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만에 승진, 대외 활동 줄이고 ‘업무 집중’
수시로 인사 단행해 긴장감·위기의식 높여
사업 부문 선택과 집중, 대대적 개편
성공작·신성장동력 과제… “사업 성과 보여야”
서울 중구 순화동 이마트 본사 전경. [이마트]
정 회장은 회장 승진에 앞서 지난해 11월 기존 전략실을 경영전략실로, 전략실 산하 지원본부와 재무본부를 각각 경영총괄과 경영지원총괄 조직으로 개편했다. 이어 경영전략실 경영총괄 산하에는 경영진단팀을, 경영지원총괄 산하에는 감사팀을 운영하기로 했다. 사업군별 경쟁력과 시장 분석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정 회장이 경영전략실 개편 이후 첫 회의를 주재할 때만 해도 신세계그룹의 쇄신 의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이들이 많았다. 당시 정 회장이 아직 부회장 신분이던 것도 의문을 더한 요인이었다. 실제 정 회장은 2006년 부회장으로 승진한 이후부터 이미 신세계그룹, 특히 이마트 부문 경영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대외 직함이 부회장이었기에 그룹 내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존재했다.
그러나 신세계그룹이 정 부회장의 회장 승진을 발표하며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꿨다. 신세계그룹은 정 회장 승진과 관련해 “날로 경쟁이 치열해지는 유통시장은 과거보다 훨씬 더 다양한 위기 요인이 쏟아지고 있다. 그만큼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해졌다”며 “정용진 회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을 정면 돌파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물론 이명희 회장이 그룹 총괄회장으로서 신세계그룹 총수 역할을 지속하기로 했으나 정 부회장의 회장 승진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유통업계가 또 한차례 변화를 맞이한 상황인 데다, 그룹 유동성에도 빨간불이 켜진 위기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 회장에겐 △주력 사업 경쟁력 강화 △신성장동력 발굴 △위기 사업 정상화 등 막중한 과제가 부여됐다.
‘경질’ 표현까지 써가며 쇄신 의지 드러내
정 회장이 계열사 가운데 가장 먼저 손을 댄 곳은 신세계건설이다. 그는 회장 자리에 오른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정두영 신세계건설 대표를 ‘경질’하고 신임 대표로 허병훈 경영전략실 경영총괄 부사장을 선임했다. 영업본부장과 영업담당도 함께 교체했다. 정 회장 승진 이후 그룹 차원에서 단행한 첫 쇄신 인사다.
당시 신세계그룹은 공식적으로 ‘경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당시 업계에선 놀랍다는 반응이 나왔다. 기업이 인사 때 쉽사리 사용하지 않는 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세계그룹이 엄중한 위기의식을 갖고 쇄신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겠다는 의지를 방증한 것이다.
허병훈 신세계건설 대표. [신세계그룹]
2011년부터는 호텔신라로 이동해 경영지원장 겸 CFO 등을 거쳤다. 이후 2018년 7월 신세계그룹에 입사해 전략실 기획총괄 부사장보, 지원총괄 부사장, 관리총괄 부사장, 백화점부문 기획전략본부장, 전략실 재무본부장 등을 지냈다. 그야말로 ‘재무통’이라고 할 만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신세계그룹 관계자는 허 대표 임명 당시 “그룹의 핵심 재무통인 허 부사장을 신세계건설 대표로 내정한 것은 그룹 차원에서 신세계건설의 재무 이슈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 2월 정 회장은 조선호텔앤리조트에 신세계건설 레저사업부문을 1820억 원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6월엔 이마트를 통해 자금보충약정을 체결, 신세계건설의 6500억 원 규모 신종자본증권 발행을 지원했다. 원리금 상환 재원이 부족해져 이를 상환하지 못하면 이마트가 대신 부족 금액을 빌려준다는 의미다. 이에 힘입어 신세계건설은 부채비율을 807%에서 약 200% 미만으로 크게 낮추게 됐다. 또 8227억 원 규모의 ‘스타필드 청라’ 신축 공사를 수주하는 등 모기업 지원을 통해 안정적 일감을 확보했다.
이커머스 사업 대대적 ‘칼바람’
정 회장은 6월 5일 유통, 물류, 콘텐츠 등 전체 사업 부문에서 협력하는 내용의 제휴 합의서를 체결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CJ그룹과의 동맹도 더 굳건히 했다. 특히 신세계그룹의 이커머스(SSG닷컴) 부문과 CJ대한통운 간 협업을 강화했다. SSG닷컴의 물류센터 ‘네오(NEO)’를 CJ대한통운에 이관하는 방안이 핵심이다.
SSG닷컴은 신세계그룹이 이커머스 강화 전략 일환으로 꾸준히 키우던 분야다. 특히 자체 물류센터는 이커머스 배송 역량의 핵심으로 꼽힌다. 중간 배송 단계를 줄여 효율성을 높이고 소비자에게 최고 품질의 물건을 직접 배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세계그룹의 네오 이관 결정은 SSG닷컴을 무리하게 확장하지 않겠다는 뜻을 나타낸 셈이다.
보름 뒤 정 회장은 이커머스 사업에서 또 한 번 대대적 쇄신의 칼날을 빼 들었다. 이커머스 양대 계열사인 지마켓과 SSG닷컴에 새 대표를 선임하고 핵심 임원들도 물갈이한 것.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필요할 경우 수시 인사를 단행해 효과를 높이겠다는 그룹 방침에 따른 것이다.
정형권 지마켓 대표. [신세계그룹]
최훈학 SSG닷컴 대표. [신세계그룹]
신세계그룹에 정통한 관계자는 “정 회장은 이마트의 본업 경쟁력 회복과 SSG닷컴의 성장동력을 새로 정리하는 것, 위기가 닥친 계열사에 대한 정상화 등 세 가지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며 “전체적 경쟁력을 쇄신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사 역시 한발 더 빠르게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회장으로 성과 필요⋯신성장동력 발굴도 과제”
그러나 정 회장이 풀어야 할 과제는 여전히 산적해 있다. 가장 급한 일은 SSG닷컴의 지분 매각처를 찾는 것이다. 6월 이마트와 신세계는 SSG닷컴의 재무적 투자자(FI)인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BRV캐피탈매니지먼트와 FI 보유 지분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FI는 현재 보유하고 있는 SSG닷컴 보통주 131만6492주(지분율 30%) 전부를 12월 31일까지 신세계그룹이 지정하는 단수 또는 복수의 제3자에게 매도할 예정이다.
만약 올 연말까지 FI 지분 매수 희망자가 나오지 않으면 신세계그룹이 지분을 되사야 한다. 현재 이마트는 45.6%, 신세계는 24.4%의 SSG닷컴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매입 대금은 FI 투자 원금인 1조 원보다 높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다만 2019년 이마트와 신세계가 FI와 맺은 풋옵션 효력은 소멸됐다. 이마트·신세계는 SSG닷컴 투자 유치 당시 FI와 SSG닷컴이 2023년 사업연도에 기업공개(IPO)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총거래액(GMV) 5조1600억 원을 넘지 못하면 대주주에게 보유 주식 전량을 매도 청구할 수 있다는 내용의 풋옵션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이마트·신세계는 풋옵션 분쟁 리스크를 해소한 만큼 신규 투자자 물색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최근 NH투자증권을 비롯한 국내 10여 개 증권사·은행 연합이 FI가 보유한 SSG닷컴 지분 131만6492주를 대출계약 형태로 인수하는 안이 시장에서 거론되고 있다. 신세계그룹 관계자는 “여러 금융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나, 아직 결정된 바는 없다”고 설명했다.
본업인 오프라인 3사(이마트·이마트에브리데이·이마트24)의 실적 개선도 신경 써야 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특히 오프라인 수익성 강화를 위해서는 편의점 ‘이마트24’의 수익성을 끌어올리는 것이 관건이다.
이마트는 지난 7월 기업형 슈퍼마켓(SSM) 자회사인 이마트에브리데이와의 합병 종료를 보고하는 이사회를 열고 합병 절차를 완료했다. 정 회장이 기획하고 한채양 대표가 실행한 ‘통합 이마트’가 공식 출범한 것이다. 신세계그룹은 이마트와 이마트에브리데이를 합병해 통합 매입·물류 등으로 주요 분야의 수익성을 개선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이마트 오프라인 유통 3사 가운데 수익성이 가장 좋지 않은 곳이 이마트24다. 이마트는 올해 1분기 별도 기준 순매출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0% 증가한 3조8484억 원, 영업이익은 44.9% 늘어난 932억 원을 기록했다. 이마트에브리데이도 순매출액과 영업이익이 각각 3.9%, 63.6% 증가했다. 반면 이마트24는 올해 1분기 영업손실이 131억 원으로 지난해 1분기(-39억 원)보다 적자가 92억 원 더 늘어났다.
중장기적으로는 그룹의 신성장동력도 발굴해야 한다. 그간 정 회장은 뚝심으로 투자를 이어간 정 회장은~~조선호텔리조트와 스타필드 등 이외에 사업상 성공작이 더 필요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H&B(헬스앤드뷰티) 스토어나 소주 사업 등도 사실상 실패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유통업 이외에 신성장동력이라고 할 만한 계열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신세계그룹은 유통 3사(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 가운데 유통업, 소비재에 가장 치중한 사업 구조를 보이고 있다. 신세계건설이나 IT 서비스 전문 기업인 신세계아이앤씨, 신세계의 콘텐츠 자회사 마인드마크 정도를 제외하면 ‘뼛속까지 유통 그룹’인 셈이다.
롯데그룹이 신성장동력으로 바이오나 헬스케어 등을 점찍고 적극적 투자를 이어가는 것과 대조적이다. 현대백화점그룹 역시 비유통에서 종합건자재기업 현대엘앤씨, 화장품 원료 사업 등을 영위하는 현대바이오랜드, 타워크레인 등 건설기계나 광산 장비, 군용 특장차 등을 설계하는 현대에버다임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그럼에도 신세계그룹은 위기 상황인 만큼 당장 대규모 투자를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정 회장이 장기적 구상이 있더라도 현재로선 급한 불을 끄는 것이 더 중요한 상황인 것. 이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회장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대내외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사업으로 성과를 인정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