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호

법정관리 ‘난파선’ 순항시킨 뚝심 선장

(주)나산 백영배 사장

  • 장인석 CEO 전문리포터

    입력2005-05-24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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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년 법정관리에 들어간 (주)나산이 회생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1999년보다 163배나 늘었다. 효성물산 부회장이었던 1999년 나산 CEO로 선임된 백영배 사장은 ‘사람관리’와 ‘품질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대수술’을 집도해왔다.
    1999년 6월 초, 효성그룹 백영배(白榮培) 부회장은 뜻밖에 법원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지방법원 파산부장이었다. 그는 백 부회장에게 법정관리에 놓여 있는 (주)나산을 맡아달라고 제의했다. 백 부회장은 망설였다. 자신에게 부실에 빠진 기업을 살릴 만한 능력이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같은 섬유제품이라고는 해도 효성은 소재를 다루는 기업이고 나산은 완제품인 패션을 다루는 회사입니다. 게다가 소재는 이론적이고 이성적이지만, 패션은 감성적이어서 필링이 전혀 다르죠.”

    하지만 그는 일주일 동안 고민한 끝에 제의를 수락했다. 주변에서는 “대그룹 부회장이 백번 낫지, 실패하면 지금껏 쌓아온 명성에 먹칠할 게 뻔한데 왜 하려고 드느냐”며 만류하기도 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1967년 공채 1기로 효성그룹에 입사한 이래 출세가도를 달려 그룹 안에선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 정점에 오른 그로서는 그간 선배, 동료들로부터 받은 도움을 부실기업 회생시키는 일로 갚아야 하는 기회가 온 것으로 생각했다.

    6월14일까지 효성으로 출근했던 백 사장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이튿날인 6월15일 나산으로 출근했다. 32년간 효성이라는 한 직장에서만 일한 끝에 맞이한 새로운 직장은 그의 ‘집도’를 기다리는 암환자였다.

    ‘선장’ 바뀌자 순항(順航)



    나산은 한때 국내 최대의 패션기업이었다. 1994년에는 ‘조이너스’가 단일 브랜드 최초로 1000억원의 매출을 올려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나산은 유통, 건설 등으로 계열사를 늘려가는 방만한 경영으로 현금사정이 급격히 악화돼 결국 1998년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이후에는 핵심사업인 패션에만 전력했지만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그 결과 지방법원 파산부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백영배 카드’였다.

    황소 같은 뚝심과 공격경영이 트레이드 마크인 백 사장은 섬유업계에선 능력 있는 전문경영인으로 손꼽혀온 지 오래다. 효성그룹 입사 11년 만인 1978년에 효성물산 이사로 승진해 업계를 놀라게 했고, 1983년에는 상무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전무로 발탁돼 또 한 번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공채 1기 출신으로 계열사 사장이 된 사람도 그가 처음이었다. 1991년 그가 당시 동양나이론 사장으로 임명된 것은, 장기 불황으로 부진에 빠져 있던 그룹의 주력기업인 동양나이론을 살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그는 사장으로 취임한 첫해 창사 이래 처음으로 매출 1조원을 돌파해 수년간의 침체를 벗고 활력을 되찾는 데 기여했다.

    백 사장은 법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나산의 2000년 말 영업이익은 1999년의 2억원보다 163배나 늘어난 326억원, 경상이익도 99년 15억원 대비 512억원이 증가한 527억원으로 크게 성장했다. 소비자 구입가를 기준으로 한 매출실적 역시 1999년보다 22.1% 성장한 2057억원을 기록해 매출 신장세가 크게 둔화된 대부분의 의류업체와 대조를 보였다. 특히 신상품은 32.5%의 성장률을 보였다. 경기가 전반적으로 위축되고 소비심리가 얼어붙은 사회·경제여건을 감안할 때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배와 선원은 그대로인데 선장만 바뀌었다고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하기야 축구나 야구팀도 유능한 감독을 영입하면 꼴찌팀이 우승을 하는 기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경영에도 이런 묘미가 있다.

    백 사장의 성공비결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사람관리’와 ‘품질향상’이 그것. 사람관리는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면에서 중요했고, 품질향상은 나산이 부도 이후 재고품을 싸게 팔면서 생긴 ‘싸구려’ 이미지를 불식하기 위해 필요했다.

    “나산에 온 첫날 느낀 것은 회사가 젊다는 거였어요. 40세를 넘은 직원이 6명밖에 없을 정도로 직원들의 나이도 젊었지만, 옷차림이며 생각도 아주 젊었어요. 패션회사는 감성적이니까요. 그때만 해도 효성에선 색깔 있는 와이셔츠 입고 다니는 것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렇게 젊은 회사인데도 분위기는 무척 침체돼 있었다. ‘통풍이 잘 되는 조직’, ‘사기가 충천한 조직’만이 회사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법정관리와 구조조정으로 땅에 떨어진 직원들의 사기를 되살리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구조조정은 계속해야 했다. 그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구조조정은 원칙이 분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이 몇 살 이상은 나가야 한다’는 식의 구조조정은 무지의 소치이고, 그런 식의 경영으로는 조직이 절대로 활성화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구조조정은 사업성 없는 부문을 ‘클로즈’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 인력이 자연 감소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나가는 직원이나 남는 직원 모두 구조조정에 공감하고 불만과 고통도 줄게 됩니다. 그리고 남은 직원들에겐 대우를 제대로 해줘야지요. 법정관리 기업이라 해서 경쟁사보다 낮게 대우한다면 똑똑한 직원이 남아 있겠습니까? 갈 데 없는 직원만 남아서야 그 조직이 발전할 수 없죠.”

    그는 수익성이 없는 브랜드인 ‘언에프’와 ‘오키프’를 포기하고, 실적이 부진한 대구와 성남의 직영점을 철수했다. 서울 종로 이코레즈와 마산 워너비 등 유통사업 부문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본업인 패션의류업에만 집중키로 했다. 또 대량으로 외상판매를 해왔던 자사 카드(나산카드)가 부실을 조장하는 원인 중의 하나라고 판단하고 이를 없앴다. 수익을 창출하기보다는 회사 이미지만 흐리는 저가 할인판매도 지양했다.

    비용은 줄이고, 봉급은 올리고

    그 결과 1997년 말 1230명에 달하던 직원이 지난해 말에는 370명으로 줄었고, 경비도 825억원에서 218억원으로 감소해 회사의 수익구조가 크게 개선됐다.

    이 과정에 백 사장은 먼저 채권단과 법원을 설득했다. 구조조정은 철저히 하되, 남은 직원들은 대우를 잘 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산은 선도적인 패션회사였는데도 봉급은 경쟁사보다 5∼10% 낮아서 직원들이 불만스러워했어요. 특히 디자이너의 이직률이 높아 일 좀 제대로 할 만하면 다른 회사로 옮겨갔어요. 그래서 ‘디자이너 양성소’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제가 왔을 때만 해도 ‘꼼빠니아’ 사업부 디자이너 중에 1년 이상 근무한 직원이 한 명도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직원 봉급을 다른 회사보다 5∼10% 높은 수준으로 올렸습니다. 보너스도 원래는 400%였는데, 인센티브제를 도입, 이익을 많이 낸 부서는 보너스를 더 주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해 한 사업부는 보너스를 800%까지 받기도 했지요.”

    백 사장은 “어느 조직이 효율을 높여 이익을 많이 내면 회사는 그에 대해 합당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효율이 지속적으로 향상된다는 것. 회사가 성장하면 종업원의 삶의 질도 함께 향상된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게 ‘사람관리’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백 사장이 부임하고 나서 그토록 이직률이 높다는 디자이너들 중에 직장을 옮긴 사람이 아직 한 명도 없다는 것은 그의 사람관리가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는 징표로 보인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굵고 힘있는 목소리의 백 사장에겐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 술 마시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 재계의 마당발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나산에 와서는 여성들이 주축을 이룬 디자인실의 분위기가 아주 좋아져 특히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일가견이 있는 게 아니냐는 ‘눈총’도 받는다.

    “허허…우리 직원들이 ‘사장님은 디자이너밖에 모른다’며 불평한다고 해요. 하지만 무슨 특별한 재주가 있는 건 아니고, 딸 셋을 키운 아빠이다 보니 젊은 여성들의 마음을 남보다 조금 더 알긴 하겠죠.”

    하지만 백 사장이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산은 패션회사지만 봉제공장이 없다. 디자인으로 승부를 거는 ‘아이디어 기업’인 것이다. 따라서 디자이너들이 얼마나 참신하고 인기 있는 디자인을 만들어내느냐에 회사의 존망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전엔 몰랐는데 나산에 와서 보니 디자이너들이 참 고생을 많이 해요. 디자이너들과 함께 파리에 출장을 간 적이 있는데, 시장조사를 나간 디자이너들을 2∼3일 따라다녔다가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여자들이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시장 구석구석을 누비고도 힘든 기색 없이 호텔에 들어와 자고는 다음날 새벽에 다시 나가는 모습을 보고 놀랐어요.”

    디자이너들의 고생을 알고 나니 그들을 격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자 디자이너들도 마음의 벽을 허물고 백 사장을 조금씩 가까이 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디자이너들도 백사장이 아주 곤혹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시즌이 끝나고 창고에서 갖는 재고상품 품평회가 그것이다.

    백 사장은 매주 3∼4회 개최되는 브랜드별 사내 품평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지만, 디자이너들이 만든 디자인이나 샘플에 대해서는 그다지 간섭하지 않는다. 그는 “경영자가 알려면 똑바로 알아야지 설알면 오히려 모르는 것보다 못 하다”며 디자인에 관한 한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만든 옷이 팔리지 않은 데 대한 책임은 은근히 추궁한다.

    “제가 오기 전에는 매출액 등 외형에만 치중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디자이너들도 옷을 만드는 데만 신경을 썼지, 자신이 디자인한 상품이 얼마나 팔렸는지, 인기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디자이너들에게도 경영마인드를 심어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외형 위주에서 ‘팔릴 수 있는 옷만 내놓는’ 품질 위주로 경영전략을 바꾼 백 사장은 시즌이 끝난 뒤 디자이너들을 재고품 창고에 소집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디자이너들을 데리고 창고 안에 진열된 옷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생각해보세요. 안 팔리고 남은 옷을 바라보는 디자이너들의 마음이 어땠겠어요? 저는 그냥 옷만 보게 했을 뿐 입 한 번 열지 않았습니다. 책임도 묻지 않았구요. 그저 애써 만든 상품이 왜 안 팔리고 이렇게 창고로 돌아와 쌓여 있는지 스스로 깨닫기를 바랄 뿐이었지요.”

    그 재고품평회는 다음 시즌의 매출 증대로 돌아왔다. 디자이너들이 스스로 ‘알아서’ 팔릴 상품을 만드는 쪽으로 머리를 싸매기 시작한 것이다. 나산의 재고 품평회는 그 후 시즌마다 계속되고 있다.

    그는 품질향상을 꾀하되 원가는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을 찾느라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나산의 5개 브랜드는 싼 편이지만 품질은 ‘별로’라는 인식이 소비자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그는 원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부재료를 직접 구입하지 않고 프로모션 등 중간상들을 통해 구입하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수입원단은 다섯 군데의 유통단계를 거치면서 가격이 필요 이상으로 올라갔다.

    소재에 관한 한 전문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백 사장의 판단은 정확했다. 원부재료의 직거래 비중을 크게 늘리자 일부 품목은 구입비가 50% 이상 줄어드는 등 상당한 원가절감 효과를 가져왔고, 이는 소비자의 즉각적인 호응으로 이어졌다.

    고객은 귀신

    “고객들이 귀신처럼 압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수입원단으로 만든 상품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일찌감치 절품됐어요. 그런데 똑같은 수입원단을 같은 시즌에 다시 수입하기가 불가능해서 그것과 흡사한 국내산 원단으로 대체해 상품을 출하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랬더니 그 상품이 안 팔리는 거예요. 소비자들이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낼 만큼 수준이 높아졌어요.”

    백 사장은 그런 소비자의 수준을 감안해 하청업체도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 단추 하나, 바느질 한 땀에 따라 품질이 결정된다며 특히 마무리에 신경을 집중한다.

    “옷은 정성입니다. 정성에 따라 품질이 결정됩니다. 비싼 원단과 재료를 쓴다고 품질이 높아지는 게 아니에요.”

    유통망을 개선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법정관리 후 이탈된 유통망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제품 설명회를 여는 등 대리점과 신뢰를 구축하는 데 애를 많이 썼다. 패션쇼를 개최하고 방송광고를 재개한 것도 대리점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서였다.

    “사실 나산이 재기한 데는 법정관리에 놓였으나 우리를 버리지 않은 450개 대리점의 공이 큽니다. 나산은 중저가 브랜드이므로 백화점에는 매장이 거의 없고 대부분 로드숍입니다. 이분들이 다른 브랜드로 매장을 바꾸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조이너스’나 ‘꼼빠니아’가 돈을 벌어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백 사장이 말단사원 시절부터 좌우명으로 삼아온 말이다. 그는 결과는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좋아진다고 믿고 ‘내가 책임지고 내가 판단해서 한다’는 생각으로 일해왔다고 말한다. 나산에 와서도 ‘이렇게 저렇게 하면 결과가 좋아지겠지’ 하고 계산해서 일한 게 아니라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니 결과가 좋아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나산에서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한 것이다.

    “효성은 잘 짜인 조직이고 기업문화가 제대로 정착돼 있는 곳이므로 신뢰가 무너지는 위기는 겪어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나산은 법정관리 회사 아닙니까? 신뢰가 금간 곳이었기에 다시 그 신뢰를 회복하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느꼈습니다.”

    신뢰에 관한 얘기로는 탤런트 이병헌과의 훈훈한 일화를 빼놓을 수 없다. 이병헌은 나산에서 만드는 남성복 ‘트루젠’의 모델. 나산이 부도 나면서 나산브랜드의 여러 광고모델들이 모두 떠났지만 이병헌은 “내가 모델을 한 회사인데 부도가 났다고 떠나면 도리가 아니다”며 모델료를 받지 않고 모델을 계속했다.

    “그 친구 참 괜찮은 젊은이더군요. 그 사실을 보고받고 놀랐지요. 지난해 마케팅팀에서 ‘이병헌과 재계약을 해야 하는데, 얼마를 줘야 할지 모르겠다’고 저한테 물어왔어요. 그래서 제가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준 친군데, 이제 우리가 먹고 살 만하니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달라는 대로 주라’고 했지요.”

    계약서의 모델료란을 비워놓고 이병헌에게 위임했는데, 이것이 ‘백지수표’ 운운하면서 알려져 화제가 됐다. 백 사장은 “그 친구, 간이 작아서인지 많이 써넣지도 못했더군요” 하며 웃었다.

    선배의 등을 보고 배운다

    요즘 백 사장은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고백한다. 디자이너들과 얘기하는 것도 즐겁고, 패션에 관한 책을 읽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라 재미있다는 것. 길을 걸으면서 젊은 여자들의 옷차림을 유심히 쳐다보는 버릇이 생긴 게 좀 뭣하긴 해도, 몸과 마음이 젊어지고 새로운 활력에 차 있는 것이 무엇보다 좋다고 한다. 더욱이 회사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어 이 상태로 가면 3∼4년 안에 채무 1700억원을 갚고 법정관리에서 조기 졸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도 큰 기쁨이다.

    솔직히 이런 기분은 효성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다고 한다. 효성에서 근무할 때는 마음 한구석에 늘 미안한 감정이 있어 불편했다고 털어놓았다.

    “너무 일찍 임원이 되고 계열사 사장이 되다 보니 늘 저보다 7∼10세 많은 분들을 아랫사람으로 데리고 있었어요. 한번은 제 아래에 있던 상무가 전무를 안 시켜준다고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기에 제가 ‘언젠가 하면 되지, 뭐 그리 조급하게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그 친구가 ‘형님, 제가 나이가 있는데 조급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라며 정색을 하고 따지더군요. 알고 보니 그 친구가 저보다 겨우 두 살 아래였어요. 제가 하도 젊은 나이에 사장을 맡았기 때문에 상무면 나이가 아주 어린 것으로 알았던 겁니다.”

    그러나 백 사장은 효성에서의 경험이 그가 전문경영인으로서 역량을 발휘하는 데 밑받침이 됐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효성은 견실한 경영으로 이름난 회사. 이른바 ‘미세(微細) 관리’를 잘해 비록 회사가 다소 구식이란 느낌은 들지만 외환위기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은 탄탄한 회사였다. 그가 굳이 효성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미지 때문이었다.

    “일본 속담 하나를 명심하고 있습니다. ‘선배의 등을 보고 배운다’는 겁니다. 저는 효성에서 근무할 때 모시던 상사를 보며 느낀 점들을 노트에 반드시 기록했습니다. ‘저렇게 하면 안 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요. 아마 그것이 리더십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CEO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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