소를 지은 유한양행은 지난해 R&D전략실장으로 남수연 박사를 영입하면서 신약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남 박사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조교수를 거쳐 로슈코리아, BMS코리아, BMS싱가포르, BMS미국 본사에서 신약 개발 전략과 임상시험 등을 담당한 인물. 앞으로 유한양행의 신약 개발을 총괄한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지금껏 국내 제약사들은 연구개발(R&D)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왔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조사 결과 2008년 국내 256개 제약업체의 총 R&D 비용은 5388억원으로 총매출액(11조8294억원)의 4.55%에 불과하다. 반면 평균 판매촉진비용 비중은 매출액의 15~20%에 달했다. 제약업계에 리베이트 관행이 이어져온 건 의약품이 가진 독특한 소비 구조 때문. 일반 상품은 소비자에게 구매 선택권이 있지만, 의약품은 환자를 진료한 뒤 처방하는 의사가 선택권을 갖는다. 긴 연구 기간에 막대한 개발비를 투자해도 성공 여부가 미지수인 R&D 투자와 달리 리베이트는 매출 증대 효과가 확실하다. 그래서 지금껏 국내 제약사들은 특허가 만료되는 신약을 복제해 복제약을 만들고 마케팅 역량을 집중해 이를 판매하는 영업 방식에 집중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