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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 고령화는 200년 전에도 고민거리

재정(財政)과 사회보험의 탄생

저출산 · 고령화는 200년 전에도 고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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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프랑스도 해외로 유출되는 자금이 갈수록 많아지고 장기간의 경기불황이 뒤따랐다. 초호화판 베르사유 궁전 조성 등으로 재정을 낭비했을 뿐 아니라 왕권신수설을 인정하지 않는 신교도들을 압박해 당시 유능한 신교도 상공업자들이 영국, 네덜란드 등지로 도피 이민을 떠났기 때문이다. 루이 16세 집권기에 재정적자가 더 심각해지자 왕정은 귀족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이에 대항하는 삼부회가 결성됐다. 삼부회는 결국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서유럽 국왕들은 귀족과 상인 등 부유층 계급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빌려 전비(戰費)에 충당했다. 전쟁에서 이기면 모두 다 좋았지만, 패하면 그냥 떼먹는 것이 요즘과의 차이일 것이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로 절대왕정의 최고봉을 달린 루이 14세 역시 여러 번의 무리한 전쟁을 일으켰고, 패하면 늘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으로 채권자들에게 어깃장을 놨다. 다른 유럽 왕들 역시 패전했을 경우뿐 아니라 선대(先代) 왕이 죽어 왕권을 계승하고 나면 부채는 함께 승계하지 않은 채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영국에서만 왕의 자의적 재정 운영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는 1688년 명예혁명 때 제정된 권리장전 덕분이다. 권리장전에는 왕이 돈을 빌리거나 세금을 부과할 때 반드시 의회의 승인을 얻도록 명시돼 있다. 1692년 영국 의회는 신대륙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와 전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채권을 발행하는데, 이것이 인류 최초의 국채로 전해진다. 왕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상환 여부가 정해지는 게 아니라 채권의 상환조건, 이자 지불의 재원, 이에 따른 신설 세금 징수 방안이 공식화하면서 영국 국채는 강력한 대외적 신뢰를 얻었다.

국민국가 싹 틔운 ‘재정혁명’

저출산 · 고령화는 200년 전에도 고민거리
1750년대부터는 여러 종목의 국채를 상환기간을 없앤 일종의 영구채 형태로 통합한 ‘콘솔 공채(consolidated annuities)’가 등장했다. 원금상환 부담을 줄인 대신 영구적으로 이자를 지급했기에 자금의 유동성이 비약적으로 커졌다. 국가의 경영 기반은 재정에 있고, 재정을 뒷받침하는 국채의 위상에 대한 법적 보증을 확실히 해 해외 투자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산업혁명에 빗대 영국의 ‘재정혁명(Financial Revolution)’이라 일컬을 정도였다.



당시 영국 콘솔 공채의 금리는 연 3%대 전후였으나, 국채 발행 시스템이 후진적이던 프랑스 왕정은 6~7%라는 고금리로 전비를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신인도 차이에 따른 결과다. 영국이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 및 나폴레옹 전쟁 등에서 승리한 것은 이렇듯 군사적 전술 못지않은 재정 지원의 차이가 좌우했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영국의 선도적 재정혁명은 왕조의 교체 없이도 국가와 국민이 재정적 결속을 통해 영속적으로 협력해나가는 근대의 ‘국민국가(nation-state)’ 정착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랑스가 영국처럼 국채 발행을 의회의 관리 하에 둔 시스템을 정착시킨 것은 19세기 중반이고, 독일은 20세기부터였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재정과 금융 시스템 설립에 가장 선진적이었다. 에도 시대부터 자국에서 은화가 많이 산출됐고, 1894년에는 청일전쟁 승전을 통한 배상금으로 2억 냥(3억 2000만 엔, 당시 일본의 4년치 예산에 상당)을 받은 게 큰 도움이 됐다.

다만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 과정에서부터 영국 파운드화로 기채(起債)된 전시국채를 사상 처음으로 발행하는 과정에서 조달금리가 10%에서 20%까지 상승했다. 일본 정부는 국채 투자자가 부족하자 일본은행에 사실상 인수(underwriting)를 강제했고, 이로 인해 패전 후 극심한 물가 상승을 동반한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겪게 된다.

獨 국민의식 고취한 사회보장제

쉽게 말해 정부가 왼쪽, 오른쪽 주머니의 경계만 없앤 채 밑천도 없이 돈을 마구잡이로 찍어댄 것이다.

당시 부작용을 교훈 삼아 일본 정부는 이후 재정법을 개정해 ‘국채 시장소화(消化)의 원칙’을 정했다. 정부가 재정 규율을 흐트러뜨려 국채를 발행해도 일본은행에서 바로 되사주지 못하도록 한 조치다.

다만 오늘날 아베노믹스의 요체인 ‘무제한 양적완화’ 역시 중간에 금융기관이 매개했으나 결론적으로 일본은행이 국채를 무제한 인수하는 방식으로 시중에 돈을 풀고 있어 내용에선 1930년대 후반과 큰 차이가 없다. 일본 정부가 유사시 빚을 모두 갚고도 남을 만한 국부(國富) 자산이 있다는 것이 그 때와의 차이이긴 하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혈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한 씨족공동체적 연대의식이 존재했다. 이런 의식은 산업혁명이 본격화한 18세기 후반 이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면서 약화되기 시작했다. 대신 개인주의와 합리주의가 지배하고, 그동안 인본주의적 가치에서 배려되던 고령자와 약자에 대한 복지는 국가의 영역으로 점차 이동했다. 세금을 통해 마련된 재원으로 전 사회적 복지가 가능한 근대 국민국가로의 전환이었다.

현대식 사회보장보험제도가 처음으로 태동한 곳은 독일이다. 독일은 중세 이래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하노버 등의 제후들이 각 지역을 군웅할거식으로 지배하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지역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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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직 | 대우증권 도쿄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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