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박찬법 아시아나항공 대표이사

성취가 곧 보상, 나를 키운 자양분의 8할은 일

  • 입력2003-08-22 18: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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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출전선을 누비느라 원도 한도 없이 비행기 타본 것말고는 항공업과 일면식도 없던 내가 항공사 사장이 됐다. 혹독한 수업을 치렀지만 길은 보였다. 하고 싶다는 열정, 하겠다는 의지,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어떤 도전도 아름답다.
    박찬법 아시아나항공 대표이사

    아시아나항공의 ‘스타 얼라이언스’ 공식 가입을 앞두고 전세계 14개 회원사 사장들이 모여 가진 기자회견에서 박찬법 사장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지난 2월17일 서울 조선호텔).

    직장생활이 어느덧 36년째다. 세 갑자(甲子)를 넘겼으니 짧지 않은 기간이다. 강산도 수 차례 바뀐 유수와 같은 시간 속에 세상도 문화도, 때론 사람들의 가치관도 바뀌어왔으니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부질없어 보이기만 한데, 속절없이 일에 묻혀 살아온 지난 시간의 궤적은 과연 온전히 남아 있기나 한 걸까.

    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1960년대 말은 젊은이들이 직장을 구하기가 요즘처럼이나 어렵던 시절이다. 당시 우리나라 산업계는 성숙 산업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걸음마 상태였기 때문이다. ‘수출해야 산다’는 절박한 구호가 일반론이던 그 시절, 나는 무역업무를 배울 요량으로 금호타이어의 전신인 삼양타이어에 입사했다. ‘수출입국’이라는 국가적 슬로건 아래 수출을 하는 사람이 마치 국가유공자처럼 대접받던 때다.

    1972년부터 본격적인 수출업무에 종사하게 됐는데, 그 무렵 종합상사는 거의 만물상 수준이었다. 산업화 초기다 보니 ‘폼 나는’ 품목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당시 수출상품 중에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볏짚머리’다. 농촌에서 나오는 볏짚의 머리 부분을 모아 브러시로 만든 것인데, 일본의 제사공장에서 이것을 누에고치 실타래로 썼다. 그때 일본에선 탈곡작업이 완전히 기계로 이뤄져 볏짚머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1000달러어치의 볏짚을 팔았다.

    “수출 안 하는 품목을 물어보시죠”



    또 하나는 ‘아구’라는 생선이다. 요즘은 수입해서까지 먹는 형편이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먹지 않고 버렸다. 그런데 일부 선진국에서 이를 ‘몽크피시(monkfish)’라 부르며 즐겨 먹는다는 얘기를 듣고, 전북 군산 등지에서 아구를 수집해 프랑스 등지로 내다팔았다. 그 무렵 친지 한 분이 “자네 종합상사에 근무한다고 들었는데, 무얼 수출하는가?” 하고 물으셨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뭘 수출 안 하는지를 물어보시는 게 낫겠습니다.”

    수출 전선도 ‘전선(戰線)’이다. 그곳에도 총성과 포연이 있다. 물론 때로는 장미꽃도 피어오른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지난 시점에도 외국 바이어들 중 상당수는 한국을 동족상잔의 포화가 가시지 않은 폐허의 나라로 기억하는 이가 많았다. 덕분에 일종의 ‘동정표’도 얻곤 했다. 특히 비즈니스 세계에서 만난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환대와 우정은 각별했다.

    미국의 시계회사 엘진(Elgin)에서 앤티크(antique) 스타일의 벽시계를 만들기 위해 목재로 된 케이스를 필요로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시카고로 달려가 담당 부사장을 만났다. 한국전 참전용사인 그는 내가 어려운 여건의 나라에서 온 청년이라고 격려하며 적극적으로 도와줘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선박편으로 한 달이나 걸려 수송된 벽시계 케이스가 태평양을 건너는 사이 온·습도 조절이 안돼 뒤틀리는 바람에 전량 클레임을 당하고 말았다. 나는 클레임에 따른 비용부담보다 거래선에서 보여준 호의에 신뢰로 화답하지 못한 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1970년대 후반 레바논의 베이루트 시내에선 기독교 민병대와 회교 민병대가 교전을 벌이며 대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리엔 총알이 날아다녀도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대로 굴러가야 했다. 당시 베이루트엔 우리 직원 한 사람이 주재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영국 식당으로 갔다가 갑자기 얼큰한 음식이 먹고 싶어 그 옆에 있는 스페인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바로 그날 우리가 처음 들렀던 영국 식당이 폭탄테러로 잿더미가 됐다. 순간의 선택이 명줄을 쥐락펴락한 것이다.

    공항에서의 총격전도 잊혀지지 않는다. 회교 민병대가 계류장에 주기중인 이집트 항공기와 승객을 납치하고 경찰과 대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워낙 오래 대치하다 보니 승객들이 조심스럽게나마 이동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총격전이 벌어졌다. 머리 위로 총알 날아다니는 소리가 귀를 찢는 듯하더니 범인들은 순식간에 현장에서 모두 사살됐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 전쟁터로 출장가겠다는 이가 있을까. 영악하긴커녕 무모할 만큼 고지식했던 청년 시절, 그래서 겁없이 목숨을 내놓고 다니던 시절의 웃지 못할 삽화다.

    1975년 이란에서 국제박람회가 열려 행사에 참가하고 있을 때 본사에서 전문이 도착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있는 바이어가 철근 1만t 구매 의향을 밝혀왔으니 곧바로 그를 만나 상담하고 수주해 오라는 내용이었다. 희소식이었으나 내겐 사우디아라비아 비자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때는 무슬림 라마단 기간이어서 정식으로 비자발급 절차를 밟자면 몇 달이 걸릴 판이었다. 이란과 쿠웨이트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으나 반응은 신통찮았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낙담해서 호텔로 돌아와 프런트 직원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더니 뜻밖에도 해당 항공편의 기장과 줄이 닿게 해줬다. 그래서 무비자 상태로 일단 제다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중간 기착지인 리야드에서 불법입국혐의로 체포됐다. 임기응변에 들어갔다. 알아듣기 힘든 빠른 영어로 “제다를 거쳐 베이루트로 갈 것이라 비자가 필요 없는 줄 알았다”고 우겼다. 우여곡절 끝에 기장에게 여권을 맡기는 조건으로 제다까지 가는 게 허용됐고, 무사히 바이어를 만나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무려 2500만달러짜리 계약이었다.

    소기의 성과는 거뒀지만, 이번엔 사우디아라비아를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가 문제였다. 여권을 되찾으려 나름대로 시도하다가 다시 철창 신세를 지고 말았다. 결국 나와 계약한 바이어가 외무성에 선처를 부탁해 베이루트로 강제 출국당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됐다. 만리타국에서 두 번씩이나 유치장에 끌려갔던 나는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사우디아라비아 불법 입국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불가능을 몰랐거나, 겁이 없었거나, 아니면 내가 아니었던 것 같다.

    시멘트 공장과 맞바꾼 라지스탄 사막의 별빛

    아스라히 떠오르는 향기로운 추억도 몇 가지 있다. 1980년대 초 기계전자 무역부장으로 있을 때 파이프 공장과 시멘트 공장을 수출하려고 인도의 라지스탄을 찾은 적이 있다. 승용차를 빌려,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타운으로 들어가 광산과 현장 입지조건 등을 조사하다가 시간이 늦어져 석양 무렵에 이동하게 됐다. 그런데 아뿔싸! 사막의 밤은 갑작스레 찾아온다고 했거늘, 급기야 운전기사는 길을 잃고 말았다. 새벽까지 헤매다녔으나 미로를 맴도는 형국이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 ‘어린 왕자’의 말도 한낱 레토릭에 불과한 것일까. 오아시스는 흔적도 없었다. 29시간 동안 갈증과 굶주림을 참으며 돌아다닌 끝에 낙타를 몰고 오는 한 노인을 만나 사막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비록 라지스탄에서 시멘트 공장을 수주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귀한 소득이 있었다. 좀 엉뚱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때 나는 적도에서 가장 가까운 사막의 별빛이 얼마나 형형한가를 생생하게 체험했던 것이다.

    ‘선수’들을 만나는 즐거움

    1980년대 중반, 독립 딜러로 미국의 타이어 세일즈 분야에서 황제로 일컬어지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언젠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함께 저녁을 먹던 우리 직원 다섯 명이 한국식으로 그에게 술잔을 돌린 적이 있다. 그후 내가 애틀랜타의 한 컨벤션에 참석했을 때 그는 10여 명의 직원들에게 자신이 한국에서 경험한 일을 들려주면서 “한국에서 오신 손님께 술을 한잔씩 따라올려라”고 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이었다.

    그는 취중에 “우정의 표시로 선물을 하나 하고 싶다”면서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마구잡이로 내 손목에 채웠다. ‘롤렉스’였다. 셀러(seller)가 바이어(buyer)에게 뇌물을 받는 격이라 이튿날 시계를 돌려보냈는데,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나서 그가 보낸 소포를 받았다. 새 롤렉스 시계가 들어 있었다. “주문 제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 이제서야 선물을 다시 보낸다”는 편지와 함께.

    더는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회사에 보고하고 시계를 보관시켰다. 비즈니스도 비즈니스지만, 나는 이런 ‘선수’들과의 만남 그 자체를 즐겼던 것 같다. 그 바이어가 보여준 호의와 신뢰를 생각하면 비록 싸구려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는 지금도 왼팔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미국법인 영업담당 이사로 6년여를 근무하고 1987년 귀국한 후에는 금호타이어 수출본부에서 영업을 총괄하게 됐다. 수많은 우리 비즈니스맨들이 해외 수출전선을 누비고 다닌 결과 한국의 국력과 위상은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그 정점이었다.

    박찬법 아시아나항공 대표이사

    아시아나항공 노사는 2001년 10월, 9·11테러 여파로 항공업계 경영난이 가중된 가운데 무분규 선언식을 가졌다. 앞줄 중앙이 박찬법 사장.

    나는 올림픽을 맞아 전세계 대리점주들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Go For The Gold’라는 테마 이벤트를 열었다. 우리와의 교역으로 성장한 거래선들을 초청, 서울올림픽이라는 특별한 계기를 통해 국력과 사세를 과시함으로써 해외시장의 네트워크 기반을 탄탄히 다지는 의미가 있었다. 더구나 당시는 한국이 저가·저품질 대량수출국에서 고가·고품질 상품 수출국가로 이미지 변신을 꾀하던 시점이라 전략적 수단으로서 매우 유용했고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되돌아보면 꽤 선진적인 이벤트였던 듯하다. 요즘은 이런 행사가 일반화한 것 같은데, 지난해 월드컵 때 보니 많은 기업이 이런 이벤트를 벌이는 걸 보고 감회가 남달랐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바로 그해에 아시아나항공이 창립되어 계열사 직원의 한 사람으로서 첫 취항(1988년 12월)의 기쁨을 누렸는데, 그로부터 1년 뒤인 1990년 1월부로 아시아나항공 직원이 됐다.

    ‘Commodity’에서 ‘Service’로

    무역을 하면서 원도 한도 없이 비행기 타고 다닌 것말고는 항공업에 대해 아는 게 없던 내게 항공사 영업을 총괄하는 책무가 주어졌다. 그때 아시아나는 만 1년간 국내선 영업만 하다가 막 국제선 취항을 준비하면서 글로벌 캐리어(Global Carrier)로 발돋움하려던 시기였다. 새 보직을 받은 지 열흘 만에 첫 정기편 국제선인 서울-도쿄 노선에 취항했다. 개인적으로는 상품(Commodity)에서 서비스(Service)로 시장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아시아나항공 영업체계의 골간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항공운수업은 거대한 오케스트라와도 같다. 비행기 좌석 하나에 손님 한 분을 모시기까지 프로세스는 방대하고 정치(精緻)해서 한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다. 마치 조감도를 내려다보듯 꿰뚫어보면서 철저하게 준비해야 취항 당일 ‘D데이 H아워’를 맞출 수 있다.

    이처럼 피를 말리는 ‘시간과의 전쟁’은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항공기 도입에서부터 서울과 외국 현지 공항의 정비·지상조업 섭외, 영업지점 사무실과 공항 카운터 확보 같은 업무는 물론, 항공협정과 운수권 배분 등의 인·허가 업무와 국내외 여행업계의 판매망 개척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작업 등도 적잖은 정력과 시간을 요구했다. 하루 24시간을 25시간으로 쪼개 쓰는 날들이 이어졌다.

    항공상품은 재고가 없는 상품이다. 즉 H아워가 지나면 이월이 안 되는 상품인 것이다. 한 좌석이라도 손님을 더 모셔야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업종이다. H아워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와중에 경쟁사가 견제하고 들어오는 것을 목격하며 후발업체의 어려움을 실감하기도 했다.

    1992년 미국 뉴욕 취항을 앞두고 미국으로 건너가 교민들을 대상으로 대리점망을 구축했다. 뉴욕 교민시장의 60%를 점유하는 5개 메이저 여행사와 접촉하며 아시아나항공 대리점을 개설해달라고 거듭 설득한 끝에 이들의 승낙을 얻어 신용장을 받았다. 그런데 취항 날짜가 임박한 어느 날 뉴욕지점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이들 메이저 여행사들이 하루아침에 아시아나와의 대리점 계약을 철회했다는 소식이었다. 청천벽력이었다.

    당시 경쟁사는 뉴욕을 주 10회 이상 운항했고, 신규 취항을 앞둔 아시아나는 일주일에 2편밖에 배정받지 못했기에 스케줄과 공급좌석에 있어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주저앉고 싶은 심정을 가다듬고 그날로 심야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5개 메이저 여행사를 포기하는 대신 중소 여행사들을 우리의 당당한 단독 대리점으로 키워나가자고 결심했다.

    결과론이지만 취항 후 아시아나를 선호하는 교민들이 늘어나면서 중소 여행사들은 빠르게 성장했다. 반면 메이저 여행사들은 그만큼 시장을 잃었다. 당시 교민들은 경쟁사가 단독 운항하던 노선에 새 항공사가 새 비행기와 새 서비스로 다가오자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아시아나를 찾았다. 본사와 대리점의 바람직한 윈-윈 관계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아시아나도 그런 난관 덕분에 오늘날의 경쟁력과 ‘면역체계’를 갖추게 됐을 것이다.

    당시 아시아나는 승객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다가갔을까. 가령 심벌 마크 하나에서도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아시아나가 출범할 무렵 항공사들은 주로 하늘을 나는 ‘기능적 이미지’로 심벌을 만들곤 했다. 이를테면 새, 깃털, 국가 문양 따위가 대세를 이뤘다.

    그런데 갑론을박 끝에 낙점된 아시아나의 심벌은 색동옷을 입고 두 팔을 벌려 환영하는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심벌에서부터 ‘휴먼 터치(Human Touch)’, 즉 인간적 교감을 강조하는 문화적 이미지로 고객에게 다가선 것이다. 심벌 자체에 서비스 마인드를 형상화한 항공사는 요즘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같은 고객중심 철학을 바탕으로 참신한 서비스, 정성어린 서비스, 상냥한 서비스, 고급스런 서비스를 4대 서비스 모토로 내걸었다. 이는 ‘안전과 서비스에 충실한 기업문화’라는 소프트웨어가 결국은 운항횟수나 노선망 같은 하드웨어 측면을 압도하며 고객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서비스 모토는 구두선에 그치지 않고 서비스를 실제적으로 향상하기 위한 장기적 투자로 연결됐다. 학사 학위 소지 승무원 채용, 새 비행기 유지, 최고급품 기내 기물 사용 등 일련의 정책은 비용부담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나의 서비스 이미지에 걸맞은 실질적 서비스로 작동했다.

    또한 아시아나는 직원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들을 그때그때 서비스에 반영해왔다. 장기 비행에 지친 승객들을 위해 승무원들이 기내에서 마술시범을 보이고 악기를 연주하는 ‘플라잉 매직 서비스’도 직원들이 내놓은 안을 채택한 것으로, 세계 항공업계에서 격찬을 아끼지 않는 아시아나의 독보적인 기내 엔터테인먼트로 자리잡았다. 겨울철에 더운 지방으로 여행하는 손님들의 외투를 공항에서 맡아 무료로 보관해주는 외투보관 서비스, 여름철 공항 대기 손님들께 수박을 접대하는 ‘원두막 서비스’ 등도 다 직원들의 창의적 아이디어가 서비스 정책에 반영된 것이다.

    아시아나는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의 고객만족도 1위 기업으로 7년 연속 선정됐고, 한국생산성본부와 한국표준협회 등 국내 유수의 평가기관으로부터 시상제도가 생긴 이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서비스 1위 기업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2001년에는 세계적인 항공잡지인 ‘에어트랜스포트월드(Air Transport World)’로부터 승객서비스상(Passenger Service Award)을 수상했다. 또한 올해엔 항공사 품질의 핵심가치인 안전과 서비스가 세계적인 수준이 아니면 입성이 불가능한 세계 최대의 항공사 동맹체 ‘스타 얼라이언스’에 가입함으로써 아시아나의 국제적 위상을 굳혔다.

    혹독한 ‘사장 1년차’ 수업

    나는 한국의 관광산업이야말로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을 위한 키워드라고 본다. 또한 관광산업의 발전은 항공운수업의 발전과 불가분의 함수관계에 있기에 항공운수업은 미래산업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21세기 동북아 중심국가라는 비전과 국가생존 전략상 한국은 반드시 인적·물적 교류의 허브가 되어야 한다. 항공화물은 전체 수출 물동량의 31%를 차지한다. 그러니 한국이 허브로 기능하려면 항공운송업이 핵심 동인이다.

    요즘처럼 고용사정이 어려울 때 효자 노릇을 하는 것 또한 관광산업이다. 고용창출효과가 가장 높은 산업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외화가득률도 가장 높아 다른 산업의 4배에 이른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두 번째 규모를 차지하는 산업이 바로 관광산업이라고 한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관광산업 발전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리 옆에는 13억 인구의 중국과 세계 2대 경제대국인 1억2000만 인구의 일본이 있다. 아시아나가 시장 개척에 가장 주력해온 곳도 중국과 일본이다. 오늘날 아시아나는 중국 내 14개 도시, 17개 노선에 취항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연간 1200만명의 신혼여행객이 생겨나고 있다. 수요의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것이다. 더욱이 우리에겐 세계적 시설을 갖춘 인천공항도 있다. 그래서 나와 직원들은 한국의 동북아 허브시대를 열어갈 첨병이라는 자긍심으로 뛰고 있다.

    36년간 직장생활을 해오면서 내가 만났거나 직접 모신 뛰어난 최고경영자들로부터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외국인과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 둘째, 부지런하다. 셋째, 순진해 보일 정도로 진지하다. 넷째, 주위 환경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단적인 예가 골프다. CEO들은 대개 핸디캡이 낮다. 하나같이 바쁜 사람들이지만, ‘운동인데 대충하면 되지’ 하고 생각하는 CEO를 못 봤다. 잘하든 못하든 운동에 임하는 자세만큼은 프로골퍼 못지않게 진지하다. 그런 선배 CEO들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왔고, 그러다 보니 남들이 나를 CEO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2001년, 꿈도 못 꿔본 항공사 사장에 선임된 나는 무거운 책임감에 가위눌리며 첫걸음을 내디뎠는데, 경영환경은 첫해부터 참으로 냉엄했다. 그 해상반기에는 노동조합의 파업과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광우병 파동 등으로 어수선하게 보냈는데, 가을 들어서는 미국에 9·11테러가 발생하고, 한국이 항공안전 2등급 국가로 판정나는 등 악재가 잇따랐다. 그 무렵 나는 공항 기자실을 방문, 기자들에게 “국내외적 악재가 몰아쳐 도무지 청코너, 홍코너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다”고 했다. 그렇게 그로기 상태로 몰리면서 사장 1년차의 혹독한 수업을 끝냈다.

    9·11 충격에서 어렵사리 벗어난 뒤부터는 회사의 수익구조 개편에 천착하기로 했다. 그 전제가 될 만큼 중요한 것은 대열을 정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람직한 노사관계, 선진적인 노사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해답은 결국 열린 경영, 투명 경영, 현장 경영에 있다고 봤다. 항공사는 조종사, 정비, 기내 서비스, 예약, 발권, 공항서비스, 화물, 시스템, 케이터링, 영업, 일반지원 등 다양한 직종과 부문에 따른 업무와 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최고경영자에겐 각 부문별 특성을 조율하는 능력, 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능력이 요구된다.

    먼저 사내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몇 가지 만들었다. 노조 대의원을 포함한 모든 직원에게 최고경영층이 직접 회사의 경영성과와 현황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회사 실정을 직원들과 투명하게 공유하는 ‘패트롤 미팅(Patrol Meeting)’을 시작했다. 또한 다양한 직종의 직원 100여 명이 한 날 한 자리에 모여 회사가 개선해야 할 사항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한 후 팀별로 건의사항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회사 경영에 반영하는 ‘오픈 플라자(Open Plaza)’ 제도를 가동했다.

    이로써 노조도 나름대로 회사 실정을 이해하게 되어 대안 없는 무리한 요구는 지양했고, 그 결과 지난해에는 노조의 자발적인 ‘무분규 선언’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순풍에 돛을 단 격으로 지난 연말 아시아나는 창립 이래 최대 규모인 1409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이제 아시아나의 열린 경영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올 상반기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몰아닥쳐 위기를 맞자 임직원들은 사내 게시판을 통해 서로를 격려하는 격문을 띄워올리며 뜨거운 애사심을 보여줬다. 승무원과 공항 직원이 서로에게 ‘파이팅’을 외쳤고, 지원부서와 현장부서가 서로 용기를 북돋웠다. 그 행간에서 ‘으샤, 으샤’ 하는 함성을 들었을 때 사장실에 앉아 있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열정·의지·확신

    오랜 직장생활을 통해 내겐 한 가지 신앙 같은 철칙이 생겼다.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인들과의 비즈니스에서 정직은 필요충분조건이다. 내가 만난 유수의 비즈니스맨들은 하나같이 정직했다. 그래서 우리 상품에 대한 신뢰가 낮았던 시절에도 나는 물건을 팔면서 “우리 제품의 약점도 알고 사라”고 했다.

    한 대학교수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연간 위증죄 고발인 수가 999명이고 무고죄 고소인 수는 1480명인데, 일본은 각각 6명, 2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씁쓸한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윤리경영이란 화두가 웅변하듯이 이제 정직하지 않은 기업은 국제경쟁에서 낙오되는 시대다. 후배들에게 “국제적 기업인이 되기 위해 어떤 덕목보다 중요한 것은 정직”이이라고 새삼 강조하고 싶다.



    하고 싶다는 열정, 하겠다는 의지, 할 수 있다는 확신. 반세기를 넘도록 금호그룹 멤버들에게 면면히 흘러 내려오는 ‘집념의 세계인’ 정신은 내게도 내면화한 것일까. 지난 36년을 무슨 말로 축약할 수 있을까. 요즘 흔히 말하는 인센티브란 게 다 뭔가. 성취 자체가 보상이던 시절을 거쳐 사장에 오른 지금까지 나를 키운 자양분의 8할은 다름아닌 일이었다. 그런 시대를 살아낸 선배에게 까닭 모를 연민을 느낄 때 약간의 신뢰를 보태준다면 긴 세월 직장에 몸담아온 나로서는 그보다 더 큰 위안이 없을 것 같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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